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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0 : 백제의 역사 26 (제17대 아신왕 1)

두바퀴인생 2010. 11. 23. 01:54

 

한국의 역사 80 : 백제의 역사 26 (제17대 아신왕 1)

 

제17대 아신왕

아신왕(阿莘王, ?~405년, 재위 392년~405년)은 백제의 제17대 왕이다. 침류왕(枕流王)의 맏아들로 아방왕(阿芳王) 또는 아화왕(阿華王)이라고도 부른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
웅진 (476년 ~ 538년
)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생애

침류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리므로 숙부인 진사왕이 대신 즉위하였으나 392년 진사왕이 죽자 왕위를 승계했다.

 

재위 기간 동안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영도하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응하기 위하여 부심하였는데, 패수(浿水)와 수곡성(水谷城:황해도 新溪) 등 국경지대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번번이 패하였다.

 

397년에 태자 전지(腆支)를 일본에 볼모로 보내어 화친을 맺어 고구려의 남하를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듬해 쌍현성(峴城)을 쌓고 403년에는 신라를 공략하였다.

 

405년에 붕어하고,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전지가 왕위에 올랐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

 

 

 

 

 

 

제17대 아신왕 실록

(?~서기 405년, 재위:서기 392년 11월~ 405년 9월, 12년 10개월)

 

굴욕의 왕, 아신왕과 백제의 위축

아신(阿辛)왕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며 진사왕의 조카이다. <일본서기>에는 아화왕(阿花)왕이라고 적혀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아방(阿芳)'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양서>에는 이름이 '수(須)'라고 되어 있다. 그는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가 밤을 밝혔다고 한다. 또한 의지와 기풍이 호방하고, 매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했다고 전한다.

 

385년 부왕 침류왕이 죽었을 때, 그는 너무 어려 삼촌 진사왕에게 왕위를 넘겨줘야 했다. 그러나 391년에 세력을 규합하여 진사왕의 힘을 무력화시킨 다음에 392년 11월에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진사왕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그는 왜국의 힘에 의지함으로써 스스로 외세를 끌여들인 이 사건은 광개토왕릉비문에서 '신묘년(391년) 이래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벡제)을 쳤다.'고 표현될 정도로 주변 국가들의 비아냥거림을 받았다.

 

아신왕은 즉위하자마자 곧장 관미성 회복 작전에 나섰다. 재위 2년(393년) 정월에 그는 외삼촌 진무를 좌장에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업무를 맡겼다. 그리고 8월에 진무에게 1만의 군사를 내주어 관미성을 공략토록 했다. 진무는 선전하여 관미성을 포위하는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아신왕은 이듬해인 394년 7월에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수곡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고구려 병력 5천에게 밀려 쫓겨오고 말았다. 한편 광개토왕은 백제의 잦은 침입을 막기 위해 관미성 주변에 7개 성을 쌓아 방어벽을 형성하였다. 그런 가운데 아신왕은 395년 8월에 진무를 앞세워 또 한차례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광개토왕이 직접 병력 7천을 이끌고 맞서왔다. 고구려와 백제 양군은 패수에서 한판 혈전을 벌였는데, 이 싸움에서 진무는 병력 8천을 잃고 쫓겨오고 말았다.

 

잇따른 패배에 분노한 아신왕은 패수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그해 11월에 병력 7천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으나, 폭설이 내려 회군하고 말았다.

 

이렇듯 백제가 관미성을 회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공격해오자, 광개토왕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아신왕이 청목령까지 올라와 진을 쳤다가 폭설 때문에 돌아간 이듬해 396년에 광개토왕은 수군 수만을 동원하여 서해를 가로질러 백제 본토 원정에 나섰다. 관미성을 손안에 넣은 광개토왕은 황하 이북의 대륙백제를 무력화시켰다고 판단하고 백제의 심장부인 한성 공략에 나섰던 것이다.

 

백제는 광개토왕이 수군을 동원하여 한성으로 급습해 올 줄은 미쳐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 군의 급습은 백제 조정을 당황시키기 충분했다. 광개토왕은 아리수(한강) 북쪽에 상륙하여 단번에 한강 이북의 58개 성 700개 촌을 모두 차지하고, 여세를 몰아 한강을 도하하여 한성으로 밀려들었다.

 

한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아신왕은 성문을 열고 나가 광개토왕에게 무릎을 끓고 항복하였다.

 

항복한 아신왕은 왕족과 중신 열 명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하지만 분을 이기지 못한 아신왕은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는 치욕을 만화하고 잃은 영토를 되찿기 위해 왜국과 연합전선을 펼 계획이었다. 그래서 397년 5월 태자 영(전지왕)를 볼모로 보내는 치욕스런 조건으로 왜국과 연합전선 구축에 합의했다. 이미 광개토왕의 무릎 밑을 기며 치욕이란 치욕은 다 경험한 만큼 그는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고구려에 설욕만 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신왕은 그야말로 복수의 화신이 되어 미친 듯이 전쟁 준비에만 매달렷다. 397년 7월에 대대적인 군대 사열을 실시하여 전쟁을 예고했고, 398년 2월에는 좌장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승격시켜 군 기강을 확립했다. 다음 달인 3월엔 공격에 앞서 쌍현성을 쌓고 수세에 몰릴 때를 대비했다. 마침내 군대를 출동시켜 한산(남한산) 북쪽 목책에서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아신왕은 밤중에 유성이 백제군 진영에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불길한 마음에 출동을 중지했다.

 

그렇다고 아신왕의 전쟁 의지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반 백성들에까지 활쏘기를 연습시키며 총력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민가의 장정과 말을 대대적으로 징발하고, 매일같이 군사 훈련을 시켰다. 그러자 백성들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신라로 도망가기 일쑤였고, 그 때문에 호구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신라의 내물왕은 392년 정월 조카(실성왕)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이렇게 되자, 백제는 왜와 가야를 끌여들여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고구려에 대항했다. 그런 상황에서 백성들이 신라로 도망가자, 백제의 신라에 대한 적대감은 더욱 깊어졌다.

 

그런 악감정은 마침내 399년에 폭발하였는데, 백제,왜,가야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였다.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순식간에 전국이 초토화되어 위기에 몰렸고, 내물왕은 급히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구원 요청을 받은 광개토왕은 이듬해인 400년에 병력 5만을 동원하여 신라구출에 나섰다. 고구려군이 신라 땅에 도착했을 땐 왜와 백제, 가야군이 신라 전역을 거의 장악한 상태였고, 도읍인 서라벌까지 유린되고 있었다.

 

그렇듯 신라 합병을 눈앞에 두었던 백제를 비롯한 연합군은 5만의 고구려 대군이 밀려오자, 그 위세에 밀려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곳곳에서 신라군이 기세를 회복하고 반격을 가하였다. 그 결과 왜는 바다를 건너 쫓겨갔고, 백제도 뒤로 물러나 수비 형태를 갖춰야 했으며, 가야는 종발성을 내주는 등 크게 피해를 입었다.

 

신라 점령에 실패한 아신왕은 402년에 왜에 사신을 보내 이번에는 아예 고구려 본토를 공략할 것을 제의한다. 그리고 404년에 왜와 백제는 대선단을 형성하여고구려 공략에 나선다. 물론 여기에는 가야 병력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구려는 후연과 영토를 다투다가 신성과 남소를 빼앗긴 뒤, 영토 회복을 위해 후연의 평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백제 등 연합군은 이런 시기에 공격이 이루어졌다. 일차적인 공격 목표는 대방 지역의 고구려군이었다. 이 대방 지역은 관미성 주변으로 황하와 발해만이 만나는 지역으로 비정된다. 백제는 우선 이 지역을 먼저 되찿고, 이어 하북으로 진출할 요량이었다. 고구려는 후연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대방 지역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고 이에 백제는 쉽게 대방 지역을 탈취하였다.

 

대방 지역을 손에 넣은 백제 연합군은 곧장 평양으로 쳐들어 갔다. 후연과 싸움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던 고구려군은 백제 연합군의 공격에 치명타를 입고 평양의 안위를 염려하여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후연이 고구려를 반격하였다. 그러자 광개토왕은 위기를 의식하고 직접 친위부대를 이끌고  백제 연합군에 맹공을 가하였다. 광개토왕의 기세에 눌린 백제 연합군은 결국 평양공략을 포기하고 퇴각해야 했다.

 

이렇듯 영토 회복에 심혈을 기울어온 아신왕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한편 왜국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국가 주권마저 크게 훼손하는 결과를 남기고, 405년 9월 한을 품고 생을 마감하였다.

 

아신왕의 가족은 비교적 자세한 편이다. 부인 성씨는 기록이 없으나 해수와 해구를 내법좌평과 병관좌평에 임명하였고, 그들이 모두 왕의 친척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신왕의 정비는 해씨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또 전지왕에게 이복 동생 신(信)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해씨 이외에도 다른 부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식은 부인 해씨에게서 맏아들 전지왕과 딸 신제도원, 다른 해씨 부인에게서 둘째 신을, 그리고 진씨 부인에게서 막내아들 혈례를 얻었다.

 

부여 신(?~429년)

부여 신은 아신왕의 아들이며, 전지왕의 이복 동생으로 누구 소생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다만 그가 해씨 세력과 거사를 도모한 점으로 미뤄, 어머니도 해씨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전지왕 등극 이후에 내신좌평에 오른 것으로 보아 혈례를 제거하는 데 주도적 역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는 백제 역사상 최초로 상좌평에 오른 인물로 상좌평은 재상과 같은 위치로 군사와 정사를 모두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명실공히 국상이었다.

 

그는 전지와 3년인 407년에 상좌평에 올라 429년에 죽기까지 무려 22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으며, 전지왕과 구이왕 대의 정치가 모두 그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음을 알 수 잇다.

 

부여 혈례(?`405년)

부여 혈례는 아신왕의 막내아들이며, 누구 소생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그는 아신왕이 죽은 뒤 정사를 대리하고 있던 삼촌 훈해흘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전지왕은 그 사실을 모르고 일본에서 귀국하였다가 한성 사람 해충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전지왕은 혈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섬에 머물며 함께 온 왜군들로 하여금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전지왕이 섬에서 그렇게 머물고 있는 동안 한성에서는 다시 한 번 반정이 일어나 혈례를 제거하고 전지왕을 맞아들였다.

 

<삼국사기>엔 혈례를 제거한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전지왕에게 혈례의 반란 소식을 알린 해충, 또 전지왕 3년에 내법좌평으로 임명된 해수, 병관좌평으로 임명된 해구 등, 해씨 세력과 내신좌평을 거쳐 전지왕 4년에 상좌평에 임명되는 이복 동생 부여 신이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모두 해씨 세력이었던 점으로 보아 혈례는 그 이전의 외척 세력인 진씨 세력의 후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혈례의 어머니 또한 진씨 출신일 것으로 판단된다.

 

신제도원(생몰년 미상)

<일본서기>에 신제도원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직지왕(전지왕)의 누이동생이 언급되고 있다. 신제도원은 이름이 아니고 일종의 시호로 보이며, 응신청황 39년에 그녀는 7인의 부녀를 대리고 왜에 들어가 천황을 받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가 전지왕의 누이라면 당연히 아신왕의 딸이다.

 

그녀가 어떤 이유에서 왜에 건너갔는지는 분명치가 않으나 <일본서기>는 전지왕이 보낸 것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신제도원이 언급되는 응신천황 39년은 서기 428년이며, 백제의 비유왕 2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녀를 왜에 보낸 사람은 전지왕이 아니라 비유왕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