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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9 : 백제의 역사 45 (백제인의 관제 및 행정 체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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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9 : 백제의 역사 45 (백제인의 관제 및 행정 체제)

두바퀴인생 2010. 12. 13. 02:29

 

 

한국의 역사 99 : 백제의 역사 45 (백제인의 관제 및 행정 체제)

 

 

 

백제는 초기에 고구려의 관제를 그대로 적용했다. 

중앙 조정은 재상격인 좌보와 우보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지방은 방향부 체제인 동시에 동서남북부와 도성 주변의 중부를 합하여 5부 체제였다.

 

좌.우보에는 왕족을 비롯한 유력한 귀족이 임명되었다. 그들은 임영 후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으며, 전임자가 죽은 후 후임자가 그 뒤를 잇는 것이 관례였다.

 

우보 제도가 정착된 것은 제2대 다루왕 대이여, 온조왕 대까지는 우보만 있고 좌보란 직책은 없었다. 초대 우보로는 온조의 재종숙부 을음이 임명되었고, 온조 41년에 그가 죽자 해루를 제2대 우보로 삼았으며, 다루왕 7년에 해루가 죽자, 동부의 흘우를 제3대 우보로 임명했다. 그러다 다루왕 10년에 흘우는 좌보로 승격되고, 북부의 진화가 우보에 임명됨으로써 좌우보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후 이 제도는 제8대 고이왕 27년 좌평제도가 성립될 때까지 유지된다.

 

지방 조직인 5부 체제는 온조왕 대에 이미 성립되었다. 온조왕 31년에 우선 남북부가 설치되었고, 33년에 다시 동부와 서부가 추가됨으로써 4부 체제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도성과 그 주변이 주부로 인식되면서 5부 체제가 확립되었다.

 

좌우보와 5부 체제의 골격 아래엔 서열과 직능을 가리키는 관직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그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2보 5부의 백제 행정 체계는 그것이 확립된 다루왕 10년(서기 437년)부터 고이왕 27년(서기 260년)까지 223년 동안 지속된다. 그러나 고이왕 대에 이르러 국토가 확장되고, 대륙에도 영토가 개척되면서 전면적인 관제 및 행정 체계의 개편이 요구되자, 고이왕은 6조평 16관등제를 탄생시켰다.

 

고이왕은 재위 27년 정월에 6좌평 16관등제를 전면 공포 실시했는데,이는 중앙집권화의 토대를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좌우보 제도가 재상 중심의 정치라면, 6조평 제도는 왕 중심의 정치제도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에 비견할 만하다. 즉 좌우보 제도가  의정부서사제에 해당한다면, 6좌평 제도는 육조직계제로서 왕권이 한층 강화된 형태인 것이다.

 

6좌평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비서실장 격인 내신좌평, 물자와 창고에 관한 일을 맡아 하는 내두좌평, 예법과 의식을 주관하는 내법좌평, 숙위 병사 및 중앙 군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위시좌평, 형벌과 송사를 책임지는 조정좌평, 지방 군사에 대한 일을 담당하는 병관좌평 등이다.

 

초대 좌평으로는 내신좌평에 고이왕의 아우 우수, 내두좌평에 진가, 내법좌평에 우두, 위사좌평에 고수, 조정좌평에 곤노, 병관좌평에 유기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 좌평을 1품으로 하여 그 아래 15품계가 설치되었는데, 2품은 달솔, 3품은 은솔, 4품은 덕솔, 5품은 한솔, 6품은 나솔, 7품은 장덕, 8품은 시덕, 9품은 고덕, 10품은 계덕, 11품은 대덕, 12품은 문독, 13품은 무독, 14품은 좌군, 15품은 진무, 16품은 극우라 했다.

 

이 같은 6좌평 제도는 전지왕 4년(서기 408년)에 전지왕의 이복 동생 부여 신이 상좌평에 임명되면서 전환기를 맞이한다. 상좌평은 군사와 정사를 책임지는 국상으로서 내각책임제의 총리와 같은 직책이었다. 따라서 상좌평 제도의 도입은 왕권의 약화를 의미하며, 동시에 왕족 및 귀족 세력이 강화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전지왕은 왜국에 볼모로 머물다가 아신왕의 급작스런 죽음 이후에 부여 신과 해구, 해수 등의 힘에 의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들에게 정사를 맡길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상좌평 제도이다.

 

초대 상좌평 부여 신을 이어 비유왕 3년(서기 429년)에는 내법좌평을 맡고 있던 해수가 제2대 상좌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상좌평은 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역활과 비중이 달라지기 일쑤였고, 좌평이란 품계도 상좌평, 중좌평, 하좌평 등으로 세분화되는 경향을 띠게 되면서 대좌평과 같은 특진의 관등도 발생하였다. 또한 의자왕 대에는 그의 서자 41명이 모두 좌평의 품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이르러면서 좌평의 의미는 관직보다 품계로서의 의미가 더 강해진다.

 

좌평 이하 16관등제는 그 품계에 따라 복색이 구별되었다. 좌평에서 6품 나솔까지는 자색, 7품 장덕에서 11품 대덕까지는 비색, 12품 문독에서 16품 극우까지는 청색이었다. 또 7품 이하는 띠의 색에 의해서도 관등이 구분되었는데, 장덕은 자주색, 시덕은 검은색, 고덕은 붉은색, 계덕은 푸른색, 대덕과 문독은 황색, 무독.좌군.극우는 흰색이었다.

 

관모의 장식에 있어서도 구분되었는데, 임금은 금제, 좌평에서 나솔까지는 은제였다. 그 이후 품계의 관모의 장식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아마도 장덕에서 대덕까지는 동제, 그 이하는 철제로 장식했을 것이다.

 

관등제가 이처럼 복식과 장식의 구분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때, 16관등은 신분을 구분하는 구실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좌평에서 나솔까지는 왕족 및 귀족으로 구성된 제1신분, 장덕에서 대덕까지는 지역 대호족 출신으로 구성된 제2신분, 문독에서 극우까지는 중소 호족과 평민을 포함한 제3신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신분 차이는 아마도 신라의 골품제처럼 개인 관등의 상하한선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관등제를 기반으로 중앙과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조직이 짜여졌는데 중앙의 22부, 지방의 22담로가 그것이다.

 

중앙의 22부는 내관 12부와 외관 10부로 구성되었는데, 내관은 궁실과 왕실의 업무를 맡아보는 관청이며, 외관은 일반 서정을 맡은 기관이었다. 내관 12부는 

왕실 관계의 업무와 왕명 출납의 직무를 관장한 전내부, 곡물과 육부, 왕실의 창고 업무를 맡은 내경부와 외경부, 왕실 맟 궁궐에 이용되는 말을 관리하는 마부, 궁 안의 무기 관리를 맡은 도부, 불교 사원을 관리하는 공덕부, 약의 제조와 치료를 관장하는 약부, 궁궐 및 왕실에 소요되는 목재를 관리하는 목부, 의장 및 율령 관계를 담당하는 법부, 왕의 후궁 및 궁녀를  관리하는 후궁부 등이다.

 

하지만 내관 및 외관의 22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신축적으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부서의 수 또한 고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방의 22담로제는 방향부 체제가 해체되고 6좌평 16관등제가 실시된 이후에 설치되었다. 설치 시기는 근초고왕 대로 판단하지만 고이왕 대에 중앙집권화를 목적으로 한 좌평 제도가 실시된 점을 감안할 때, 이미 고이왕에 의해 그 골격이 마련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양서> 백제전은 "읍을 일러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개 담로가 있는데, 모두 자제와 종족을 분거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담로가 백제의 지방 통치 조직이었음을 알려준다.

 

담로가 지방  조직이었다는 것은 영토의 확장과 축소, 또는 정치적 원인에 따라 그 수가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담로의 수는 항상 22개로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담로에 파견된 지방관은 대개 왕족 출신이거나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을 것이며, 이는 담로가 중앙집권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담로 제도는 성왕 대에 이르러 큰 변화를 겪는데, 성왕은 도성을 웅진에서 사비성으로 옮겨 국호를 남부여라 하고, 대대적인 조직 정비를 감행했다. 전국을 크게 동서남북중 5방으로 나누고 그 아래 군과 성과 현을 두었다. 방의 중심지 치소를 방성이라 하고, 방성의 장관을 방령이라 했는데, 대개 달솔의 품계를 가진 자가 방성의 성주가 되었다. 5방 관할의 각 군에는 군장이 있고, 그들은 대개 덕솔의 품계였다. 군 안에는 다시 여러 성이 있는데, 이들 성은 군장과 방령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 성중에서 규모가 크고 인구가 많아 독립적인 조직이 필요한 성에 현을 설치했다.

 

성왕 당시에 백제 땅에 설치된 군은 총 37군단이었고, 현의 수는 대략 200개에서 250개 정도였다. <삼국사기>는 백제 멸망 당시 인구를 76만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평백제국비명>에는 24만 호에 620만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백제 전성기의 호수를 15만 2천 3백호로 기록하고 있는데, 어느 기록이 정확한지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