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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 : 백제의 역사 31 (제21대 개로왕)

두바퀴인생 2010. 11. 28. 03:07

 

 

 

한국의 역사 85 : 백제의 역사 31 (제21대 개로왕)

 

제21대 개로왕

개로왕(蓋鹵王, ? ~475년, 재위: 455년~475년)은 백제의 제21대 왕이다. 이름은 경사(慶司) 또는 여경(餘慶)이며 근개루왕(近蓋婁王)으로도 불린다. 비유왕의 맏아들이다. 바둑을 잘 두기로 유명하였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
웅진 (476년 ~ 538년
)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생애

개로왕은 고구려를 선제 공격하고, 청목령과 같은 군사 요충지에는 방어를 굳건히 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송나라에 대해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서로의 관계를 재확인 하였고, 나제동맹도 지켜나갔다.

 

472년에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에 군사를 내어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북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고구려의 장수왕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불안정하긴 했지만 개로왕은 밖으로는 정치에 안정을 기하는데 노력을 했다. 하지만 내정에는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개로왕은 왕족이 중심이 된 집권체제를 추구했지만 이는 되려 중앙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으며, 지배층의 분열을 일으켰다. 이것은 후에 문주왕이 귀족인 해구에게 살해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무리한 토목 공사와 권위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에 충분하였으며, 이는 《삼국사기》의 도미 설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밖에도 고구려의 첩자인 도림에 의해 실책을 펼치게 되는데, 이 또한 무리한 공사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결국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고구려 군사들에게 붙잡혀 아차산성 근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라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를 죽인 재증걸루고이만년은 본래 백제의 귀족으로 지배층의 분열로 고구려에 망명간 이들이었다고 한다.

 

죽음

위서》의 백제전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장수왕풍홍을 살해하고 북위의 풍태후와 불편한 관계에 빠져 있다고 판단을 하였던 개로왕은 사신을 통해 북위고구려고국원왕을 '쇠'로 묘사한 고구려를 비방한 국서를 보내었다. 이 사실을 간파한 장수왕은 475년 9월 경 고구려군 3만과 함께 백제의 수도 한성으로 친정했다. 단번에 한성을 포위하고 4개의 군대로 분할하여 총 공격한 고구려는 먼저 북성을 함락하고, 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몽촌토성한성을 공격하였다. 성이 함락에 초 읽기 하자, 개로왕은 수십의 기병과 함께 성을 탈출하였다. 이 때 고구려군의 고이만년과 재증걸루에게 발각되어 고구려군에게 체포 당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조는 사로잡힌 개로왕에게 걸루 등이 절한 다음에 얼굴을 향해 3회 가량 침을 뱉는 치욕을 주었고, 아차산 아래에서 죽였다고 전한다. 《일본서기》 웅략기 5년 조에 따르면, 고구려군에 위례를 잃고 국왕 및 대후의 왕손들이 모두 죽임 당하였다고 전한다. 이어서 20년 조는 이 때 백제가 멸망하였다고 전한다.

 

도미 설화

백제 사람 도미의 아내는 얼굴이 아름답고 절개가 있어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이 소문을 들은 개루왕은 도미의 아내를 얻기 위해 도미와 내기에서 이겨 얻으러 왔다고 속이기도 하고 옥반지를 줘서 유혹하고 부하를 시켜 데려오게 했지만, 그는 계속 도미를 사랑했고 개로왕에게는 월경 때문에 몸이 더럽다는 핑계로 몰래 도망쳐 나왔다. 개루왕은 결국 도미의 눈을 뽑고 먼 곳으로 버렸다. 도미의 아내는 도미가 그리워 강가에서 울고 있었는데, 한 배가 떠밀려 왔고, 그는 배를 타고 어떤 외딴 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곳에서 도미를 발견하고 둘은 고구려로 도망가 서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설화를 개루왕때의 이야기라고 견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히 모순이 많다. 그 이유는 당시 개루왕 시대의 백제 주변엔 말갈이 둘러싸 있어서 고구려로 직접 도망가기엔 거의 모험에 가까웠고, 설령 배를 타고 간다 해도 황해를 건너서 고구려로 도착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봐야 한다. 거기에 개루왕의 성격으로 봐서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할 왕이 아니었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도미 설화에 나오는 지명 대부분이 개루왕 시대보다 훨씬 후에야 나타나는 지명이름이기 때문이라는 점 (도미 설화 중도에 나오는 지명 이름인 산산(蒜山)이 주요 예로, 산산이란 한자 지명은 개로왕 이전에도 아예 한자 지명으로 불리지 않았고, 고유 지명인 매시달이란 이름으로 불렸었다)등은 개루왕이 아니라 개로왕 때의 이야기임을 거의 반증해준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

 

 

 

 

 

 

제21대 개로왕 실록

(?~서기 475년, 재위:서기 455년 9월~ 475년 9월, 20년)

 

개로왕의 파란만장한 삶과 한성시대의 종말

개로(蓋鹵)왕은 비유왕의 맏아들로 근개루왕으로도 불리었으며, 이름은 경사다. 455년 9월에 비유왕이 정변으로 살해되자 백제 조정은 격심한 혼란을 겪었고, 그 와중에 개로왕이 즉위했다.

 

개로왕의 즉위 당시 백제는 여전히 정변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비유왕을 살해한 반란군은 그의 시신을 방패로 삼아 한성을 장악한 상태였다. 선왕의 시신을 빼앗긴  개로왕은 함부로 반군을 제압하지도 못했다.

 

<삼국사기> 개로왕 치세 기사는 재위 14년부터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즉위시부터 재위 14년까지는 개로왕이 정식 왕권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백제는 개로왕 즉위시부터 십여 년간 내분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개로왕 즉위년 12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는데, 이 때 신라가 원군을 파견하여 고구려군을 막아낸 사실에서도 백제의 내분이 매우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한 것은  이 사건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전혀 언급이 없고, 신라본기에만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백제 땅을 침범한 고구려군을 막아낸 군대가 백제군이 아니라 신라군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당시 백제는 내분때문에 고구려군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고, 그래서 동맹군인 신라군이 대신 고구려군을 상대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라군이 자기 땡도 아닌 백제 땅을 지킨 것은 동맹 관계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고구려가 차지하려 했던 백제 땅이 신라 공략의 교두보 역활을 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엿기 때문일 것이다.

 

십 년 이상 지속되던 백제의 분쟁은 결국 개로왕의 승리로 끝나고, 그 때서야 개로왕은 가까스로 한성에 입성하여 정식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개로왕이 한성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반란군에 가담했던 여러 장수들은 고구려로 달아난 듯하다. 후에 개로왕을 생포하는 과정에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그들 중 일부로 판단된다.

 

개로왕이 왕권을 회복하던 무렵인 468년 2월에 고구려는 말갈 병력 1만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실직(삼척)성을 빼앗았다. 이에 위협을 느낀 개로왕은 이듬해 8월에 고구려 남쪽 변경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고구려의 반격을 의식한 개로왕은 그해 10월에 쌍현성을 수축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세워 침략에 대비했다.

 

당시 고구려는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한 북위와 한동안 신경전을 벌이다가 관계를 회복한 상태였다. 북위는 466년에 고구려의 공주를 위 왕에게 시집보낼 것을 요청했고, 고구려는 장수왕의 딸이 이미 시집간 상태라 응할 수 없어 장수왕의 아우 승평을 딸을 대신 보내기로 했다. 북위는 북연과 혼인 관계를 맺은 후 북연을 몰락시킨 전례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고구려 조정에서는 북위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북연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북위와의 혼인을 강력하게 반대하느 신하들이 있었다. 그들은 북위가 혼인 관계를 맺자고 하는 것은 지형을 탐색하기 위한 수작이라고 주장했고, 장수왕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혼인시키기로 한 승평의 딸이 죽었다고 둘러댔다. 그러자북위에서는 종실의 딸이라도 달라고 하였고, 장수왕은 대답을 차일피일 미루며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북위의 왕이 교체되어 횐 문제는 무효화되었다. 덕분에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원만하게 되었고, 고구려는 그런 상황을 맞아 신라와 백제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던 개로왕은 방책을 강구하던 끝에 재위 18년(472년)에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협공을 가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개로왕의 제의는 북위로서도 입맛이 당기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당장 고구려를 공격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그렇지만 백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개로왕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대의 계책이 나의 뜻과 맞으니 큰 군사가 토벌의 길을 떠나는 것도 장차 먼 일이라 할 수 없다. 그대는 미리 군사를 정돈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며, 때에 맞춰 사신을 보내 그들의 실정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출동하는 날, 그대가 향도의 선두가 된다면 승리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고구려의 방해로 북위의 사신은 백제로 가지 못했고, 후에 바닷길을 이용하여 백제의 한성으로 직접 가려 하였으나, 이 때에도 풍랑을 만나 백제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위 왕의 편지는 백제에 도달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개로왕은 북위가 호응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더 이상은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그 무렵, 고구려에선 백제 공략을 위한 은밀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 예비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내용인즉, 한성을 공격하기 전에 백제의 국력을 먼저 소모시킬 필요가 있다는 판단 아래 첩자를 파견하여 개로왕이 많은 백성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이도록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장수왕은 첩자 노릇을 할 만한 사람을 물색하고 있던 중, 승려 도림(道琳)이 나섰다. 장수왕이 도림의 능력을 알아보고 기꺼이 일을 맡기자, 도림은 죄를 짓고 도망한 것으로 가장하여 백제에 잠입했다.

 

개로왕은 바둑과 장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바둑의 고수였던 도림은 그 점을 이용하여 개로왕에게 접근했다. 도림의 바둑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을 안 개로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엿고, 그런 와중에 도림은 개로왕을 부추겨 비유왕의 능을 조성케 하고, 궁실과 성을 새로 짓게 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백성이 징발되고 국고는 텅 비어가고 있는 가운데, 도림은 고구려로 돌아가 그 소식을 알렸고, 장수왕은 475년 9월 병력 3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급습했다.

 

고구려군의 기습에 당황한 개로왕은 그때서야 도림이 첩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고구려군은 순식간에 한강 이북을 차지하고, 이내 강을 건너 한성으로 쳐들어 올 기세였다. 그런 상황을 읽은 개로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아우 문주를 신라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 무렵. 아치성에 본진을 설치한 고구려군은 한강을 도하하여 한성으로 밀려들었다. 백제군은 궁성에 군대를 밀집하고 방전을 펼쳤으나, 바람을 이용한 화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7일 만에 북성이 무너졌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이내 개로왕이 머물고 있던 남성으로 밀려들었고, 위기를 의식한 개로왕은 성을 빠져나와 달아나려 했지만 결국 재중걸루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에 대해 학계 일부에서는 북성을 북한산성, 남성을 남한산성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전투의 경과를 살펴볼 때 북성을 점령 후 한강을 건너서 남성인 남한산성을 공략했다는 것은 무리한 추론이다. 개루왕이 머물렀던 남성은 지금의 몽촌토성, 북성은 풍남토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재중걸루는 원래 백제의 장수였으나, 개로왕 초기 정변 과정에서 실패하자 고구려로 달아난 장수였다. 때문에 재중걸루는 일단 생포한 개로왕에게 왕에 대한 예를 갖춘 뒤에 얼굴에 침을 세 번 밷고 장수왕이 머물고 있던 아차성으로 압송하였고, 그 곳에서 개로왕은 참수되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개로왕의 가족에 대해선 자세한 내용이 없고, 당시 해씨가 조정을 장악했던 점으로 미뤄 부인은 해씨 가문 출신일 것으로 짐작된다. 자식은 여러 명이 있었으나 한성이 무너질 때 죽은 것으로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문주왕과 곤지가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개로왕의 아우임을 이미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