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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3 : 백제의 역사 19 (제13대 근초고왕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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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3 : 백제의 역사 19 (제13대 근초고왕 2)

두바퀴인생 2010. 11. 16. 09:24

 

 

 

한국의 역사 73 : 백제의 역사 19 (제13대 근초고왕 2)

 

 
제13대 근초고왕

근초고왕(近肖古王, ? ~375년, 재위 346년~375년)은 백제의 제13대 왕이다. 이름은 《진서》에는 여구(餘句), 《고사기》에는 조고왕(照古王), 《일본서기》에는 초고왕(肖古王), 《신찬성씨록》에는 속고왕(速古王)으로도 불린다.

 

근초고왕은 백제가 차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무렵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도 아주 크고 용감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었지만, 차기 왕으로 지목되어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 비길 만한 정복군주로 평가받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마한을 정복하여 백제의 영토를 전라도 지역까지 확장하고 북쪽으로는 평양 근처까지 진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생애

남방 진출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근초고왕 즉위부터 20년(365)까지의 기록이 빠져 있다. 때문에 그 사이에 근초고왕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일본서기진구 황후(神功皇后) 46년조에 초고왕(肖古王)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신공황후 46년은 이주갑인상에 따르면 서기 366년으로 근초고왕 21년에 해당한다.

 

이 해 3월에 근초고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맺고, 가야 소국의 하나인 탁순국 국왕을 통해 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려 하였다.

 

이듬해인 367년에 백제의 사신이 신라의 사신과 함께 왜국에 도착함으로서 백제와 왜 사이에 최초로 국교가 수립된다.

 

한편 근초고왕은 신라와의 외교도 중시해 23년(368년)에 신라에 명마 두 마리를 보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구 황후 섭정 49년에 해당하는 서기 369년, 근초고왕 24년에 백제와 왜의 군대가 남쪽으로 탁순국에 모여서 가야의 비자벌, 남가라, 훼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일곱 나라를 평정하고, 고해진을 돌아 침미다례로 대표되는 옛 마한의 잔여 세력들을 정복하여 전라도 영산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다.

 

고구려와의 전쟁

369년 가을 9월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치양성(황해도 배천)에 쳐들어왔다. 그러자 근초고왕은 태자인 근구수를 보내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5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고구려에 도망쳤다가 마음을 고쳐 돌아온 백제인 사기가 제공한 정보를 통해 고구려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371년에는 태자와 함께 고구려군을 대동강에서 물리치고 옛 대방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또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로써 백제는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그리고 황해도의 일부까지 차지하여 강력한 고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한반도의 패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근초고왕은 이러한 영토 확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부자 세습 제도를 확립했다.

 

외교 및 문화

근초고왕은 백제 역사상 최초로 중국 사서에 이름이 기록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진서(晉書)》권제9·간문제기·함안2년(372년) 정월조 및 6월조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태자의 스승이 된 아직기왕인 두 사람이 일본에 파견된 것이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고 적고 있다. 왜왕에게 칠지도가 보내진 것도 이 무렵의 일로 오늘날 칠지도의 성격을 두고 한국과 일본은 논쟁중에 있다.

 

또한 왕실의 존귀함을 알리고 국가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사 고흥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백제 왕실의 역사를 정리한 《서기》를 저술하게 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이 철정 40매를 왜국에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일본이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서는 가야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백제로부터 철기를 수입했다고 볼 수 있다.

 

평가

가야 정복 주체(主體)의 정체

근초고왕이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일본서기》에 백제와 왜가 함께 가야를 정복하는 군사행동의 주체가 백제인가 왜인가를 두고 끊임없이 논쟁이 벌어져 왔다. 심지어 이 기록을 과연 믿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도 학자들의 설이 서로 나뉘어 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기록 본문은 다음과 같다.

[四十九年春三月, 以荒田別, 鹿我別爲將軍. 則與久■等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新羅. 更復奉上沙白ㆍ盖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 沙沙奴跪【是二人不知其姓人也. 但木羅斤資者, 百濟將也.】領精兵與沙白ㆍ盖盧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ㆍ南加羅ㆍ喙國ㆍ安羅ㆍ多羅ㆍ卓淳ㆍ加羅七國. 仍移兵西廻至古爰津, 屠南蠻枕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ㆍ辟中ㆍ布彌ㆍ支半ㆍ古四邑, 自然降服.]

49년(369) 봄 3월에 아라다노와케(荒田別), 가고노와케(鹿兒別)를 장군으로 삼았다. 구저들과 함께 군사를 정돈하여, 탁순국에 건너가서 장차 신라를 치려고 했다. 이 때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군사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겠습니다. 다시 사백(沙白), 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 증원을 청합시다."
그리해서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詭)【이 두 사람은 그 성씨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목라근자만은 백제의 장군이다.】에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백, 개로와 함께 보냈다. 모두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비자발(比自○), 남가라(南加羅), 훼국(喙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군사를 옮겨 서쪽을 돌아 고해진(高奚津)에 가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枕彌多禮)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그 왕인 초고와 왕자 귀수가 또한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비리(比利), 벽중(壁中), 포미(布彌), 지반(支半), 고사(古四)의 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 기록을 두고 우선 기록 그대로 믿는 쪽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같은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이었고, 이들은 《일본서기》의 기록된 대로 왜가 백제를 앞잡이로 삼아서 가야를 정벌한 뒤 그 땅에 임나일본부라는 관청을 두고 100년 가까이 직접통치를 했다고 주장했다.

 

《일본서기》안에서도 특히나 황국사관에 찌들어있다고 평가받는 진구 황후조 기사에서, 특히 어렵게 정복한 땅을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남의 나라에 선뜻 주어버렸다는 어이없기까지 한 기록에 대해 "세상에 이렇게 인심 좋은 국제 관계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한국 학계의 비판까지 나올 정도로, 《일본서기》초기기록의 신빙성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진 이래 일본 내에서도 이 학설은 거의 폐기되다시피 한 지 오래다.

 

《일본서기》진구 황후조의 기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한국 일본에서는 여러 가지 학설을 제기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것은 천관우가 제시한 백제군사령부설이다. 군사령부설의 요체는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조에서 가야 정벌을 행한 주체를 왜에서 백제로 바꾸어보는 것으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는 원래 백제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군사 기관이었는데 그것을 마치 왜의 통제를 받는 기관처럼 《일본서기》가 주체를 바꾸어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비록 이전 학설들과 차별화되지만 식민사학이 만든 고대사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학설로, 백제의 군사령부라고 보는 설에 대해서는 임나일본부의 관리들이 백제인이 아니라 왜인이며, 정작 본국인 백제의 명령을 듣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일본서기》진구 황후조에 기록된 가야 정벌의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치환시켜 해석했던 관점에 대해서 조롱과 비판이 많다. 대표적 인물이 한국고대사의 권위자인 홍익대 김태식교수이다.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가야 정벌' 같은 사업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허구의 사실이라는 주장이다. 《일본서기》의 초기기록이 조작되었음을 밝혀낸 이래, 일부 학자들은 '가야 정벌'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을 진구 황후의 업적을 미화하기 위해 조작해냈다고 하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일본서기》에 가야 정벌 당시 백제의 장수로 등장하는 목라근자와 그의 아들인 목만치(木滿致)의 관계를 증거로 제시한다. 훗날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밀려날 때, 근개루왕의 아우로서 신라에 원병을 청하러 갔던 문주왕을 옆에서 호종한 사람으로 《삼국사기》에도 이름이 등장하는 목만치의 탄생시점에 대해서 《일본서기》응신 천황 25년(414년) 기사에 인용된 《백제기(百濟記)》에, "목만치는 아버지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의 부인을 얻어서 낳은 아이이다[木滿致者, 時木羅斤資討新羅時, 聚其國婦, 以所生也]."라고 한 기록에서 '신라를 칠 때'라는 시점을 진구 황후 섭정 46년인 서기 369년에 "탁순에 모여서 신라를 깨뜨렸다[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는 것과 같은 사건로 해석할 때 369년에서 한성이 고구려에게 함락된 서기 475년까지는 무려 106세나 산 것처럼 해석되어, 두 사람 사이에는 처음부터 기록된 것과 같은 부자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 아울러 이러한 점을 볼 때 《일본서기》진구황후조의 기록은 전연 허구의 전설으로서 실제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칠지도의 성격

 

칠지도(七支刀)는 일본 나라 현 덴리 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 중인 길이 74.9cm의 양 옆으로 모두 6개의 가지가 뻗은 철제 칼로 칼에는 표면(앞면)에 35자, 이면(뒷면)에 27자로 총 62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X-레이 촬영결과 앞면에 十(십)자가 숨겨져 있음이 발견되어 1자가 늘었다.) 명문(銘文)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해석 문제는 광개토대왕릉비와 더불어 임나일본부설의 실재 여부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 중인 칠지도 모사품

발견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육차모(六叉鉾)’라는 명칭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1873년 신궁의 궁사에 의해 명문이 발견되었고, ‘칠지도’로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형태

전쟁 기념관에 전시 중인 칠지도 모사품

 

74.9cm 중 칼날 부분이 65cm이고 나머지는 칼자루다. 칼 좌우로 3개씩 가지가 뻗어있으며 주 몸통과 더불어 7개의 가지로 보고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서는 이 때문에 이 칼이 실제 전투용으로서보다는 의식용으로 보고 있다.

 

 

내용

 

1977년과 1978년에 찍은 확대 근접사진과 1981년 NHK에서 촬영한 X-레이 사진을 통해 보면 年(연)자와 月(월)자 사이에 十(십)자가 검출되어 그동안 五月(5월)로 보았던 명문을 十一月(11월)로 볼 수 있게 되었다.[4]

학자 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지만, 대개 앞면과 뒷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앞면

泰□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侯王□□□□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상감문 논란과 역사

1945년 이전의 연구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에 언급된 칠지도가 실재함으로 일본서기와 신공황후에 대한 신빙성을 증명하는 것에 사용되었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에 대한 증거로 채택되어 한반도 병합의 역사적 이유로 이용되었다. [5] 칼이 너무 오래되어 부식되어 철의 녹과 상감의 박락때문에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칠지도 명문에 대한 해석이 본격화된 것은 1945년 이후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의 연구에 따라 명문이 61자인 것이 확인되었고, 이 칠지도가 한일 고대사의 중요한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사료로서 가치가 인정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로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니혼쇼키) 신공기 52년조에 언급되고 있는 "칠지도"로 해석하여 이 칼이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헌상했다고 주장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이 칠지도는 연구되지 않았으나 196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대학김석형이 오히려 이 칼의 명문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고대 삼국이 일본(당시 )에 식민지 국가인 분국을 세웠다는 이른바 삼국분국설을 주장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김석형은 1963년에 발표한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과 이 논문을 보완하여 1966년에 발표한 《초기조일관계사》라는 저서에서 칠지도가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바쳤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고 오히려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하사했다고 주장했다. 김석형의 삼국분국설은 현재 많은 부분이 수정되거나 파기되었지만, 백제 왕이 칠지도를 하사한 것이라는 학설은 남북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당시 유물의 상감 기법 등으로 제작 연대가 6세기로 추정되며 가지가 실제로는 7개가 아닌 6개라는 등 칠지도를 《일본서기》의 내용에 맞추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2009년 고려대연구원인 홍성화의 연구에 따르면 NHK의 X-레이 촬영으로 칠지도의 명문의 연(年)자와 월(月)자 사이에 十(십)자가 검출됨에 따라 제작일을 11월 16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11월16일이 병오(丙午)의 일간지(日干支)를 가진 연도를 산출하면 369년이 아니라 408년이 되어 칠지도는 백제의 전지왕(腆支王)4년 11월16일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명문(銘文)의 '泰□四年'은 전지왕4년으로 추정되어 백제가 연호를 썼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명문의 '侯王'(후왕)은 백제에 신속하고 있던 후왕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백제왕세자(百濟王世子)인 구이신(久爾辛)이 진귀하게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왜왕에게 하사된 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연구에 의해 그동안 칠지도를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에 근거하여 369년 백제에서 제작되어 372년 백제가 일본에 헌상했다는 설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

 

가계

  • 부왕 : 비류왕
  • 모후 : ?
  • 왕후 : 왕후 진씨 - 좌평 진정(眞淨)의 친척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