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니발 장군의 마지막 전투 '자마회전' 1 본문
한니발 장군의 마지막 전투 '자마회전' 1
로마 스키피오 장군의 한니발의 조국 카르타고 심장부 타격 대회전
로마가 강대국이 된 것은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승리한 이후이다.
일본인 여류작가가 쓴 '로마인 이야기'에서 '한니발 전쟁'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진수이다. 그녀는 로마를 너무나 사랑하였고 그래서 이탈리아인과 결혼하여 지금도 로마에 살고 있다. 1년에 한 권씩 '로마인 이야기'를 책으로 내면서 총15권을 15년 동안 매년 출간한 여성이다. 그녀는 로마 유적지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로마인들의 이동로를 따라 전적지를 일일이 답사하면서 그 책을 썼다고 한다. 그 책이 나오자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그녀는 로마인을 사랑한 덕분에 지금은 부자도 되었고 유명인이되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트' 한 장면
로마는 페니키아인들과 벌인 전쟁인 3차례의 '포에니 전쟁' 중 2차 전쟁인 '한니발 전쟁'에서 카르타고에 결국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지중해 강대국으로 발돋음 할 수가 있었고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니발 전쟁에 대하여 요약하여 올리면서 난 많은 상상에 빠지곤 하였는데 한니발 장군의 조국 카르타고란 나라가 꼭 지금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니발의 로마 침공 과정과 16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하면서 벌인 전투, 그리고 로마 장군 스키피오의 카르타고 본토 침공과 한니발의 이탈리아 반도 철수 및 한니발이 일생일대의 딱 한 번의 패전인 마지막 전투인 '자마회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니발의 성장
카르타고는 지중해에서 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한 그 당시 강대국으로 페니키아인들로 구성된 민족국가였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지배하면서 로마 제국과 충돌하게 되는데, 제1차 전쟁에서 로마에 패배하고 시칠리아를 로마에 빼앗기게 된다. 굴욕의 세월을 보내면서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던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 식민지 총독으로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를 파견되게 된다.
한니발 아버지 하밀카르는 제1차 전쟁 당시 카르타고 장군으로 시칠리아에서 로마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로마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유명한 장수였다. 카르타고의 패배로 강화가 이루어지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상실하고 철수하게 된다. 귀국 후 절치부심한 한니발 아버지는 울분을 삼키면서 9살의 어린 한니발을 대리고 같이 카르타고 신전에 가서 신 앞에서 로마 타도를 약속하게 만든다. 어린 가슴에 로마가 무엇인지 몰라도 한니발은 아버지의 울분에 찬 그 모습에 아마 어린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한니발의 가슴속에는 로마타도라는 아버지의 처절한 고언을 평생잊지 못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바로 이베리아 반도 카르타고 식민지 총독에 임명되어 떠나게 된다.
한니발은 지중해가 바라보이는 해변가 언덕 위 궁전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독서에 열중하였고, 특히 대제국 페르시아를 굴복시킨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 대왕의 양익포위 전략과 전술에 매료된다. 세월은 흘러 아버지가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뒤를 이은 매형마저 집안 노에에게 살해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매형의 뒤를 이어 총독에 취임한 한니발은 원주민과 싸우면서 전략.전술을 익히고 식민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광산을 개발하여 많은 지하자원을 채굴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로마 침공을 위한 군비를 착실히 증강하게 된다. 한니발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신전에서 약속한 로마타도를 항상 가슴속에 새기고 있었다.
영화 ' 글래디에이트' 한 장면
한니발 장군의 로마 침공
한니발은 로마를 침공하기 위해서 전략을 구상했다. 삼면이 바로로 둘러싸인 이탈리아 반도는 1차 포에니 전쟁시 세계 최강의 강력한 카르타고 해군을 괴멸시킨 로마 해군이 진을 치고 있는 바, 지중해를 통과하여 해상전에 익숙하지 않은 한니발 입장에서 해상으로 침공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고 판단한 한니발은 육로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알프스를 넘는 길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으로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로 가는 길은 해상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그 길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기병 전사들인 누미디아 기병과 갈리아 기병, 이베리아 반도 원주민, 아프리카 흑인, 코끼리 부대 등을 포함하여 총 9만여 명의 군대를 양성했다. 그들은 모두 용병이었다. 9만 명의 많은 병력이 무사히 알프스를 넘기는 어려운 일로 많은 희생도 따를 것이며 성공도 보장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고심끝에 한니발은 로마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를 기습하기로 한다.
처음 9만 명의 병력으로 로마군의 눈을 피해 프랑스 남부 내륙의 밀림과 론 강 도하하면서 많은 코끼리와 병사들이 수장되었고, 이동로 마다 원주민인 갈리아족과 산악민족과의 싸움, 알프스를 넘어면서 병사들이 동사하고 코끼리와 병사들이 천 길 낭떨어지 계곡으로 추락하는 등 각고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알프스 정상에 도달하였다. 한니발은 병사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게 되는데, 황금과 미녀들이 넘쳐나는 로마를 타도하고 모든 재물과 미녀들, 그리고 땅을 부하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약속하는 유명한 알프스 정상의 연설을 하게 된다. 병사들은 한니발의 연설을 듣고 고무되어 환호했다.
로마군은 한니발의 위치를 찿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론 강 근방 밀림 속에서 정찰대끼리 잠깐 조우전을 치른 뒤 사라졌기 때문이다. 로마군 지휘관은 가능한 모든 방안에 대하여 고심끝에 신속하게 원로원에 상황을 보고하고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공할 것으로 예견하였고 지휘부 일부는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하고 나머지 본대는 한니발 본거지를 급습하도록 계획을 수정했다. 급보를 받은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 공략을 위해 남부 시칠리아에 파견되었던 2개 군단의 부대를 신속히 북쪽으로 이동을 지시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 파견되었던 로마군에 대해서는 지휘관의 의도대로 조치하도록 하였다.
알프스 정상에서 내려가는 빙판길은 더구나 더 위험한 길이었다. 추락하는 병사들의 비명소리를 자장가 삼아 절벽 밑에서 새우잠도 자기도 하고 얼어붙은 음식을 삼키면서 묵묵하게 남쪽으로 향했다. 보름 동안 행군한 끝에 겨우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 평원에 도착한 한니발군은 병력이 4만으로 반이상이나 줄었다. 한니발은 보름간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주변 갈리아 원주민을 설득하여 식량과 병력을 보충하고 전력을 정비했다. 병력보충과 훈련을 통해 정예 5만 명으로 구성된 한니발군은 충분한 휴식을 끝내고 로마를 타도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티치노(현재의 토리노) 전투 : 제1회전
지금까지 로마인과 적들은 겨울이 되면 서로 휴전기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상식이 통할 것 같지 않은 한니발이다. 북으로 먼저 올라온 로마 2개 군단은 피아첸차에 그대로 묶여 충분히 요새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겨울을 지내야 할 상황이었다. 한니발은 겨울이지만 로마군을 찿아 동쪽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로마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도 기병대와 경보병대 소수를 이끌고 적정정찰을 나갔다. 피아첸차에서 포강 상류쪽에 티치노(오늘날 파비아) 근방에 가장 평탄한 지대가 펼쳐저 있다. 로마 기병대는 포강의 지류인 티치노강에 임시다리를 놓고 서쪽으로 진출하자 서쪽 지평선에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한니발도 기병만 대리고 지형정찰을 나오던 중이었다. 양군은 거리를 좁히면서 서로의 적장이 포함된 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마군과 한니발군의 기병이 서로 접전이 벌어졌다. 처음 얼마동안의 전황은 호각지세로 전개되었다. 한니발의 양쪽 날개인 누미디어 기병의 전투력은 대단하여 로마의 갈리아 기병을 순식간에 격파하고 로마 본대를 위협했다. 로마기병은 포위 직전에 부상당한 집정관을 포함하여 패주하기 시작했다. 로마군이 임시로 가설한 다리를 건너자 대기하던 경보병 병력이 다리를 파괴했다. 한니발은 더 이상 추격을 하지 못하고 미쳐 강을 건너지 못한 패잔 기병 600명을 포로로 잡았다. 한니발은 다잡은 로마 집정관을 아슬아슬하게 놓쳐버린 것을 못내 아쉬워 했다지만, 그보다는 집정관을 구해낸 젊은 기사를 놓친 것을 더 아쉬워 해야했다. 집정관의 아들인 그 기사는 그해 나이 17세. 아버지와 같은 푸불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앞으로 16년 뒤에는 로마군을 이끌고 자마전투에서 한니발과 대결하게 된다. 피아첸차까지 도망쳐 돌아온 코르넬리우스는 중상이지만 한니발 기병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평원에서의 숙영이나 전투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방비가 허술한 피아첸차는 곧 도착할 2개군단 등 4개 군단의 숙영지로는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유리한 지형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트레비아 전투 : 제 2회전
이탈리아 반도 동북쪽에 있는 포강은 알프스에서 발원하여 북쪽에서 흘러드나 트레비아강은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원하여 남쪽에서 포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이다. 트레비아강이 흘러드는 일대는 아펜니노 산맥이 가까이 있어 울퉁불퉁한 지형으로 기병활동에 제한을 주고 있다. 집정관 코르펠리우스는 이 일대에서 가장 높고 넓은 곳에 군단의 견고한 진지를 편성했다. 한니발은 이대로 겨울을 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포로들의 심문결과 로마군의 군량 저장소가 '카스테조' 마을 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병과 코끼리 부대는 동쪽으로 진군토록 지시하고 자신은 기병대를 이끌고 '카스테라' 마을을 습격하여 군량 저장소를 확보했다. 주변 갈리아 마을을 약탈하여 식량을 확보할 필요도 없어졌다. 갈리아인들의 일부는 티치노 전투에서 한니발군이 승리하자 한니발 진영으로 모여 들었다. 아직도 포강 이북지역 갈리아인들의 절반 이상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해가 바꾸기 전에 다시 한번 싸움을 벌여 갈리아인들의 동향을 카르타고쪽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충분한 군량을 확보한 한니발은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였다. 한편 셈프로니우스가 이끄는 2개군단이 강행군으로 코르넬리우스가 기다리는 숙영지에 도착했다. 지친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두 집정관은 전황 토의를 거듭했다. 코르넬리우스는 안전한 숙영지에서 겨울을 나고자 하였으나 셈프로니우스는 평민 출신으로 분발하여 강력하게 나갈 것을 강조했다. 한니발은 이러한 적장의 심리까지 파악한 모양으로 셈프로니우스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매일 교대로 지휘하 것는 로마 집정관들이며 한사람이 중상을 당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한니발은 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고 적장의 심리까지 파악하여 그것을 이용하는 천재적인 능력을 소유한 젊은 장수였다. 양군은 트리비아강을 사이에 두고 진영을 세웠다. 29세의 젊은 장군은 대낮에 당당히 트레비아 강둑 언저리까지 군대를 전진시켰다. 기원전 218년 12월말. 한니발은 막내동생 마네고를 대리고 주변지형을 조사하러 나갔다. 트레비아강 서안을 꼼꼼히 조사한 뒤 관목숲이 있는 남쪽 방향을 가리키며 동생에게 말했다. " 저곳에 보병1천,기병1천을 선발하여 내일 동이트기 전에 숙영지를 떠나 저 숲속에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 숙영지로 돌아온 한니발은 모든 병사들에게 충분한 식사를 주도록 명령하고 이튼날 아침 동이트기 전에 아침식사를 끝내고 모닥불로 따뜻해진 몸에 기름을 발라두라고 했다. 양력 12월22일. 아침은 어느때 보다도 더한층 추위가 혹독하였고 금방 비가 내릴것 같은 찌푸린 날씨였다. 한니발은 로마진영을 기습했다. 집정관 셈프로니우스는 적이 기병만으로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고 황급히 전 기병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기병대는 아침식사는 커녕 방한복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속옷에 갑옷과 병기만 휴대하고 신속히 말에 올라 달려나갔다. 로마기병과 중무장 보병이 전열을 갖추어 접전을 벌이자 한니발군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로마기병과 중무장 보병이 강을 건너 퇴각하는 한니발군을 쫓아 눈사태처럼 우르르 강을 건넜다. 골짜기 강이지만 비가내려 물이 불어난 강을 건너온 로마군은 온 몸이 흠뻑젖은 상태였다. 강 건너편에 아침을 든든히 먹고 몸에 기름까지 바르고 기다리고 있는 한니발군과 물에 젖은 로마군간에 접전이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중앙에 갈리아 보병대를 배치하고 양쪽 날개를 보강하여 로마군을 양익포위를 시도했다. 로마군 중무장 보병이 한니발군의 중앙을 돌파하여 선전하고 있을 때 기병끼리 격돌한 지역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접전이 시작되자 누미디아 기병대의 강한 전력에 로마군 기병대가 격파되어 패주하자 로마군 양쪽 배후에 한니발군의 기병과 숲속에 숨어 있던 마고네군이 후방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4만의 로마군 보병의 포위망이 조금씩 좁혀들자 아침을 든든히 먹고 몸에 기름을 바른 한니발군은 추위는 커녕 더욱 사기가 오른 반면, 강을 건너 흠뻑젖은 상태로 방한복도 벗고 아침 식사도 못한체 급하게 전투에 임한 로마군은 추위와 허기진 로마군은 전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포위망을 돌파하여 하류 트레비아 강을 건너 도망친 병사는 1만여명에 불과하였고 포위된 3만의 로마병사들의 살륙전이 계속되는 속에 도망칠 수 있었던 병사들도 숲속에 숨어있던 한니발의 동생 마고네군에 의하여 대부분 강물속에서 죽어갔다. 이 회전에서 로마군은 전술적인 패배와 정면대결에서 한니발군에게 완패를 당하였다.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군이 승리하자 갈리아인들이 한니발 진영으로 몰려와 지원하였던 결과 한니발 진영의 군대는 5만으로 늘어났다. 겨우 목숨을 살아 도망친 로마의 두 집정관은 피아첸차에서 만나 패잔병들을 모아 리미니로 떠났다. 로마는 몇달전 재패를 끝낸 북부 이탈리아 지역을 완전히 포기했다. 한니발은 로마시민 포로에게는 적은 식사에 가혹한 사역을 시키는 반면 동맹국 포로는 후한 대접과 자신의 적은 로마이지 동맹국의 시민들이 아님을 주지시키고 귀향조치 했다. 이는 동맹국들에게 로마에 등을 돌리도록 하기위한 선전책이었으며 나중에 로마시민 포로는 모두 현지에서 처형했다. 트라메시노 호반 전투 : 제3회전 패전 책임자는 처형하는 것이 관례인 카르타고와는 달리 로마는 패장을 처벌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었다. 귀족과 평민출신의 집정관을 처벌한다면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는 패전 책임을 지고 처벌받는 것은 파벌싸움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원한에 의한 처벌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패전의 원인이 지휘관의 능력부족이라면 로마 민회는 두번다시 그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트레비아 전투에서 패한 집정관 셈프로니우스는 그 후 두번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반대로 중상을 입은 코르넬리우스는 전직 집정관에 임명되어 1만명의 로마군대와 같이 에스파냐(이베리아)에 파견되었다. 한니발 원정 2년째가 되는 기원전 217년. 로마는 그해에 전선을 담당할 집정관으로 귀족인 세르빌리우스와 평민인 플라미니우스를 선출했다. 플라미니우스는 기원전 232년에 호민관, 그후 원로원에 들어간 그는 기원전 227년 시칠리아 총독. 기원전 223년에는 집정관에 선출되어 갈리아 전투를 승리한바 있다. 기원전 220년에는 재무관에 선출되어 오늘날 이탈리아 3번국도로 남아있는 플라미디아 가도를 건설했다. 두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된 그는 나이 45세 안팎의 무르익은 나이였다. 로마군은 한니발의 남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워 집정관 세르빌리우스는 이탈리아 반도 우측에 위치한 길목 지점인 '리미니'로 파견되어 한니발이 플라미디아 가도를 선택할 경우에 대비했고, 집정관 플리미니우스는 아펜니노 산맥의 서쪽인 '아레초'에서 한니발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토스카나' 지방으로 내려올 경우에 대비했다. 두 집정관에게는 2개군단씩 각각 2만 5천명의 병력이 주어졌으며 한니발의 움직임이 파악되면 유사시 남쪽인 '페루자' 근처에서 합류하여 협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기원전 217년 4월. 30세가 된 한니발은 전군을 이끌고 겨울 숙영지를 떠났다. 그는 '볼로냐'에서 리미니로 간 다음 이탈리아 반도 우측 플라미니아 가도를 지나 남하하는 평이한 길을 선택하지 않고 곧장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곧장 피렌체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다음 전장터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살고 있는 '토스카나'지방으로 결정하고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줄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주도권은 한니발이 쥐고 있었다. 아펜니노 산맥을 간단히 넘고 '토스카니' 지방에 도착한 한니발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된다. 지중해 기후인 이탈리아는 겨울부터 봄까지 집중적인 비가 내리는 지역으로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원하는 '아르노' 강은 '피렌체'를 지나 몇몇 지류를 모아 '피사'로 가서 '티레이아' 강으로 흘러드는데 '토스카나' 지방에서 범람하여 이 지역 일대가 평지로 물에 잠기면 늪지대로 변한다. 한니발 군대가 평지로 내려 왔을때 온 천지가 늪지대로 변해 있었다. 한니발은 눈병이 나서 결국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는데 마지막 남은 코끼리에 올라타고 부대를 지휘하여 겨우 '피렌체'에 도착했다. 한니발은 척후를 사방에 내보내 로마군의 동향을 살폈다. 남동쪽으로 100키로 떨어진 지점 '아레초'에 로마군 2개 군단이 있는 것도 알았다. 적의 위치를 파악한 한니발은 휴식을 끝낸 부대로 하여금 '아레초' 서쪽 방향으로 행군하여 남하토록 하였다. 이동간 그 지역 일대를 약탈하고 불지르며 겹겹이 구릉이 포개진 평야지대를 지나서 '아레초'로 향했다. 집정관 플리미니우스는 '리미니'에 있는 동료 집정관에게 전령을 보내 적군의 움직임을 알리고 '리미니'에 있는 2개군단의 남하를 요청하면서 우선 기병대를 먼저 보내주도록 했다. 양군이 페루자 근방에서 합류하여 적을 협공하여 격멸하기로 했다. 한니발이 평범한 적장이라면 로마군이 승리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니발은 적정에 대한 정보수집과 활용면에서 그 유례를 찿아볼 수 없을 만큼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신속한 행동도 발군인 한니발은 로마군의 합류를 지켜보지만 않았다.그는 적의 움직임,적장과 적의 습관과 행동까지도 예측하였고 적을 유인하여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적을 섬멸하는 작전을 항상 구상하고 있었다. 눈 앞에서 로마연합의 충실한 동맹자인 '에트루리아'인들이 한니발에게 약탈과 살해를 당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로마연합의 맹주인 로마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분통이 터지는 가슴을 억누를 수가 없었지만 셈프로니우스의 기병이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접전을 벌일 용기나 나지 않았다. 일단 페루자에서 합류한 다음 상대적으로 우세한 전력으로 한니발과 접전을 벌이고 싶었다.플로미니우스는 적의 위치를 확인도 못한체 부대를 페루자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레초'와 '페루자'의 중간쯤 되는 곳에 이탈리아 중부지방에서 가장 큰 '트라시메노' 호수가 시야 가득 펼쳐저 있었다. 이 호수 북쪽에는 산악구릉과 호수사이에 좁고 긴 평야지대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이곳을 지나 동쪽으로 조금난 가면 플리미니우스가 셈프로니우스와 합류지점으로 생각하고 있는 '페루자'에 도착할 수가 있다. 한니발은 호수 북쪽 동서로 발달된 호반 구릉지에 매복하고 있다가 로마군을 전멸시켰다. 한니발은 로마군 4개군단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하기로 작정하고 먼저 가까이 있는 플라미니우스의 2개 군단을 먼저 격파하기로 했다. 그들이 페루자에 도착하기 전에 길목에서 그들을 기습공격할 장소로 지형을 연구한 결과 로마군이 지나갈 만한 곳으로 '트레메시노' 호수를 주목했다. 이동로 중에서 적을 섬멸하기 가장 좋은 장소로 호수 북쪽 좁고 긴 평야를 선택하고 그날만은 부대의 행군을 서둘러 저녁이 되기 전에 '트라메시노' 호반에 도착했다. 척후병을 미리 보내 주변지형을 면밀히 조사한 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각 부대를 지정된 구역으로 배치했다. 야영은 현지에서 하되 불을 피우는 것은 일체 금지했다. 한니발의 의도는 길쭉하고 좁은 호반옆으로 적을 끌여들여 적 부대가 호반옆 길쭉한 평야에 들어왔을때 기병은 서쪽 신기슭 배후에서, 중무장 보병은 동쪽 적의 선두방향에서,나머지 보병은 북쪽 산기슭에서 공격하는 포위 작전을 세웠다. 유일하게 남쪽에는 넓은 호수가 펼쳐저 있다. 한니발의 장기는 포위작전인데 자연적인 호수까지 이용한 계획이었다. 한니발 부대는 숨소리도 죽인체 로마군이 접근해 오기를 밤새 기다리고 있었다. 집정관 플리미니우스의 2개 군단은 한니발군의 위치를 놓쳐버린 상태로 아군과 합류지점인 '페루자'로 가기 위하여 밤이 된 뒤에야 호반 근처에 도착했다. 한니발 군대가 어디서 야영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척후를 보내 정찰도 하지 않은체 추척하기를 적은 호반을 지나 페루자쪽으로 갔을 것으로 판단하고 호반의 서쪽에 있는 평지에 숙영지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호반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하였고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집정관 플로미니우스가 만약 척후를 사방에 풀어 면밀히 정찰을 하였다면 매복하고 있는 한니발군을 발견 하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다음날 있을 엄청난 패배를 피할수 있었을 것이나 그는 적정에 대하여 소홀히 하였던바 돌이킬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기원전 217년 4월. 이튼날 아침 '트라시메노' 호수 주변은 짙은 안개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적을 빨리 따라 잡겠다는 일념에 진영을 아침 일찍 거둔 로마군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좁은 호반 평야지대에 발을 들여 놓았다. 앞의 시계가 차장된 가운데 각 부대의 표지판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전 병력이 빠른 강행군으로 길고 좁은 호반지대 평야에 들어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이변을 알아차린 부대는 로마군 전위부대였다. 호반의 동쪽 끝에 기다리고 있던 한니발 중보병부대와 조우했다. 전위부대가 전투를 벌이는 동안 본대와 후위쪽에서는 전위부대쪽에서 함성소리가 들렸으나 진작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는 상태로 부대가 계속 앞으로 밀려들고 있을때 적의 기병대가 호반의 서쪽 산기슭에서 나타났다. 북쪽 언덕 산기슭에 숨어 있던 갈리아 병사와 경보병대가 로마군을 공격했다. 5만명의 한니발군의 포위망속에서 2만5천의 로마군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분전하였으나 집정관 플리미니우스를 포함한 1만7천명이 살륙되고 전위에서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 6천여 명도 한니발의 기병대에 의하여 모두 포로로 잡혔다. 산이나 강으로 도망쳐 로마까지 살아 돌아온 병사는 2천명에 불과했다. 한니발군의 손실도 2천명이나 대부분 갈리아 지원병이고 정예병은 손실없이 고스란히 남았다. 패전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로마 민회와 원로원은 비통에 잠겼다. 완패를 인정했다. 사흘후 법무관은 민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5만의 군대를 이끌고 플라미니아 가도를 이용하면 사흘밖에 걸리지 않는 한니발군을 눈앞에 두고 있는 로마는 비상사태를 맞았다. 수도방위 2개군단과 기병은 이미 잃은 리미니에서 이동중인 셈프로니우스의 2개군단 뿐이다. 모두가 한니발이 바로 로마를 공격할 것으로 생각하고 수도 로마는 일종의 공황상태가 발생하고 있었다. 계절은 막 5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30세의 카르타고 장군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길을 선택했다. 그는 로마로 바로 가는 길을 버리고 동쪽으로 '아드리아해'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휘하 장수들이 불만을 품었으나 한니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능력을 충분히 경험하였고 전장터가 로마밖에서는 절대로 로마를 무너뜨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전장터를 로마 본국인 이탈리아 반도로 선택했고 로마연합을 해체하지 않는 한 로마를 굴복시키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드리아해'쪽에서 남쪽으로 이탈리아 반도 '로마연합' 동맹도시를 하나하나 굴복시켜나가는 즉 로마아성을 공격하기 보다 우선 아성을 둘러싸고 있는 '바깥해자'를 메울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한니발은 포로들 가운데 동맹도시에서 온 포로들은 후한 대접으로 귀향조치하였고 로마 시민병은 모두 처형했다. 그는 '로마연합'의 해체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스카나' 지방의 '에트투리아'인들도 당장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로마에 등을 돌릴 것으로 기대했다. 이제 로마인도 한니발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한니발의 의도는 로마연합 가맹국 영토를 중점적으로 약탈하고 불태우며 로마군이 출동하면 싸워 이긴다. 승리가 거듭될 때 마다 로마에 등을 돌리는 동맹도시가 늘어난다. 바깥해자가 다 메워지면 로마를 공격하여 괴멸시킨다는 것이 한니발의 전략이었다. 이치에 맞는 완전전략이었다.
'아드리아해'로 빠져나온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시간을 부여했다. 헤어진 옷을 벗어 버리고 로마군 시체에서 군복을 벗겨 갈아 입었다. 후일 이러한 복장이 로마군을 괴롭혔다. 적을 분간 못하는 복장으로 로마군이 자주 기습을 당하였던 것이다. 말에게는 포도주로 목욕을 시키는 등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한니발은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로마동맹 도시에 대한 약탈과 방화,살륙을 자행하면서 빼았은 물자가 너무 많아서 다 가져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5만명의 장병들의 배를 채우는 문제도 보통이 아니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폴리아' 지방에서 제멋대로 분탕질을 한 뒤. 한니발은 '캄파냐' 지방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지역에는 대도시 '카푸아','쿠마','포추올리','나폴리','소렌토' 등 로마의 바다 동맹국들이 산재되어 있었다.
한편 로마는 사태의 위급성을 고려 '독재관'을 임명하기로 하였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후 32년만에 독재관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취임했다. 로마의 명문귀족 파비우스 가문의 총수이며 58세로 집정관에 두번이나 선출되어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도 하였던 경력자의 소유자다.
'리미니'에서 달려온 2개군단과 새로 편성한 2개군단을 합하여 4개군단으로 한니발을 추격한 '파비우스' 전략은 추격은 하되 한니발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코르넬리우스','셈프로니우스','플라미니우스' 등 한니발과 싸운 집정관들은 모두 패배하였다. 그는 자기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과 전투를 벌이지 않으면서 바짝 뒤를 쫓는 작전은 적군의 소모를 기다리는 작전이었다. 병사들은 눈앞에 전개되는 적이 동맹도시에 대한 약탈과 방화를 바라보면서 맹주로써 책임을 다하지 못함을 원통해 하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에서는 '파비우스'의 작전을 놓고 지구전파와 적극전파간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니발이 '캄파냐' 지방에서 약탈을 자행한 후 겨울이 오자 남부의 '폴리아' 지방으로 이동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독재관 '파비우스'는 적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야 할 3군데 길목에 병력을 분산배치하여 고개길에서 매복을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한니발은 그러한 로마군의 동태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로마군이 매복하고 있는 산기슭에 도착하자 밤이 되기를 기다려 소떼 2천마리 뿔에 횟불을 달게 하여 로마군이 매복한 반대편 다른쪽 골짜기 고개길로 돌진시켰다. 독재관 '파비우스'는 한니발군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도 한니발의 의도를 알수가 없어 접전을 벌일 엄두를 못내고 병사들에게 절대로 움직이지 말도록 지시하였다.적의 횟불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밤을 지새는 동안 로마군이 매복한 지점 아래로 한니발군은 유유히 통과해 버렸다. 아침에야 이 사실을 알게된 '파비우스'는 기병대로 하여금 추격을 하였으나 '누미디아'기병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로마로 소환된 '파비우스'는 독재관에서 파직되고 지구전파와 적극전파간에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지구전파의 약점은 소뿔 사건 보다도 동맹도시들의 피해에 있었으며 그에 따른 '로마연합'의 이탈이었다.
대규모 전투는 한니발도 바라는 바였다. 로마군을 수차례 패배시켰고 약탈과 방화로 동맹도시들을 억누르고 포로로 잡은 동맹도시 시민들은 돌려 보내기도 하였지만 로마연합을 이탈하여 성문을 열거나 한니발한테 달려온 도시는 아직 하나도 없었다. 한니발은 로마와 대규모 결전을 해야할 시점이며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칸나회전 : 제4회전
기원전 216년. 민회에서 병력 증강을 의결한 후 로마군단은 로마 시민병 보병 4만, 기병 2천400명 도합 4만2천400명에 동맹국 병사는 보병 4만, 기병 4천800명 도합 4만4천800명을 보충하여 전체적으로는 8만7천200명으로 증강하였다.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11:1이다. 그당시 로마군은 기병의 확보에 애를 먹고 있었는데 말을 키우는 생산지는 중부 산악지대 일부와 시칠리아 지역에 국한되어 있어 절대적인 말의 생산숫자도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누미디아 기병이나 갈리아 기병처럼 어릴때 부터 말을 타는 민족이 아니었다. 그래서 갑작스런 기병의 증강도 아려울 뿐만 아니라 기량면에서도 한니발 기병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니발군은 자신이 에스파냐에서 대려온 정예보병 2만, 누미디아 기병 6천 도합 2만6천명에 갈리아 용병 보병 2만, 기병4천으로 도합 5만명 수준이었다.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4:1이었다.
이듬해 기원전 216년 신임 집정관으로 적극전파와 소극전파에서 각각 한명씩의 집정관을 선출하였는데 소극전파에서 귀족출신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선출되었고 적극전파에서는 평민출신인 '테렌티우스 바로'가 선출되었다. '바로'는 군무 경험이 거의 전무한 사병출신으로 대부대를 지휘해 본 경험이 전무하였다. 로마군은 기원전 218년에 6개군단에서 기원전 216년에는 13개 군단으로 증편되었다.
로마군이 군단편성을 끝내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남으로 이동하고 있을때 적정보고가 들어오기를 한니발군이 남쪽 '폴리아' 지방으로 이동중이라는 보고였다. 한니발은 포로 심문을 통하여 이미 신임 집정관의 성격,경력 등을 상세히 알고 있었으며 기병이 쉽게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원에서의 전투를 생각하고 있었다.
추격하는 로마군에게 달아나듯 남하를 계속하던 한니발은 '오판토'강이 '아드리아해'로 흘러드는 근처에 펼쳐진 평원까지 와서 행군을 멈추고 로마군의 식량저장소가 있는 '칸나'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본국 '카르타고'나 '에스파냐'에서 지원은 단 한번도 없었다. 재해권을 장악한 로마해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칸나'에서 식량을 조달한 한니발은 마을 뒤 언덕에 진을 치고 로마군을 기다렸다. 로마군 9만명이 한니발 진영 5만명과 10키로쯤 떨어진 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서로 대치했다. 정찰대끼리 간헐적인 접전이 있었으나 소규모 접전에 불과했다.한니발은 소규모 접전시 마다 갈리아 기병에게 로마군에게 패하는 척 도망을 치도록 하였다. 로마군은 소규모 접전에서 다소의 전과를 올리곤 하였는데 대부분 갈리아 용병이었다. 로마진영의 병사들은 절대적인 병력의 우세와 소규모 접전에서의 전과로 차츰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이런 상태라면 충분히 이길수 있다고 생각했다. 31세의 젊은 장군은 처음에는 져주고 막판에 모두 털어가는 고수의 수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로마군은 그것을 인식 못했다. 그는 로마군 병사와 사령관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 그는 자신이 원하는 전장터로 적을 이끌어 내려면 그들의 경계심을 풀도록 할 필요성이 있었다.
전투욕에 불탄 로마군은 진영을 '오토판'강 왼쪽 언덕까지 전진시켰다. 한니발도 당장 같은 쪽으로 진영을 이동시켰다. 양군의 거리는 2키로도 체 안되었다. 양 진영은 서로 노려보며 대치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한니발은 적극성도 없이 소규모 전투 결과에 대하여 낙심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31세의 젊은 장군은 40세가 훨씬 넘은 로마군 장수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군이 경계심을 누그뜨리기 위해서는 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했다.
이튼날 아침이 되자 로마군 진영에서 집정관 '바로'의 명령을 받은 로마군이 줄지어 나와 '오토판' 강 우측 구릉지대에 진을 쳤다. 강 좌측은 넓은 평야지대로 기병들의 활동이 유리한 점을 고려하여 울퉁불퉁한 언덕이 산재되어 있는 오른쪽 지대를 선택한 것이었다. 로마군 전체가 포진을 끝낸 것을 본 한니발은 자신도 전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로마군 정면에 진을 쳤다. 그러나 로마군이 가로 횡대로 일직선인 반면 한니발군은 중앙부가 불룩 튀어나온 활모양으로 변형된 진영을 편성했다.
한니발은 항상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전투를 했다. '트레비아' 전투나 '트레메시노'호반 전투도 마찮가지였다. 그가 원하는 곳으로 적을 유인했다는 점에서 '칸나'도 다를게 없었다.
로마군 사령관은 중앙종심을 중무장 보병으로 보강하여 적진의 중앙 돌파를 노린 것이었다. 그래서 완만한 경사의 좁은 지역을 선택하였던 것이었다. 이런 진행때문에 우익 기병 2천 400명은 강과 보병대 사이에 낀 좁은 지역에서 3배나 많은 적의 기병과 싸워야 하는 불리함을 안게 되었다. 기병이 잘 견디어 내고 보병이 중앙돌파에 성공 했을때 후방에 예비로 있는 1만명을 투입하여 전투를 단숨에 승리로 이끌어 가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레비아' 전투때와는 전혀 다른 진용을 짠 한니발은 그 수법에 넘어가지 않았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의도를 이미 간파하고 중앙부를 활모양으로 불룩하게 하여 갈리아 보병으로 전진시켰다. 접전이 벌어지면 갈리아 보병이 로마군의 중앙부를 견제하면서 뒤로 점차적으로 후퇴하는 동안 양익의 기병대가 로마군 기병대를 격파한 다음 양익포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단 갈리아 보병대가 로마 경보병대와 중무장 보병대의 공격을 잘 견디어 내 주면서 나중에는 안쪽으로 들어가는 형태로 로마 중무장 보병대를 아군 깊숙히 유인하는 것이었다. 갈리아 보병대가 임무를 수행하고 좌우측으로 빠지면 자신의 정예 중무장 보병대가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로마 중무장 보병과 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시간의 싸움이었다.
전투는 우선 양군이 정석대로 각자의 정면에 있는 적과 맞서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한니발의 좌익기병은 로마군 우익기병과, 중앙은 로마군 중앙의 경무장 보병과, 우익은 로마군의 좌익기병과 맞서는 식이었다. 하지만 양군에서 처음 접촉한 것은 활 모양의 진형을 이루고 있던 한니발의 갈리아 용병과 로마의 경무장 보병이었다.
이 싸움에서 양군의 격돌은 처음부터 로마군의 우세속에 전개된다. 이것을 본 로마 집정관 '바로'는 보병대 지휘를 맡고 있던 전직 집정관 '세르빌리우스'에게 중무장 보병대를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로마의 중무장 보병 전체가 육박해 오자, 갈리아 용병으로 구성된 한니발의 전위부대는 점점 뒤로 후퇴하였다. 가운데가 불룩하던 활모양의 한니발 진영이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활모양으로 바뀌었다. 로마 보병대의 중앙돌파에 되도록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만든 활모양의 진형이 효과를 발휘하도록 갈리아 용병들은 후퇴하면서도 잘 견디어 내고 있었다. 로마의 귀족 자제들로 편성된 우익기병은 3배나 많은 전력의 한니발 좌익 기병에게 밀리고는 있었지만 분전하고 있었다. 로마의 좌익 기병도 한니발의 누미디아 기병과 비슷한 숫자로 선전하고 있었다. 한편 로마 중보병의 맹공을 받은 갈리아 용병들이 침착성을 잃자 기세가 오른 로마군 중앙부는 중무장 보병과 경무장 보병이 한덩어리가 되어 후퇴하는 적을 열심히 추격하며 공격하고 있었다. 뒤로 물러나던 갈리아 용병들이 갑자기 좌우측으로 전선을 이탈했다. 그러자 한니발의 중무방 보병대가 나타났다. 정예 2만의 중무장 보병이 7만의 로마군 중무장 보병과의 접전에서 잘 견디어 내고 있었지만 보병전세는 점점 로마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나 반대로 기병전은 로마군이 밀리고 있었다. 로마 좌익 기병대가 누미디아 기병대의 공격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패주하기 시작하자 한니발의 작전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갈리아 용병과 경무장 보병대가 로마 기병대가 무너진 로마군 좌익부로 다가왔다. 로마 우익 기병도 무너져 흩어지자 한니발의 좌익기병 부대가 배후로 돌아와 공격하자 로마군 7만명은 5만의 한니발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다. 로마 시민인 중무장 보병대가 쉽게 항복할 리는 없었지만 한니발의 포위작전은 바로 섬멸작전이었다. 전 집정관 '세르벨리우스'도, 현집정관 '아이밀리우스'도 전사했다. 독재관 '파피우스'의 부관을 지낸 '마누티우스'도 전사했다. 기병이나 중무장 보병대로 참전한 원로원의원들 80명도 전원 전사했다. 극소수만이 한니발의 포위망을 뚫고 목숨을 건졌다. 포위작전도 완벽했듯 섬멸작전도 완벽했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의 섬멸을 실현하였다. 사령관 '바로'는 50기의 기병을 이끌고 포위망을 탈출하여 산길을 따라 서쪽으로 수십키로나 떨어져 있는 로마 식민도시 '베누시아'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보병 4천과 기병200명은 '칸나' 북쪽 20키로나 떨어진 '카사노'까지 도망갔다. 그들중 19세인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도 끼어 있었다. '트레비아' 전투후 에스파냐로 파견된 아버지가 '아이밀리우스' 집정관에게 아들을 맡겼기 때문이다. 젊은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뛰어난 전술을 접한 것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로마 패잔병은 1만도 체 되지 않았고 칸나전투에서 로마쪽 희생자는 7만이었으나 한니발은 희생자 5천 500명중 3분지2가 갈리아 용병이었다. 로마가 이런 참패를 맛본 것은 이 '칸나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
▲ 카르타고 언덕에서 바라본 튀니스 만 |
한니발은 전사자들로 부터 가치있는 물건을 빼았는데 이튼날 하루를 꼬박 소비했으며 승리를 알리기 위해 카르타고 본국에 보낸 그의 동생 '마고네'는 죽은 로마 병사들의 손가락에서 빼낸 금반지를 본국 요인들의 눈앞에 산더미 처럼 쌓아 올렸다고 한다. 로마 시민에게 금반지는 결혼 반지가 아니라 개인도장으로 크고 묵직하였다고 한다. 이런 반지가 7만개나 쌓였다면 그 높이가 얼마나 될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로마는 완패 소식을 조용히 받아 들였다. 집정관 '바로'가 패잔병을 수습하여 수도 로마로 돌아오자 원로원 의원들을 비롯한 모든 시민이 성문까지 마중나와서 노고를 치하했다. 로마시민들은 조용히 패전을 감내하며 누구를 비난하거나 입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이후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하면서 로마군을 가는곳 마다 무찔렀으며 16년 동안 로마인들에게는 전율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특히 세계 전쟁사에서 새로운 전략. 전술로 기록되고 있는 '칸내전투'에서 로마군 7만명을 전멸시켰고 그동안 열 명이 넘는 로마 집정관을 전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로마는 쓰러지지 않았다. 도시국가들로 구성된 로마연합은 건재하였고 가는 곳마다 로마군을 전멸시켜도 끝없이 계속 충원되는 로마군을 보면서 한니발은 로마연합을 해체하는 길만이 로마를 굴복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도시국가들은 한니발 편에 서지 않았고 로마 원로원을 포함한 로마 귀족과 지도층이 앞장서서 전쟁터에 참가하여 목숨을 던졌다. 로마 제국, 즉 로마연합의 모든 도시들이 계속 병력을 충원해 주었고 물자를 제공하였다. 한니발은 그 중 자기편으로 들어온 도시국가 카프카가 유일하였다. 카프카가 로마군의 공격을 받자 카프카를 구원하기 위해 도시 외곽 로마 방어진지를 공격하는 전투를 벌이면서 잠시 대치하는 시간을 이용하여 한니발은 일부 기병 병력만 대리고 잠시 수도 로마로 향했다.
로마는 비상이 걸렸다. 수도 방위군이 동원되고 방어준비에 분주하였다. 로마시는 공화상태에 빠졌다. 시민들이 한니발을 보기 위해 성벽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로마 가정에서는 아기가 울면 '한니발이 나타났다'고 하면 울던 아기도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는 아기에게 '호랑이가 나타났다!'하면 울음을 그치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그만큼 한니발은 로마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니발은 화살 사거리 밖에서 백마를 타고 천천히 수도 로마 성벽을 둘러보면서 많은 상념에 빠졌다. 로마인들은 성벽 뒤에서 숨을 죽이면서 한니발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 한니발은 공성전을 벌여 수도 로마를 점령하여도 결코 로마연합은 굴복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하들이 로마시를 공격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이야기 했지만 한니발의 최종 결론은 동맹도시를 해체하는 길만이 로마를 괴멸시킬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공성전에 자신도 없지만 시간이 걸리면 동맹도시들에 의해 역포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로마시를 점령해도 로마제국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후 한니발은 남부 지역 일대를 휘저으면서 동맹도시를 자신의 편으로 끌여들이기 위해 노력을 하였으나 대부분 실패하였고 로마군은 직접적인 접전을 피하고 뒤를 쫒아 다니기만 할 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집없는 5만의 장병을 거느리고 눈비를 맞으며 밤하늘의 별을 보며 노천에서 보내기를 16년, 로마타도를 위해 한니발은 분전을 하고 있었지만 고국 카르타고의 지원도 전무하였다. 또 이베리아 반도의 소식은 로마의 젊은 장수에게 연전연패하고 있다는 소식, 그리고 동생 하스두루발이 알프스를 넘어 지원군을 대리고 오다 로마군과의 접전에서 전멸되어 죽은 동생의 머리가 전달된 사실을 생각하면서 많은 회한에 빠졌을 것이다.
이처럼 한니발이 결정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지구전을 벌이면서 로마군과 꼬리를 물고 밀고 당기는 전술로 대치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리한 스키피오 장군이 로마로 개선하게 된다.
스키피오 장군의 카르타고 본토 침공
한편 로마의 젊은 장수 스키피오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한니발 본거지를 공격하여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 장군으로 돌아오자 원로원에서 스키피오는 자신을 한니발을 물리치는 대업을 수행하겠다고 자청하게 된다. 당시 로마군은 한니발과 결전을 피하면서 한니발의 꼬리를 물고 따라다니는 지구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원로원의 잠정적인 묵인하에 개인자격으로 시칠리아로 가서 카르타고 본토를 기습할 군대를 준비하게 된다. 병력과 군선을 징발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병력을 훈련시키는 등 수 년에 걸친 노력 끝에 군비를 증강한 스키피오는 배를 타고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본토를 기습하게 된다.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의 로마군이 북아프리카에 나타나자 국내 용병으로 대처하지만 적수가 되지 못하자 로마와 강화를 서두르는 한편 급히 한니발을 귀국하도록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에 한니발은 조국의 위급함에 부름을 받고 결국 16년간 누비던 이탈이아 반도를 떠나게 된다. 헤라신전에 동판으로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항구를 떠나면서 한니발은 나머지 병사들은 남겨두고 정예 1만 5천 명만 대리고 항구를 떠나게 된다. 그러자 남게 된 수많은 병사들이 로마군의 보복이 두려워 배를 타려고 아우성을 치자 활을 쏘면서 항구를 벗어난 한니발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백색의 헤라신전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기게 된다. 16년간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타도를 위하여 종횡무진하였건만 결국 로마는 굴복하지 않았고 모든 노력이 무위로 끝나게 된 현실을 무어라 생각했을까? 지금은 조국 카르타고가 위기에 처하여 돌아가고 있다. 사랑하던 하스두루발과 마고네 두 동생도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자신은 아무것도 이룬 것도 없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실을 가슴저리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니발 장군의 마지막 전투 '자마회전' 2 (0) | 2010.11.26 |
---|---|
한국의 역사 83 : 백제의 역사 29 (제19대 구이신왕) (0) | 2010.11.26 |
한국의 역사 82 : 백제의 역사 28 (제18대 전지왕) (0) | 2010.11.25 |
한국의 역사 81 : 백제의 역사 27 (제17대 아신왕 2) (0) | 2010.11.24 |
한국의 역사 80 : 백제의 역사 26 (제17대 아신왕 1) (0) | 2010.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