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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4 : 백제의 역사 20 (제13대 근초고왕 3) 본문
한국의 역사 74 : 백제의 역사 20 (제13대 근초고왕 3)
제13대 근초고왕 실록
(?~서기 375년, 재위:서기 346년 9월~ 375년 11월, 29년 9개월)
대국의 위업을 달성한 근초고왕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차남이며 언제 태어낫는지는 분명치 않다. 체격이 크고, 외양이 기이하게 생겼으며 ,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고 전한다.
초고왕 2세를 뜻하는 근초고라는 묘호가 말해주듯, 그는 자신이 초고왕의 혈통을 이었음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이는 방계 혈통에 속하는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계왕으로 이어지는 고이왕계 왕실을 종식시키고 적통 왕실을 북구하였다는 인식을 주기 위한 조처였다. 하지만 <비류왕 실록>에서 밝혔듯이 근초고왕 역시 초고왕 직계는 아니다. 그가 초고왕 직계를 자임한 것은 명분을 세우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비류왕이 죽은 뒤, 그는 대륙백제의 계왕과 왕위 계승권을 다투어야 했고, 그 때문에 2년 동안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결국 계왕을 쫓아내고 대륙백제를 아우른 뒤에야 비로소 왕위에 오른 그는 즉위 후에도 여전히 왕위 계승의 명분을 얻지 못해 시달린 모양이다. 그래서 스스로 초고왕의 직계 혈통임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바로 초고왕 2세를 뜻하는 '근초고'라는 묘호였다.
<삼국사기>는 그의 즉위 후, 약 20년 동안의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고 있다. 기록은 재위 21년 이후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근초고왕 20년까지의 기록들이 전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빼버린 결과일 것이다.
근초고가 대륙백제의 계왕을 쫓아내고 대륙백제와 한반도 백제를 통일했기 때문에 즉위 후 상당 기간 동안 대륙백제를 안정시키는데 몰두했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편자들은 대륙백제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기록들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판단하여 고의로 제외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재위 2년 기사에 뜬금없이 조정좌평 진정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데, 진정은 왕후의 친척으로 성질이 흉악하고 어질지 못해 일을 처리함에 있어 까다롭고 잔소리가 많았으며,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진정이 그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또 근초고왕이 진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부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정이 학정을 지속하고 있던 때에 근초고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할 정도였다면, 당연히 왕은 그를 파직시키든지 형벌을 가하든지 무슨 조치를 취하는 게 도리다. 만약 왕이 그런 진정의 행동을 묵과했다면, 필시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진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이 있었다는 기록만 남겼을 뿐, 근초고왕이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부연하지 않았다.
이것은 <삼국사기>편자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고의로 누락시킨 결과 일 것이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란 근초고왕이 한반도 한성에 머물고 있지 않았던 상황을 의미한다.
근초고왕이 즉위 당시 한성에 있지 않고 대륙에 있었을 것이고 그는 대륙백제를 지배하고 있던 계왕을 치기 위해서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계왕과 전쟁 끝에 승리하여 그 곳을 장악하였지만, 숨가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계속 대륙에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즉, 당시 근초고왕은 한성에 머물지 않았으며, 한성은 진정을 비롯하여 황후의 척족들이 다스리고 있었던 까닭에 한반도 백제의 백성들은 그들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뜬금없이 외척에 불과한 진정의 성품과 학정이 언급되고, 백성들이 그를 미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또 그런 기록을 남기려면 의당 근초고왕의 후속 조치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어야 했으나 그것도 없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근초고왕이 대륙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근초고왕이 즉위하던 346년 무렵에 대륙엔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친 뒤였다.
비류왕 재위기간인 311년에 흉노 귀족 유연은 아들 유총과 함께 여러 차례 낙양을 공략하여 무너뜨리고, 서기 316년에 장안을 무너뜨렸다. 이로써 서진은 몰락하였고,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열리는데, 이 혼란을 이용하여 고구려와 선비족은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미천왕은 이미 311년에 서안평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313년에는 낙랑군을 점령하였으며, 314년에는 남쪽으로 진군하여 대방군을 점령하였고, 315년에는 현도성을 장악하였다.
낙랑과 대방은 백제가 개척한 영토인 만큼 미천왕의 세력 확대는 대륙백제의 기반을 송두리체 흔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와 대륙으로 분리되어 있던 백제는 대륙에서 군사적 열세로 계속 남쪽으로 밀리고 있었고 근왕 세력을 대리고 가까스로 왕실을 유지하고 있던 어린 계왕은 무섭게 밀려드는 고구려군을 상대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 무렵 선비족도 세력을 확대하여 모용, 단, 우문 선비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것은 모용외가 이끄는 모용 선비였다. 모용외는 319년 유주(황하 동북방) 일대를 장악했고, 이에 따라 320년 이후엔 모용 선비와 고구려가 치열한 영토싸움을 전개했다.
양국의 전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모용 선비가 조금씩 우세를 보였다. 모용 선비는 337년 국호를 연이라 하여 요하 상류의 양안에 도읍을 정하였고, 339년에는 고구려의 신성까지 밀고 들어가 고국원왕으로부터 화약조약을 받아냈다. 연에게 몰린 고국원왕은 태자 구부(소수림왕)를 연의 도성에 입조토록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342년에 연은 수도를 발해만 근처 용성(조양)으로 옮기고 , 그해 11월 고구려를 침략했다.
연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고구려가 무기력하게 무너졌고, 결국 도성인 환도성이 무너지자 고국원왕은 가까스로 환도성에서 달아났지만, 태후, 왕후를 포함한 왕족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 갔으며 미천왕의 무덤까지 파헤쳐 시신을 꺼내 싣고 갔다.
이 때문에 고국원왕은 연나라의 신하가 되겠다는 굴욕적인 서약을 해야 했다. 최대의 강적 고구려를 무릎 끓린 모용황은 수도를 계현(북경)으로 옮기고 더욱 세력을 확장했다. 그 후 모용황은 우문 선비를 병합하고, 345년에는 고구려의 남소를 함락시켰으며 근초고왕이 즉위하던 346년 무렵에는 대대적인 남하정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륙백제를 인수한 근초고왕은 한성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북쪽에서는 연나라가 계속 남하를 하는 중이고, 서쪽에서는 유총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후조의 석륵 세력이 뻗쳐오고 있었으며, 남쪽에서는 동진이 안정을 되찿아 북진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말하지먄 대륙백제는 사면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이었다.
근초고왕의 재위 20년까지의 기록이 전무한 것은 바로 그가 이 기간 동안 대륙 백제의 안정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근초고왕이 당시 대륙에서 영토 확장에 주력하였다는 증거는 일본의 <고사기> 기록에 나타난다. 이 책 '응신천황' 기사에 일본 왕의 부탁을 받은 백제 왕이 왕인 박사를 일본에 파견한 내용이 보이는데, 이 때 왕인과 함께 간 일행 중에 오인(吳人) 베틀장인 서소(西素)라는 사람이 있다. 서소는 기록대로 오나라 사람으로 중국 양자강 하류 남북 땅을 차지하고 있던 나라로 주로 남쪽에 지우쳐 있던 나라이다. 백제에서 보낸 서소가 양자강 근처의 오나라 사람이라는 것은 대륙백제의 힘이 그곳까지 미쳤다는 의미가 된다. 이 사실은 백제가 근초고왕 시대에 이미 중국 남쪽까지 세력을 뻗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는 뜻이 된다.(왕인 박사의 파견은 <고사기>에는 근초고왕 시대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는 아화왕(아신왕) 대인 405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술 관계와 사료의 신빙성에 비춰볼 때, 왕인 박사가 일본에 건너간 시기는 근초고왕 대가 아닌 아신왕 대로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서소 또한 아신왕 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북사>에 '백제....거강좌우(據江左右)'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강이란 양자강을 일컫는다. 풀이하면 '백제가 양자강 좌우 땅을 차지하고 막아 지켰다.'는 뜻이다. 근초고왕이 오나라 베틀장인 서소를 일본에 파견할 수 있었던 것은 양자강 좌우 땅을 차지했다는 <북사>의 기록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일이다.
근초고왕은 재위 21년(366년) 3월에 신라에 사신을 보냈고, 367년에는 왜에도 사신을 보냈다. 또 368년에는 신라에 명마 두 필을 보냈고, 그해에 왜에도 구저를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확인하였다.
근초고왕이 신라와 왜 양국에 이런 유화책을 쓴 것은 그들 국가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며, 계왕 시절 상실한 대륙백제의 땅을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와 대치 중이었고, 그것이 심화되어 점차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위급한 시기에 신라나 왜로부터 침략을 당하면 치명타가 아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와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어 재위 24년(369년) 9월에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직접 병력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까지 밀고 내려왔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태자(근구수왕)에게 군대를 안겨 고구려군을 격파했다. 백제군은 고구려군 5천을 궤멸시키고 대승을 거두었고, 이 싸움을 기점으로 백제군의 힘은 고구려와 대등해진다.
그러자 근초고왕은 그해 11월 한수 근처에서 대대적인 군사 사열을 감행했다. 이 때, 황색 깃발을 사용하였는데, 황색이란 곧 황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근초고왕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2년 뒤인 371년에 고구려가 다시 대병을 이끌고 남진을 감행해왔는데, 근초고왕은 패하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기다렸다가 일시에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근초고왕은 그 여세를 몰아 그해 겨울에 정예군 3만을 이끌고 북상하여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백제의 급습을 받은 고국원왕은 당황한 가운데 수성전을 펼치다가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고 얼마 후 사망하였고, 근초고왕은 일단 고국원왕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에 만족하고 고구려군의 포위에 전군이 전멸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고 신속하게 고구려 땅에서 철수하였다.
그 뒤로도 고구려와 백제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375년 고구려가 백제의 북쪽 변방의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근초고왕은 대병을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지만, 흉년이 드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그해 11월에 파란만장한 생을 접어야 했다.
그는 재위 내내 영토 확장에 매달렸고, 덕분에 백제는 대륙에서 막강한 세력으 형성했다. 또한 신라와 왜 등 주변국들과 화친을 맺어 대륙 정책에 문제가 없도록 애를 썼으며, 특히 왜에는 여러 문물을 전해줌으로써 일본 문화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삼국사기>는 <고기>라는 책을 인용하여 근초고왕 대에 처음으로 백제의 역사가 정리되었다고 쓰고 있다. 당시 쓰여진 역사서는 <서기(書記)>이며, 저자는 고흥이라는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고흥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서기>의 내용도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근초고왕의 가족 관계는 자세히 기록이 없으나, 아들 근구수왕이 장남이 아닌 점으로 보아 여러 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정좌평을 지낸 진정이 황후의 친척이라는 기록을 통해 왕후의 성씨도 확인된다. 근구수왕 2년에 그의 외삼촌 진고도가 내신좌평에 임명되어 정사를 맡아보았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근초고왕의 처족이 '진(眞)'씨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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