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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4 : 백제의 역사 30 (제20대 비유왕) 본문
한국의 역사 84 : 백제의 역사 30 (제20대 비유왕)
비유왕(毗有王, ?~455년, 재위: 427년~455년)은 백제의 제20대 왕이다. 이름은 《송서 이만전 백제조(宋書 夷蠻傳 百濟條)》에서는 여비(餘毗)로 나와있다. 구이신왕(久爾辛王)의 맏아들이다. 《삼국사기》는 전지왕의 서자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용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좋았다고 한다.
기원전 18년 ~ 66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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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 |
공용어 | 고대 한국어 |
수도 |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
정치체제 | 군주제 |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
76만호(3,800,000명 추정) |
성립 | 기원전 18년 |
멸망 | 660년 |
초대 군주 |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
최후 군주 | 의자왕 641년 ~ 660년 |
성립 이전 | 마한, 부여 |
해체 이후 | 신라 |
주석 |
|
생애
다음 430년에는 전지왕에게 주었던 작호를 계승하는 것이 허락되어<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으로 책봉 되었다.
433년 신라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요청해, 선물의 교환을 통해서 양국의 수호가 성립했다.
이와 같이 중국 남조 송나라, 신라, 왜국의 협조 체제를 가지고, 북조 북위와 연결한 고구려에 대항하는 태세로 만들었지만,
455년(9월 이후로 보인다)에 사망할 때까지, 비유왕의 대에 있어서는 전란 기사는 보지 못하고 끝났다.
왕의 죽음의 직후(455년 10월)에 고구려가 백제에 침입했을 때에는, 신라에서는 백제를 구원하는 군이 파견되어 비유왕이 목표로 하고 있던 대고구려의 체제는 성공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 왕호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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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온조왕(溫祚王) | 온조(溫祚) |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 |
2 | 다루왕(多婁王) | 다루(多婁) | 기원후 28년 ~ 77년 | 온조왕의 아들. | |
3 | 기루왕(己婁王) | 기루(己婁) | 77년 ~ 128년 | 다루왕의 아들. | |
4 | 개루왕(蓋婁王) | 개루(蓋婁) | 128년 ~ 166년 | 기루왕의 아들. | |
5 | 초고왕(肖古王) | 초고(肖古) | 166년 ~ 214년 |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 |
6 | 구수왕(仇首王) | 구수(仇首) | 214년 ~ 234년 |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 |
7 | 사반왕(沙伴王) | 사반(沙伴) | 234년 |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 |
8 | 고이왕(古爾王) |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 234년 ~ 286년 | 개루왕의 차남. | |
9 | 책계왕(責稽王) | 책계(責稽) | 286년 ~ 298년 |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 |
10 | 분서왕(汾西王) | 분서(汾西) | 298년 ~ 304년 | 책계왕의 아들. | |
11 | 비류왕(比流王) | 비류(比流) | 304년 ~ 344년 | 구수왕의 차남. | |
12 | 계왕(契王) | 계(契) | 344년 ~ 346년 | 분서왕의 아들. | |
13 | 근초고왕(近肖古王) | 초고(肖古), 여구(餘句) | 346년 ~ 375년 |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 |
14 | 근구수왕(近仇首王) | 구수(仇首), 수(須) | 375년 ~ 384년 | 근초고왕의 아들. | |
15 | 침류왕(枕流王) | 침류(枕流) | 384년 ~ 385년 | 근구수왕의 장남. | |
16 | 진사왕(辰斯王) | 진사(辰斯) | 385년 ~ 392년 | 근구수왕의 차남. | |
17 | 아신왕(阿莘王) | 아신(阿莘) | 392년 ~ 405년 | 침류왕의 아들. | |
18 | 전지왕(腆支王) |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 405년 ~ 420년 | 아신왕의 아들. | |
19 | 구이신왕(久爾辛王) | 구이신(久爾辛) | 420년 ~ 427년 | 전지왕의 아들. | |
20 | 비유왕(毗有王) | 비유(毗有), 여비(餘毗) | 427년 ~ 455년 | 구이신왕의 아들. | |
21 | 개로왕(蓋鹵王) | 경사(慶司), 여경(餘慶) | 455년 ~ 475년 |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 |
22 | 문주왕(文周王) | 모도(牟都), 여도(餘都) | 475년 ~ 477년 |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 |
23 | 삼근왕(三斤王) | 삼근(三斤) | 477년 ~ 479년 | 문주왕의 아들. | |
24 | 동성왕(東城王) | 동성왕 |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 479년 ~ 501년 |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
25 | 무령왕(武寧王) | 무령왕 | 사마(斯麻), 여융(餘隆) | 501년 ~ 523년 |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
26 | 성왕(聖王) | 성왕 | 명농(明襛) | 523년 ~ 554년 | 무령왕의 아들. |
27 | 위덕왕(威德王) | 위덕왕 | 창(昌) | 554년 ~ 598년 | 성왕의 장남. |
28 | 혜왕(惠王) | 혜왕 | 계(季) | 598년 ~ 599년 | 성왕의 차남. |
29 | 법왕(法王) | 법왕 | 선(宣), 효순(孝順) | 599년 ~ 600년 | 혜왕의 아들. |
30 | 무왕(武王) | 무왕 | 장(璋), 서동 | 600년 ~ 641년 |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
31 | 의자왕(義慈王) | 의자 | 641년 ~ 660년 | 무왕의 아들. |
제20대 비유왕 실록
(?~서기 455년, 재위:서기 427년 12월~ 455년 9월, 27년 9개월)
비유왕의 전방위 외교와 나제동맹
비유(毗有)왕은 전지왕의 둘째 아들이며, 왕후 해씨 소생이다. 전지왕이 죽은 후 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자, 그의 모후 팔수태후가 정권을 장악하고, 임나의 권력자 목만치를 불러들여 조정을 혼란케 하였다. 이에 비유왕은 외척인 해씨 세력의 힘에 의지하여 목만치를 제거하고, 그 와중에 죽은 구이신왕을 이어 427년 12월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그를 구이왕의 맏아들이거나 전지왕의 서자라고 쓰고 있으나, 구이왕이 23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고, 비유왕은 즉위 당시 성년의 나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전지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즉위 전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언변이 좋아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며, 인재를 중시했다고 한다.
비유왕은 즉위 한 지 불과 두 달 뒤에 전국을 순행하면서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는 조정의 혼란으로 어수선해진 민심을 달래고, 반발 세력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그 무렵, 왜왕 응신천황이 사신을 보내왔는데, 수행자가 무려 50명이나 되는 대규모 행렬이었다. 응신천황이 비유왕에게 이토록 많은 사신을 보내온 것은 팔수태후의 일로 악화된 양국간의 관계를 만회하고, 자신의 딸 필수태후를 왜국으로 대려가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서기> 응신천황 39년(428년) 2월 기사에 '백제의 직지왕(전지왕)이 동생 신제도원을 보내어 봉사케 했으며, 신제도원은 일곱 명의 부녀와 함께 들어왔다.'는 내용이 있다. 응신천황 39년은 비유왕 2년이므로 전지왕이 그녀를 보냈다는 내용은 옳지 않겠지만, 그녀가 전지왕의 여동생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비유왕이 즉위하자, 왜국에서는 팔수태후의 환국을 요청했을 것이고, 비유왕은 왜의 청을 들어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 팔수태후와 친분이 있던 귀족들도 생명 보전을 위해 그녀를 따라 왜로 갔을 것이고, 신제도원과 일곱 명의 부녀란 바로 그들일 것이다.
비유왕 재위 3년(429년)에 남송에 사신을 보내고 이듬해에 전지왕의 작위였던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 책봉받음으로써 국제 무대에서 정식으로 백제 왕으로 대접받기에 이른다.
비유왕은 433년에는 신라의 눌지왕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하여 성립시키는데, 백제의 이런 조치는 당시 국제관계가 매우 미묘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당시 신라는 내물 이사금 이래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었고, 눌지왕 8년(424년)에도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수교를 맺은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아우 미사흔이 탈출해 옴으로써 왜와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고, 재위 15년(430년)에는 왜병이 동해안을 침략하여 유린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와 신라가 동맹 관계를 맺은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 왜 4국간의 역학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근초고왕에 의해 사망한 이래 백제를 적국으로 규정하였고, 신라는 백제와 협공을 막기 위해 고구려에 볼모를 보내면서까지 굴욕적인 수교 관계를 지속해왔다. 때문에 신라와 백제는 서로 적대관계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양국이 갑자기 화친을 제의하고 동맹을 맺은 까닭은 무엇일까? 신라가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는 것은 고구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오히려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남하정책을 감행하고 있었는데,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끼고 백제와 함께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백제 또한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고, 또한 팔수태후 사건으로 왜와의 관계가 소원해졌으므로 왜의 눈치를 볼 이유도 없었다. 어쨋든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역학 관계에 크다란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신라가 회친제의를 받아들인 이후로 비유왕은 양국 관계를 밀착시키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434년 2월에 좋은 말 두 필을 신라에 보냈고, 9월에는 다시 흰 매를 보냈다. 그러자 신라도 황금과 구슬로 답례를 하였다.
두 나라가 급격히 가까워 지고 있는 가운데 왜가 신라를 침입했다. 왜는 440년에 신라의 남쪽과 동쪽을 침입하여 민가를 약탈하였으나, 이 때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444년의 침입은 금성을 포위할 정도로 거센 것이었으나, 식량이 떨어져 돌아가야 했다. 이 때 식량이 떨어졌다는 것은 백제가 왜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백제는 왜를 지원하지 않고 방관함으로써 묵시적으로 신라를 도운 것이다.
이렇듯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가 확고하게 굳어지자,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리고 450년 7월에 고구려 장수가 실직(삼척)벌에서 사냥하는 것을 하슬라(강릉) 성주가 습격하여 죽이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신라와 고구려는 완전히 적대 관게로 돌아섰다.
고구려 장수왕은 수하 장수가 신라군에 의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사신을 눌지왕에게 보내 크게 책망했다. 그리고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했다. 눌지왕은 일단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장수왕에게 사과하고 사태를 무마시켰다. 하지만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회복될 기미는 없었다.
고구려는 454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고, 455년에는 백제를 침범했다. 신라 침입에 이어 백제를 공격한 것은 아마도 백제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가 백제를 치자, 이번에는 신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함으로써 양국은 동맹 관계의 견실함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렇듯 백제와 신라의 동맹 관계가 결실을 맺고 있는 가운데, 비유왕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그의 재위 29년(454년) 기사에서 '별이 비처럼 떨어지고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두 발 정도 되었다.'는 내용으로 백제 조정에 불길한 일이 일어났음을 암시하고 있고, 이듬해 9월에는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시 구름과 안개가 덮여 어두워지자 날아갔다.'는 말로 반란이 일어났음을 시사했으며, 바로 그 달에 비유왕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유왕의 급작스런 죽음은 아무래도 한강에 나타난 '검은 용'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즉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는 기록을 한성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비유왕은 그 검은 용에 의해 죽었다는 뜻이다. 또 반란군 우두머리를 '검은 용'으로 표현한 점으로 미뤄 비유왕을 죽인 반란군은 한동안 조정을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개로왕 21년 기사에 '선왕(비유왕)의 해골이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라는 기록이 있는 것도 정변 중에 비유왕이 살해되었음을 방증해주고 있다. 즉 비유왕은 반란군에 의해 죽었고, 반란군이 그의 시신을 아무 곳에나 묻어버린 까닭에 비유왕의 시신은 가매장 된 채로 들판에 묻혀 있다가 개로왕 21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왕릉으로 조성된다.
비유왕이 455년 9월에 죽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해 10월에 있었던 고구려의 침입은 비유왕의 죽음을 틈타 이뤄진 야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나제 동맹군의 수비진을 뚫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비유왕이 전방위 외교 성과는 그의 죽음 뒤에 더욱 빛을 발하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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