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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3 : 백제의 역사 29 (제19대 구이신왕) 본문
한국의 역사 83 : 백제의 역사 29 (제19대 구이신왕)
구이신왕(久爾辛王, 404년?~427년, 재위: 420년~427년)은 백제의 제19대 왕이다. 전지왕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팔수부인(八須夫人)이다.
기원전 18년 ~ 66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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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 |
공용어 | 고대 한국어 |
수도 |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
정치체제 | 군주제 |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
76만호(3,800,000명 추정) |
성립 | 기원전 18년 |
멸망 | 660년 |
초대 군주 |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
최후 군주 | 의자왕 641년 ~ 660년 |
성립 이전 | 마한, 부여 |
해체 이후 | 신라 |
주석 |
|
생애
「송서」백제전에서는, 송의 태조가 원가 2년(425년)에 백제왕에 대해서 해마다의 충절을 현창한 것과 그 후 매년 조공 해 온 것을 기록되어 있다. 단지, 원가 7년(430년)에 「여비(余毗, 비유왕)에 여영(余映, 전지왕)의 작호의 계승을 허락했다」라고 있으므로, 중국측에서는 구이신왕을 인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 왕호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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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온조왕(溫祚王) | 온조(溫祚) |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 |
2 | 다루왕(多婁王) | 다루(多婁) | 기원후 28년 ~ 77년 | 온조왕의 아들. | |
3 | 기루왕(己婁王) | 기루(己婁) | 77년 ~ 128년 | 다루왕의 아들. | |
4 | 개루왕(蓋婁王) | 개루(蓋婁) | 128년 ~ 166년 | 기루왕의 아들. | |
5 | 초고왕(肖古王) | 초고(肖古) | 166년 ~ 214년 |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 |
6 | 구수왕(仇首王) | 구수(仇首) | 214년 ~ 234년 |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 |
7 | 사반왕(沙伴王) | 사반(沙伴) | 234년 |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 |
8 | 고이왕(古爾王) |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 234년 ~ 286년 | 개루왕의 차남. | |
9 | 책계왕(責稽王) | 책계(責稽) | 286년 ~ 298년 |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 |
10 | 분서왕(汾西王) | 분서(汾西) | 298년 ~ 304년 | 책계왕의 아들. | |
11 | 비류왕(比流王) | 비류(比流) | 304년 ~ 344년 | 구수왕의 차남. | |
12 | 계왕(契王) | 계(契) | 344년 ~ 346년 | 분서왕의 아들. | |
13 | 근초고왕(近肖古王) | 초고(肖古), 여구(餘句) | 346년 ~ 375년 |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 |
14 | 근구수왕(近仇首王) | 구수(仇首), 수(須) | 375년 ~ 384년 | 근초고왕의 아들. | |
15 | 침류왕(枕流王) | 침류(枕流) | 384년 ~ 385년 | 근구수왕의 장남. | |
16 | 진사왕(辰斯王) | 진사(辰斯) | 385년 ~ 392년 | 근구수왕의 차남. | |
17 | 아신왕(阿莘王) | 아신(阿莘) | 392년 ~ 405년 | 침류왕의 아들. | |
18 | 전지왕(腆支王) |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 405년 ~ 420년 | 아신왕의 아들. | |
19 | 구이신왕(久爾辛王) | 구이신(久爾辛) | 420년 ~ 427년 | 전지왕의 아들. | |
20 | 비유왕(毗有王) | 비유(毗有), 여비(餘毗) | 427년 ~ 455년 | 구이신왕의 아들. | |
21 | 개로왕(蓋鹵王) | 경사(慶司), 여경(餘慶) | 455년 ~ 475년 |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 |
22 | 문주왕(文周王) | 모도(牟都), 여도(餘都) | 475년 ~ 477년 |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 |
23 | 삼근왕(三斤王) | 삼근(三斤) | 477년 ~ 479년 | 문주왕의 아들. | |
24 | 동성왕(東城王) | 동성왕 |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 479년 ~ 501년 |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
25 | 무령왕(武寧王) | 무령왕 | 사마(斯麻), 여융(餘隆) | 501년 ~ 523년 |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
26 | 성왕(聖王) | 성왕 | 명농(明襛) | 523년 ~ 554년 | 무령왕의 아들. |
27 | 위덕왕(威德王) | 위덕왕 | 창(昌) | 554년 ~ 598년 | 성왕의 장남. |
28 | 혜왕(惠王) | 혜왕 | 계(季) | 598년 ~ 599년 | 성왕의 차남. |
29 | 법왕(法王) | 법왕 | 선(宣), 효순(孝順) | 599년 ~ 600년 | 혜왕의 아들. |
30 | 무왕(武王) | 무왕 | 장(璋), 서동 | 600년 ~ 641년 |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
31 | 의자왕(義慈王) | 의자 | 641년 ~ 660년 | 무왕의 아들. |
제19대 구이신왕 실록
(서기 405~서기 427년, 재위:서기 420년 3월~ 427년 12월, 7년 9개월)
불운한 어린 군주 구이신왕과 팔수태후의 난정
구이신왕은 전지왕의 맏아들이며, 팔수왕비의 소생이다. 그는 전지왕이 왜국에서 돌아와 혈례의 반란 때문에 섬에 머물고 있던 405년에 태어 났으며, 420년에 전지왕이 죽자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후, 구이신왕은 7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나, <삼국사기>는 그의 즉위와 죽음만 기록했을 뿐 그 외 기사는 전혀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서기>엔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다.
어린 구이신왕이 왕위에 오르자, 왕권은 태후 팔수가 마음대로 농단하였다. 팔수는 왜왕 응신천황의 딸로 전지왕이 왜에 인질로 가 있을 때 혼인하였으며, 전지왕이 환국할 때 구이신왕을 임신한 상태로 함께 온 여자였다. 그녀는 전지왕이 죽자, 임나를 장악하고 있던 목만치를 궁으로 불러들려 밀통하였고, 목만치는 그녀의 배경을 믿고 정사를 농단하고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에 대해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응신천황 25년에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 즉시, 그의 아들 구이신왕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연소하였으므로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다. 왕의 어머니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천황은 이 말을 듣고 불러들였다.'
즉 팔수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목만치를 궁에 불러들여 밀통하면서 정사를 농단하였다는 내용임에는 틀림이 없다.
목만치라는 인물에 대해서 <일본서기>는 <백제기>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백제기에 이른 바에 의하면, 목만치는 목근라자(모구라곤시)가 신라를 토벌할 때, 그 나라 여자를 취하여 낳은 자이다. 그 아버지의 공에 의해 임나를 오로지 마음대로 하였다. 우리 나라(백제)에 와서 귀국(왜)에 오고 가고 하였다. 천조(왜)의 제도를 계승하여 우리 나라 정치를 장악하였으며 권세를 당할 자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천조(왜)에서 그의 폭정을 듣고 소환하였다.'
이 기록을 인정한다면, 목만치는 왜인 아버지와 신라 여인 사이에서 태어 났으며, 임나의 권력자였다. 그가 어떻게 팔수 태후에게 접근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백제와 임나는 서로 화친 관계였기에 친해질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었다.
왜왕실 출신의 팔수 태후는 백제에 온 뒤로 대단한 소외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더구나 부군 전지왕은 왕위에 오르자 두 번째 부인을 맞아들였고, 그것은 팔수 태후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부군이 죽고, 권력을 잡은 팔수 태후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임나의 권력자 목만치에게 동질감을 느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당시 왜국의 관습대로라면 남편이 죽고나면 홀로 된 왕녀가 휘하에 남자를 두는 일은 허다하였기에 팔수가 목만치를 가까이 하여 밀통하였다는 것은 납득이 가능한 일이다.
팔수 태후를 등에 업고 목만치는 백제의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폭정과 전횡을 일삼았다.
그가 왜국을 오가며 백제의 정치에 관여하고, 왜의 제도를 수용했다는 것은 왜가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의 폭정에 관한 소식을 듣고 왜왕이 그를 소환하였다는 것은 왜곡된 기록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는 왜국의 지원을 받으며 폭정을 일삼다가 백제인들의 큰 반발에 부딪혔고, 그래서 반정이 일어나고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왜로 도주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가 왜국으로 도망간 것과 구이신왕의 죽음과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구이신왕은 혈기 왕성한 때인 23세에 죽었는데, 이 죽음은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백제기>의 기록대로 목만치의 권력을 당할 자가 없을 정도였다면, 그는 필시 왕위를 넘보며 구이신왕을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물론 팔수 태후의 암묵적이거나 노골적인 동조 아래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다.
이 사건에 비춰볼 때, 구이신왕은 자연사 한 것이 아니라, 목만치인지 아니면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른 비유왕 세력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구 세력 중 한 쪽이 구이신왕을 살해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비유왕을 구이신왕의 맏아들인지 전지왕의 서자인지는 분명치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비유왕이 23살에 죽은 구이신왕의 아들이라면, 비유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에 기껏해야 8살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어린이어야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욍위에 오를 당시의 비유왕에 대해 '용모가 훌륭하고 말을 잘하여 사람들이 따르고 귀히 여겼다.'고 쓰고 있다. 이는 즉위 당시에 비유왕이 이미 장성한 어른이었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비유왕은 전지왕의 서자이며. 구이신왕의 이복 동생이 분명하다.
비유왕에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는 것은 그가 구이신왕을 제거한 뒤에 즉위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분서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비류왕, 계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근초고왕,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아신왕 등에 대해서 '줄충한 용모, 의지와 기풍이 호방, 풍채 기이하고 원대한 식견, 의지와 기풍이 호방했다' 등으로 표현했다. 이런 표현이 비유왕과 일맥상통한다. 다시말해 비유왕 역시 그런 왕들과 같이 반정을 일으켜 전 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라는 뜻이다.
비유왕이 반정을 일으며 왕위에 올랐다면. 목만치는 비유왕의 반정으로 실각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왜국으로 달아났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구이신왕은 비유왕의 반정 과정에서 살해되었거나, 반정 이후 은밀하게 제거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 때 팔수 태후도 쫓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왜왕 딸인 관계로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유왕이 즉위하였을 때 왜왕 응신천황은 많은 사신을 보내 축하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의 딸 팔수 태후의 신변을 염려한 조치였을 것이다. <일본서기>의 내용 중 '귀국', '천조'라는 표현은 자신들을 내세우기 위해 변조하였거나 개찬하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표현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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