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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0 : 백제의 역사 16 (제11대 비류왕) 본문
한국의 역사 70 : 백제의 역사 16 (제11대 비류왕)
비류왕(比流王, ? ~ 344년, 재위 : 304년 ~ 344년)은 백제의 제11대 왕이다. 기록에 따르면,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년~234년)의 둘째 아들이고, 사반왕의 동생이다. 분서왕(汾西王)이 죽자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려서 비류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하였다.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를 고려할 때 비류왕은 구수왕이 사망한지 70년이 지난 왕위에 올랐고, 자신은 40년을 재위하였기 때문에 구수왕의 차남이 아니라 차남의 후예인 것으로 판단된다.
기원전 18년 ~ 660년 | |
---|---|
![]()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 |
공용어 | 고대 한국어 |
수도 |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
정치체제 | 군주제 |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
76만호(3,800,000명 추정) |
성립 | 기원전 18년 |
멸망 | 660년 |
초대 군주 |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
최후 군주 | 의자왕 641년 ~ 660년 |
성립 이전 | 마한, 부여 |
해체 이후 | 신라 |
주석 |
|
생애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312년 음력 2월 신하를 보내어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살펴보고, 홀아비,과부, 고아, 그리고 늙어서 자식없이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그 중에서도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는 곡식을 한 사람당 3섬씩 주었다. 또,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321년 봄 정월에 왕의 서제(庶弟) 우복(優福)을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으나 우복은 327년 북한산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고 왕은 이를 토벌하였다.
337년 봄 음력 2월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수교하였다.
344년 겨울 음력 10월에 왕이 죽었고 계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자연재해 기록
- 308년 봄 정월 초하루 병자 : 일식이 발생했다.
- 316년 봄 : 가뭄이 발생했다.
- 321년 가을 음력 7월 :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나라 남쪽에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 327년 가을 음력 7월 : 붉은 까마귀와 같은 구름이 해를 끼고 있었다.
- 331년 봄, 여름 : 가뭄이 크게 들어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음력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 333년 여름 음력 5월 : 별이 떨어졌다.
- 335년 겨울 음력 10월 초하루 을미 : 일식이 발생했다.
- 336년 봄 정월 신사 : 혜성(彗星)이 별자리 규(奎)에 나타났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 왕호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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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온조왕(溫祚王) | 온조(溫祚) |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 |
2 | 다루왕(多婁王) | 다루(多婁) | 기원후 28년 ~ 77년 | 온조왕의 아들. | |
3 | 기루왕(己婁王) | 기루(己婁) | 77년 ~ 128년 | 다루왕의 아들. | |
4 | 개루왕(蓋婁王) | 개루(蓋婁) | 128년 ~ 166년 | 기루왕의 아들. | |
5 | 초고왕(肖古王) | 초고(肖古) | 166년 ~ 214년 |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 |
6 | 구수왕(仇首王) | 구수(仇首) | 214년 ~ 234년 |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 |
7 | 사반왕(沙伴王) | 사반(沙伴) | 234년 |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 |
8 | 고이왕(古爾王) |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 234년 ~ 286년 | 개루왕의 차남. | |
9 | 책계왕(責稽王) | 책계(責稽) | 286년 ~ 298년 |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 |
10 | 분서왕(汾西王) | 분서(汾西) | 298년 ~ 304년 | 책계왕의 아들. | |
11 | 비류왕(比流王) | 비류(比流) | 304년 ~ 344년 | 구수왕의 차남. | |
12 | 계왕(契王) | 계(契) | 344년 ~ 346년 | 분서왕의 아들. | |
13 | 근초고왕(近肖古王) | 초고(肖古), 여구(餘句) | 346년 ~ 375년 |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 |
14 | 근구수왕(近仇首王) | 구수(仇首), 수(須) | 375년 ~ 384년 | 근초고왕의 아들. | |
15 | 침류왕(枕流王) | 침류(枕流) | 384년 ~ 385년 | 근구수왕의 장남. | |
16 | 진사왕(辰斯王) | 진사(辰斯) | 385년 ~ 392년 | 근구수왕의 차남. | |
17 | 아신왕(阿莘王) | 아신(阿莘) | 392년 ~ 405년 | 침류왕의 아들. | |
18 | 전지왕(腆支王) |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 405년 ~ 420년 | 아신왕의 아들. | |
19 | 구이신왕(久爾辛王) | 구이신(久爾辛) | 420년 ~ 427년 | 전지왕의 아들. | |
20 | 비유왕(毗有王) | 비유(毗有), 여비(餘毗) | 427년 ~ 455년 | 구이신왕의 아들. | |
21 | 개로왕(蓋鹵王) | 경사(慶司), 여경(餘慶) | 455년 ~ 475년 |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 |
22 | 문주왕(文周王) | 모도(牟都), 여도(餘都) | 475년 ~ 477년 |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 |
23 | 삼근왕(三斤王) | 삼근(三斤) | 477년 ~ 479년 | 문주왕의 아들. | |
24 | 동성왕(東城王) | 동성왕 |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 479년 ~ 501년 |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
25 | 무령왕(武寧王) | 무령왕 | 사마(斯麻), 여융(餘隆) | 501년 ~ 523년 |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
26 | 성왕(聖王) | 성왕 | 명농(明襛) | 523년 ~ 554년 | 무령왕의 아들. |
27 | 위덕왕(威德王) | 위덕왕 | 창(昌) | 554년 ~ 598년 | 성왕의 장남. |
28 | 혜왕(惠王) | 혜왕 | 계(季) | 598년 ~ 599년 | 성왕의 차남. |
29 | 법왕(法王) | 법왕 | 선(宣), 효순(孝順) | 599년 ~ 600년 | 혜왕의 아들. |
30 | 무왕(武王) | 무왕 | 장(璋), 서동 | 600년 ~ 641년 |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
31 | 의자왕(義慈王) | 의자 | 641년 ~ 660년 | 무왕의 아들. |
제11대 비류왕 실록
(?~서기 344년, 재위:서기 304년 11월~ 344년 10월, 39년 11개월)
비류왕의 한성 장악과 백제의 분열
고이왕 대 이후 백제는 대륙 정책을 가속화하여 산동 지역의 대방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에 주력하였다. 고이왕의 대륙 정책은 그의 아들 책계왕과 손자 분서왕에게로 이어져 대륙에서의 백제의 힘은 한층 강화되었다. 고이왕이 대륙 진출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은 무엇보다도 왕위를 찬탈한 부도덕한 행위를 영토확장과 국력 강화를 통해 상쇄시키려는 의도가 컷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계왕이 대륙에서 전사하고, 분서왕마저 낙랑의 자객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고이왕 대에 시작된 대륙 정책은 힘을 잃고 만다.
책계왕과 분서왕은 왕성인 한성을 비워두고 아예 대륙 지역에 머물면서 영토 확장에 주력했지만, 그것은 고이왕계의 퇴조로 이어졌다. 책계왕이 대륙에서 전쟁을 치르다 전사한 뒤로 백제 내부에서는 대륙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고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서왕은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대륙으로 건너가 낙랑의 서현을 빼앗는 등 강력한 대륙 정책을 감행하였고, 그것은 결국 내분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분서왕의 묘호 '분서'는 서쪽을 나눴다는 뜻으로, 분서왕의 대륙 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들어 있다. 말하자면 분서왕이 대륙을 향한 서진 정책에 지나치게 매달린 탓에 서쪽이 따로 떨어져 나간 꼴이 되었다는 비아냥 거림이 묘호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이는 분서왕 시절에 이미 한반도의 한성에서는 대륙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이 형성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백제가 대륙백제가 따로 분리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분서왕에 대한 반발은 고이왕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된 대륙에서의 영토 확장 정책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것은 고이왕의 즉위와 그 후예의 왕위 계승 자체를 부정하는 사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비류왕의 등장은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삼국사기>는 비류왕을 구수왕의 차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대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구수왕은 234년에 죽었고, 그 뒤로 고이왕이 52년, 책계왕이 12년, 분서왕이 6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즉 비류왕은 구수왕이 죽은 지 70년이나 지난 뒤에 왕위에 올랐다는 말인데, 이는 조작의 흔적이 역력하다. 비류왕에게는 우복이라는 이복 동생이 있는데, 만약 비류왕이 구수왕의 아들이라면, 우복도 구수왕의 아들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비류왕은 적어도 구수왕이 죽은해인 234년보다 이전에 태어났다는 뜻이고, 왕위에 오를 땐 칠순이 넘은 나이어야 한다. 거기에다 자신의 40년 재위 기간을 합치면 그는 110년 이상 살았다는 것인데, 이는 물리적으로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왕위를 찬탈하여 불법적으로 왕좌에 오른 고이왕이 개루왕의 차남이며, 초고왕의 동복 아우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류왕이 구수왕의 차남이라고 한 것 역시 명분을 세우기 위해 혈통을 조작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가 구수왕의 차남임을 자처한 것은 고이왕계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세력을 형성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그에 대해 '오랫동안 평민으로 살면서 명성을 떨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민으로 살았다는 것은 벼슬도 하지 못했고, 귀족으로 대우받지도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명성을 떨쳤다는 것은 반정세력을 형성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구수왕의 혈통을 자처하는 평민이 세력을 떨친다는 것은 반역의 무리를 형성하지 않고는 불가능 할 것이다. 구수왕의 차남이라고 하면 고이왕에 의해 내쫓긴 사반왕의 아우라는 뜻이고, 곧 고이왕계 왕실에겐 반역의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인물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자가 명성을 떨쳤다는 것은 국가 안위를 해치는 중대한 문제인 만큼 책계왕이나 분서왕이 그냥 두고 봤을 리 없다.
고이왕이 사반왕을 내쫓고 왕위에 오를 땐, 사반의 형제들과 그 자식들을 모두 죽였을 것이다. 필시 후일에 화근이 될 것이 뻔한데 살려뒀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구수왕의 직계 자손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비류왕은 누구인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구수왕의 차남의 후손? 아니면 구수왕의 서자 혈통을 이은 방계 인물? 그것도 아니면 그는 정녕 구수왕과 전혀 무관한 인물? 어쩌면 그는 백제 왕실의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인물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분서왕이 대륙 정책에만 의욕을 쏟고 있는 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고, 분서왕이 낙랑에서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자, 왕위에 올랐다.
분서왕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는 대목도 의심스러운데, 자객에게 분서왕이 피살되었을 때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바로 비류왕이다. 그렇다면 분서왕을 죽인 쪽은 낙랑 태수가 아니라 비류왕 쪽이 아닐까? 낙랑에서 보낸 자객에게 왕이 죽었다면, 필시 백제에서는 낙랑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이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비류왕은 즉위 이후 낙랑에 대해 한 차례도 공격하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는가?
또 이상한 것은 비류왕 재위 중에 낙랑은 물론이고, 대륙백제에서 일어난 일은 단 한 건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대륙에서 전쟁 중에 죽었는데, 그들을 이어 왕위에 오른 비류왕 대엔 대륙백제와 관련된 기사가 단 한 건도 없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분서왕 시대 결혼까지 성사한 대방에 대한 기사도 전혀 찿을 수가 없다. 이 사실은 비류왕과 대륙백제와 무관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런 추론이 가능한데, 비류왕은 분서왕이 대륙 경영에 매달려 있는 동안 한반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성을 장악하였고, 낙랑과 공모하여 분서왕 살해에 성공하자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른다. 이 때 대륙에서는 근왕세력이 따로 분서왕의 아들(계왕)을 왕으로 세워 대륙백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분서왕이 죽었을 때,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으로 세울 수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비류왕이 한성을 장악할 수 있었던 가장 현실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비류왕이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그가 정식 절차를 거쳐서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은 그가 무장 출신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고이왕이나 책계왕의 대륙 경영은 분조, 즉 조정을 둘로 갈라 왕이 대륙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태자가 한성을 다스리고, 왕이 한성에 머물고 있는 동안은 태자가 대륙을 경영하는 형태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분서왕의 경우에는 그것이 불가능하였는데, 태자가 너무 어린 탓에 분조를 할수가 없었다. 그러에도 그는 대륙경영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래서 늘 대륙에 머물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반역의 빌미가 되어 비류왕 세력이 등장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분서왕의 묘호인 '분서' 즉, '서쪽을 나누다.'는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비류(比流)'의 뜻인 '나란히 흐른다' 또는 '견줘 흐른다'는 묘호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 있다.
이렇게 볼 때, 비류왕의 즉위 시기는 꼭 분서왕이 죽은 이후라고 말할 수 만은 없다. 다만 왕이라는 호칭을 공공연히 쓰기 시작한 때가 분서왕 사망 이후이고, 그 전부터 한반도 백제를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류왕이 결코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과 비류왕과 대륙백제는 무관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런 사실에 기초할 때 분서왕 시절에 백제는 대륙백제와 한반도 백제로 나누어 졋으며, 비류왕 시절엔 한반도 백제는 비류왕이 다스리고, 대륙백제는 어린 계왕을 옹립한 대륙 세력에 의해 다스려졌을 것이다. 즉 비류왕 재위 40년 동안 백제는 대륙과 한반도로 나눠어 별도로 존재했다는 뜻이다.
분단 상황에서 이어진 비류왕의 40년 치세
비류왕은 구수왕의 방계 혈통으로 보이며,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사람을 아낄 줄 알았다고 한다. 그는 원래 평민이었다가 분서왕 재위시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분서왕이 죽자(혹은 대륙에 생존시) 무력을 앞세워 한성을 장악하고 한반도 백제를 다스리는 왕위에 올랐다.
그는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왕이 된 뒤에도 대궐 서쪽에 누대를 쌓아 놓고 활쏘기를 연습할 정도로 무예에 관심이 많았다.
무력을 앞세워 왕위를 찬탈한 까닭에 그는 즉위 직후부터 민심 안정에 주력하였다. 특히 재위 9년 (312년) 2월에는 각 지방에 민정관을 파견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지방을 순회하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폈다. 이 과정에서 홀아비, 고아, 자식없는 늙은이들 중에 자력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을 골라 일인당 곡식을 세 석씩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또 천지신명께 제사 지낼 때 자신이 직접 재물로 쓰일 고기를 써는 등 여러 방면에서 백성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외교 관계에서도 강경책을 지양하고 평화 구축과 우호 증진에 노력하였다. 신라와 사신을 주고 받으며 화친을 맺었고, 낙랑.고구려.말갈 등과도 전혀 전쟁을 하지 않았으며, 재위기간 내내 다른 나라와 일체의 싸움을 벌이는 일도 없었다.
비류왕의 이런 안정책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늘 불안한 상황이었다. 불안의 첯 번째 요소는 반란이었다.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줄곧 대륙에는 또 하나의 백제가 있는 상태이고, 대륙 세력이 늘 왕위 회복을 엿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내부에서도 함께 반정을 도모했던 세력의 도전이 도사리고 있었다.
재위 24년(327년)에 일어난 '우복의 난'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우복은 비류왕의 이복 동생으로 18년(321년) 정월에 내신좌평에 임명된 사람이다. 내신좌평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직위로 좌평 중에서 가장 요직에 속하며, 왕의 최측근이 맡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비류왕은 반정을 통해 왕이 되었기에 그 공신들이 요직을 차지했을 것이고, 우복 또한 반정 공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반정 공신이란 시대를 막론하고 늘 왕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게 마련이고, 한편에선 언제던지 왕권을 탈취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이다. 우복 또한 그러한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복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비류왕과 대립이 있었다는 의미인데, 이러한 대립은 비류왕이 반정세력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즉 비류왕은 왕권이 안정되면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반정 세력의 힘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려 했을 것이고, 공신의 우두머리격인 우복은 그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우복은 327년 9월에 북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거점이 한강 건너편에 북한성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사건은 정변이 아니라 군사 쿠테타였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정변이라면 한성 내부에서 벌어졌을 터인데, 산성을 거점으로 삼았다는 것은 병력을 일으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복은 거사에 성공하지 못햇다. 비류왕이 출동시킨 토벌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우복의 반란 이외에 비류왕 년간에 또 다른 반란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반란 사건의 흔적은 있다. 재위 13년 기사에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는 내용이 있고, 또 4월 기사에서 '서울에 우물이 넘치고, 그 속에서 흑룡이 나타났다.'는 은유적인 내용이 보인다. 여기서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는 것은 민심이 대륙백제에 머물고 있는 계왕에게 쏠렸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흑룡은 아마도 왕을 자칭하는 또 하나의 인물을 의미하는 듯하다. 또 서울에 우물이 넘쳤다는 것은 서울 민심이 요동쳤다는 것을 표현한 것인 듯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건을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전쟁이나 정변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류왕을 괴롭힌 것은 비단 정치적 불안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더 힘들게 만든 것은 천재였다.
재위 18년 7월에는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곡식을 해치는 바람에 흉년이 들었고, 재위 28년 봄과 여름에 걸쳐 심한 가믐이 들었는데, 풀과 나무가 말라 죽고 강물까지 말라버렸다. 그런 가믐은 무려 반 년 동안 계속되어 가을에 이르러서야 겨우 비가 내렸다. 하지만 가믐으로 심한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재위 30년 5월에는 대궐에 큰 화재가 나, 그 불길이 번져 많은 민가가 불에 타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비류왕은 반란과 천재, 인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굳건히 왕위를 지키며 40년을 재위하다가 344년 10월에 죽었다.
그의 능에 관한 기사는 남아 있지 않고, 가족에 대한 기사는 자세하지는 않다. 근초고왕이 그의 차남인 점을 감안할 때 자식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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