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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1 : 백제의 역사 27 (제17대 아신왕 2) 본문
한국의 역사 81 : 백제의 역사 27 (제17대 아신왕 2)
아신왕과 광개토왕의 지속된는 라이벌전
아신왕과 광개토왕은 둘 다 391년에 정권을 잡고 392년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광개토왕은 18세, 아신왕은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모두 혈기 왕성한 때였다. 이들은 젊은 혈기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패자를 자처했고, 그것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선제 공격을 가한 쪽은 광개토왕이었다. 고국원왕의 전사 이후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줄기차게 복수전을 꾀하였으나 번번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젊고 용맹한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광개토왕은 백제가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분을 겪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륙백제의 북쪽 요충지인 관미성과 주변 10개 성을 공략하여 얻음으로써 먼저 승기를 잡았던 것이다.
그무렵, 아신왕은 숙부 진사왕을 내쫓기 위해 정변을 일으켜 왕권을 장악했고, 392년 11월 드디어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빼앗긴 영토를 되찿기 위해 숱한 전쟁을 치른다.
관미성 수복전(393년)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이설이 많다. 그것은 백제를 한반도 내로 한정한 이병도를 포한한 일제 식민사관 역사를 만든 일제 어용학자들과 대륙백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엉터리 사기를 쓴 김부식을 포함한 11명의 고려 사관들 때문이다. 위치에 대해서는 강화도, 오두산성, 예성강 하구, 대동강 평양성, 충남 아산만 등 별의 별 장소가 다 거론되고 있다. 광개토왕이 1차 관미성을 포함한 11개 성을 점령한 이후, 2차로 백제 본토 한성을 공격하기 위해 수군을 이용하여 한수 이북에 상륙하여 58개 성을 공취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후세 사가들이 헷갈리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같은 지역을 두번 씩이나 공격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58개 성은 대륙백제를 포한한 아리수 이북의 백제 성을 모두 통털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관미성의 위치는 대륙백제의 요충지로 황하 하류 발해만 부근으로 비정된다.
아신왕은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역시 관미성 수복 전쟁이었다. <삼국사기>는 아신왕의 관미성 수복 전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제본기> 아신왕 2년 기사
봄 정월, 진무를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 침착하고 지략이 많은 인물로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였다.
가을 8월, 왕이 진무에게 "관미성은 우리의 북변 요새이다. 그 땅을 지금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다. 과인은 이것이 너무 애통하니, 그대는 응당 여기에 노력을 기울여 땅을 빼앗아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군사 1만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계획을 세웠다. 진무는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해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싸고 굳게 방비하는 바람에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야 했다.
여기에서 오두산성, 강화도, 아산만, 예성강 하구, 평양성 등의 관미성이라고 식민사학자들이 비정하는 곳은 실제 지형상 주변에 10개 성을 쌓을 지형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그리 넓지도 않은 곳들이다. 그리고 이런 지역들은 한성이 지척인 백제 입장에서 백제군의 군량 수송에 문제가 있을 수가 없는 지역들이다. 그리고 적이 지근거리에 있는 북변 지척에 아리수만 건너면 바로 수도 한성이 있는 백제의 입장에서 수도를 버젓이 그대로 두고 있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다. 당시 서해를 주름잡으며 대륙백제를 통치했던 백제는 먼거리의 백제군에게 군량을 지원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백제는 관미성 수복에 실패하자, 이듬해인 394년 7월에 다시금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친다. 하지만 수곡성에서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군 5천에게 대패하여 퇴각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결국 관미성을 포함한 그 주변 10개 성은 완전히 고구려 소유가 되고, 백제의 영역은 대륙에서 황하 이남으로 축소된다.
패수싸움(395년)
수곡성에서 대패한 이후 아신왕은 영토 회복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395년에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는데, 이것이 패수싸움이다. 이 전쟁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4년(영락 5년) 기사
가을 8월, 왕이 패수에서 벡제와 싸웠다. 왕은 그들을 대패시키고 8천여 명의 적을 생포하거나 목을 베었다.
<백제본기> 아신왕 4년
가을 8월, 왕이 좌장 진무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 왕 담덕이 직접 군사 7천을 거느리고 패수에서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사망자가 8천이었다.
패수싸움은 아신왕이 국운을 걸고 벌인 전쟁이엇다. 가장 믿고 의지하던 좌장 진무에게 대군을 내주었고, 평양의 목줄이라고 할 수 있는 패수를 곧장 공격해 들어감으로써 광개토왕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광개토왕이 친위부대인 직할부대를 직접 거느리고 대항했을 정도로 진무의 공략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진무의 군대가 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패수까지 곧장 쳐들어갔다는 것은 진무가 배를 이용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대륙백제의 땅은 황하 남쪽에 있었고, 패수는 난하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강으로 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따라서 백제의 군대가 패수까지 직접 갈 수 있는 방법은 배를 이용하는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진무는 수군을 이끌고 가서 고구려의 심장부를 급습해 유린했던 것이다.
공격 초기엔 진무의 공격이 주효했던 것은 분명하다. 광개토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와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왕이 직접 군대를 지휘해야 할 정도로 고구려의 상황이 급박하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진무의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 정예병 7천에게 패해 8천의 병사를 잃고 쫓겨나야 했다.
전사자가 8천이면 포로도 수 천에 달하였을 것이고 거기다 부상자까지 합한다면 백제의 피해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도 백제군을 지휘하던 좌장 진무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진무는 복귀한 후에 병관좌평으로 승진했다. 이는 곧 패수에서 전사한 8천이 진무 휘하에 있던 군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병력은 대부분 대륙백제의 군사이거나 왜, 가야의 병력이었을 것이다. 패수에서 살아 돌아온 병력을 감안할 때 총 출전 병력은 2만 내지 3만 정도였을 것이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371년에 평양성을 칠 당시에 총 병력은 3만이었는데, 이는 대륙에 머물고 있던 백제 병력과 한반도에서 지원된 일부 병력이 합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평양성 싸움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끊임없이 세력 다툼을 지속하였기 때문에 이 때 조성된 백제군 3만은 그대로 대륙에 잔류하고 잇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진무가 동원한 병력도 대륙의 백제군 3만과 한반도의 지원군으로 편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3만의 백제 병력은 패수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학계 일각에서 패수를 한반도에 있는 강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일제와 이병도,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주장하는 한반도 사관에 한정된 시각이다.
아신왕은 패수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3개월 뒤인 11월 엄동설한에 직접 군대 7천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 진을 쳤다. 하지만 폭설이 내려 많은 병졸이 동상에 걸리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회군할 수 밖에 없었다.
병신년의 치욕(396년)
청목령에 진을 쳤던 아신왕이 되돌아가자, 이전에는 광개토왕이 백제의 허를 찌르며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다. 이때의 상황을 광개토왕릉비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백잔(백제를 낮춰 부르는 말)은 의에 굴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덤볐다. 왕은 위엄을 떨치며 노하여 아리수(한강)을 건너 선두 부대를 백잔성으로 진격시켰다. 백잔의 병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곧 그들의 소굴이 포위됐다. 그러나 백잔의 군주는 방도를 구하지 못하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왕 앞에 무릎을 끓고 맹세했다.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겠습니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며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이번에 모두 백잔의 58개 성, 700개 촌을 얻었다. 또한 백잔주의 형제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출정했던 군대를 이끌고 국도로 돌아왔다. >
다소 고구려 입장에서 쓴 면이 없지 않겠지만, 백제의 아신왕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음이 분명하다. 이듬해인 397년에 태자(전지왕)를 왜국에 볼모로 보내 구원을 요청한 것을 보면, 당시 백제의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짐작할 만하다. 광개토왕릉비문은 아신왕이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적고 있는데, 크게 과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조선의 인조가 청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의 수모를 당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 병합작전(399년)
병신년 치욕 이후, 아신왕은 그야말로 복수의 화신이 되어 이를 갈며 반격을 준비했다. 397년 6월엔 태자를 볼모로 보내는 조건으로 왜국과 군사동맹을 맺었고, 신라의 세력 확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가야까지 끌여들여 삼국연맹을 결성했다. 그 힘을 과시하기라도 히듯 그해 7월엔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함으로써 전쟁 분위기를 조성했다.
재위 7년(398년) 2월에는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삼아 군 기강을 확립하고, 3월에는 쌍현성을 쌓아 공격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8월에 군사를 출동하여 한산 북쪽 목책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그날 밤 유성이 백제군 진영에 떨어지자 병사들이 술렁댔고, 결국 아신왕은 불길하다고 판단하여 물러났다.
399년 8월에 다시 고구려를 치기 위해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징발했다. 수년 동안 지속된 전쟁과 부역으로 백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급기야는 백성들이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라로 도망가는 탈백제국 사태가 속출하였고, 이 때문에 호구가 줄어들 지경이었다.
신라는 392년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실성왕)을 고구려에 입조시켜 동맹을 맺은 이래 백제와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심라가 뒷통수를 칠 수 있는 여건에 있었고 백성들이 탈주하는 사태가 발생되자 아신왕은 감정이 악화되어 신라 공략에 나섰다.
이에 대한 광개토왕릉비문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9년 기해에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은 하평양(지금의 대동강변 평양)을 순시했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기를 그 나라에는 왜인들이 가득하여 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노객(신라왕)을천민으로 삼았으니(고구려에)의탁하여 왕의 지시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신라의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10년 경자년에(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때)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하였다. 관군(고구려군)이 그 곳에 이르자 왜적은 퇴각했다. 이에 우리가 왜적의 뒤를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 감성 등에서 왜구가 크게 함락되었다. 성안에 있던 십분지 구의 신라인들이 왜를 따라가길 거부했다. 이에 신라인을안치하여 병사를 두게 하였다. 신라성-(지워져 내용을 알 수 없음)- 나머지 왜군은 궤멸되어 달아났다. 지금껏 신라 매금(이사금 또는 임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이 내용을 잘못 받아들이면 자칫 신라의 공격을 왜가 주도한 것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백제가 '왜와 화통하였다.'는 내용이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봐서 신라 공격을 제안하고 주도한 세력이 백제임을 알 수 있다. 즉, 아신왕이 신라 공격을 왜에 제안하여 왜군을 끌여들였다는 의미다. 그리고 고구려군이 왜군을 추적하여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야도 이 전쟁에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의 당시 기록에는 가야와 왜, 백제가 매우 친밀하였으며, 특히 왜와 가야는 서로 신하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사이였다. 거기에 비해 신라와는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 왜, 가야 삼국이 동맹을 맺고 연맹군을 형성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백제, 왜, 가야가 연합하여 일시에 신라를 공격한 것은 신라를 병합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삼국연맹군은 세력을 떨치며 남하하고 있던 고구려군을 저지하기 위해 하나로 뭉쳐야 하는데, 신라가 큰 방해 요소였다. 때문에 우선 신라를 병합한 다음에 힘을 합쳐 고구려를 치기로 한 것이다.
삼국연맹군은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개시해 순식간에 신라 전역을 장악했다. 다소 과장되긴 했겠지만, 신라 땅에 '왜인이 가득하고 노객을 천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전역이 삼국동맹군의 수중에 떨어진 것망은 분명했다. 만약 고구려의 구원이 없었다면 신라는 삼국연맹군에 의해 병합될 처지였다. 말하자면 아신왕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신왕이 쾌재를 부르기 전에 광개토왕이 보낸 5만의 고구려 대군이 밀고 내려왔다. 이에 숨어있던 신라 잔병들이까지 대거 합세하여 순식간에 전세를 역전시켜 버렸다.
고구려와 신라군에 밀린 왜군은 해안으로 밀려났고, 가야군은 종발성을 빼앗기는 손실을 입었으며, 백제의 아신왕은 또다시 눈물을 머금고 퇴각해야만 했다.
대방전투(404년)
한을 안고 돌아선 아신왕은 402년 5월에 왜국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략을 제의하고, 다음해 왜국의 응락을 얻어냈다. 한편 신라는 402년 2월에 내물왕이 죽고,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 가 있던 실성왕이 돌아와 왕이 되었다. 실성왕은 즉위 직후인 그해 3월에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왜국에 인질로 보내고 우호 관계를 맺었다. 실성왕이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일본에 인질로 보낸 것은 자신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내물왕에 대한 복수심의 발로이며, 동시에 정적 제거 차원이었다. 때문에 미사흔을 왜국에 인질로 보냈다고 해서 우호 관계를 형성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403년 7월에 우선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여 위축시킨 것도 그런 판단에 따른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신왕은 404년에 왜국과 함께 대선단을 형성하여 고구려 본토 공략에 나섰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사
아신왕 11년 5월, 왜국에 사신을 보내 큰 구슬을 요구하였다.
아신왕 12년 2월,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왕이 이들을 환영하고 위로하였으며,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가을 7월,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입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사
내물왕 원년 3월,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
내물왕 2년 7월, 백제가 변경을 침입하였다.
눌지왕 원년,....내물왕 37년에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는데, 실성왕이 돌아와 왕이 되고 나서 내물이 자기를 외국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망하였다. 그는 내물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원한을 풀고자 하였다....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14년 기사>
14년 갑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 지역을 침범하였다. (그들은)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격하였다. (늘어선 배에서 많은 적들이 몰려 왔다.)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평양을 출발했다. 그리고....봉에서 적과 만났다. 왕은 적을 막아서며 대열을 끓고 좌우에서 공격하였다. 왜군은 궤멸되었고 죽은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광개토왕릉비문에서 언급한 대방 지역은 지금의 중국 산동성 지역이다. 당시 백제는 황하 하류의 요충지인 관미성 상실에 따른 결과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군으로 조직된 선단이 공격한 대방 지역이란 바로 관미성 주변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능비문에 언급된 '석성(石城)'은 392년에 광개토왕이 관미성을 얻기 전에 차지한 10개 성 중 하나인 '석현성(石峴城)'을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아신왕의 석성 공격은 시의적절했다. 고구려는 당시 후연과 각축전을 벌이고 있던 시기라 남쪽 변경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백제와 왜는 그 기회를 틈타 392년에 상실한 황하 이북의 10개 성과 관미성을 탈환하려 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광개토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전한 것으로 보면 왜와 백제의 공격은 주효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덕분에 그들은 석성을 위시하여 황하 북부 일대를 일부 장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관미성 탈환에는 실패하였다. 광개토왕은 후연과의 싸움을 미루고 백제와 왜를 상대로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다. 광개토왕의 강력한 방어전에 밀린 아신왕은 다시 후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군을 동원한 고구려의 하북 지역 공격도 이렇게 아무런 성과없이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광개토왕과의 싸움에서 한 차레도 승리하지 못한 아신왕은 이듬해에 한많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아마도 패전의 분을 삭이지 못한 탓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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