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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6 : 백제의 역사 42 (제31대 의자왕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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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6 : 백제의 역사 42 (제31대 의자왕 1)

두바퀴인생 2010. 12. 9. 02:55

 

 

한국의 역사 96 : 백제의 역사 42 (제31대 의자왕 1)

 

제31대 의자왕

 

의자왕(義慈王, 595/9년~660년, 재위: 641년~660년)은 백제의 제31대 이며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부여(扶餘)이다. 대개 의자왕의 ‘의자’(義慈)는 시호라 잘못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의자왕의 휘이다. 태자 때부터 아우들과 우애가 깊고 사려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으로 칭송을 받았다.

초기 생애

599년 당시 백제의 왕족인 서동사택부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어 아버지가 왕에 오르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총명하고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로 불렸다. 641년 아버지 무왕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었다.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

의자왕은 641년 즉위하면서 당 태종에 의해 '주국대방군왕백제왕'으로 책봉되어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그는 왕위 초기에는 아주 휼륭한 정치를 폈다. 642년에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고구려 연개소문과 연합하여, 의자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다. 이어 장군 윤충(允忠)이 신라의 구 가야지역 최대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하는 등 백제의 힘을 떨쳤다. 이때 김춘추는 대야성에서 사위와 딸을 잃었다.

 

김춘추가 고구려로 들어가 군사원조를 요청했을 때 고구려는 본래 자신들의 땅이었던 죽령 서북지방을 돌려주면 돕겠다고 하였다. 의자왕은 당태종에게 부여강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연합하지 않고 오히려 당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원한다고 하였다. 643년에는 고구려와 화친하고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으려 시도하였다.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하자 당 태종은 644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 공격을 멈추라고 요구하였다.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고자 신라에서 원군을 징발하자 이 기회를 노려 649년 신라의 7성을 습격하다가 김유신(金庾信)에게 역습을 당하였다. 그 후 백제는 결국 이를 다시 빼앗다. 648년 겨울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가 태종의 신임을 얻고, 649년 당 고종이 즉위했을 때 진덕여왕이 태평송을 써서 보내는 등 중국과 외교관계를 긴밀히 하였다. 백제도 조공사신을 보내어 관계개선을 시도했으나 당이 신라의 실지를 반환하라고 하자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후 백제와 당의 외교관계는 멸망시까지 단절되었다.

 

의자왕은 655년에는 고구려, 말갈과 연합해 신라의 성 30여 개를 빼앗았고, 659년 4월 신라를 다시 공격하였다.

 

백제의 멸망

즉위 후에 국위를 만회하려던 의자왕의 노력은 57세를 넘기자 차츰 약해졌으며, 방탕해진 의자왕은 왕비 군대부인(또는 은고)과 함께 사치스러운 주연을 매일 열었다. 그로 인해 총기가 흐려지고 방종해져 충신 성충의 말을 무시하고 하옥하자 국정이 문란해져 갔다. 그리고 그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 말이 “육로는 탄현(炭峴)에서, 수로는 기벌포(伎伐浦)에서 막으소서.”라고 하였지만 그는 그 말을 무시하고 여흥에 빠졌다.

 

거듭된 당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라를 압박하자 마침내 당과 신라는 밀계하여 660년 나·당연합군으로 협공을 하였다. 귀양 가있던 흥수에게 사신을 보냈지만 성충과 같은 말을 하자 믿지 못했다. 기벌포에서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려던 백제군은 대패하였고, 황산벌에는 계백(階伯)을 5천의 군사와 보내어 4번을 막아냈지만 백제군의 10배나 되는 신라군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계백과 그의 군사는 전멸하였다.


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항복하게 하였다.

—《구당서》, 〈소정방전〉

其將禰植 與義慈降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다.

—《신당서》, 〈소정방전〉

사비성 부근에서도 결전이 벌어졌으나 백제군 1만이 전사하며 대패하고 수도인 사비성(泗沘城)이 포위되자 태자 융과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으며, 사비에는 둘째 아들 태가 남아 왕을 자처하며 항전하다가 곧 항복했다. 그 후 의자왕도 항복했다.

 

중앙군의 전멸과 왕성이 무너지며 거의 모든 왕족과 의자왕의 측근 최고 지배층들이 모조리 포로가 되자 가망없다고 여기고 의자왕을 배신한 웅진성 방령 예식(禰植, 예식진(祢寔進))에 의해 항복이 진행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삼국사기 태종 무열왕본기는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스스로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자왕이 너무 쉽게 항복을 하였는데, 의자왕은 이것을 대당외교투쟁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지 국가의 멸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당은 이후 부여 융을 웅진도독으로 신라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아 동맹을 맺게 하는 의식을 웅진 취리산에서 행한 바 있다. 즉, 당나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 후 왕자들과 대신 88명을 포함하여 백성 1만 2천 명과 함께 당나라 수도로 압송된 후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망국의 군주가 묻힌다는 낙양북망산에 묻혔다.

              

논란

3천 궁녀와 낙화암

자살한 궁녀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서 “궁녀들왕포암(王浦巖)에서 올라가 물로 뛰어들어 자살함으로써 타사암(墮死巖)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라는 내용이다. 그 뒤 고려 시대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 권2에서 “여러 비빈”(諸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조선 초의 문신 김흔(金訢, 1448~?)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 /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三千歌舞委沙塵 / 紅殘玉碎隨水逝)”라고 읊은 것이 “3천”이라는 수효에 대한 첫 언급이다.

 

“3천 궁녀”를 맨 처음 언급한 글은 윤승한(尹昇漢)이 지은 소설김유신》(野談社, 1941년)이고, 최초의 공식 기록은 이홍직(李弘稙)이 쓴 《국사대사전》(지문각, 1962년)의 “낙화암” 조항이다.

 

결국 근대 이전에 “삼천궁녀”를 기록한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잘못 되었다고 알려진 사실

의자왕은 술과 여흥에 빠져,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하나,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군대를 보내어 싸웠다고 전해지고, 술과 여흥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또한, 《삼국유사》는 전설도 포함되어 있고, 《삼국사기》는 실제 있던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가족

  • 왕비 : 은고(또는 군대부인)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

 

 

 

 

 

 

제31대 의자왕 실록

(?~서기 660년, 재위:서기 641년 3월~ 660년 7월, 19년 4개월)

 

해동증자 의자왕과 백제의 패망

의자왕(義慈王)은 무왕의 맏아들로 무왕 재위 33년(632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641년 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남달라 중국의 '현인증자'와 같다 하여 '해동증자'로 불리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해동증자라는 별칭과 달리 그는 즉위와 함께 매우 야심차고 공격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우선 즉위년 8월과 이듬해 정월, 두 차례에 걸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그해 2월에는 전국의 주와 군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의 민심을 살폈다. 5개월 뒤인 7월에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 등 40여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위용을 떨쳤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 만인 8월에는 신라가 백제의 가잠성을 공격하자 가잠성은 성주 계백에게 맡기고, 성충의 계략에 따라 양동 전술로 장군 윤충에게 1만을 주어 신라의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대야성은 백제에서 신라의 경도 서라벌로 가는 길목으로 아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신라의 실권자 김춘추는 자신의 사위 김품석에게 이곳을 맡겼는데, 품석이 향락에 빠져 민심을 잃자, 급습하여 장악하고 품석을 사로잡은 것이다. 윤충은 품석과 그의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현에 나눠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대야성 함락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윤충을 불러 치하하고,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상으로 내렸다.

 

한편 신라의 선덕왕은 백제에 보복을 가하기 위해 고구려에 김춘추를 보내 군대의 파견을 요청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막리지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옛 땅인 죽령 서북 지역을 돌려주면, 군대를 파견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김춘추가 화를 내면서 거절하자, 연개소문은 그를 별관에 가둬버렸다. 이는 당시 백제의 성충이 고구려를 찿아가 동맹을 제의 한 상태로 성충은 그간의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한 사레를 들면서 신라의 거짖 속셈을 설파하였고, 또 고구려가 당나라와의 전쟁에 신라보다 근거리에 위치한 백제의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연개소문에게 간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을 차단하였기 때문에 김춘추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춘추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닭고 거짓으로 연개소문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말한 후 겨우 풀려난 뒤, 접경지역에 와 있던 김유신의 결사대 1만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귀환했다.

 

이렇듯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악화된 것을 기회로 의자왕은 643년 11월에 보장왕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의자왕의 목적은 신라가 당으로 갈 때 사용하던 당항성(당진)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신라의 선덕왕은 위기감을 느끼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의자왕은 사태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군대를 일단 철수했다. 

 

의자왕은 당나라를 달래기 위해 이듬해 사신을 당에 보냈고, 당 태종은 사농승 상리현장을 고구려에 보내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출 것을 요구했다. 의자왕은 당 태종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표를 올려 전쟁을 재개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고구려 연개소문은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찿기 전에는 공격을 멈출 수 없다며 당 태종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당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고, 결국 당 태종은 고구려를 무력으로 응징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자연히 신라와 백제 사이에도 전쟁 기운이 돌았고, 결국 그해 9월 신라 김유신이 백제를 공격하여 7개 성을 빼앗음으로써 잠시나마 유지되었던 화해 분위기는 사라졌다.

 

이듬해인 645년 3월, 마침내 당 태종은 당나라 정예병 10만과 돌궐과 거란의 군사 5만을 합쳐 15만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그러자 의자왕은 빼앗겼던 7개 성을 공략하여 다시 회복하였고, 신라에서는 김유신을 보내 총공세를 가해왔다.

 

그무렵, 고구려를 침공한 당은 비사성과 개모성을 함락시키고, 요동성마저 장악했다. 그러나 안시성에서 고구려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장기간 공방전을 벌이다가 추운 날씨, 군량 부족, 막대한 병력 손실로 결국 점령하지 못하고 대패하여 음력 10월 당 태종은 겨울 바람을 안고 퇴각했다. 퇴각시에도 요택지를 통과하면서 고구려군의 추격으로 많은 병력을 잃었고 일설에는 고구려군이 장안까지 추격하여 당 태종의 항복까지 받아내고 철수하였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자료는 찿을 수가 없다. 당으로 돌아간 당 태종은 보복을 다짐했고, 또 한 번의 고구려 침공을 위해 대대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국제 정세가 그렇듯 험악하게 흘러가고 있던 647년 10월 즈음, 의자왕은 장군 의직에게 병력 3천을 주어 감몰과 동잠 두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김유신의 반격으로 의직은 군대를 모두 잃고 단기로 도망쳐 왔다. 이듬해 3월, 의직은 다시 신라의 서부 변경 요차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다시 10여 개 성을 빼앗았다. 하지만 4월 옥문곡에서 다시 김유신에게 대패하였다.

 

한편 고구려도 당의 재침을 받고 있었는데, 당 태종은 설만철에게 군사 3만을 내주어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설만철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공방전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자 당 태종은 30만 병력을 추가로 동원하여 고구려를 재침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649년 4월에 그는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당 태종의 죽음으로 당은 군사를 동원할 수가 없었고, 의자왕은 기회를 잡은 듯 다시 신라를 공격하였다. 649년 8월 좌장 은상에게 병력 7천을 주어 신라의 석토 등 7개 성을 빼앗자, 신라는 김유신, 진춘, 천촌, 죽지 등의 장수를 앞세워 응전해왔다. 처음엔 백제군이 우세하여 김유신의 군대를 내몰았으나, 도살성 아래서 상황이 역전되어 패배하였다.

 

이 때 신라는 당나라에 김춘추의 맏아들 법민(문무왕)을 보내 백제와 고구려가 침략을 일삼고 있다면서 당 고종에게 당이 중재하여 전쟁을 종식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당 고종은 백제에 조서를 보내 신라에게 빼앗은 땅과 포로를  돌려주지 않으면 당은 신라를 지원하고 고구려로 하여금 백제를 돕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또한 고구려에게도 말을 듣지 않으면 거란과 모든 변방 국가들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겠다고 말했다.

 

당 고종의 강력한 경고에 의자왕은 일단 한 발 물러섰다. 그래서 652년에 당 고종에게 사신을 보내 당을 달래고, 한편으론 왜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으며,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도 유지했다. 당과 신라가 연합할 경우에 대비한 의자왕의 포석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의자왕은 655년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여 23개 성을 무너뜨렸다. 이에 당황한 신라의 무열왕(김춘추)은 급히 당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은 그해 2월에 정명진과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쳤으나, 패하여 5월에 돌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는 8월에 고구려와 말갈의 지원하에 신라를 공격하여 다시 여러 성을 빼앗았다. 이로써 신라는 졸지에 30여 성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계속된 승리로 인하여 의자왕은 자만에 빠져 음란과 향락에 빠져들었고, 임자와 같은 간신들이 가까이 하면서, 늘 궁녀들과 어울려 지내며 정사를 등한시 하고 술에 취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좌평 성충이 충언으로 적극 말렸으나, 의자왕은 진노하여 성충을 옥에 가둬버렸다. 그 뒤로 신하들이 감히 간언하지 못햇다.

 

성충은 음식을 전폐하고 옥중에서 굶어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며 의자왕에게 몇 가지 충고를 남겼지만, 의자왕은 듣지 않았다.

 

성충의 예언대로 전쟁은 발발하였다. 당은 658년 정명진과 설인귀를 보내 고구려를 침략하더니, 659년에도 재차 침입했다. 660년 6월에는 소정방이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와서 신라군 5만과 함께 백제를 공격해왔다.

 

 

 

의자왕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신료들을 모아 대응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대립되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좌평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더니, 흥수는 백강과 탄현의 길목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흥수의 말을 따르지 않고 당나라 군사를 백강 안으로 끌여들여 일시에 공격하여 무너뜨릴 것을 주청했다.

 

의자왕은 결국 대신들의 말을 따랐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먼 곳을 달려온 당나라 군대는 속전속결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백제가 그런 의도를 도아준 꼴이 되고 말았다. 당군과 신라군은 순식간에 백강과 탄현을 넘어 사비성으로 밀려왔고, 의자왕은 당황하여 달솔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주어 신라군을 저지할 것을 지시했다. 계백은 황산(충남 연산)에 진을 치고 신라군의 길을 막아 시간을 지연시켰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계백은 네 차레나 이겼으나 병력의 열세를 넘지 못하고 전원 전사하였다.

 

                

                                                                 황산벌 전투 재현

 

 

한편, 의자왕은  전 병력을 웅진 어귀에 집결하여 당군과 대치했으나, 당나라 수군과 육군의 협공을 당해내지 못하고 밀리다가 결국 태자 효를 데리고 웅진성으로 달아났고,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도성을 지켰다.

 

그러나 태자 효의 아들 문사가 불안함에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갔다. 그 소식을 듣고 많은 백성들이 탈출하기 시작하였고, 당나라 소정방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성내로 군사를 투입하여 당나라 깃발을 꼿아 버렸다. 그러자 부여 태는 성문을 여고 항복하였고, 이어 웅진성으로 달아난 의자왕도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게 된다. 의자왕은 신라 무열왕과  당의 소정방에게 술잔을 올리면서 항복하는 비운의 백제 마지막 왕이 되었다.

 

소정방은 9월에 의자왕과 태자 효, 왕자 태와 융, 연 및 대신과 장병 88명, 백성 1만 2천 8백 7명을 호송하여 당의 도읍인 낙양으로 데려갔다. 이로써 백제는 온조가 나라를 세운 지 678년 만에 몰락하게 되었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당으로 압송된 의자왕은 그 곳에 이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고, 무덤은 손권의 손자 손호의 무덤옆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의자왕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다만 낙양의 북망산 봉황대 일대로 추정할 뿐이며, 이는 그의 아들 부여 융의 묘지석이 북망산에서 출토된 것에 근거한다.

 

 

의자왕의 가족들

 

<삼국사기>는 의자왕에게 41명의 서자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그들 이외에도 여러 적자의 이름도 전하고 있다. 여러 적자와 많은 서자가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 여러 부인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부인들의 면면은 기록되지 않았고, 41명의 서자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름이 전하고 있는 융, 풍, 효, 태, 연, 용, 궁, 충승, 충지 등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언급한다.

 

부여 융(615~682)

융은 의자왕 재위 4년인 644년에 태자에 책봉된 것으로 봐서 의자왕의 장남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태자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다. 백제가 몰락하던 660년에 백제의 태자는 효였다. 어떤 이유로 태자가 교체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태자를 바꾸는 문제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닌 만큼 교체 과정에서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자왕 재위 16년 (656년)에 좌평 성충이 감옥에 갇히고,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쳐들어오던 660년에 좌평 흥수가 감옥에 갇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봐서, 태자가 융에서 효로 바낀 시점은 656년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성충은 곧고 바른말을 하는 충신으로 태자의 교체에 대하여 극력 반대하는 발언을 하였을 것이며 의자왕의 사치와 항략에 대하여 충언을 서슴치 않았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의자왕과 외척, 그리고 간신들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태자를 왜 교체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외척들의 정권다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은 즉위 초부터 왕권을 강화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귀족들을 제거했다. 이들 제거된 귀족 중에는 외척들도 많았을 것인데, 태자 융의 외가도 이 때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융과 효는 사로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낫는데, 그들 외가끼리 정쟁을 벌여 효의 외가가 융의 외가를 무너뜨리고 조정을 장악하면서 융은 폐세자가 되고, 그 자리를 효가 차지한 듯하다.

 

융은 태자 직위에서 밀려난 뒤로 여느 왕자와 같은 신분으로 지내다가 660년 7월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당으로 호송될 때 함께 낙양으로 끌려갔다. 그 뒤 복신과 부여 풍 등에 의해 백제부흥전쟁이 발발하자, 당은 그에게 웅진도독대방군왕의 직책을 내리고 장군 손인사와 함께 토벌군 7천을 주어 백제로 돌려보냈다. 백제부흥군은 나당연합군과 백강에서 마지막 일전을 치렀지만 패배하였다. 그 뒤 융은 신라 문무왕을 만나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이 웅진도독부에 있음을 인정받았다. 이에 따라 예 백제 귀족 관료를 중심으로 1도독부 7주 51현제를 백제 옛 땅에 실시하였다.

 

백제 옛 땅을 웅진도독부에 예속시킨 것은 당의 전략에 따른 것으로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그 곳을 수중에 넣기를 원했고, 부여 융은 그들의 허수아비 노릇을 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에 대한 권리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때문에 융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당으로 돌아가자, 백제 유민의 분열과 신라의 압력을 두려워하여 당나라로 되돌아갔다. 그 후 신라는 백제의 고도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백제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고, 웅진도독부는 한반도에서 축출되어 677년 2월에 만주의 건안고성으로 옮겨갔다. 융은 이곳에서 다시 백제 유민들을 모아 다스리다가 682년에 죽었다.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작위는 손자 경에게 계승되었다. 묘지는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 마련되었다.

 

부여 태(생몰년 미상)

태는 의자왕의 차남이다. 사비성이 당군에 포위되었을 때, 의자왕이 태자 효와 함께 웅진성으로 몸을 피하자, 그는 의자왕을 대신하여 사비성을 지켰다. 그러나 함께 있던 효의 아들 문사는 혹 그에 의해 살해될까 염려하여 측근들을 데리고 사비성을 밧줄을 타고 빠져나갔다. 그러자 많은 백성들이 문사를 따라 성을 이탈하였다. 이 일로 그가 이끌던 군대와 백성들의 전의가 상실되었고, 그 틈을 이용하여 당군이 성내로 침투하자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660년 9월 소정방에 의해 낙양으로 압송되었으며, 그 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부여 풍(생몰년 미상)

풍은 무왕 32년(631년)에 볼모가 되어 왜에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뒤 줄곧 왜에서 성장하였다. 백제가 몰락한 뒤, 무왕의 조카 복신이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하며 왜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이 때 왜는 풍에게 전함170척과 병력 1만을 주어 복신을 돕도록 했다. 풍이 도착하자, 복신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싸웠다.

 

그러나 복신과 함께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승려 도침이 서로 반목하여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복신은 도침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다. 뿐만 아니라 풍왕까지도 제거하려 했다. 풍왕는 그런 낌새를 먼저 눈치채고 복신을 살해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663년 9월 그는 백강에서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일대 격전을 벌였는데, 이 전쟁에 패배하여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그 뒤, 백제 재건을 꾀하던 아우 용과 연락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죽음과 묘지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부여 효(생몰년 미상)

효는 의자왕의 태자이다. 원래 융이 태자엿으나, 의자왕 재위 후반기에 외척들간의 정쟁에서 융의 외척을 몰아내고 효의 외척들이 승리함으로써 효가 태자로 책봉되었다. 

 

660년 7월, 사비성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그는 의자왕과 함께 웅진서응로 몸을 피하였으나, 사비성이 함락된 후 의자왕과 함께 나당연함군에 항복하였고 그해 9월에 당나라 낙양으로 압송되어 그 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부여 연(생몰년 미상)

연은 의자왕의 아들이며. 의자왕과 함께 낙양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이름만 전한다.

 

부여 용(생몰년 미상)

용은 의자왕의 아들이며.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밳제부흥군을 지휘하여 아당연합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무리를 이끌고 왜로 망명하였다.

 

왜에 머물면서도 그는 여전히 백제 재건의 꿈을 버리지 않았고, 고구려에 망명중이던 형 부여 풍과 연락하여 그 방도를 모색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포착한 당나라가 웅진도독부의 사신을 왜에 파견하여 그를 비롯한 백제 유민의 동태를 살피고 압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왜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죽었다.

 

부여 궁(생몰년 미상)

궁은 의자왕의 서자이다.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하자, 다급해진 백제는 당나라 군대를 회유하려 했다. 이 때 그는 상좌평과 함께 당군 진영으로 가서 풍성한 음식으로 그들을 대접하면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군이 그 제의를 거절하자, 그는 좌평 여섯을 이끌고 다시 당군 진영으로 찿아가 죄를 빌면서 철병을 요청했으나,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이후 기록은 없다.

 

충승(생몰년 미상)

충승은 의자왕의 아들로 백제 부흥운동에 가담한 인물이다. 의자왕이 황복하자 충지와 함께 주류성에 웅거하면서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663년의 백강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

 

충지(생몰년 미상)

충지도 충승과 함께 부흥 운동에 가담한 의자왕의 아들이다.  충승과 같이 백강 전투에서 패배하여 당군에 항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