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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1 : 백제의 역사 17 (제12대 계왕) 본문
한국의 역사 71 : 백제의 역사 17 (제12대 계왕)
계왕(契王, ? ~ 346년, 재위 : 344년 ~ 346년)은 백제의 제12대 왕이다. 분서왕(汾西王)의 장남이다. 분서왕의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으므로 사반왕(沙伴王)의 동생인 비류왕(比流王)이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18년 ~ 66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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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 |
공용어 | 고대 한국어 |
수도 |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
정치체제 | 군주제 |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
76만호(3,800,000명 추정) |
성립 | 기원전 18년 |
멸망 | 660년 |
초대 군주 |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
최후 군주 | 의자왕 641년 ~ 660년 |
성립 이전 | 마한, 부여 |
해체 이후 | 신라 |
주석 |
|
생애
344년 비류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346년 음력 9월에 왕이 죽자 비류왕의 둘째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하였다.
가계
- 부왕 : 분서왕
- 모후 : ?
- 왕후 : ?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 왕호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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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온조왕(溫祚王) | 온조(溫祚) |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 |
2 | 다루왕(多婁王) | 다루(多婁) | 기원후 28년 ~ 77년 | 온조왕의 아들. | |
3 | 기루왕(己婁王) | 기루(己婁) | 77년 ~ 128년 | 다루왕의 아들. | |
4 | 개루왕(蓋婁王) | 개루(蓋婁) | 128년 ~ 166년 | 기루왕의 아들. | |
5 | 초고왕(肖古王) | 초고(肖古) | 166년 ~ 214년 |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 |
6 | 구수왕(仇首王) | 구수(仇首) | 214년 ~ 234년 |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 |
7 | 사반왕(沙伴王) | 사반(沙伴) | 234년 |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 |
8 | 고이왕(古爾王) |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 234년 ~ 286년 | 개루왕의 차남. | |
9 | 책계왕(責稽王) | 책계(責稽) | 286년 ~ 298년 |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 |
10 | 분서왕(汾西王) | 분서(汾西) | 298년 ~ 304년 | 책계왕의 아들. | |
11 | 비류왕(比流王) | 비류(比流) | 304년 ~ 344년 | 구수왕의 차남. | |
12 | 계왕(契王) | 계(契) | 344년 ~ 346년 | 분서왕의 아들. | |
13 | 근초고왕(近肖古王) | 초고(肖古), 여구(餘句) | 346년 ~ 375년 |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 |
14 | 근구수왕(近仇首王) | 구수(仇首), 수(須) | 375년 ~ 384년 | 근초고왕의 아들. | |
15 | 침류왕(枕流王) | 침류(枕流) | 384년 ~ 385년 | 근구수왕의 장남. | |
16 | 진사왕(辰斯王) | 진사(辰斯) | 385년 ~ 392년 | 근구수왕의 차남. | |
17 | 아신왕(阿莘王) | 아신(阿莘) | 392년 ~ 405년 | 침류왕의 아들. | |
18 | 전지왕(腆支王) |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 405년 ~ 420년 | 아신왕의 아들. | |
19 | 구이신왕(久爾辛王) | 구이신(久爾辛) | 420년 ~ 427년 | 전지왕의 아들. | |
20 | 비유왕(毗有王) | 비유(毗有), 여비(餘毗) | 427년 ~ 455년 | 구이신왕의 아들. | |
21 | 개로왕(蓋鹵王) | 경사(慶司), 여경(餘慶) | 455년 ~ 475년 |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 |
22 | 문주왕(文周王) | 모도(牟都), 여도(餘都) | 475년 ~ 477년 |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 |
23 | 삼근왕(三斤王) | 삼근(三斤) | 477년 ~ 479년 | 문주왕의 아들. | |
24 | 동성왕(東城王) | 동성왕 |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 479년 ~ 501년 |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
25 | 무령왕(武寧王) | 무령왕 | 사마(斯麻), 여융(餘隆) | 501년 ~ 523년 |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
26 | 성왕(聖王) | 성왕 | 명농(明襛) | 523년 ~ 554년 | 무령왕의 아들. |
27 | 위덕왕(威德王) | 위덕왕 | 창(昌) | 554년 ~ 598년 | 성왕의 장남. |
28 | 혜왕(惠王) | 혜왕 | 계(季) | 598년 ~ 599년 | 성왕의 차남. |
29 | 법왕(法王) | 법왕 | 선(宣), 효순(孝順) | 599년 ~ 600년 | 혜왕의 아들. |
30 | 무왕(武王) | 무왕 | 장(璋), 서동 | 600년 ~ 641년 |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
31 | 의자왕(義慈王) | 의자 | 641년 ~ 660년 | 무왕의 아들. |
제12대 계왕 실록
(?~서기 346년, 재위:서기 344년 10월~ 346년 9월, 1년 11개월)
베일에 가려진 게왕의 즉위와 죽음
계(契, 또는 설,결, 글로도 발음됨)왕은 분서왕의 장남이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무술이 뛰어났던 것으로 전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에 관한 기사는 매우 간단하다. 그의 즉위 경위에 대해서는 '이전에 분서왕이 죽었을 때는 계왕이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가 없었는데,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죽자 즉위하였다.'고 밝히고 있고, 재위 3년 9월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계왕에 대한 기록의 전부이다. 하지만 계왕의 즉위와 죽음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그렇게 간단하거나 편이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류왕이 계왕의 아버지 분서왕이 살해된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고,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왕위 계승으로 볼 수 없다. 때문에 비류왕이 죽은 뒤에 계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면 분리된 백제가 대륙과 한반도에서 각각 통치를 하다가 분서왕이 대방 왕이 보낸 자객에게 죽자 계왕이 뒤를 이었고 한반도에서는 비류왕이 죽자 근초고왕이 뒤를 이어 왕위 계승 전쟁에서 계왕이 패배하여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계왕의 즉위와 2년이 채 못 되는 짧은 치세, 그리고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의 즉위, 이 일들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순리적으로 순조롭게 이어질 수 없었다.
계왕은 정식 묘호가 아니라 단순히 '계'라는 이름에 왕을 붙인 형태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왕은 묘호가 아니다.
온조왕 이후 계왕에 이르기까지 백제의 묘호는 온조, 다루,기루, 개루, 초고, 구수, 고이 등등 모두가 두 글자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독 계왕만 외자로 되어 있다. 후대에 있어서도 근초고, 근개루 등 2세적 개념이 있는 묘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두 글자로 이뤄졌고, 말기의 성왕 이후에 혜왕, 법왕, 무왕만이 외자 묘호이다. 성왕 시절 이후에 외자 묘호가 나타나는 것은 남북조나 당의 영향 때문이다. 그러나 근초고왕 시절에는 두 글자로 이어져 오던 묘호의 전통을 깨고 계왕이 외자 묘호를 받았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점이다. 즉 계왕은 두 자 묘호의 전통을 깬 것이 아니라 아예 묘호를 받지 못해 그저 이름에다 왕이라는 칭호를 갖다 붙인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추론이 맞는다면 계왕의 즉위는 정상적인 형태일 수 없고, 죽음 또한 순리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 즉위하여 즉음에 이르럿을까? 그 과정을 추론하자면 대강 이렇다.
이미 비류왕 실록에서 밝혔듯이 분서왕이 대륙에서 대방 왕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어 죽자 계왕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비류왕은 한반도 백제를 장악하여 왕위에 올랐다. 어린 계왕은 대륙 세력에 의해 대륙백제의 왕으로 옹립된 듯하다. 그러다가 비류왕이 늙고 병들자 왕권을 되찿기 위한 시도를 했을터이고, 이 과정에서 비류왕이 죽자, 계왕은 명분을 앞세워 자신이 백제 왕임을 공포했을 것이다. 이에 당황한 근초고는 군대를 앞세워 계왕을 치기에 이르고, 결국 백제는 둘로 갈려 전쟁을 치른 끝에 근초고왕이 승리함으로써 백제는 다시 통일되었을 것이다.
어쨌던 계왕의 즉위와 죽음은 기록이 전무하여 의문투성이로 남아 있다.
비류왕 대에는 철저하게 주변국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던 백제가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갑자기 고구려와 세력을 다툴 정도로 강국으로 성장하는 것도 이런 통일에 바탕하여 이루어진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계왕의 능과 가족은 물론이고 그 후손에 대해서는 내용이 전혀 전해지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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