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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2 : 백제의 역사 28 (제18대 전지왕) 본문
한국의 역사 82 : 백제의 역사 28 (제18대 전지왕)
전지왕(腆支王. ? ~ 420년, 재위: 405년 ~ 420년)은 백제의 제18대 왕이다. 이름은 여영(餘映) 또는 영(映). 《일본서기》에서는 직지왕(直支王), 《삼국유사》왕력에서는 진지왕(眞支王), 또 《한원》에 인용되는 《송서》, 《통전》에서는 부여전(夫餘腆)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신왕의 맏아들이다.
기원전 18년 ~ 66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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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 |
공용어 | 고대 한국어 |
수도 |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
정치체제 | 군주제 |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
76만호(3,800,000명 추정) |
성립 | 기원전 18년 |
멸망 | 660년 |
초대 군주 |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
최후 군주 | 의자왕 641년 ~ 660년 |
성립 이전 | 마한, 부여 |
해체 이후 | 신라 |
주석 |
|
생애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신왕이 죽자 백제 왕실에서 내분이 일어났다고 한다.
일본에서 귀국하는 도중에 전지왕은 신하 해충(解忠)에게서 백제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을 알고 섬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 뒤 해씨세력은 내분을 일으킨 아신왕의 막내동생 설례를 죽이면서 전지왕을 즉위 시키고, 그 이후에 전지왕이 백제에 들어온 것으로 파악된다.
외교
동진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416년에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 백제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과의 우호 관계역시 긴밀히 하여 야명주를 보내온 일본의 특사를 후히 대접한 뒤 비단 열 필을 사은품으로 보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기타 특기할 만한 사항
해씨세력에 맞서 이복동생인 신(信)을 상좌평에 앉혀 권력의 편중현상을 예방한 것으로 보이는데, 상좌평이란 관직명은 이때 처음으로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 왕호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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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온조왕(溫祚王) | 온조(溫祚) |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 |
2 | 다루왕(多婁王) | 다루(多婁) | 기원후 28년 ~ 77년 | 온조왕의 아들. | |
3 | 기루왕(己婁王) | 기루(己婁) | 77년 ~ 128년 | 다루왕의 아들. | |
4 | 개루왕(蓋婁王) | 개루(蓋婁) | 128년 ~ 166년 | 기루왕의 아들. | |
5 | 초고왕(肖古王) | 초고(肖古) | 166년 ~ 214년 |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 |
6 | 구수왕(仇首王) | 구수(仇首) | 214년 ~ 234년 |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 |
7 | 사반왕(沙伴王) | 사반(沙伴) | 234년 |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 |
8 | 고이왕(古爾王) |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 234년 ~ 286년 | 개루왕의 차남. | |
9 | 책계왕(責稽王) | 책계(責稽) | 286년 ~ 298년 |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 |
10 | 분서왕(汾西王) | 분서(汾西) | 298년 ~ 304년 | 책계왕의 아들. | |
11 | 비류왕(比流王) | 비류(比流) | 304년 ~ 344년 | 구수왕의 차남. | |
12 | 계왕(契王) | 계(契) | 344년 ~ 346년 | 분서왕의 아들. | |
13 | 근초고왕(近肖古王) | 초고(肖古), 여구(餘句) | 346년 ~ 375년 |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 |
14 | 근구수왕(近仇首王) | 구수(仇首), 수(須) | 375년 ~ 384년 | 근초고왕의 아들. | |
15 | 침류왕(枕流王) | 침류(枕流) | 384년 ~ 385년 | 근구수왕의 장남. | |
16 | 진사왕(辰斯王) | 진사(辰斯) | 385년 ~ 392년 | 근구수왕의 차남. | |
17 | 아신왕(阿莘王) | 아신(阿莘) | 392년 ~ 405년 | 침류왕의 아들. | |
18 | 전지왕(腆支王) |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 405년 ~ 420년 | 아신왕의 아들. | |
19 | 구이신왕(久爾辛王) | 구이신(久爾辛) | 420년 ~ 427년 | 전지왕의 아들. | |
20 | 비유왕(毗有王) | 비유(毗有), 여비(餘毗) | 427년 ~ 455년 | 구이신왕의 아들. | |
21 | 개로왕(蓋鹵王) | 경사(慶司), 여경(餘慶) | 455년 ~ 475년 |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 |
22 | 문주왕(文周王) | 모도(牟都), 여도(餘都) | 475년 ~ 477년 |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 |
23 | 삼근왕(三斤王) | 삼근(三斤) | 477년 ~ 479년 | 문주왕의 아들. | |
24 | 동성왕(東城王) | 동성왕 |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 479년 ~ 501년 |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
25 | 무령왕(武寧王) | 무령왕 | 사마(斯麻), 여융(餘隆) | 501년 ~ 523년 |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
26 | 성왕(聖王) | 성왕 | 명농(明襛) | 523년 ~ 554년 | 무령왕의 아들. |
27 | 위덕왕(威德王) | 위덕왕 | 창(昌) | 554년 ~ 598년 | 성왕의 장남. |
28 | 혜왕(惠王) | 혜왕 | 계(季) | 598년 ~ 599년 | 성왕의 차남. |
29 | 법왕(法王) | 법왕 | 선(宣), 효순(孝順) | 599년 ~ 600년 | 혜왕의 아들. |
30 | 무왕(武王) | 무왕 | 장(璋), 서동 | 600년 ~ 641년 |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
31 | 의자왕(義慈王) | 의자 | 641년 ~ 660년 | 무왕의 아들. |
제18대 전지왕 실록
(?~서기 420년, 재위:서기 405년 9월~ 420년 3월, 14년 6개월)
온건주의자 전지왕과 해씨 세력의 득세
전지(腆支)왕은 아신왕의 맏아들로 <양서>에는 이름이 영(映)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직지왕으로 적혀있다. 아신왕 3년(394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아신왕 6년(397년)에 왜국에 인질로 보내졌다. 서기 405년 9월에 아신왕이 죽자 왜왕의 허가를 받아 환국하였으나, 이복 동생 혈레가 정사를 대신하고 있던 삼촌 훈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바람에 입국하지 못하고 섬에 머룰러야 했다. 그리고 얼마 뒤 해씨 세력과 이복 동생 신이 혈례를 제거하자 왕위에 올랐다.
서기 405년 (아신왕 재위 14년) 9월, 아신왕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삼국사기>는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지는 않고 있다. 다만 그해 3월 기사에 '흰 기운이 왕국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는 은유적인 내용이 보일 뿐이다.
아신왕이 죽을 당시 조정은 진씨 세력과 해씨 세력이 권력을 다투고 있었다. 두 세력 모두 외척으로 당대의 최대 파벌이었다.
해씨는 비류와 온조가 망명할 때 함께 온 씨족으로 부여 왕실 혈통이다. 때문에 그들은 백제 초기부터 조정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왕비를 배출하는 귀족 집안이다.
해씨가 조정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온조왕 41년 해루가 우보에 임명되면서부터 였다. 그 이전에는 온조의 재종숙부 을음이 우보였다. 즉 을음은 온조의 혈족으로 왕족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해루는 부여 사람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온조의 직계 혈족은 아닌 듯하다.
진씨 세력이 백제 조정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해씨보다 조금 늦은 다루왕 10년이었다. 이 때 북부를 관장하던 진희가 우보가 되면서 진씨 세력은 백제 조정의 주요 씨족으로 떠오른다. 진희에 대해선 부여 출신이라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마한 출신으로 보인다. 진씨는 마한의 귀족으로 백제의 마한 통합에 도움을 준 씨족으로 판단된다.
진희의 세력 확대 이후, 해씨 세력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 해루 이후 아신왕 대까지 해씨 일족으로서 주요 관직에 오른 인물은 비류왕 대의 병관좌평 해구뿐이다. 그에 비해 진씨 일족은 뚜렷한 족적을 드러낸다.
진씨 세력의 영향력은 초고왕 대의 뛰어난 장수 진과 이후에 급속도로 확대되었으며, 고이왕에서 진사왕까지가 절정기였다. 고이왕 대엔 명장 진충과 진무, 내두좌평이 된 진가 등이 있었으며, 비류왕 대엔 내신좌평 진의가 있었다. 또 근초고왕 대엔 왕비가 진씨였고, 조정좌평 진정이 정사를 좌지우지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으며, 근구수왕 대엔 그의 외삼촌 진고도가 내신좌평으로 정사를 도맡았고, 진사왕 대엔 병관좌평 진가모가 그 대를 이었다.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은근히 진씨 일족을 견제했다. 물론 이 때도 진무가 병관좌평에 올라 군사권을 쥐고 있었지만, 아신왕이 해씨 소생인 영(전지왕)을 태자로 삼은 것은 진씨 일족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엔 전지왕 이후에는 진씨 일족의 이름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는 전지왕의 즉위와 동시에 진씨 일족은 완전히 쇠락했다는 뜻이다.
전지왕 즉위와 진씨 일족의 쇠락 시점이 일치하는 것은 아신왕 사후에 일어났던 혈례의 반정과 무관하지 않다. 아신왕이 죽자, 그의 동생 훈해가 태자 영을 대신하여 정사를 대리하고 있었는데, 아신왕의 막내아들 혈례가 삼촌 훈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이 사건으로 조정은 한 차례 피바람이 몰아쳤으며 내분에 휩싸였다.
왜국에 가 있던 태자 영(전지왕)이 환국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삼국사기>는 태자 영이 부왕 아신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왜왕 응신천황에게 울면서 귀국을 요청하니, 왜왕이 1백 명의 군사를 내주어 태자를 보호하여 귀국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막상 고국에 도착한 영은 본토에 상륙하지 못하고 마중나온 한성 사람 해충이 말하기를 혈례가 반정을 일으켜 삼촌 훈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고하면서 당분간 섬에 머물러 있을 것을 권유했던 것이다.
태자 영은 그로부터 한동안 섬에 머물면서 한성의 상황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때 한성에서는 혈례 세력과 태자 세력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태자 세력은 해충, 해구, 해수 등의 해씨 세력과 이복 동생 신이었다. 해충과 해수가 영의 친척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들 해씨 세력은 태자 영의 외가 세력이 분명하다. 또한 이복 동생 신이 같은 편이 된 것도 신의 어머니도 해씨 일 가능성이 높다. 즉 당시 백제 조정은 태자 영의 외척인 해씨 세력과 그 반대 세력이 왕위계승권을 놓고 혈전을 치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해씨의 반대 세력은 누구였으며, 그들은 왜 혈례를 지원했을까? 그에 대한 답은 전지왕의 즉위 이후 한동안 진씨 세력이 조정 핵심에서 모습을 감추는 사실에서 찿을 수 있다.
진씨 세력은 고이왕 이후 약 160년 동안 백제 조정의 중추 세력이었으며, 주요 외척이었다. 그런데 전지왕 즉위와 함께 그들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다시 등장하는 것은 70년이 지난 삼근왕 대이다. 그래서 전지왕 이후 백제 조정은 해씨 세력이 장악하게 된다.
이런 사실은 혈례를 지원했던 세력이 진씨 세력이었으며, 혈례 또한 진씨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아신왕 사망 당시 백제의 군권은 병관좌평 진무가 쥐고 있었고 진무는 아신왕이 죽자, 왕권이 해씨 소생인 태자 영에게 돌아갈 것을 염려했을 것이고, 그래서 태자 영을 대신하여 정사를 관장하고 있던 훈해를 죽이고, 혈례를 왕위에 올렸던 것이다.
그러자 해씨 세력들은 대의 명분을 앞세워 병력을 일으켜 진무에게 대항하였고, 그 와중에 태자 영이 왜국에서 환국함으로써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태자의 환국으로 반정군은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고, 결국 진무의 군대를 무너뜨리고 혈례를 제거함으로써 태자 영은 우여곡절 끝에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왜국 볼모에서 백제 왕으로 등극한 전지왕
전지왕은 어린 나이에 왜국으로 인질로 가서 8년 동안 왜에 머물렀으며, 그 곳 여자 팔수부인과 결혼했다. 때문에 국내에서는 입지가 약하고, 주변 정세에도 어두웠다. 또한 해씨 세력에 의해 왕위를 되찿았기 때문에 권력이 모두 해충, 해구, 해수 등의 해씨 세력에게 집중되어 왕권은 미약하였다.
14년여의 전지왕 재위 기간 동안 전쟁 기사가 한 번도 보이지 않는 점으로 미뤄, 그는 해씨 세력의 눈치를 보며 주도적인 왕권을 행사하지도 못했고 대외문제도 자신이 결정하지도 못하는 온건주의자였던 모양이다. 때문에 중국의 동진을 비롯하여 왜, 가야, 신라, 고구려 등의 주변 국가들과 화친을 유지했다. 특히 첯부인이 왜국여자이고, 그녀가 왜 왕실의 공주였기에 왜국과는 각별한 관계를 형성했던 모양이다.
대외 관계와 관련된 기사로는 <양서> 에 의희(405~418년) 연간에 동진에 노예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에 재위 5년에 왜국이 야명주를 보내왔다는 것과 재위 12년에 동진의 안제가 사신을 보내와 그를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에 책봉했다는 내용, 또 재위 14년에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흰 포목 열 필을 보냈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국방 관련 기사로는 재위 13년 7월에 북부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게 하고, 병관좌평 해구를 시켜 일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는 것이 유일하다.
그를 왕위에 앉히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던 이복 동생 부여 신을 특별히 예우하여 국상격인 상좌평에 임명하였는데, 이는 상좌평 제도의 효시였다. 재위 4년(408년)에 상좌평에 임명된 부여 신은 비유왕 3년까지 20여 년 동안 그 자리에 있게 되는데, 전지왕은 이름뿐이었다.
<삼국사기>는 그가 재위 16년 (420년) 3월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엔 전지왕이 응신천황 25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 기년으로 294년이며, 2갑자를 더한 연도로는 414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응신천황 39년 2월에 백제의 직지왕(전지왕)이 여동생 신제도원과 7인의 부녀를 왜에 보내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같은 책에서 죽은 것으로 기록한 직지왕이 살아 있는 것으로 묘사된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는 편찬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전지왕의 가족들은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왕비는 본처인 구이신왕의 어머니 팔수왕비와 비유왕의 어머니 해씨가 있었으며, 자식은 구이신왕과 비유왕만 언급되어 있다.
구이신왕의 어머니 팔수왕비는 그 이름으로 보아 왜인으로 판단되고 인덕천황 즉위 관련 기록이 등장하는 팔전 황녀와 자매 사이인 듯하다. 그녀가 팔전과 자매지간이라면 응신천황의 딸이라는 것이며 이는 곧 전지왕이 응신천황의 사위가 되는 셈이다.
그녀는 전지왕이 일본에 인질로 머물러 있을 때 시집왔으며, 전지왕이 환국시 이미 임신한 몸이었다.
전지왕이 죽고 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자, 그녀가 권력을 쥐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으며, 임나의 권력자 목만치와 밀통하여 조정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돌째 부인 해씨는 <삼국사기>에는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비유왕이 전지왕의 서자라는 기록이 있어, 전지왕에게 다른 부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며, 당시 정황으로 보아 그녀는 해씨 가문 출신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일설에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구이신왕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겨우 6년여 기간 재위한 뒤 죽었기 때문에 비유왕을 전지왕의 서자로 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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