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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6 : 백제의 역사 22 (제13대 근초고왕 5) 본문
한국의 역사 76 : 백제의 역사 22 (제13대 근초고왕 5)
대왜 관계와 칠지도
근초고왕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에 이르러 양국 관계가 활기를 띤 것만은 분명하다. 이 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엔 전무하고,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전한다.
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신공황후 46년(서기366년)에 이뤄졌다. 당시 왜는 탁순국(위치 미상)에 사신 시마노스구데를 파견하였다가 백제가 왜와 통교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시마노스구데는 근초고왕에게 부하 니하야를 파견하여 근초고왕을 만나게 하였다. 근초고왕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많은 선물을 안겨 돌려보냈다. 이듬해 신라 사신 편에 구저, 미주류, 막고 등 세 사람을 딸려 보냈다. 이 중 막고는 <삼국사기> <<백제본기>>편에 나오는 막고해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세 명의 백제 사신을 맞이한 신공황후는 몹시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왕이 바라고 있던 나라의 사람이 지금 내조하였다. 천황을 만나지 못한 것이 참으로 통탄스럽다."
황후의 이 말을 지켜보던 군신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왜왕실은 오래 전부터 백제와 통교하기를 희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도 백제는 왜와 꾸준히 사신을 교환하였고, 신공황후 52년(372년)에 그 유명한 칠지도가 보내졌다. 이 때 칠지도와 함께 칠자경을 비롯하여 여러 진귀한 물건들이 함께 보내졌다고 한다.
칠지도는 곧은 칼날 좌우로 각각 가지칼이 세 개씩 있는데, 도합 7개의 칼날이 있다 하여 칠지도라 하고, 여석 개의 가지칼이 있다 하여 '육차모'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지금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다. 이소노카미 신궁의 칠지도는 단철로 만든 양날 칼인데, 몸체 전후면에 60여자의 명문이 상감되어 있고, 그 외곽은 금선으로 돌러쳐저 있다.
다음은 칠지도의 명문 왜곡에 대한 내용이다.
칠지도 앞 뒤면
일본(日本)의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석상신궁(石上神宮)에는 백제왕이 왜왕(倭王)에게 보낸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명문(銘文) 중 일부가 예리한 도구에 의하여 글자가 손상되어 있다.
「泰( )四年(五)月十( )日丙午正陽造百練( )七支刀( )辟百兵宜(復)供侯王( )( )( )( )作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註 ( ) 안의 글자는 후에 학자들이 보충해 본 것이다.]
위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을 나누어 해석해 본다.
泰( ) 四年
칠지도(七支刀)를 만든 해의 연호(年號)이다. 근초고왕 재위시기(A.D 346 - 375년)에 나오는 중국왕조 연호 중 "太"나 "泰"가 나오는 연호는 태화(太和) 밖에 없다(참고 : 太나 泰는 같이 쓰였다). 그런데 백제와 동진(東晋)과의 교류는 A.D 372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그 3년 전에 벌써 백제가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泰( ) 四年은 동진(東晋)의 연호가 아니고 근초고왕 시기 백제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연호로 추정된다.
(五)月十 (六)日丙午正陽
칠지도(七支刀)를 만든 월일이다. 학자들은 "( )월"을 5월로 판독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漢), 위(魏), 진(晋) 시기에 주조한 검 등의 명문(銘文)에 "五月丙午日中(또는 正陽)"이라는 길상구(吉祥句)가 많이 나오는데, 칠지도 문구로 보아 "五月丙午正陽"도 길상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양(正陽)은 한낮을 가리킨다.
고대의 신앙은 하늘에 있는 태양을 하늘나라 임금(天帝)라 믿고 지상의 임금은 천제의 아들(天子)이라 믿었다. 한(漢), 위(魏), 진(晋) 시기에 만들어진 검과 거울의 명문에 불(火:太陽=天帝)과 관계가 있는 오월(五月), 병오(丙午), 일중(日中), 정양(正陽)이라는 문구가 자주 나오는 것은 고대의 신앙과 관계가 깊다. 논형(論衡)이나 수신기(搜神記)에는 위세품인 칼이나 거울을 만들 때 불(태양=천제)의 기운을 가장 많이 받기 위하여 5월 병오일 한낮(日中,正陽)에 만든다고 적혀 있다.[(論衡 率性篇 第八 "陽燧取火於天 五月丙午日中之時 消鍊五石 鑄以爲器 磨礪生光 仰以嚮日 則火來至 此眞取火之道也), (搜神記 卷十三 "夫金之性一也 以五月丙午日中鑄爲陽燧"].
칠지도 제작월을 5월로 보면, 제작일은 십(육)일이다. 병오일이 제작일이 아닌 이유는 병오(丙午)는 고대의 신앙에 따라 불(태양=천제)과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관용어이기 때문이다. 즉 칠지도는 5월 십(육)일에 만들어졌다.
造百鍊( )七支刀
위 "造"는 동사로 사용되었고, "百"은 100이라는 뜻보다 모든, 아주 많은, 여러번이라는 뜻이며, "百練"은 칼의 도명(刀銘)에 주조와 관련된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학자들은 괄호 안의 글자를 "鐵"의 옛 글자로 보고 있다. 위 문구는 여러 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 )辟百兵
위 "辟"는 물리칠수 있다는 뜻이다. "兵"은 앞의 길상구(吉祥句)와 관련하여 이 문구도 길상구(吉祥句)로 보면 병란(兵亂)이라는 뜻이 된다. 이 문구는 칠지도(七支刀)가 모든 병란을 물리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문구는 은근히 백제왕의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 백제왕이 만들어 보내는 칠지도를 받은 왜왕(당시 일본열도는 천황공백기이므로 100여개 소국 중 어느 왜왕)에게는 백제의 위세를 겁내어 감히 덤벼드는 나라가 없을 것이니 너희 나라가 병란에 휩싸이지 않고 평안해 질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宜(復)供侯王
위 "宜"는 동사로 보아 ∼함이 마땅하다는 뜻이다. 괄호 안의 글자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異見)이 많은데 학자들은 대체로 "供" 또는 "復" 자(字)로 보고 있다. 위 문구에 쓰인 "復"의 의미는 안정, 편안의 뜻이고, "供"은 주다는 뜻이며, "侯王"은 주로 고위관리나 신분이 높은 사람의 "刀"나 "鏡"의 명문(銘文)에 사용되었다. 위 문구의 의미는 칠지도(七支刀)를 후왕(侯王)인 왜왕(倭王)에게 주어 왜왕을 편안케 함이 마땅하다는 뜻이다.
( )( )( )( )作
사학자들은 훼손된 글자를 만든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先世以來未有此刀
위 문구는 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다는 뜻이다.
百濟王世(子)奇生
"奇生"은 진기(珍奇)한 것이 생겼다는 뜻이다(奇生謂生奇質也. 馬融의 長笛賦 注). 위 문구는 백제 왕세자(王世子)에게 (칠지도) 모양과 유사한) 진기(珍奇)한 칼이 생겼다는 뜻이다.
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위 "聖音"의 "聖"은 극존칭(極尊稱)을 나타내는 글자이고, "音"도 고대에 높임에 사용되었는 글자이므로, "聖音"은 구태백제왕(仇台百濟王)을 가리킨다. 그리고 "故爲倭王"은 “일부러 왜왕(倭王)을 위하여”라는 뜻이고, "旨造"는 (성음의) 뜻으로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이며, "傳示後世"는 후세(後世)까지 전하여 보여라는 뜻이다. 위 문구는 성음(구태백제왕)이 일부러 왜왕(倭王)을 위하여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다는 뜻을 후세(後世)까지 전하여 보여라는 뜻이다.
위 내용을 종합하면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의 뜻은 아래와 같다.
「泰( ) 4년 5월 ( )일 정오에 여러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여러 병란을 물리칠 수 있으므로, 후왕(侯王)에게 주어 후왕이 편안하도록 함이 마땅하다..중략..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에게 진기(珍奇)한 칼이 생겼기에, 성음(聖音)께서 (그것을 보시고) 일부러 왜왕(倭王)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뜻을 후세까지 전하여 보여라.」
위 칠지도 명문은 백제왕이 칠지도를 후왕(侯王)인 왜왕(倭王)에게 하사(下賜)하는 내용이다.
칠지도에 관한 내용은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神功皇后本紀) 52년조에 나온다.
「신공황후 52년 가을 9월 정묘 삭 병자(10일) 구저 등이 천웅장언을 따라왔다. 칠지도 1구, 칠자경 1면 등 각종의 중보를 바쳤다. 이어 말하여 "신의 나라의 서쪽에 강이 있습니다. 수원은 곡나의 철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 먼 곳은 7일을 가도 이르지 못합니다. 그 물을 마시고 그 산에서 제철하여 길이 성조에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손자인 침류왕에게 일러"지금 내가 통하고 있는 귀국은 하늘이 열어주신 바이다. 이로써 천은을 내리시고, 해서를 떼어서 나에게 주셨다. 이 때문에 국기가 영원히 단단하다. 너도 마땅히 화호를 거두고, 토산물을 모아서 봉헌하기를 끊이지 않는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매년 계속하여 조공하였다. 五十二年秋九月丁卯朔丙子 久氐等從千熊長彦詣之 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 及種種重寶 仍啓曰 臣國以西有水 源出自谷那鐵山 其邈七日行之不及 當飮是水 便取是山鐵 以永奉聖朝 乃謂孫枕流王曰 今我所通 海東貴國 是天所啓 是以 垂天恩 割海西而賜我 由是 國基永固 汝當善脩和好 聚斂土物 奉貢不絶 雖死何恨 自是後 毎年相續朝貢焉」[註 "손자인 침류왕에게 일러 운운" 문구를 보면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준 시기는 근초고왕 때이다. 위 문구는 2가지 목적으로 왜곡한 것인데, 하나는 4세기 근초고왕 재위시기에 백제왕으로부터 칠지도를 받은 왜왕이 마치 신공황후인 것처럼 꾸며 신공황후를 우상화 할 목적과 다른 하나는 백제 초고왕 때 인물인 구저 등이 마치 근초고왕 때 인물인 것처럼 왜곡하여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시대의 인물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왜국이 백제 초고왕, 구수왕 시대[신공황후 재위시기에 해당한다.]에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는 흠명천황본기 문구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칠지도는 제작년월일 등이 훼손되어 있다. 일본인 누군가가 신궁(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귀중(貴重)한 물품인 칠지도(七支刀)를 훼손한 것은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왜곡과 관계가 있다.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의 지배층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나라 이름을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일본국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백제계 안만려(安萬侶)에게 일본서기를 짓게 하였는데, 안만려가 일본서기를 지으면서 가장 중점을 두어 왜곡한 부분은 일본열도 왜와 백제와의 관계였다. 일본서기 저자는 일본국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일본열도 왜가 백제의 후국(侯國)이었는 사실을 감추고 거꾸로 일본열도 왜가 백제의 종주국이었는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하였다.
일본서기 저자가 다음으로 중점을 두어 왜곡한 부분은 일본열도왜와 신라와의 관계였다.
일본서기를 만들 당시 일본국의 지배세력은 백제 유민들이었고, 이들은 신라에 대한 패배감과 반감이 아주 강하였다. 그 때문에 백제계인 일본서기 저자 안만려는 일본열도 왜가 신라를 정벌한 사실이 있는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하여 마음으로나마 백제 유민들의 한(恨)을 달래고 패배감을 극복하려 하였다.
일본서기 중 왜곡이 가장 심한 신공황후본기를 보면 섭정전 연도 조에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이어서 고구려왕과 백제왕으로부터도 복속을 맹세받았다고 적혀 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는 위에 나온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가 한반도에 있었는 나라가 아니고 대마도에 있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고대에 한반도에서 대마도나 일본열도로 이주한 무리들은 이주한 곳에 소국(小國)을 세우고 나라 이름으로 근국(根國)의 이름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서기 저자는 신공황후가 대마도에 있는 신라계, 백제계, 고구려계 소국을 정벌한 사실을 이용하여 그 사실에다 한반도의 신라 역사를 적은 구 신라기에서 왜(倭)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는 사실을 발췌하여 이를 신공황후본기에 가필해 넣음으로써 신공황후가 마치 한반도의 신라, 백제, 고구려를 정벌한 것처럼 신공황후본기를 왜곡하였다. 또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왜곡하기 위하여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52년조에 백제왕이 신공황후에게 칠지도를 바친 것처럼 거꾸로 왜곡해 놓았다.
그렇다면 칠지도 명문 훼손과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왜곡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52년조에는 신공황후가 백제로부터 칠지도를 받았다고 적혀 있고, 석상신궁(石上神宮)에는 칠지도가 보관되어 있다.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 도신(刀身)에는 전면에 34자 후면에 27자 총 61자가 금(金) 상감기법(象嵌技法)으로 새겨져 있는데, 칠지도 명문에는 연호(年號)와 제작월일이 훼손되어 있다.
泰( ) 四年 ( )月十( )日丙午正陽
누가 무슨 목적으로 연호(年號)와 제작월일을 훼손하였을까?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20년조(A.D 173년)에는 왜(倭)의 여왕 비미호(卑彌呼)가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고 적혀 있고(二十年 夏五月 倭女王卑彌乎 遣使來聘),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전(倭傳)에는 신공황후가 비미호(卑彌呼)로 적혀 있는데, 비미호는 A.D 247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다(正始 八年 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宮呼素不和 遣倭載斯 烏越等詣設相功擊狀 遣塞曹椽史張政等因詔書 黃幢 拜假難升米爲檄告喩之 卑彌呼以死). 즉 비미호가 실제 재위한 연도는 A.D 173년경부터 247년까지이다.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A.D 200년부터 섭정(攝政)을 시작하여 269년에 죽은 것으로 적혀 있으나, 삼국사기 등을 참조하면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전(倭傳) 내용이 더 정확하다.
일본인 누군가는 석상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七支刀)와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神功皇后本紀) 52년조에 나오는 칠지도가 동일한 칠지도인 것으로 만들어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의 신빙성을 높이려 하였는데, 만약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의 제작연월일이 들어나면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는 신공황후가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들통나게 된다. 따라서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와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52년조에 나오는 칠지도가 동일한 칠지도인 것처럼 왜곡하는데 장애가 되는 칠지도의 명문(銘文)의 연호(年號)와 제작월일을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누군가가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의 명문(銘文)과 제작월일을 훼손한 것은 칠지도 명문 중 신공황후본기 52년 9월조 내용과 상충되는 부분을 훼손하여 신공황후가 재위 52년 9월에 백제로부터 칠지도를 받았다고 왜곡한 것이 들통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왜국에서는 칼과 거울이 왕(王)의 상징이었다.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에는 신공황후가 백제로부터 칠지도(七支刀), 칠자경(七子鏡) 등 각종 중보(重寶)를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고, 일본서기 신대(神代)에는 신보(神寶)로 백동경(白銅鏡), 십악검(十握劒), 구악검(九握劒), 팔악검(八握劒), 팔지경(八咫鏡), 초치검(草稚劒) 등이 나오며, 수인천황본기(垂仁天皇本紀)에는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가져온 소도(小刀), 일경(日鏡) 등을 신보(神寶)로 보관하였다는 내용이 나오고, 중애천황본기에(仲哀天皇本紀)는 "꿇어 앉아 천자의 검경(劍鏡)의 새부(璽符)를 올리고 재배하였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처럼 고대 일본에서는 칼과 거울이 왕의 상징이었다.
[參考 :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의 명문을 훼손한 사람은 A.D 1873년부터 1877년까지 석상신궁(石上神宮)의 대궁사(大宮司)를 지낸 관정우(菅政友)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석상신궁의 물품목록에 육차모(六叉鉾)로 적혀 있었는데도 그는 칠지도(七支刀)라고 불렀고, 그가 대궁사(大宮司)로 재직할 때 칠지도의 녹을 닦아 내었고, 칠지도 명문 앞 부분의 "태( )4년"을 "태시4년"으로 읽어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의 신공황후 생존연도에 맞추었고, 또 "( )월"을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52년조에 맞추어 "9월"로 읽었으며, 그는 "태시 4년은 한토의 연호로써 진의 태시 4년은 6월 11일, 8월 12일, 9월 13일 어느 것이나 병오(丙午)이며..중략..이 해는 우리 신공황후 섭정 68년 무자(戊子)에 해당한다"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즉 관정우는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를 신공황후가 받은 것처럼 조작하기 위하여 칠지도 명문의 연호를 훼손하여 태시 4년으로 읽고, 제작월을 훼손하여 "九월"로 읽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에는 신공황후가 비미호(卑彌呼)로 적혀 있는데, 비미호는 A.D 247년에 죽었다. 만약 관정우 주장대로 신공황후가 백제로부터 칠지도를 받은 연도가 "泰始 四年(A.D 268년)"이라면 이 연도는 신공황후가 죽은 지 21년 후이다. 또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52년조에 "그리고 손자인 침류왕에게 일러" 문구가 나온다. 이 문구에 의하면 왜왕이 백제왕으로부터 칠지도를 받은 시기는 백제 근초고왕 때이다. 그런데 근초고왕 재위시기는 A.D 346년부터 375년까지이다. 즉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재위시기가 아니다. 또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는 금(金) 상감(象嵌) 기법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고대 한반도의 금 상감 기법은 빨라야 4세기에 나타나고 5-6세기 유물에서 주로 나타나므로, 칠지도에 금 상감 기법으로 글자를 새긴 시기는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신공황후 재위시기가 아니다. 따라서 신공황후가 백제왕으로부터 칠지도를 헌상받았다고 적혀 있는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52년조 문구는 조작이다. 관정우는 자기 딴에 칠지도 문구를 훼손하여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의 신빙성을 높이려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아무 소득없이 귀중한 칠지도만 훼손한 결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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