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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4 : 백제의 역사 40 (제30대 무왕 1) 본문
한국의 역사 94 : 백제의 역사 40 (제30대 무왕 1)
무왕(武王, 580년 ~ 641년 음력 3월, 재위: 600년 ~ 641년 음력 3월)은 백제의 제30대 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휘는 장(璋), 아명은 서동이다. 법왕(法王)의 아들이며, 위덕왕의 서자라고도 한다.
생애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라고 나오지만, 삼국유사의 무왕열전에서는 강가에 사는 미혼모의 자식이라고 나온다. 무왕의 어머니는 강가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 날 강에서 검은 용이 나타나 과부와 통정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그 아들이 자라서 재주가 뛰어나고 용기가 있었는데 그가 백제의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전라북도 익산에는 무왕이 연못에서 사는 용의 아들이라는 탄생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남북조 시대 때 북조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에서는 '백제 위덕왕의 아들 무왕이 사신을 보냈다'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위덕왕의 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사》만 백제 위덕왕의 아들로 되어 있고 나머지 중국사서는 법왕의 아들로 되어 있다. 무왕은 641년 음력 3월에 사망하였다. 사후 당 태종이 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1]
치세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재위기간 중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 가잠성(椵岑城), 모산성(母山城), 늑노현(勒弩縣), 주제성과 신라 북서쪽의 두 성과 서곡성(西谷城) ·독산성(獨山城) 등을 공격하였다.
한편 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여러 번 고구려 공격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高祖)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당 태종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629년 미륵사를 완공하였다.
무왕 3년 관륵(觀勒)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 지리, 역법(曆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였다. 630년 사비 왕궁을 수리하였으나 가뭄으로 인해 중지하였다. 634년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궁남지를 건설하였으며, 미륵사를 건설하는 등 토목공사를 자주 벌이고 신라와의 전쟁이 잦아 국력을 소모하는 등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탁월한 정치역량을 바탕으로 한 외교력으로 국가의 위상을 높였고 군사력을 크게 신장시킨 치적을 남긴 무왕은 동성왕과 함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전성기 이후로 무너져가는 백제를 되살린 왕으로 평가받는다.
서동 설화
무왕은 왕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에 궁 밖에서 홀어머니를 모시며 마를 캐는 서동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신라의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경주시)로 갔다. 그러고는 서라벌의 아이들에게 마를 주는 선심을 쓰고, 선화공주가 ‘맛둥서방’과 몰래 사귄다는 ‘서동요’라는 노래를 전해주어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로 선화공주는 신라 왕실에서 쫓겨났고, 선화공주와 서동이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서동요(薯童謠)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대(599년 이전)에 이루어진 동요, 혹은 참요이다. 백제 무왕(武王)이 소년 시절에 지어 아이들에게 널리 부르게 했다고 한다.
서동이라는 개인의 창작으로 당시 아동들에게 불린 동요이기는 하나, 전대에 그러한 형식의 민요가 널리 불려 이것이 4구체의 향가로 정착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서동요는 향가 중의 가장 오랜 형태로 그 형식은 4구체이다.
전문
이 작품의 유래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 일찍이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1]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龍)과 정을 맺어 그를 낳았다. 아명(兒名)은 서동(薯童). 그 도량이 비상하고 항상 서여(마)를 캐어 팔아서 생계로 삼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명을 그리 부른 것이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더벅머리를 깎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자신을 따르게 했다. 드디어 노래 하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 공주니믄(선화공주님은)
남 그즈지 얼어 두고(남 몰래 시집가 두고)
맛둥방을(맛둥 서방을)
바매 몰 안고 가다.(밤에 몰래 안고 간다.)
” 이 동요는 서라벌에 퍼져 대궐에까지 스며들어 갔고, 백관(百官)들이 크게 간(諫)하여 공주를 멀리 귀양보내게 되었다. 떠날 때 왕후(王后)는 그 딸에게 순금 한 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길에 오를 때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여 시위(侍衛)해 가겠노라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도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며 정을 나누었다. 그 후에야 서동이란 것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공주는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장차 생계를 꾀하려 하니 이때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했다. 공주는 "이것이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을 넉넉히 살 수 있을 것"이라 하자 서동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땅엔 이런 것이 흙과 같이 쌓였다." 하니 공주는 크게 놀라며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이니 그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궁궐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했다. 서동이 좋다 하며 금덩이를 모아 구릉(丘陵)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 금 수송의 방책을 물었다. 법사는 "내 신력(神力)으로 옮기리라." 하니, 공주가 편지와 함께 금덩이를 절간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옮겨 놓았다.
신라의 진평왕은 그 신이(神異)함에 더욱 존경하고, 항상 편지를 보내어 문안을 물었다. 서동은 이런 일로써 민심을 얻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
선화공주(善化公主/善花公主)는 《삼국유사》기록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백제 무왕의 왕후이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봉안사리기에 의하면 백제 무왕의 왕후는 사택왕후로 기록되었기에 그 실존 여부에 관한 논란이 있다.
생애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딸이자 선덕여왕과 천명공주의 동생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모가 매우 뛰어나 백제의 서동(후에 무왕)이 사모하여, 두 사람이 남 몰래 밤에 만나곤 한다는 〈서동요〉를 지어 금성(지금의 경주)에 퍼뜨렸다고 한다. 공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되어 가던 중 서동에게 구출되어 결혼하고 백제에 가서 왕비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미륵사의 창건을 무왕에게 부탁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무왕이 아니고 모대(동성왕)라고도 하며, 그녀의 신분에 대해서도 신라의 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공주, 귀족, 지방 호족의 딸 등 다양한 가설이 있다.
논란
2009년, 미륵사지 석탑에서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미륵사 창건의 주체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왕후가 무왕의 왕후라 기록하고 있어 선화공주의 존재를 뿌리부터 위태롭게 하였다. 이에 학자들은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에 대해 대립하기도 하였다.
가족
- 부왕 : 법왕
- 모후 : ?
왕후 : 사택왕후(沙宅王后) -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
- 아들 : 의자왕(義慈王)
- 아들 : 부여교기(扶餘翹岐)
- 왕후 : 선화공주(善花公主) - 신라 진평왕의 3녀.
동시대 고구려, 신라
고구려
- 영양왕 (590년 - 618년)
- 영류왕 (618년 - 642년)
신라
- 진평왕 (579년 - 632년)
- 선덕여왕 (632년 - 647년)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 왕호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1 | 온조왕(溫祚王) | 온조(溫祚) |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 |
2 | 다루왕(多婁王) | 다루(多婁) | 기원후 28년 ~ 77년 | 온조왕의 아들. | |
3 | 기루왕(己婁王) | 기루(己婁) | 77년 ~ 128년 | 다루왕의 아들. | |
4 | 개루왕(蓋婁王) | 개루(蓋婁) | 128년 ~ 166년 | 기루왕의 아들. | |
5 | 초고왕(肖古王) | 초고(肖古) | 166년 ~ 214년 |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 |
6 | 구수왕(仇首王) | 구수(仇首) | 214년 ~ 234년 |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 |
7 | 사반왕(沙伴王) | 사반(沙伴) | 234년 |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 |
8 | 고이왕(古爾王) |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 234년 ~ 286년 | 개루왕의 차남. | |
9 | 책계왕(責稽王) | 책계(責稽) | 286년 ~ 298년 |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 |
10 | 분서왕(汾西王) | 분서(汾西) | 298년 ~ 304년 | 책계왕의 아들. | |
11 | 비류왕(比流王) | 비류(比流) | 304년 ~ 344년 | 구수왕의 차남. | |
12 | 계왕(契王) | 계(契) | 344년 ~ 346년 | 분서왕의 아들. | |
13 | 근초고왕(近肖古王) | 초고(肖古), 여구(餘句) | 346년 ~ 375년 |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 |
14 | 근구수왕(近仇首王) | 구수(仇首), 수(須) | 375년 ~ 384년 | 근초고왕의 아들. | |
15 | 침류왕(枕流王) | 침류(枕流) | 384년 ~ 385년 | 근구수왕의 장남. | |
16 | 진사왕(辰斯王) | 진사(辰斯) | 385년 ~ 392년 | 근구수왕의 차남. | |
17 | 아신왕(阿莘王) | 아신(阿莘) | 392년 ~ 405년 | 침류왕의 아들. | |
18 | 전지왕(腆支王) |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 405년 ~ 420년 | 아신왕의 아들. | |
19 | 구이신왕(久爾辛王) | 구이신(久爾辛) | 420년 ~ 427년 | 전지왕의 아들. | |
20 | 비유왕(毗有王) | 비유(毗有), 여비(餘毗) | 427년 ~ 455년 | 구이신왕의 아들. | |
21 | 개로왕(蓋鹵王) | 경사(慶司), 여경(餘慶) | 455년 ~ 475년 |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 |
22 | 문주왕(文周王) | 모도(牟都), 여도(餘都) | 475년 ~ 477년 |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 |
23 | 삼근왕(三斤王) | 삼근(三斤) | 477년 ~ 479년 | 문주왕의 아들. | |
24 | 동성왕(東城王) | 동성왕 |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 479년 ~ 501년 |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
25 | 무령왕(武寧王) | 무령왕 | 사마(斯麻), 여융(餘隆) | 501년 ~ 523년 |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
26 | 성왕(聖王) | 성왕 | 명농(明襛) | 523년 ~ 554년 | 무령왕의 아들. |
27 | 위덕왕(威德王) | 위덕왕 | 창(昌) | 554년 ~ 598년 | 성왕의 장남. |
28 | 혜왕(惠王) | 혜왕 | 계(季) | 598년 ~ 599년 | 성왕의 차남. |
29 | 법왕(法王) | 법왕 | 선(宣), 효순(孝順) | 599년 ~ 600년 | 혜왕의 아들. |
30 | 무왕(武王) | 무왕 | 장(璋), 서동 | 600년 ~ 641년 |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
31 | 의자왕(義慈王) | 의자 | 641년 ~ 660년 | 무왕의 아들. |
제30대 무왕 실록
(?~서기 641년, 재위:서기 600년 5월~ 641년 3월, 40년 10개월)
서동에서 왕으로 등극한 무왕
법왕은 정적들에 의해 제거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무왕을 추대한 세력은 법왕의 정적들이어야 한다. 법왕의 정적들은 위덕왕 또는 그의 태자 아좌의 측근들이다. 그런 그들이 법왕의 아들을 다시 왕위에 옹립한다는 것은 자기 목에 칼을 대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연히 위덕왕의 혈통을 왕위에 앉혔을 것이고, 그 대상이 바로 무왕이었다. 따라서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무왕은 어느 왕손과는 성장 과정이 크게 달랐다. 대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아니요, 제왕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다. <삼국유사>는 그가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으며, 마를 캐는 서동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이는 무왕의 왕위 승계 과정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한낱 마를 캐던 그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을까?
위덕왕이 죽고, 그의 태자 아좌가 법왕 세력에 의해 제거될 때, 아좌의 형제들은 거의 모두 살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왕은 궁궐 밖에서 민간인의 신분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어쩌면 그는 혜왕과 법왕의 재위시에 쫒기는 처지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신분을 속이고 마를 캐는 서동으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 서동이 왕위에 오른 과정은 고구려의 미천왕이나, 고려의 현종, 조선의 철종과 유사했을 것이다. 미천왕은 봉상왕에게 쫒기는 신세로 전락하여 머슴, 소금장수, 거지 생활을 하면서 지내다 창조리 반정으로 봉상왕이 쫒겨나자 신하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를 승계한 경우다. 고려 현종은 왕위를 차지하려던 목종의 모후 헌정왕후와 그녀의 정부이며 실권자였던 김치양에게 쫒겨다니며 가까스로 목숨을 보존하다가 강조의 반정으로 왕으로 추대된 경우이며, 조선의 철종은 강화도에서 일자무식의 촌부로 살다가 허수아비 왕이 필요했던 외척이었던 안동 김씨 정권에 의해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경우다.
법왕 세력에 의해 위덕왕의 자식들이 대부분 죽임을 당하고, 다시 반법왕 세력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법왕의 자식들이 거의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백제는 왕실의 씨가 마르는 사태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때 찿아낸 것이 위덕왕의 서자 서동이었다면, 앞의 세 가지 사례 가운데 미천왕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동 이외에도 왕위를 계승할 만한 왕손이 있었는데도 굳이 서동을 택했다면, 그것은 철종처럼 권력자들의 필요성에 의해 왕위를 승계하였을 것이다. 또 서동의 왕위 계승 배경에는 미천왕과 철종의 승계 형태가 혼합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던 서민으로 살던 서동은 600년 5월, 법왕이 반대 세력에 의해 제거되자,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백제 제30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야말로 땅을 기던 지렁이가 하루아침에 용이되어 승천한 격이었다.
그리고 무왕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무왕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화공주는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딸이며, 서동의 아내로 그가 왕위에 오르는데 큰 역활을 한 것으로 나온다.
정말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라면 서동은 진평왕의 사위가 되고 양국은 결혼 동맹을 맺은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다른 기록 어디에도 그러한 내용은 없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내용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진평왕은 정비인 마야왕후에게서 천명공주와 덕만공주 두 명의 딸이 있었다. 하지만 선화공주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마야왕후가 죽은 뒤 진평왕은 또 한 명의 왕후를 얻었는데, 바로 승만왕후이다. 그녀는 아들 한 명만 낳았으나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죽었다. 그리고 딸을 낳았다는 기록은 없다. 결국 <삼국유사>의 내용은 지어낸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적국 신라의 공주를 백제의 민간인 신분이던 무왕과 연결되었다는 가설이 황당하다. 또 당시 신라의 왕에게는 딸이 둘이나 있었지만 선화라는 공주의 이름은 화랑세기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신라의 화랑들은 왕족과 혼인하면 출세의 지름길이기에 왕족이던 선화공주를 빼고 기록을 남겼을 리가 없다.
또 <삼국유사>에 서동과 선화공주가 금맥을 발견하여 신라 궁중에 많은 금을 보내자, 진평왕이 서동을 남다르게 생각하여 그 덕분에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또 진평왕의 사위였다면 백제와 신라는 결혼동맹으로 화친이 계속되어야 하나 그렇지 못하였다. 무왕은 즉위 후 바로 신라를 공격하였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성주의 목을 베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내용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선화공주는 신라의 공주가 아니고 백제 법왕의 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무왕은 법왕의 딸과 인연이 되어 설화를 남겼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다시 말해 서동은 위덕왕의 아들이며, 법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는 무왕이 등극 후 법왕파와 위덕왕 세력을 공히 등용하여 신하들을 다둑거려 정쟁을 잠재우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가능성이 높다. 양대 파벌이 화해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위덕왕계의 무왕과 법왕계의 선화공주가 결혼한 사건일 것이다.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는 이렇게 백제 내부에서 일어난 일인데, 구전되는 과정에서 더 극적으로 만들어져 <삼국유사>에는 백제와 신라 양국 사이에 벌어진 일로 변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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