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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새벽길을 달리며...1 본문
자전거를 타고 새벽길을 달리며...1
새벽 자전거 타기나 등산은 무척 피곤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오전 중에 졸음도 오고 피곤이 몰려 오기도 한다. 그러나 습관이 되면 시람의 신체 리등은 변하기 마련이다.
블로그에 백제의 역사를 올리기도 거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 한낱 마를 캐는 서동에 불과하던 무왕이 백제의 왕이 되었던 스토리가 재미있고 뭉클한 무언가를 느끼게 만든다. 무왕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선화공주와 얽힌 설화로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좀 황당하여 구전되어 오면서 변형된 듯하다.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백제 법왕의 딸로 판단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블로그의 백제의 역사를 참조하시길...
무왕이 왕위에 오른 과정은 고구려의 미천왕이나, 고려의 현종, 또 조선의 철종과 유사한 점이 많다. 고구려 미천왕은 고구려의 명장이었던 자신의 아버지 돌고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봉천왕에게 쫒겨 머슴, 소금장수, 거지 생활을 하면서 지내다가 창조리의 반정으로 봉상왕이 쫒겨나자 신하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를 계승한 경우다. 고려의 현종은 왕위를 차지하려던 목종의 모후 헌정왕후와 정부 김치양에게 쫒겨다니며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강조의 반정으로 왕으로 추대된 경우이며, 조선의 철종은 강화도에서 일자무식 촌부로 살다가 허수어비 왕이 필요했던 안동 김씨 정권에 의해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경우다.
무왕은 위덕왕의 서자이며, 이름은 장이다. 무왕이 즉위하자, 백제 조정은 수년간 계속되던 정쟁이 중단되고 안정을 찿기 시작했다. 그는 신라와 고구려에 빼앗긴 영토를 되찿는 작업에 착수하여 재위 3년(602년)에 장군 해수로 하여금 신라 아모산성(충북 음성 일대)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당시 중국은 수나라가 창업되면서 양견(문제)가 아들 양광(양제)에게 살해되고 중원을 통일하면서 주변국에게 위협이 시작되었다. 무왕은 수나라 양광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치자고 제의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가 백제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여 백성 3천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듬해 무왕은 다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치자는 제의를 했다. 수의 양광은 백제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611년 수나라가 11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는 동안 무왕은 사신을 보내 수나라와 고구려 공격을 협의했다. 한편 무왕은 느닷없이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여 장악하고 성주 찬덕을 죽였다. 이듬해 612년 수 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시작하자 백제 무왕은 섣불리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 결과에 따라 방향을 결정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수나라는 수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연전연패하자, 그 타격으로 인한 영향과 아울러 대수로 건설 등 내부적인 폭정으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붕괴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고구려와는 화친을 맺었다. 617년 태원 귀족 이연이 반군에 가담하였고, 618년 봄 양광이 강도에서 피살됨으로써 수나라는 몰락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무왕은 616년 10월 달솔 백기로 하여금 신라 모산성을 공격하였고, 2년 뒤 신라는 백제가 차지했던 모잠성을 공격하여 성주 해론을 전사시켰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백제는 623년 신라의 늑노현을 공격하였고, 624년에는 속함, 앵잠 등 6개 서을 동시에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626년에는 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여 성주 동소를 살해하였고, 627년에는 장군 사걸을 보내 신라 서부 변경 두성을 함락시켰다.
무왕이 본격적으로 신라에 대한 전면전을 선언하고 대군을 집결시키자, 신라의 진평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백제도 조카 복신을 당에 보내 당의 의중을 살폈다. 당 태종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신을 모두 불러놓고 서로 간에 전쟁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무왕은 표문을 올려 전쟁을 중단할 것을 약속했으나, 628년 신라의 가잠성을 다시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무왕은 한동안 무력 동원을 자제하고 내치에 힘을 쏟았다.
629년에는 당에 사신을 보내 신뢰를 다시 회복하였고, 630년에는 사비성을 증축하였고, 632년에는 장남 의자를 태자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그해 2월 신라에 대한 공략을 재개하였고, 633년 8월에는 신라 서곡성을 공격하여 13일 만에 함락시켰고, 636년 5월에는 장군 우소로 하여금 신라 독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여 장군 우소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이후 무왕은 더 이상 신라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였고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한 백제인의 사기가 올랐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어 사냥이나 잔치를 베풀며 만년을 즐기면서 불교에 대해서도 심취하기도 하고 사치스런 시설과 주연을 즐겼다.
당나라와도 사이가 좋아 서로 사신을 교환하면서 선물을 주고 받으며 왕자들을 당나라 태학에 입학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641년 3월, 그는 40여 년의 치세를 뒤로 하고 역동적인 삶을 마감하였다.
그는 비록 한낱 마를 캐는 아이로 살다가 얼떨결에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지략이 뛰어나고 판단력이 출중하여 국제 관계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기량도 보였다. 또한 물러날 때와 공격할 때를 능히 알아 영토 회복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유의 친화력과 인간미로 신하들을 다독거려 정쟁을 종식시키는 역활도 하였다. 이는 한없이 추락하던 백제의 위상을 드높이는 결과를 초래했으니 그는 과연 백제의 성군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무왕의 치세를 살펴보면서 어떠한 사람이던지 자신의 그릇이 있고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이 있음을 알았다. 인종, 성별, 출신을 가리지 않고 능력이 잇다면 누구던지 발탁하는 지혜로운 인사만이 지금같이 험난한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새벽 여명이 서서히 동쪽 하늘을 밝혀오고 있다. 아파트는 아직 대부분 불꺼진 상태로 잠들어 있는 상태이다. 이런 평화로운 서울의 밤하늘에 적의 방사포와 장거리포가 날아온다면 그때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 그들이 그러한 불장난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대처할 방책은 있는가? 때를 놓치고 기회를 놓치고 변명하고 발뺌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매번 뒷북만 치고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뚜렷한 주관도 없고 의지도 없고 눈치보기에만 여념이 없다면 그 정권을 국민들이 신뢰할리가 없다. 수도 서울이 적의 포격을 받는다면 그 때도 우유부단한 태도로 확전을 방지하라 할 것인가? 재갈량같은 전략가가 없는 지도자의 주변도 안타까울 뿐이다. 탈북자들의 말에 의하면 유사시 보복타격시엔 무차별적인 타격은 기본이요 적의 병력이나 장비를 손상시키는 것은 물론 주석궁과 김일성 동상, 기념관 등 북한 정권이 가장 신성시 하는 아킬레스건을 타격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일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 엇그제 벌어졌지만 그 후유증은 엄청나다. 정부와 군에 대한 불신에서 외교.안보라인의 무능과 무책임한 태도를 보면서, 현재 국민들의 80% 이상이 안보에 대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군미필자가 반드시 무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안보라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국에는 군대갔다오면 출세를 할 수 없다는 결론인가? 미국의 한 언론에서 비밀로 분류된 최근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한국의 외교.안보라인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극을 달리고 있다. 미국에 아첨하는 그들의 말에는 국가의 비밀도 없고 전략도 없는 오로지 환상에 젖은 시각으로 대북 정책과 외교 정책을 바라보고 있다는 결론이며 외교적인 언사도 아닌 저차원적인 원색적인 평가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국가안보상 내부적인 치부를 그대로 송두리채 노출하는 유치함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에겐 책략가도 없고 전략가도 없고 오로지 미국에 아첨하는 졸부들 뿐인가?
연평도에 최신 무기가 들어간다고 반대하는 사람, 찬성하는 사람 가지각색이다. 모두가 전략가요 국방장관이다. 해박해 보이지만 짧은 지식으로 입만 살아서 글로 쓰고 논조를 펴고 있다. 여당 고위직 사람들이 쓰레기 통에서 보온통을 적의 포탄으로 오인하는 추태를 보이는가 하면, 서울시 의회는 빚내어서 무상급식을 하자면서 단상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나라다.
군은 군대로 한미훈련이다, 포사격 훈련이다 부산을 떨고 있으며, 종합적인 서북 5개 도서 대북방어 전략이 부재하고 단편적인 땜질식 대응책이 난무하고 있다. 적의 어떠한 공격에도 서북 도서를 사수하겠다면 근본적인 전략개념이 수립되어야 한다. 적의 포병 공격을 포함한 화생생화학무기 공격, 상륙작전까지 완벽한 방어태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상 노출의 장비 배치는 무용지물이다. 국방부와 함참은 대만의 금문도처럼 기본적인 개념정립부터 다시 수립하여 전력증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아군의 자주포 대응사격에 대한 적의 피해 규모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탄착지점이 적의 진지가 아닌 논밭에 떨어진 화구가 보이고 그 규모도 조그만한 웅덩이에 불과하다. 80발 중 45발을 제외한 대부분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자주포의 피해 위력에 대해서도 의문이며 사격능력과 장비능력에도 의문이다. 과연 군이 말하는 그만한 피해를 발휘한다면 적은 막대한 피해를 당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자주포에 대한 성능 검사를 재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새벽 여명은 밝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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