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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8 : 백제의 역사 14 (제9대 책계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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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8 : 백제의 역사 14 (제9대 책계왕)

두바퀴인생 2010. 11. 12. 02:48

 

 

 

한국의 역사 68 : 백제의 역사 14 (제9대 책계왕)

 

 
제9대 책계왕(청계왕,책찬왕)

 

책계왕(責稽王, ? ~ 298년, 재위 : 286년 ~ 298년)은 백제의 제9대 왕이다. 고이왕(古爾王)의 아들로 청계왕(靑稽王) 또는 책찬왕(責贊王)이라고도 부른다. 체격이 크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하였다고 한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생애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따르면 286년에 산동 반도의 대방 땅에 있던 초기 수도인 위례성을 수리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막고자 한반도의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고 한다.

 

대방이 공격을 당하자 백제 책계왕은 구원병을 보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기록하고 있으나 이때 고구려는 제13대 서천왕 17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고구려본기에는 대방을 공격하였다는 기사가 없다. 그해 2월 고구려에서는 서천왕의 아우 일소와 소발이 모반을 도모하여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시기로 당시 대방을 공격할 여우가 없던 시기이다.

 

그렇다면 이 때 대방을 공격한 세력은 누구일까? 그것은 아마도 낙랑일 가능성이 높다. 대방은 원래 낙랑에 속한 땅인데, 고이왕에게 빼앗겼다가 고이왕이 죽자,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낙랑이 고구려군에 의지하여 대방을 쳤을 것이라는 뜻이다. 책계왕이 한나라(흉노 귀족 유연 세력) 군대와 맥족 백성들로 형성된 연합군과 싸우다가 죽은 사실이나, 책계왕의 아들 분서왕이 낙랑과 영토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낙랑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는 것은 백제를 공격해온 중심 세력이 낙랑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298년 음력 9월, 한나라군(漢軍)이 맥인(貊人)들을 이끌고 침입하였고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가계

  • 부왕 : 고이왕
  • 왕후 : 보과부인(寶菓夫人) - 대방군(帶方郡) 태수(太守)의 딸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

 

 

 

 

 

 

제9대 책계왕 실록

(?~서기 298년, 재위:서기 286년 11월~ 298년 9월, 11년 10개월)

 

대륙백제의 영토확장에 주력한 책계왕

책계(責稽)왕은 청계(靑稽)라고도 불리었으며,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는 고이왕의 아들이기는 하나 장남은 아니었으며, 체격이 장대하고 위지와 기품이 걸출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책계왕이 즉위와 동시에 장정들을 선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는데, 이 때 보수한 위례성은 한강 북쪽의 위례성이 아니라 온조와 비류가 건국 초기에 중국의 대방 땅에 건설한 산동반도의 하남 위례성으로 판단된다. 당시 백제는 한반도 북방의 말갈과 화친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라와도 평화를 지속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때문에 한강 북방의 위례성을 굳이 보수할 이유가 없었다.

 

책계왕이 위례성을 보수했다는 기사에 이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등장한다.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 왕 딸 보과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왕이 "대방은 우리와 옹서지간이 되는 나라이니,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켰다.

 

이 내용은 위례성 보수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대방은 중국 산동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고, 고이왕 대에 백제의 지배권 아래 놓여 있던 곳이었으며, 대륙백제의 전초기지 역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방  태수는 딸을 백제에 시집보내야  했고, 그 딸이 책계왕의 부인 보과부인이다. 책계왕은 그런 대방 땅을 지키기 위해서 백제가 초기에 건설했던 위례성을 보수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 때 쳐들어온 군대가 고구려군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책<<고구려본기>>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책계왕 원년은 고구려 13대 서천왕 17년에 해당하는데, 당시 고구려 서천왕은 아우 일소와 소발이 모반을 도모하여 조정이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래서 고구려는 당시 대방을 주도적으로 공격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책계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대방을 구원하자 고구려가 백제를 원망하였다는 기사가 있고, 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하여 방비케 하였다는 기사가 덧붙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 대방을 침략한 군사 중에는 고구려군도 일부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고구려의 당시 상황이 전쟁을 치를 입장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고구려는 대방 공략의 주도 세력은 아닌 듯하다.

 

이 때 대방을 공격한 주도 세력은 아마도 낙랑 태수의 군대였을 것이다. 대방은 원래 낙랑의 땅인데, 고이왕에게 빼앗겼다가 고이왕이 죽자,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낙랑이 고구려군에 의지하여 대방을 쳤을 가능성이 높다. 책계왕이 한나라 군대와 맥족들로 구성된 연합군과 싸우다가 죽는 일이나, 책계왕의 아들 분서왕이 낙랑과 영토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낙랑의 자객에게 살해되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백제를 공격해온 중심 세력은 낙랑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책계왕은 재위 13년(296년) 9월에 죽은데, 그때 상황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한나라가 맥 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한나라는 흉노 귀족 유연 세력을 일컫는다. 당시 서진은 외척과 왕족들의 내분으로 곳곳에서 전쟁을 일삼고 있었는데, 그 혼란을 이용하여 저족과 흉노족이 대거 봉기하여 세력을 형성하였고, 이 때부터 이른바 외방 오족인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된다.

 

유연의 터전은 대륙백제가 있던 산동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양(산서성 임분)이었다. 이들은 304년에 평양을 도읍으로 한나라를 세우는데, 이미 이때부터 이 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낙랑 지역은 유연의 세력권 아래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잇다.

 

유연이 세력을 확대하던 시점에 백제 또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당시 진이 내분으로 몰락상을 보일 때로 백제가 대륙의 영토를 확대하고자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흉노족이나 저족 등 외족들도 대거 중앙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하는 상황이라면, 백제의 입장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책계왕은 이 일을 위해 직접 대륙에 머물면서 전쟁을 직접 지휘하였다. 그러다가 흉노족과 맥족으로 구성된 연합군의 침략을 막다가 전사하는 비운을 맞이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한과 맥족이 어느 성을 어떻게 침범하였는지는 전혀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만약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구체적인 격전지를 기록하였을 것이고, 또 그들이 쳐들어온 곳이 백제의 도성인 한성이라면 그 점을 기록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책계왕이 어디서 어떻게 싸우다가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이는 <삼국사기> 편자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기록한 사료, 즉 중국 대륙에서 책계왕이 싸우다가 죽었다는 내용의 사료를 보고 납득할 수가 없어 그냥 죽은 내용만 기록했을지 모른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책계왕 즉위년 기사는 다른 왕들의 즉위년 기사에 비해 비교적 상세한 편인데, 재위 2년부터 죽기 전까지의 기록은 전무하다. 게다가 책계왕의 죽음도 대륙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는 <삼국사기> 편자들이 본 책계왕 관련 사료들이 모두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했기 때문에 고의로 빼버린 결과가 아닐까? <삼국사기> 편자들은 대륙백제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다. 때문에 책계왕이 대륙에서 죽은 일과 재위 기간 대부분을 대륙에서 보낸 일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편찬 과정에서 고의로 그런 내용을 모두 빼버린 것은 아닐까?

 

중국측 사료에는 대륙백제에 대한 기사가 숱하게 보이는데도 그 자료를 기반으로 만든 <삼국사기>에는 대륙백제에 대한 기사가 전무하다. 이는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백제의 땅이 대륙에도 있었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광활한 땅을 가졌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륙에서 한나라군과 싸우다가 죽은 책계왕 관련 사료들도 그런 이유에서 무시되었고, 그래서 책계왕에 대해선 즉위년과 사망한 해에 관한 기사만 다룬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책계왕이 죽을 때 한나라 사람들과 함께 몰려온 '맥' 사람들은 누구일까? 맥은 대개 예맥으로 불려졌고, 흔히 중국 측에서 예맥이라고 하면 고구려인들을 일컬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후한서>엔 '원초 5년(118년) 고구려가 예맥과 함께 현도군을 침입하여 화려성을 공격하였다.'는 내용이 있고, '건광 원년(121년) 가을 궁(고구려 6대 태조)이 마한, 예맥의 수천 기를 이끌고 현도군을 포위했다.' 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들은 고구려와 예맥을 다른 세력으로 기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때 예맥은 고구려의 변방에 있으면서, 고구려에 속하지 않은 예맥족을 일컫는 것인데, 한과 함께 책계왕을 공격한 맥족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에 속하지 않던 예맥족은 어디에서 살고 있던 세력일까? 아마도 이들은 낙랑 지역에 살고 있던 세력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온조왕 실록>에서 낙랑은 원래 서기전 123년에 예의 임금 남려가 약 1백만의 백성들을 이끌고 세운 예족 집단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예족과 맥족은 원래 다른 민족이었으나, 점차 예맥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합쳐지게 되었다. 책계왕 당시 백제를 침입한 맥은 예맥을 일컫는 것인바, 남려가 형성한 낙랑과 같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때 한나라군과 함께 쳐들어온 맥인들은 곧 남려와 함께 낙랑을 형성한 1백만의 예족들의 후예라고 볼 수 있겠다.

 

책계왕을 이어 즉위한 분서왕이 낙랑의 서현을 기습한여 빼앗고,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는 것도 책계왕을 공격한 맥이 낙랑 태수와 관련이 있는 세력이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다만, 이 때 한국과 함께ㅡ 볼려온 맥인들은 낙랑 태수가 직접 이끄는 군대가 아니라 낙랑 지역에 살고 있던 예맥 출신의 백성들일 가능성이 높다.

 

책계왕의 기족으로는 대방 출신의 부인 보과와 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남 분서왕이 있다. 당시 상황으로 대방 출신 보과는 정비에 오르지 못햇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분서왕은 보과의 아들이 아니라 정비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책계왕은 대방 출신의 보과 이전에 이미 부인이 있었다는 뜻이다. 보과가 분서왕의 어머니라는 기록이 없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