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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새벽 1(국방장관과 혈서) 본문
우면산의 새벽 1(국방장관과 혈서)
기온이 떨어지고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리거나 빙판길이 되면 자전거 타기는 위험하여 오늘은 우면산을 올랐다. 겨울철에는 가급적 산행위주로 방향을 바꿀 예정이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을 억제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사는 욕심에서 비롯되는 불행이 대부분인지라 도로 상태와 날씨를 잘 살펴야 할 것 같다.
우면산의 새벽
지난밤에 내린 눈으로 우면산은 눈으로 옷을 갈아 입고 본격적인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야생 꿩과 청살모도 보이지 않는다. 굴속이나 낙엽 속에 숨어 추위를 피하고 겨울잠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등산로는 후라쉬를 비추지 않으면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께 서울대공원에서 탈출한 곰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하니 청계산과 연결된 우면산이라 여기도 혹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바위나 나무 그루턱이 어둠속에서 시커멓게 보이면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남자의 자격에 나오던 한 연예인이 마약건으로 구속된 모양이다. 본인은 물론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였던 다른 연예인들과 합창단원들, 박칼린씨를 포함하여 주변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타격을 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던 선우가 그 사람에 대한 격려의 말 한마디로 네티즌들로부터 매도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합창 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선우와 배다해 등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동료애를 발휘한다고 한 한마디 말로 인하여 마녀사냥을 당하는 느낌이다. 한 사람의 문제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이 그동안 쌓아올린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하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간 사회가 너무나 많은 변화를 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번에 발생하였던 타블로 학력 문제, 지하철 성추행 동영상 남자가 스스로 자수를 하였고, 말한마다 잘못으로 집중적인 네티즌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신분을 숨기고 남을 비방하는 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일종의 상대적 열등감의 발로이기도 할 것이다. 공적이라고 욕하면서도 자신은 뒷구멍에서 부끄럼없이 저질스런 행위를 하면서도 말이다... 인간들은 이중적인 성격이 다분하고 혼자일 때와 다른 사람이 같이 있을 때는 행동이 다르다.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는게 인간이고 자신의 추함이나 부도덕성은 나타내지 않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 남을 끌어내리는데 즐거움을 느끼는 사회, 그러면서도 불륜과 유흥업이 번창하는 사회, 막장 드라마에 심취한 사회, 사회적 비난은 그 시대의 법적 윤리적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법적, 윤리적 문제는 변하기 마련이다. 군중심리는 동조자들이 몰려들면 폭력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네티즌들의 무차별적인 마녀사냥은 제도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사안일 것이다.
전투기 폭격은 우리들이 결정 못했다.
한국은 연평도 포격 직후 북한 폭격을 검토하다 미국의 요구로 포기했다 한다.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낸 적의 도발을 미국에게 일일이 물어보는 우리들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당시 합참은 한미연합사에 북한 폭격이 가능한지 물었고, 연합사는 3시간 30분 동안의 회의를 거쳐 부정적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이어 유엔군사령부가 30분간 교전규칙 저촉 여부에 대해 논의해 역시 같은 입장을 밝혔다. 그리곤 북한 폭격은 이뤄지지 않았다.
자위권이 교전수칙이나 CODA보다 우선인데도 그런 입론을 통해 미국을 설득하지 못하고 그냥 굴복한 것이다. 자위권의 권위를 스스로 추락시켜 버린 셈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8일 나온 자위권 보장 약속은 나중에 밝혀진 이러한 사실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차단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할지 모른다. 미구근 한반도에서 확전을 바라지 않가 때문이다. 이러한 자위구너 보장 약속이 미국이 과연 제대로 지킬지, 한국이 자위권을 확립해 나갈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게 됐다.
한국의 국가 지도자와 군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자기 나라의 국방 자주권을 온전히 행사하겠다는 의지가 도대체 보이지 않는다. 미국 말이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들어 주면서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다.
미국도 좀 변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의 이해에 직결되는 중요한 지역인 것은 맞지만 지금처럼 자위권까지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한심한 나라로 만들어서는 곤란하다. 한국의 숨통을 틔어 주지 않으면 반미 감정 때문에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국방장관과 혈서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신임 국방장관에 거는 기대가 어느 때 보다도 높아진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신임 국방장관에게 혈서를 쓰라고 한다.
즉 혈서를 쓰서 벽에 걸어 놓고 과감한 군 개혁을 추진하라는 뜻일 것이다. 장군들에 대한 비난이 쇄도하고 있다. 숫자도 많을 뿐 아니라 무능한 장군이 대부분이고 정치군인을 이차에 모두 군복을 벗기라는 아우성이다. 군 개혁도 많은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무기개발, 인사,복무기간, 예산 집행, 국방부 내부 편제, 합참 기능. 군 조직, 주적 개념, 자위권, 교전규칙, 해병대 운용, 무기체계, 방산 분야, 부패와 비리.... 전 분야에 걸쳐 국방선진화위원회의 보고 내용과 더불어 엄청난 군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신임 국방장관은 이러한 거국적인 요구를 혈서를 쓰는 심정으로 과연 추진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의문이다. 내부적인 갈등과 국민들의 가력한 대응 요구, 그리고 정치적인 부담을 아울러 소화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과연 얼마나 개혁을 이룰지는 두고볼 일이다.
역사를 보면 급격한 개혁은 대부분 실패하였다. 기득권층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추진을 주도하던 세력이 하나 둘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개혁 실패 사례
아편전쟁 이후 몇몇 중국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중국이 서양의 문물과 과학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깨닫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각이 186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일종의 국가 개혁운동으로 퍼졌는데 이를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고 부른다. 청나라 조정이 주도가 되어 이루어진 양무운동은 어느정도의 성과를 이루었으나 청일 전쟁의 패배로 그 한계를 드러나게 된다. 더이상 봉건적인 청나라로서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청일전쟁 패배에 대한 한계의식은 곧 "변법자강운동"이라는 새로운 개혁운동으로 발전했다. 캉유웨이(강유위)와 량치차오(양계초)의 개혁운동은 광서제의 주목을 받았고 여러가지 개혁조치가 시도되었으나, 이들의 청조 개조운동은 서태후를 중심으로한 반동세력에 의해 100일만에 끝나고 만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중 과거 제도 폐지 및 근대적 대학 설립 등은 나중에 신해혁명의 자양분이 되었다. 청조는 1906년 새로이 헌법을 정하고 입헌군주국으로 변화를 선언했고 1911년 5월 헌법에 의거한 새로운 내각을 발표했는데 이 초대 13명의 내각중 9명이 만주족 출신이고 그나마도 7명이 황제의 친족이었다. 이는 개혁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실망을 더욱 키운 꼴이 되었다.
한편, 전통적인 청나라 군대인 팔기군은 태평천국의 난, 청일 전쟁을 거치면서 급속히 약화되고 대신 이홍장의 신식 군대인 북양군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이홍장의 뒤를 이은 위안스카이는 북양군을 더욱 강화하고 각 지방에 군사학교를 세워 장교를 양성하였고 이들은 나중에 중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고대 로마 시대의 개혁 실패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기원전 163년 - 기원전 132년)는 기원전 2세기에 활동한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이다. 호민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의 개혁을 추진했는데, 결국 개혁에 반대하는 원로원의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63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집정관을 지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였고 어머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였다. 그라쿠스 가문은 당시 로마에서 존경받던 부유층 가문으로 아버지는 기원전 154년경 10살인 티베리우스와 누나, 갓난아기였던 남동생 가이우스를 남기고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재혼하지 않고 아이들의 양육에 힘썼다. 누나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와 결혼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 당시 그는 매형 스키피오와 함께 카르타고의 멸망을 지켜보았고 기원전 137년에는 군단의 회계감사관(콰이스토르)으로 히스파니아의 누만티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원정에 참가했다. 원정은 실패했고 불명예스러운 강화 조약을 맺었는데, 이때 그라쿠스의 소극적인 태도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원로원은 불만을 가졌다.
로마 사회의 불안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로마 사회는 불안해졌고 자작농들은 군단에 복무하느라 자신의 토지를 돌볼 수 없었다. 또한 전쟁으로 늘어난 속주들에게서 들어오는 농작물로 본국 이탈리아의 자작농은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티푼디움(노예를 기반으로 한 대농장제도)의 발달로 거대 지주와 일부 부유한 원로원 의원들 등 귀족들의 부는 더욱 늘어만 갔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자작농들은 농지가 없어 갈 곳을 잃고 무산자가 되어 로마로 밀려 들어왔다.
정치적으로도 전쟁을 치르면서 원로원은 그 권한이 점점 더 강화되고 일부 소수의 가문들에게 그 권력마저 집중되었다. 자작농들은 자산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는 실제로 군단병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게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이러한 로마의 문제를 파악하고 개혁을 생각하게 되었다.
농지개혁의 추진
기원전 134년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당선된 후 '셈프로니우스 농지법(lex Sempronia agraria)' 이라고 불리는 농지 개혁 법안을 제출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국유지 임차 상한선을 500유게라(jugera)(약 1.3㎢)로 정하고 아들의 명의로 한명당 250유게라까지 인정한다. 전체 가족(한 가문)이 1,000유게라를 넘기지 못한다.
- 국유지 임차권은 상속하지만 양도할 수는 없다.
- 1,000유게라 이상의 토지는 국가에 반환하고 보상을 받으며, 반환된 토지는 농민에게 재분배하고 국고에서 보조금을 지급한다.
그라쿠스는 이 법안으로 국유지의 공정한 분배와 자작농의 보호를 꾀했다. 원로원의 보수주의자들도 처음에는 이 법안에 드러내놓고 반대할 수 없었다. 백년 전에 제정되었지만 유명무실해진 기존의 법안을 부활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고 완전한 평등보다는 단순히 공정한 분배를 원칙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보수파는 그라쿠스의 동료 호민관 옥타비우스를 끌어들여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려 했지만, 그라쿠스는 평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옥타비우스를 탄핵시킨 후 농지법을 통과시키고 농지 위원회를 선출하게 되었다.([[기원전 133년])
때마침, 페르가몬의 아탈루스(Attalus) 3세가 죽으면서 왕국 전체를 로마에게 넘기는 일이 일어났다. 농지 위원회를 위한 자금이 필요했던 그라쿠스는 아탈루스 왕의 유산을 이용하여 자작농에게 보조금을 주자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보수적인 원로원의 반감을 샀다. 외교권과 해외 재산의 사용에 대한 결정은 원로원의 고유 권한인데 호민관이 이 권한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반대파는 그라쿠스의 호민관 임기가 끝나면 그를 기소하려 했고 그라쿠스는 그때까지 관례적으로는 재선이 허용되지 않던 호민관직에 평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재선에 출마했다. 반대파는 그라쿠스가 독재를 꿈꾼다는 비난을 퍼붓는 등 필사적으로 당선을 막으려 했다.
죽음과 그 이후
호민관 선거날, 수많은 그라쿠스의 지지자들이 로마 광장에 모여들었다. 이러한 기세라면 그라쿠스의 당선은 분명해 보였다. 다급해진 반대파는 집정관 스카이볼라에게 선거를 무효로 하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반대파는 철제 곤봉으로 무장하고 광장으로 가서 그라쿠스의 지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라쿠스도 살해당하고 수백명이 반대파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들의 시체는 티베르 강에 버려졌다.
그라쿠스가 죽은 후, 원로원은 평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반대파의 주동자인 스키피오 나시카를 사실상 추방하고 농지 개혁 법안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라쿠스라는 견인차가 없어진 마당에 토지 개혁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또 한번의 토지 개혁으로 보수파와 맞서게 된다.
이처럼 개혁이란 목숨을 담보로 추진하지 않으면 대부분 실패하기 마련이고 개혁을 위한 지지층이 동반되어야 하고 실질적인 권력층의 비호가 뒤따라야만 성공이 가능하다. 그러나 기득권층은 개혁을 적극 반대할 것이고 그들의 권력과 경제력, 그리고 힘을 이용하여 개혁파를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김관진 국방장관의 개혁은 이러한 이유로 군개혁의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자위권을 확대해석하여 북한에게 확전의 빌미를 제공하는 행위가 공공연해 진다면 미국은 김국방을 그대로 두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이번 사태에서도 미국은 전투기 폭격을 거부했다. 이대통령이 보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김국방은 우선적으로 군내부터 강력하게 개혁드라이브를 걸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권력으로부터 군이 난도질 당하여 왔고 군은 그래서 무사안일과 내부적으로 부패와 비리가 난무하는 무능한 집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권력과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았고 군부대가 이전하려도 갈 곳이 없는 현실이다. 군인들이 매입하여 민간아파트에 입주하려면 주민들이 데모를 하여 군인가족들의 입주를 반대하는 게 오늘의 군 현실이다. 주적도 없고 하늘과 땅 바다에서 떨어지고 침몰하고 폭발하고 깨지고 빠지는 부셔지는 전투장비들이 전력증강의 결과로 나타났다. 군내 부조리는 만연하여 시설, 급식, 납품, 정비, 진급, 보직 등 전반에 걸쳐 썩고 있다. 정치 장교와 출세지향주의 사고가 팽배해져 군의 전략과 전술에는 관심도 없다. 때리면 터지고 맞기만 하고 있다. 이번 연평도 사태에서도 대응 능력도 없었고 훈련도 안되어 있었으며 전투장비도 제대로 작동되지도 않았다.
군출신들은 대부분 보유 재산이 10억 안팍에 불과하다. 정치인 중에서 군출신은 군인공제회나 군인들이 결성한 조합을 통해 분양받은 아파트 한 채와 약간의 예금이 전부인 재산으로 정치인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거지나 다름없다. 다른 군면제자 정치인들은 그동안 사회에서 대부분 부도덕한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하여 부자가 되었고, 그 돈으로 정치적으로 출세하여 부귀를 누리면서 몇십 억대의 재산을 가지자들이 대부분이다. 재산이 빈약한 군출신을 선호한다고? 황의돈 참모총장이 가진 6층짜리 건물이 40억이 넘는 건물인데, 그 건물은 고도제한이 풀리기 전에 매입하여 제한이 풀리자 6층으로 올렸다고 한다. 땅값이 몇 배나 오라서 지금 40억 이상 간다고 배들이 아픈 모양이다. 그것으로 군을 무너뜨리기에 혈안이 된 무리들이 말들이 많다. 군인은 평생 재테크도 하지말고 거지처럼 살아야만 청빈하고 명예로운 사람인가? 전역한 수많은 군출신들이 취업은 커녕 쥐꼬리만한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으며, 가난과 능력없는 부모가 되어 자식들한테 얼마나 배척당하고 있는지나 아는가?
수도 서울이나 경기도 일원에 적의 장거리포와 방사포 포탄이 수천발 떨어져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그때서야 자주 국방을 외치며 필요성을 실감할 것인가? 그때서야 천시받던 군대를 외치고 떠들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역사적으로도 국방을 소홀히 하고 군을 냉대하는 나라치고 오래간 나라는 없다. 고려는 무신을 냉대하다 무신정권이 들어서서 멸망할 때까지 나라는 병들었고 백성들의 민심은 떠났다. 그러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전국토는 불탔으며 수십만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수많은 부녀자들이 성 노리개가 되어 몽고군에게 끌려갔다.
이 나라가 망한다면 지금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연예계 별이라는 미모의 여자 연예인들이 가장 먼저 적국의 노리개가 된 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우리가 터지면 미국은 폐기 직전의 무기를 최신 무기라며 팔아먹기 좋고, 일본은 한국을 핑계로 자위대를 증강하고 호시탐탐 한반도에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안감힘을 쏟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우리 정부와 군이 무능하여 북한에 당하면 우리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미국은 미군을 투입하기 전에 일본 자위대를 미군에 앞서 한반도에 파견할 지도 모른다. 즉, 우리가 적의 도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한다면 일본군이 다시 한반도에 진주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조선 말기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을 모르는가?
일본은 고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 백제와 가야 땅에 깊은 관여를 하면서 임나일본부라는 허구의 역사를 포장하여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려 했으며,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통해 조선을 삼키려다 명나라의 지원으로 실패하였으나, 조선은 그 후로 공리주의와 허례허식에 빠진 유교, 외척들의 권력 농단, 부정과 부패의 만연, 흥선과 민비의 권력 다툼속에 무능했던 결과 결국은 일제에 합병되고 나라가 망해버리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일제 36년간 이 나라 백성들은 600만이 넘는 젊은이들이 탄광이나 전장터로 끌려갔고, 젊은 여성들은 정신대로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끌려가지 않았던가?
우리가 두번 다시 이러한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졸부같은 근성을 버리고 난장판의 국회를 문닫고 정치, 경제, 사회, 군부 등 제반 분야에 대대적인 혁신을 기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암튼, 기로에 선 한국군의 미래가 한 두사람의 노력으로 개혁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이 있어야 하고 군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 군을 우대하고 군출신들이 사회에서 대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대폭적인 복지와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 사기를 먹고 자라는 것이 군이다. 군이 사기가 오른다면 군은 달라질 것이다. 지금같이 바닥에 떨어진 군의 위상을 세워주고 군을 우대하지 않는 한 국방개혁은 결고 쉽지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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