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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새벽길을 달리며...2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자전거를 타고 새벽길을 달리며...2

두바퀴인생 2010. 12. 4. 12:12

 

 

자전거를 타고 새벽길을 달리며...2

 

 

  

 

 

서초카패거리의 새벽 

 

  

임 국방장관 후보자 청문회

김관진 신임 국방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기 있었다. 그 사람의 육사 생도 생활은 물론 군 생활이 남다르게 의지가 곧고 올바른 생활로 일관해온 사람으로 알고 있다. 우리군이 위기를 겪고 있는 이 시기에 국방장관으로 선택되었다는 점은 다행일 수도 있으나 아니면 시대의 굴레를 혼자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면서 '북이 연평도 포격시 전투기로 북한 지역을 공격했어야 했다'고 단호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진 군, 그리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현정권 아래서 잘하면 역사에 남을 사람이 될 수 있으나 잘못하면 조기에 국방장관을 그만두어야 하는 비운의 국방장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호하지만 유연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 나라의 국방정책이 군사적인 측면만 고려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가의 안위를 모든 측면에서 판단하고 강력한 조언으로 국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결단만이 바람직할 것이다. 전략.전술가로 역사에 남은 재갈량도 그토록 나라를 위해 노력했으나 무능한 군주를 만나고 강력한 적을 만나 결국은 북진정책을 성공하지 못하고 한많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손자병법을 쓴 손문도 나라의 군주를 잘못 만나 그토록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으나 결국은 월나라 구천에게 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단호하고 결의에 찬 그의 얼굴에서 국민들은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전투기로 보복 공격은 자위권 행사 차원이라고 했다. 지금의 김태영 장관은 미군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어느 것이 맞는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단호한 응징을 못하고 모든 것을 미국에 의지하는 김태영 장관의 생각과 태도를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확전 방지'란 말이 사실이던지 아니던지 당장 피해를 입은 국민들의 생각으로는 대량보복을 했으면 하는 심정일 것이나, 나라를 생각해야 하는 지도층 입장에서는 확전으로 인해 전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도 서울과 개성 공단, 그리고 지금까지 애써 일군 경제 발전이 적의 포화로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일 것이다.

 

개성공단을 만들면서 적의 방사포들이 일부 후방으로 물러났으나, 만약 확전이 된다면 적은 무차별 포격으로 수도권을 때릴 것이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의 소식통에 의하면 북은 경기도 일원에 조만간 포격을 할 것이라 하여 김문수 경기지사가 어제 3군사령부를 방문하여 협의를 한 모양이다. 그들의 도발에 대해 우리들이 대응다운 대을 못하고 침묵하고 당하고 있는 이유를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또다시 그들은 도발을 자행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사실인지 아니지 몰라도 그들은 이번 연평도 포격 작전을 시행하면서 울산,포항 쪽 공업시설을 타격할 계획도 세웠다고 한다. 그들은 서북 5개 도서를 포함 동.서해안에 대한 공기부양정 등으로 기습상륙작전을 전개할 수도 있다.

 

이번 연평도 사태에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라면과 생필품 사재기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국민들이 적의 공격에 무감각해졌거나 안보에 대한 불감증 때문이 아닐까? 피할 곳도 도망갈 곳도 없는 서울 시민들은 어쩌면 무기력한 상태로 적의 위협에 무감각해졌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확전이 되어도 시민들은 피난갈 곳도 없을 뿐만 아니라 포격을 피해 잠시 대피하였다가 다시 아파트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청문회 과정에서 질의 하는 국회의원들의 턱과 빰은 살이쪄서 비만형의 얼굴로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탐욕스런 얼굴들이 대부분이고 저들은 수십억 재산을 가지고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10억도 안되는 김 후보자의 가락 시영 아파트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일부 군출신 국회의원들은 말은 그럴듯 하게 하지만 오늘의 군대가 이렇게 된것은 바로 그들이 현역 시절에 저질러진 결과가 바로 오늘의 군이 아닌가? 그들은 누구보다도 청치군인이었고 승진을 위해 권력자편에 서려고 발버둥 치던 졸장들이었다.  

 

그동안 종북. 친북 세력들이 국민들을 호도하였고 젊은이들에게 사상적인 희석작용을 전교조와 교육계를 통해 무던히도 노력하지 않았던가! 그런 북한이 무차별적인 포격으로 민간인까지 사망하는 엄청난 학살을 저질렀다는 점이 그들도 정신적인 혼란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토록 추앙하던 김정일 장군이 민간인을 포격하리라고는 생각못했을지도 모른다.

 

젊은이들이 해병대 지원자가 증가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나 한국의 귀신잡던 해병대는 이미 골병이 들어 있은지 오래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이라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 해병대는 휴전 후 이 나라 군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 5.16혁명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그후 월남전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귀신잡는 해병'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날렸다. 그러면서 해병대는 별도의 사령부를 가지고 전성기를 누리면서 국방부를 비롯한 타군 어디에서도 간섭이 불가능한 군대로 변모하였다. 예산 집행은 물론이요 해병대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으로 일종의 무소불위의 집단으로 변질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해병대는 내부적으로 부패하기 시작하였고 통제하기 어려운 무력집단이 되었다. 그런 해병대에 불안감을 느낀 박정권의 견제로 급기야는 1973년 10월 10일부로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해병대 사령부 해체의 원인은 박대통령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오랜 역사를 통해서도 항상 자행되어 왔던 바로 토사구팽의 사례로 창업 공신들은 정권의 존속을 위해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시대적으로 타고난 불운한 운명이었다.

 

 

 

 

 

아침 출근 차량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잇다. 

 

 

 

  

해병대 역사

 

대한민국 해병대(大韓民國 海兵隊, 영어: Republic of Korea Marine Corps/ROK Marines, ROKMC)는 국가 전략 기동군으로서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한다. 현재 예하에 상륙돌격장갑차(KAAVP7A1)같은 상륙장갑차와 3세대 K1 전차K9 자주포, 등의 기갑 전력을 갖췄으며, 영국 해병대와 같은 국가전략기동군으로서 발전을 추진하고 있다. 독도함도 이런 해병대의 미래 발전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건조되었다.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일 1949년 4월 15일
국가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종류 해병대
규모 약 27,000명 (2008)
명령 체계 Naval Jack of South Korea.svg 대한민국 해군
본부 경기도 화성
지휘관
문장

 

 

Foal Eagle 2007 훈련에서, 강습상륙함 USS Essex(LHD 2)에 탑승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한국 해병대 병사들

 

 

한국의 만리포 해변에서 실시된 Foal Eagle 2007 훈련에서, 한국 해병대가 미국 해병대의 CH-46E 헬리콥터에 탑승해 앉아 있다

 

 

한국의 만리포 해변에서 실시된 RSIO 와 Foal Eagle 2006 훈련에서, 미국 상륙모함 USS Juneau (LPD 10)에서 출발중인 한국 해병대의 수륙양용장갑차

 

 

한국의 만리포 해변에서 실시된 RSOI 와 Foal Eagle 2006 훈련에서, 상륙훈련중인 한국 해병대의 수륙양용장갑차

 

 

Foal Eagle 2007 훈련에서, 미국 상륙모함 USS Essex (LHD 2)에 탑승한 한국 해병대에게 구명조끼 입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미군 부사관

 

 

Foal Eagle 2007 훈련에서, 한미 해병대를 수송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수륙양용장갑차들

 

 

역사

1949년 4월 15일 진해에서 창설되었다. 초대 지휘관은 신현준 중령이었으며, 해군에서 옮겨온 장교 26명, 하사관 54명, 사병 300명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직후부터 한국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마거릿 히긴스 기자는 1950년 8월 23일자 뉴욕헤럴드트리뷴지에 한국 해병대가 "귀신을 잡을 정도로 용감했다"고 썼고, 그 이후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후 베트남 전쟁에도 파병되며 활약했지만, 1973년 10월 10일 해병대사령부의 해체와 함께 해군으로 통폐합되어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1987년 11월 1일 해병대사령부의 재창설로 오늘에 이른다. 현재는 쿠웨이트다이만 부대 경비를 위해 중대 병력이 파견되어 있다.

 

대한민국해병대의 병과

  • 보병과
  • 포병과
  • 기갑과
  • 공병과
  • 수송과
  • 해병통신과
  • 해병병기과
  • 해병보급과
  • 해병경리과
  • 해병정훈과
  • 해병헌병과

 

조직과 편성

국방개혁2020 계획에 의해 신속대응과 공중, 지상 기동작전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바꾸기 위해 해병 6 여단과 연평부대를 해체하는 대신 백령부대와 제주부대, 1 사단과 2 사단에 예하 항공대대를 신설하고, 사령부 예하로 정보단과 통신단을 정식으로 편제하기로 했다.

  • 해군 본부
    • 해병대 사령부
      • 해병 6 여단 (국방개혁2020에 따라 해체될 예정)
      • 해병 연평부대 (국방개혁2020에 따라 해체될 예정)
      • 해병 교육 훈련단
      • 해병 상륙 지원단
      • 해병 1 사단
        • 1 해병 전차 대대
        • 1 상륙 돌격 장갑차 대대
        • 1 해병 수색 대대
        • 1 공병 대대
        • 1 지원 대대
        • 2 해병 연대
        • 3 해병 연대
        • 7 해병 연대
        • 1 해병 포병 연대
      • 해병 2 사단
        • 2 해병 전차 대대
        • 2 상륙 돌격장갑차 대대
        • 2 해병 수색 대대
        • 2 공병 대대
        • 2 지원 대대
        • 1 해병 연대
        • 5 해병 연대
        • 8 해병 연대
        • 2 해병 포병 연대

 

 

 

  

 

 

 

 

외로운 가로등

 

새벽 거리

 

 

 

한 해병 출신이 쓴 해병대 사령부 해체와 재창설에 관한 이야기를 싣는다.

 

해병대 사령부 해체와 재창설 비화

 

해병대 사령부 해체

5.16 혁명 주체세력이었던 해병대가 사령부 해체라는 비극을 겪게 되자, 해병대에서는 박정권과 당시 대대적으로 창설된 특전사에 대한 증오심이 불같이 일어났다. 같은 주체 세력인 특전사와 쌍벽을 이루면서 주도권 쟁탈에 심각한 파열음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휴가나온 해병대 병사와 특전사 병사가 싸움질을 했다. 대우받던 해병대가 신생 특전사에 질 수 없다는 자존심과 혁명군으로 이름을 떨친 해병대로써 특전사와 벌인 주도권 경쟁이었다. 당시 양군에서는 휴가병이나 외출 병사가 상대방에게 맞고 돌아오면 무수하게 고초를 격었다고 한다.

 

 

 

 

 

새벽 골목길

 

 

 

5.16혁명

1961년 5월 16일, 쿠테타 모의가 발각이 되어 육군 30사단, 33사단, 공수특전단은 출동하지 못한 채 발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각각 만주 신경군관학교 1기와 6기인 해병대 제1사단장 김동하 장군과 해병대 제1여단장 김윤근 장군은 만주 신경군관학교 2기생인 박정희 소장을 지원하기 위해 김윤근 장군의 직접 지휘아래  해병대 제2연대를 출동시켜 서울로 진입한다.


김윤근 장군의 해병대 제1여단 제2연대의 출동으로 5.16은 성공했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김윤근 장군은 최고회의 최고위원, 김동하 장군은 최고회의 고문으로 참여하게 된다.


1963년 혁명 공약대로 민간에 정부를 이양하고 군은 본연에 위치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주장하던 김동하 장군 등의 주장대로 박정희는 2월 18일 민정에 불참할 것이라는 선언한다. 그리곤, 곧바로 3월 11일경 박정희와 김종필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김동하 장군 등은 반혁명사건으로 체포되고 3월 16일 박정희는 군정 4년 연장을 선언한다. 군정 연장 선언을 하기위한 군 내부의 숙청작업으로 소위 알래스카 토벌작전으로 언론에 명명된 사건이다.


모 책에 씌여진 김성은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4.19 이전부터  이승만 정권 시절에도 김동하 장군은 만주 신경군관학교 선후배들로 뭉쳐진 박정희 세력과 어울리며  김성은 사령관에게 군부쿠테타를 제의해 김성은 장군은 '이 들이 큰일 낼 사람들....'인 것을 미리 예견했다 한다.


이처럼 5.16을 주도했던 김동하 장군은 박정희에 의해 반혁명 사건으로 몰려 숙청을 당하고 노년에 미국에서 쓸쓸히 작고하기 직전에 "나 때문에 해병대가 해체 당했다"고 5.16에 해병대를 동원한 것을 후회햇다고 하였다.


김동하 장군의 이러한 인식이 정확한 것이며 솔직한 사실이었다.


이에 반하여 직접 지휘 아래 병력을 동원한 김윤근 장군은 해병대가 육군의 시기와 질시에 의해  해체되었다고 한다. 그 글에 보면 해병대 해체에 대한 김윤근 장군의 책임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토사구팽은 5.16 직후 부터 박정희는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혁명 동지와 혁명세력들을 하나 둘씩 모두 제거했다.

 

해병대 사령부 해체
그의 일환으로 월남전이 끝나고 해병대는 5.16 참가 세력으로 박정희에 의해 해체되고 해군에 흡수 통합되었다. 당시 군의 현대화 계획 및 전략군 사령부 해프닝, 청와대 직속의 특검 등은 궁극적으로 해병대를 해체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을 뿐이다. 당시 해병대 해체 이외에는 군의 현대화나 군조직 개편 등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이 반증하고 있다.


당시까지 해병대를 지원하며 잘 끌고왔던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헙법을 선포하고 장기집권 독재체제수립하면서 1973년 월남전이 끝나면서 효용 가치를 다한 해병대가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도록 그냥 놔두지를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급격이 증가한 육군의 방만해진 야전군 체제를 정비한다는 명분으로  육군은 손도 안대고 1973년 10월 10일부로 해병대 사령부는 급작스럽게 해체되어 강제로 해군에 흡수 통합시켰다.


이처럼 성장한 해병대 사령부는 수가 많은 육군 장성들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세력이었다. 허나 72년 10월 유신은 박정희에게 모든 권력을 주었고 그로인해 해병대는 해체되었다. 해병대 사령부 해체 이후로 해병대는 형편없이 힘없는 세력으로 전락했으며, 일개 공수부대 소장에 의해 짓밟히고 찢어져도 아무 말 못하고 눈치나 보는 힘없는 세력으로 전락했다. 군부에서 민간정부로 정권이 넘어왔어도 해병대는 5.16 쿠테타의 주역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 쓰고 키워줘야 할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 언제 들고 일어날 지 모르는 경계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새벽 거리

 

 

해병대 사령부 재창설

1973년 10월 10일에 해체를 당했던 해병대사령부가 6.29 민주화 선언이 있었던 그 해 11월 1일 부로 재창설이 된 것은 5공화국 말기에 단행한 그 민주화선언이 가져다 준 우연의 선물은 결코 아니었다.

10.26사태로 무너진 유신독재정권을 거쳐 신군부 집권의 긴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역대 제2참모차장과 해병참모부에서는 해병대사령부의 재창설을 위해 남모르는 궁리와 연구를 해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해병대사령부의 재창설을 위해 군복을 벗을 각오를 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은 제7대 해군본부 제2참모차장 성병문 해병중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휘권을 행사할 수가 없어 전력관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던 그는 전력 관리상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다음과 같은 7가지 불합리한 요소를 척출하여 그것을 지면에 정리했다.

1) 전문성의 현격한 차이로 인해 제기될수 밖에 없는 제반 문제점을 조목 조목 지적한 것 외에
2) 전시 군수지원 체계상의 중대한 문제점.
3) 통합이 초래한 혼성편성으로 인한 비능률.
4) 고위계급의 축소로 인해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진급 확률의 극소화로 인한 자질의 저하와 저능력의 심화.
5) 기술군과 체력군의 불구분으로 인한 교육 훈련의 약화 현상.
6)전통과 사명감의 상실과 사기의 저하.
7) 근무 장소가 다름으로 해서 초래되는 진급심사 등 인사관리상의 문제점

이러한 내용의 브리핑 자료가 정리되자 성병문 제2참모차장은 그것을 해병참모부 기획처장 김기홍 대령에게 건네주며 극비리에 10부를 인쇄해 오라고 했고, 지시를 받은 김처장은 마치 역적이 된 것 같은 두려운 마음으로 해군본부 인쇄소에서 종사하고 있는 5명의 해병대 출신 인쇄공들에게 퇴근시간 후 은밀히 부탁하여 인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쇄된 유인물을 건네 받을 때 성병문 중장은 만약에 무슨 일이 있을 경우 인쇄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이 지겠다고 말한 다음 10부 중 1부를 김처장에게 주며 굳은 표정으로 "세월이 흐른 후 역사의 증인이 돼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편 그렇게 하여 브리핑 자료를 마련했던 성병문 장군은 불편한 관계에 있는 해군본부의 동의 없이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접근하기가 어려운 군부의 실세들, 이를 테면 보안사령관과 함창의장 국방부장관 등의 군부요인을 보안 유지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가운데 끈덕진 노력 끝에 차례로 배방하여 인쇄물에 적힌 그 문제점들을 브리핑을 통해 조목 조목 설득력있게 설명함으로써 해병대사령부가 없어서는 안되겠다는 필요성을 공감하게 했고,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러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경주한 끝에 성병문 해병중장은 자신의 제2참모차장 임기를 1개월 앞둔 1986년 8월 전두환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인 이기백 국방장관이 전 대통령으로부터 해병대사령부를 재창설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합참의장으로 있을 때부터 여러 차례 성병문 장군의 공식적인 방문을 받았고, 또 성 장군의 브리핑에 공감을 했다고 말하는 전 국방장관 이기백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대통령에게 진언을 할 때 해병대사령부를 재창설 하게되면 대선 때 해병대의 현역과 예비역을 합쳐서 100만표는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농담을 곁들이긴 했지만 본시 기질에 포용력과 결단력이 있는 전두환 대통령이 그 시기에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임기 중 전투역량을 최대한 강화하여 전쟁공포로부터 국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그렇게 하여 국방부와 합참의 관련부서에서는 해병대사령부의 재창설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으나 다음과 같은 일로 인해 상당기간 지체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 박구일 해병중장이 제2참모차장으로 취임 한 후 해군본부에서는 합참의 지시에 따라 신편될 사령부 지휘체제 안을 복수로 작성하여 해병참모부에서 만든 1개 안과 함께 합참에 제출햇고, 합참 작전국에서는 합참에서 작성한 1개 안과 해군본부의 1개 안 및 해병참모부에서 만든 1개 안을 합참전략회의에 회부한 결과 해병참모부 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됨에 따라 그 안을 국방부 군무회의에 회부하게 되었는데, 그때 각 군의 작전 책임부서장이 전원 참석했던 그 전략회의에 참석하여 해병참모부 안을 직접 설명했던 당시의 해병참모부차장 박태복 예비역 준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러한 결과가 초래된 것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정만길 소장이 해병참모부 안이 가장 합리적이고 예산도 안들고 해병들의 사기도 진작 할 수 있는 안이라고 말하면서 "딴 것 볼 것 없다"는 식으로 해병참모부 안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군무회의에 회부된 그 안건은 어떤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최상화 해군 참모총장의 임기 중에는 매듭이 지어지지 않고 있다가 10대 해군 참모총장 김종호 대장이 추임한후 해결 됨으로써 13대 대통령 선거일을 45일 앞둔 1987년 11월 1일, 그러니까 1987년 7월 14일 이기백 국방장관의 뒤를 이은 정호용 장관이 취임한 지 109일만에 해병대사령부의 역사적인 재창설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해병대사령부 재창설 계획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거론이 된 신사령부의 명칭과 관련된 비화이다.

당시 해군 본부에서는 신 사령부의 명칭을 (1)해군상륙군사령부 (2)해군해병사령부 (3)해군해병상륙군사령부 등 3가지로 정하여 그 중의 하나를 택하게 할 계획이었으나 그 안건이 합참 전략회의 석상에서 거론될 때 의견제시를 요구받은 박구일 중장이 해군본부에서 제시해 놓은 3가지 명칭이 다 좋은 명칭이지만 '해병'이라고 하면 개개인을 뜻하지 조직체가 아니므로 '해병대'로 표현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 공감을 불러 일으켜 합참에서는 '해군 해병대 사령부'로 단일화 하여 장관 결재에 회부하자 정호용 국방장관은 해병대의 전통과 해병대 장병들의 사기를 고려해서 옛날 명칭 대로 '해병대사령부'로 고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재가를 받던 날 마지막 브리핑을 했던 박구일 제2참모차장은 브리핑이 끝난 후 "좋았어!"하며 흔쾌히 결재서류에 서명을 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별 지시를 받고 두 눈에 눈물이 핑돌만큼 감격했다고 한다.

첫째 공부를 많이 하여 상륙작전의 전략을 개발하라.

둘째 김포에 주둔하는 사단을 2년마다 교체하여 상륙전훈련을 시켜라. 그렇게 하지 않는 다면 육군과 같은 지상군 부대가 되고 말 것이다.

셋째 해병대 대원들이 싸움박질을 너무 많이 하지 않도록 해라.
적과 싸울 때 용감하게 싸워야 되지 않겠는가.

이상이 그 세가지 지시사항이었고, 이 지시사항을 전장병에게 교육을 통해 철저히 주지시키라고 했다고 하니 잔인하게 머리와 팔 다리를 죄다 잘라 없애 버리고 몸통만 남겨 놓은 박정희 대통령의 처사에 비한다면 참으로 감읍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박구일 장군은 그로부터 1주일 후 국방부에서 개최된 전군 지휘관회의 석상에서 국방부의 브리핑이 끝난 후의 건의사항 시간에 정호용 장관이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을때 얼마나 그 일을 고맙게 여기고 있었던지 "요새 170만의 현역과 예비역 해병가족들은 매일 청와대를 향해 큰 절을 올리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전두환 대통령을 위시한 전 군의 휘관이 참석해 있는 그 자리를 폭소의 도가니로 만들었 하며, 해군 제2참모차장으로 취임한 후 약 1년 간 불철주야로 노심초사했던 박구일 장군은 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그 3가지 지시사항을 브리핑 차트에 정리하여 40일 간에 걸친 예하부대 초도순시 때 철저한 교육으로 주지시켰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덧붙여둘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공정식 장군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즉 '해병대'라는 명칭을 되찾아 준 정호용 전 국방장관이 너무 고마워서 만약에 이번 국회의원 선거 때 정 장군이 대구에서 출마를 하게 되면 대구로 내려가서 인사도 하고 격려도 할 작정이라고 했는데, 만약에 그 때 정 장관이 '해병대'란 명칭을 되찾아 주지 않고 해군본부에서 정해 놓은  세가지 명칭 중의 하나를 택했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듯 필시 기쁨도 반감되고 신명도 반감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해병대사령부가 재창설된 날짜는 87년 11월 1일 이었다. 해병대가 수난을 당한 1973년 10월 1일 그 날로부터 14년 1개월 9일 만에 우리 해병가족들은 몽매지간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해병대'란 그 이름과 '해병대사령부'란 그 명칭을 소리 내어 불러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