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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 : 백제의 역사 32 (제22대 문주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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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 : 백제의 역사 32 (제22대 문주왕)

두바퀴인생 2010. 11. 29. 02:12

 

 

 

한국의 역사 86 : 백제의 역사 32 (제22대 문주왕)

 

제22대 문주왕

문주왕(文周王, ? ~477년, 재위: 475년~477년)은 백제의 제22대 왕이다. 문주(汶洲)라고도 하며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는 개로왕의 아우이다. 일본서기 유랴쿠기(雄略紀)에는 개로왕의 모제(母弟, 동생)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은 남제서(南齊書) 백제전와, 양서(梁書)에서는 모도(牟都)로 기록되어있고, 송서(宋書) 백제전에는 여도(餘都)로 기록되었다. 즉위 전에, 부왕(父王) 개로왕을 도와 상좌평(上佐平)을 지냈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
웅진 (476년 ~ 538년
)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생애

475년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한성을 공격하자 문주는 개로왕의 명을 받아 신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하였다. 군사 1만명과 함께 돌아왔으나 이미 고구려군은 물러간 뒤였다. 그러나 한성은 모두 파괴되었다. 왕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475년 음력 10월,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겼다.

 

부여족 계통의 지배세력들은 남쪽의 마한 세력에게 도전을 받고 귀족 통제에 실패한 문주왕은 결국 477년 당시 정권을 장악했던 병권좌평 해구가 보낸 자객에게 죽임을 당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품이 부드러워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고 백성 또한 그를 사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계

  • 부왕 혹은 형 : 개로왕
  • 왕후 : 왕후 곽씨(王后 郭氏)
  • 모후 : ?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

 

 

 

 

 

 

제22대 문주왕 실록

(?~서기 477년, 재위:서기 475년 9월~ 477년 9월, 2년)

 

위기의 백제와 살얼음판 위의 문주왕

문주(文周)왕은 비유왕의 둘째 아들이며, 개로왕의 아우이다.

 

상좌평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문주는 475년 9월에 장수왕이 정병 3만을 이끌고 한성을 압박해왔을 때, 개로왕으로부터 특명을 받고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려 갔다. 개로왕은 왕자들과 더불어 한성을 지킬 것을 맹세하면서, 문주에게는 신라로 가서 원군을 얻어오도록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문주는 무장 목협만취와 조미걸취의 보호를 받으며 서라벌로 가서 신라의 자비왕에게 병력 1만을 얻어 한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땐, 한성은 쑥대밭이 되었고, 개로왕도 고구려군에게 잡혀 처형된 뒤였다.

 

비록 한성에선 고구려군이 떠나고 없었지만, 궁궐은 불타고, 성곽은 무너져 도저히 왕도로 사용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게다가 한강 건너편에 포진하고 있던 고구려군이 언제 또다시 강을 건너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문주왕은 별 수 없이 국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겨야 했다. 이로써 온조왕 13년(서기전 6년) 이후 약 500년 동안 지속되었던 한성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음력 10월, 쌀쌀한 초겨울 날씨 속에 문주왕은 남쪽으로 행군하여 백강(금강)을 건너 웅진성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웅진에는 궁궐도 없고, 종묘도 마련되지 않았기에 그는 행궁 생활을 하면서 궁궐이 수축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문주왕은 이듬해 대두산성을 수축하여 그 곳으로 한강 이북의 민가를 대거 이동시켰다. 3월에는 남송에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고구려가 뱃길을 막는 바람에 보내지 못했다. 이는 백제 수군이 고구려 수군에게 완전히 제압당하고 있는 상태였다는 뜻이다.

 

문주왕은 도읍을 옮기는 극단적인 조치로 왕실을 유지하긴 했지만, 백제 왕실은 일대 몰락 위기에 몰려 있었다. 백성들은 부여 씨 왕실에 대한 믿음을 져버렸고, 조정 대신들 역시 왕실을 깔보고 있었다. 특히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외척 해씨 세력은 왕권을 능가하는 힘을 행사하면서 기강을 문란케 했다. 거기다가 곳곳에서 도적들이 일어나 설쳐댔고, 대신들 중에는 도적과 결탁하여 사익을 챙기는 자도 있었다.

 

476년 8월, 해씨 세력의 핵심인 해구가 병관좌평에 임명되면서부터 왕권은 한층 유명무실해졌고, 권력은 모두 해구에게 집중되었다.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재위 3년(477년) 2월에 가까스로 궁실이 마련되어 문주왕은 궁궐에 기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문주왕은 아우 곤지를 내신좌평에 임명해 해씨 세력의 독주를 견제하고, 맏아들 임걸(삼근왕)을 태자에 책봉해 국가 기강을 바로 잡으려 했다.

 

그러나 해씨 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내신좌평에 오른 곤지가 조정을 추스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시 상황은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으나, <삼국사기>는 이렇게 은유하고 있다.

'3년 5월, 검은 용이 웅진에 나타났다.'

 

'검은 용'이란 곧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근왕 세력의 핵심인 곤지와 해구가 한판 사움을 벌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결과는 해구의 승리였다.

 

두 달 뒤인 7월에 곤지는 죽었다. 그 내막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해구와의 다툼에서 패배하여 살해되었을 것이다.

 

다음 기사는 그런 사실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3년 8월, 병관좌평 해구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여, 법 질서를 문란하게 하며, 임금을 경시하였으나, 왕은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문주왕은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해구에겐 여전히 문주왕이 위험스런 존재였다.  문주왕은 어떻게 해서든 왕권을 되찿으려 했을 것이고, 때문에 해구를 제거할 방도를 모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제거된 쪽은 문주왕이었다. 477년(재위 3년) 9월 문주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 근처에서 하루를 묵게 되자, 해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적들을 시켜 문주왕을 살해함으로써 권력을 독식해 버렸던 것이다.

 

문주왕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장남 삼근왕이 왕위를 이었다는 사실만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