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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9 : 백제의 역사 25 (제16대 진사왕)

두바퀴인생 2010. 11. 22. 01:34

 

 

 

한국의 역사 79 : 백제의 역사 25 (제16대 진사왕)

 

제16대 진사왕

진사왕(辰斯王, ?~392년, 재위 385년~392년)은 백제의 제16대 왕이다.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아이부인(阿爾夫人)이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
웅진 (476년 ~ 538년
)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생애

나이 어린 아들을 남겨 두고 침류왕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죽자, 조카 아신 대신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아신이 어려 대신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는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389년에는 고구려 남쪽 변경과 390년에는 달솔 진가모를 시켜 고구려의 도곤성을 함락시켜 200명을 포로로 잡기도 했다.

 

그러나 392년 7월부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석현성관미성 등 경기북부와 한수이북의 10개 성과 부락이 함락 당하여 백제가 크게 불리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그 뒤 구원에 사냥을 나갔다가 행궁에서 병사했다. 고 하고 《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이 왜왕에게 무례하게 대해 아신왕 추종세력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연재해

  • 386년 가을 음력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 390년 가을 음력 7월에 살별이 북하(北河)에 나타났다.
  • 392년 여름 음력 5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진서에 나오는 백제왕세자 여휘(百濟王世子余暉)

「진서」9권·효무제본기 태원 11년(386년) 여름 4월조에는 「백제왕세자여휘(百濟王世子余暉)」(여는 백제왕의 성)로서 백제왕의 휘라고 생각되는 인명이 나타난다. 이 여휘를 「세자」의 표현으로부터 아신왕에 해당된다고 보는 설도 있지만, 연차의 면으로부터 진사왕에게 비정 하는 설이 많다.「삼국사기」에서 이름을 「휘(暉)」라고 하는 백제왕의 기술은 볼 수 없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

 

 

 

 

 

 

제16대 진사왕 실록

(?~서기 392년, 재위:서기 385년 11월~ 392년 11월, 7년)

 

진사왕의 불행한 죽음과 백제의 위기

진사(辰斯)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아우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동복 아우라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복 동생인 듯하다. 385년 11월 침류왕이 갑자기 죽자 왕위에 올랐으며, 이 때 침류왕의 태자(아신왕)는 나이가 너무 어려 숙부인 그가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사람됨이 용맹하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진사왕은 조카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탓에 정치적 기반이 약하였고 강력한 통치력을 구사하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세력 회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고구려에게 호기가 아닐 수 없었다. 백제 조정이 왕권이 취약한 틈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백제 침략을 준비하였고,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한 진사왕은 즉위 이듬해 386년 봄에 15세 이상의 장정들을 대대적으로 징발하여 청목령에서 팔곤성을 거쳐 서해에 이르는 방어벽을 설치하였다.

 

그해 8월, 고구려의 고국양왕은 예상대로 병력을 보내 백제를 침공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갔다.

 

진사왕은 고구려의 재침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달솔 진가모와 은솔 두지를 앞세워 방어 전략을 짰다. 그런 상황에서 387년 9월에는 말갈군이 관미령으로 쳐들어왔다. 말갈은 고이왕 이래 화친을 맺고 약 130년 동안 평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맹약을 어기고 백제를 친 것은 고구려의 압력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기동력이 좋고 산악전에 능한 말갈군의 개입은 확실히 백제에게는 치면타였다. 요새인 관미령 싸움에서 백제군이 패해 물러났다. 이 때문에 백제는 수세에 몰리게 되고 진사왕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위 5년(389년) 9월에 고구려 남쪽을 공격하여 유린하는 한편, 390년 9월에는 진가모로 하여금 고구려 도곤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싸움에서 진가모는 고구려군 2백 명을 포로로 잡았고, 그 공으로 병조좌평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다.

 

도곤성을 얻은 진사왕은 모처럼 여유를 부리며 사냥을 다니기도 하고 궁실을 증수하는 호사를 부렸다. 중수한 궁실엔 연못도 만들고 동산도 꾸며 그 곳에 진귀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가꾸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반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런 호사를 부린 진사왕의 행동에 대해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391년 4월에 말갈군이 적현성을 급습하여 함락하였는데도 진사왕은 그해 7월과 8월에 사냥을 다니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했다. 취약한 입지에서 왕위에 오른 사람일수록 일반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방에 심혈을 기울이고 주변 세력을 견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적군의 침입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섬이나 산으로 사냥이나 다녔던 진사왕의 행동은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다. 심지어 392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대병 4만을 이끌고 대대적인 침략을 가해왔는데도 진사왕은 사냥이나 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진사왕은 이 무렵 태자(아신왕) 세력에게 정권을 장악당해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한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391년 무렵에 백제 조정엔 한 차례 정변이 일어나 진사왕 세력이 대거 제거되고 아신왕 세력이 조정을 장악했다는 뜻이다.

 

이 일에 대해 <일본서기> 응신천황 3년(391년) 기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진사왕이 서서 귀국(왜국) 천황에 대하여 예를 갖추지 않았다. 그래서  기각 숙미, 우전시대 숙미, 거천 숙미, 목토 숙미를 파견하여 그 예 없음을 힐책하였다. 그로 인해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이고 사죄하였다. 기각(기노쓰노) 숙미 등은 아화(아신왕)을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얼핏 보면 이 내용은 마치 왜국이 백제의 내정에 간섭하여 진사왕을 폐하고 아신왕을 세운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응신천황이 백제에 보낸 사신들은 '예 없음을 힐책'한 것 외에 한 일이 전혀 없다. 또 진사왕을 제거하는 일에 직접 가담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한 내용도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저 백제 조정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지켜보고 진사왕이 제거되고 아신왕이 즉위한 사실이 온당함을 인정하는 역활만 했을 뿐이다.

 

진사왕이 왜국 천황에 대해 예를 잃었다는 것도 왜국과 외교적인 마찰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왜국과 무슨 외교적인 문제가 있었다면, 그 구체적인 내용이 조금이라도 언급되어야 하는데 전혀 없다. 즉, 진사왕이 왜국 '천황에 대한 예를 잃었다.'는 것은 백제 조정 내부 문제를 천황과 연계시켜 표현한 문구의 뜻이다.

 

그렇다면 내부 문제란 무엇인가? 진사왕은 즉위 시 침류왕의 태자(아신왕)가 장성할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왕위에 머문다는 약속을 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런 선례는 없다. 그보다는 침류왕의 태자가 장성하여 주변 세력과 함께 정변을 도모하고 왕위를 돌려받으려 했을 것이다. 응신천황이 사신들을 보낸 시점은 아신왕이 이미 정변에 성공한 뒤였을 것이다. 따라서 왜국 사신들이 한성에 도착했을 땐, 진사왕은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해 있었다는 뜻이다.

 

왕에 대한 왜국 사신들의 힐책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며, '천황에 대한 예를 잃었다.'는 것은 왜국 천황이 정변에 성공한 태자 편을 들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즉, 왜국은 진사왕이 태자에게 돌아갈 왕위를 찬탈했으니,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표명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태자(아신왕) 세력이 정변을 일으킨 뒤에, 대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왜국의 힘에 의지했음을 시사한다. 진사왕은 정변 뒤에도 쉽사리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아신왕은 왜국의 사신을 불러들여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 정당하게 진사왕을 제거할 명분을 세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듯 조정이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와중에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입이 있었다. 광개토왕이 392년 7월에 뱡력 4만을 이끌고 백제의 북쪽 변경으로 밀고 내려왔다. 고구려의 대병 앞에 백제군은 무력하게 무너졌고, 단 20일 만에 10여 개의 성이 함락되었고, 10월에는 발해만 해변가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였던  백제의 관미성이 무너졌다.

 

관미성은 대륙백제의 황하 이북 지역 최대 거점이었다. 때문에 관미성의 상실은 대륙백제의 힘이 황하 이남의 산동 지역으로 축소되었다는 의미이다.

 

진사왕은 그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광개토왕이 관미성을 공략하고 있던 그 시간에 진사왕은 사냥을 나가 열흘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당시 그가 왕권을 전혀 행사할 수 없는 처지였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사냥을 하던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아신왕 세력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대륙백제의 위축과 관미성 전투

 

고국원왕이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이래, 고구려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백제의 강한 기세를 꺽지를 못하고 고전하다가 광개토왕 대에 이르러 마침내 성과를 거두었다. 광개토왕은 우선 대륙백제의 힘을 약화시키는데 주력했는데, 이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 기사>

'가을 7월,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했다.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감싸여 있었다. 왕이 일곱 방면으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백제본기 진사왕 8년 기사>

 '가을 7월, 고구려 왕 담덕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이 기록은 백제의 주요 거점인 관미성을 비롯하여 11개 성이 고구려에 의해 장악당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기사에서 백제의 10개 성이 함락된 뒤, 한수 북쪽의 여러 성이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내용으로 봐서 관미성을 제외한 10개 성은 한수 북쪽에 위치한 성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사학계 일각에선 392년 7월에 고구려가 지금의 한강 이북 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해석한다. 말하자면 광개토왕의 백제 공략은 처음부터 한반도에서 이뤄졌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기사의 '한수'가 지금 한반도 중부를 흐르는 한강이라면, 이 주장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과연 <삼국사기>에서 '한수'라고 기록된 강이 모두 한강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심해 보아야만 한다.

 

이 한수 문제는 삼국사 전체의 구도를 바꿔놓을 수 있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때문에 한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곧 삼국사 전체를 다르게 해석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한수(漢水)'는 이 책의 편찬자들에 의해 한반도에 있는 한수(韓水)와 중국 대륙의 하수(河水, 한나라 시대에는 한수)가 혼동된 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백제가 대륙에도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고, 고구려의 영토에 대해서도 거의 무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의 지리적 개념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지리편은 일부 한반도에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혀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삼국사기>에 한수(漢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백제본기> 온조 편에 백제의 도읍지와 관련된 부분이다. 여기서 이 책의 편찬자들은 한수를 지금의 한강으로 보도록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대륙백제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광개토왕릉비문에서는 한강을 '아리수(阿利水)'로 기록하고 잇는데, 여기서 '아리'는 고구려어로 '크다'는 뜻으로 순 신라어로는 '크다'는 뜻인 '한(韓)'과 같은 의미이다. 경상도에서는 '큰길'을 '한길'이라 부르며 '많이'를 '한거'라고도 한다.

 

한강을 한수라고 부르게 된 것은 당과 교류가 많았던 통일신라 이후 일 가능성이 높으며, 392년 당시에는 한강을 고구려에서는 '아리수'로 표기하고, 신라나 백제에서는 '한수'로 표기했을 것이다. 여기서 '한수'의 '한'은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에서 유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한강은 고구려에서 '아리수'로 불렀고 신라와 백제에서는 '한수(韓水)'로 불리었는데. 통일신라 이후 당의 영향을 받아서 '한수(漢水)'로 표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를 편찬할 1146년 당시에는 한강이 '한수(漢水)'로 표기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김부식을 비롯한 11명의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백제의 첯 도읍지인 '하남(河南)'을 '한수의 남쪽'으로 해석하여 지금의 한강 남쪽에 설정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는 대륙백제의 기록과 한반도 백제의 기록이 뒤엉키게 되었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대륙백제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대륙백제 침략전쟁을 모두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처럼 쓰고 있다. 하지만 광개토왕릉비 기록에도 나타나듯이 고구려는 백제를 칠 때 수군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록에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진군하였다는 내용도 없으며, 한수(漢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능비문에서는 지금의 한강을 아리수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백제본기>의 한수를 모두 한강으로 단정할 수 없는 근거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대륙백제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중국의 하수(河水, 황하)를 모두 한반도의 한강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왕이 392년에 점령한 '한수' 이북의 11개 성은 모두 '하수(황하') 북쪽에 위치한 백제의 요서군에 속한 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광개토왕이 백제를 침략하던 392년 당시 대륙백제의 영토는 산동 지역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양자강이 이르렀고, 북으로는 요서 지역에 미쳤으며, 서쪽으로는 태산에 이르렀다. 때문에 대륙백제의 군대는 언제던지 고구려의 심장부인 요동의 평양을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정예병력 3만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공격한 바 있고, 그 과정에서 고구려는 왕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대륙백제의 군대는 그만큼 고구려에겐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런 위협적인 적군을 등뒤에 두고 광개토왕이 대병 4만을 이끌고 백제의 한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따라서 광개토왕의 일차적인 목표는 당연히 백제의 대륙 영토일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왕비문 영락 6년(396년 병신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392년에 대륙 백제의 영토를 공략한 4년 후, 수군을 동원하여 백제의 한반도 땅을 공략하는데, 처음에는 아리수(한강) 이북 땅을 공격하여 58개 성을 취하고, 다음엔 한강을 도하하여 백제의 도읍 한성을 공략하였다.

 

수군을 동원하였다는 것은 바다를 건넜다는 뜻이고, 이는 바다를 건너 공격하는 것이 육로를 통하는 것보다 훨씬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고구려의 평양은 요동 지역에 있었기에 육로로 한강까지 밀고 내려오기엔 너무 먼 거리이다. 때문에 수군을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한반도를 공략한 것이다. 이 때 그의 수군 4만이 상륙한 곳이 아리수(한강) 이북이었다는 것은 396년 당시에도 한강 이북이 백제의 땅이었다는 말이 된다. 이는 392년에 장악한 한수 이북의 10개 성이 한강 이북에 위치한게 아니라는게 증명된다. 만약 392년에 광개토왕이 한수 이북을 장악했다면 굳이 396년에 다시 한강 이북을 재차 공격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392년 7월에 한수 북쪽 10개 성을 장악한 광개토왕은 10월 다시 한수 지역의 백제 주요 거점인 관미성을 장악했다. 만약 여기서 말하는 한수가 한강이라면 광개토왕은 이미 396년에 자신이 이미 공격한 땅을 다시 공격한다는 모순을 낳는다. 따라서 392년에 공격하여 얻은 한수 이북의 10개 성과 관미성은 아리수(한강) 북쪽에 있던 성들이 아니라 하수(황하) 북쪽, 즉 대륙백제에 속해있던 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이고, 바다에 돌러싸인 천혜의 요새로서 대륙백제의 황하 이북 지역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런 요충지를 상실했다는 것은 백제가 이 때 황하 이북 지역의 패권을 고구려에 완전히 빼앗겼다는 의미이다. 광개토왕이 영락 6년(396년)에 수군 수만을 동원하여 한성 공략에 나서는 것도 392년에 황하 이북 지역의 백제 땅을 차지했다는 전제 아래서만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