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67 : 백제의 역사 13 (제8대 고이왕 2)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67 : 백제의 역사 13 (제8대 고이왕 2)

두바퀴인생 2010. 11. 11. 02:00

 

 

한국의 역사 67 : 백제의 역사 13 (제8대 고이왕 2)

 

 

백제의 대륙 진출 과정과 그 증거들

 

백제는 언제 대륙에 진출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백제 땅이 대륙에도 있었다는 것은 이미 정설이 되어 있지만, 그 구체적인 성립 과정은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한 사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결코 수수께끼 정도로 치부할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대륙백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편자들은 백제의 대륙 영토에 대하여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중국 사서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대륙백제에 관한 기사는 완전히 제외시켰고, 설사 인용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편찬했다. <삼국사기>편자들의 이런 행위는 결국 백제사를 한반도 안에만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축소하고 왜소한 별 볼일 없는 나라로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오히려 중국의 사서들은 대륙백제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있으며, 그 성립 과정과 시기를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중국 사서에서 백제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나타는 것은 남북조 시대 송나라 역사를 기록한 <송서>다. <송서>는 남조 제나라 무제 연간인 488년에 심약이라는 인물이 무제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책으로 권 97 열전 제57 이만편에서 백제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백제국은 본디 고려(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었으며, 그 뒤에 고려(고구려)는 요동을 공략하여 가지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가지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린 곳을 일컬어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삼국사기> 편자들도 송서를 참고했을 터이고, 틀림없이 도입부의 이 기록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기록을 신뢰하지 않았고 당시 그들의 상식으로는 백제가 요서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백제란 그저 한반도 서쪽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작은 나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비단 그들뿐 아니라 지금도 일부 학자들은 백제의 요서 경략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실정이다.

 

 

백제의 대륙 근거지 마련 시기

 

백제는 도대체 어떤 경로로 바다 건너 대륙의 요서 지역을 장악하여 다스렸단 말인가? 진평군이라는 구체적인 지명까지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가 요서 지역을 점령하여 다스린 것은 분명한데, 그 경로는 그저 수수께끼로만 남아 있다.

 

백제는 고구려 유리명왕 때 분리된 세력으로 건국 초기에 요동과 하남(황하 남쪽) 지역에서 기반을 형성했다. 하지만 요동 세력은 수년에 걸친 기근으로 백성들이 대거 고구려로 이주함에 따라 요서로 건너와 합류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후한과 고구려의 세력이 팽창하자 산동 지역에 일부 근거지만 남겨놓고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마한의 땅으로 찿아든다.

 

그 후 마한에서 독자적인 힘을 형성하여 마침내 마한을 무너뜨리고 한반도의 신진세력이 되자 백제는 다시금 산동에 남아있던 근거지를 확장하면서 한편으로 한반도에서는 낙랑, 말갈 등과 세력 다툼을 벌이면서 또 하나의 신진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신라와 세력을 다투게 된다. 이처럼 백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강국으로 성장하여 5호 16국 시대가 전개되던 4세기 초부터는 대륙에서의 기반을 강화하여 산동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당나라 태종 연간인 636년에 편찬한 <양서>는 남조 양나라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거기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백제는 본디 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으나, 진나라 때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가지자, 백제 역시 요서군과 진평군의 땅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양서>는 백제가 요서 지역을 차지한 때를 진나라 때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고, 여기서는 진평군 이외에는 요서군이라는 지명과 백제군이라는 지명이 추가되었다.

 

<양서>에서 말하는 진나라는 사마염이 266년에 세운 '진(晉)'을 일컫는다. '진'은 '서진'과 '동진'으로 나뉘는데, 서진은 사마염이 세운 것이고 동진은 흉노족 유연에 의해 서진이 몰락하자 사마씨의 후예 사마예가 동쪽으로 달아나 세운 나라를 일컫는다. 서진은 266년에서 316년까지 유지되었고, 동진은 317년에서 420년까지 유지되었는데,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한 시기는 서진 시대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13년(298년) 9월 기사에서 '한나라가 맥 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살해되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한나라는 흉노의 귀족 유연의 세력을 일컫는다. 유연은 이 무렵 서진의 세력이 약화되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304년 '한(漢)'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 한나라는 원래 평양(지금의 산서성 임분시 서남쪽)에 도읍하였다가 나중에 장안으로 천도하여 국호를 '조(趙)'로 고쳤는데, 이를 중국사에서는 '전조'라고 부른다.

 

한이 침입한 백제 땅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이었다. 흉노 새력이 고구려 땅을 지나 지금의 한반도 중부 한성까지 침공하였을 리가 없다. 따라서 백제가 망명 당시 일부의 잔존 세력이 산동반도 일대에 잔류하다가 고이왕 13년(246년) 8월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으로 하여금 낙랑 변방을 공격하여 진출하면서 뿌리를 내렸고, 요서 지역을 최초로 장악한 시기는 서진이 세워진 266년에서 한의 침입으로 책계왕이 전사한 298년 사이로  약 32년간으로 한정된다.

 

그런데 책계왕의 부인이 대방 왕의 딸 보과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책계왕 즉위년인 286년 이전에 대방이 백제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백제가 산동성 아래 위치한 대방을 세력권 아래 두었다는 것은 이미 그때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하여 있었다는 의미다. 즉, 백제는 고이왕 연간에 이미 대륙에 진출하여 요서 지역을 장악하였고, 진평군과 요서군을 합쳐 백제군으로 불렀으며, 대방 왕은 그런 백제의 막강한 힘에 의지할 요량으로 자신의 딸을 백제 태자에게 내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백제는 언제부터 대륙에 진출했을까? 고이왕 13년(246년) 8월에 위나라 유주 자사 관구검이 낙랑 태수 유무와 대방 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이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을 공격해 그 주민들을 잡아오는 사건이 있었는데, 백제의 대륙 진출은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중국측 기록은 진(晉)의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 권 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제30의 '한(韓)' 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디 한국을 통치하였다고 하면서 진한의 여덟 나라를 분할하여 낙랑에게 줘버렸는데, 이 일을 벼슬아치가 통역하면서 전하다가 잘못 전해진 부분이 있자, 신지가 한(韓) 백성들을 격분시켜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 때에 태수 궁준과 낙랑 태수 유무가 병사를 일으켜 정벌했는데, 궁준은 전사하였으나 두 군이 마침내 한을 멸하였다.'

 

 <삼국지>의 이 기록은 마한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마한은 이미 그때 멸망하고 없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백제를 여전히 마한으로 알고 있던 때였다. 때문에 백제 왕을 마한 왕 신지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마한의 신지로 표현된 사람은 다름 아닌 백제의 고이왕이었고, 기리영을 공격하여 궁준을 죽인 군대는 고이왕이 보낸 진충의 군대였다.

 

고이왕이 진충을 시켜 대방을 공격한 것은 낙랑 태수가 위나라 부종사 오림의 말을 빌미로 백제에 속한 진한 땅의 영유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서 낙랑군과 대방군이 합쳐서 한을 멸하였다고 하는 내용은 조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때문에 진수의 <삼국지> 외에 마한에 관한 기사는 어느 사서에도 이러한 내용이 발견되지도 차용되지도 않고 있다. 진수의 <삼국지>는 위나라 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고 쓴 책인데, 당시 백제가 낙랑과 대방을 장악한 내용이 그대로 남을 경우 위나라 땅을 승계한 진나라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염려하여 진수가 고의로 조작했다는 뜻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역사는 오류가 있기 마련이고 잘못 기록되기도 한다. 또 역사는 승자들에 의해 조작되기도 하고 과장.축소되기가 일쑤였다. 

 

서진 시대에 이미 백제가 대륙에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서>에 백제 편은 없으며 이미 망한 나라인 '마한' 편만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 때 백제의 세력은 낙랑과 대방 세력에 의해 패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물리치고 대방을 장악했으며 그 때문에 대방에서는 볼모로 딸을 백제에 시집보내야 했던 것이다. 즉,백제는 이 때 대방을 장악하여 대륙 진출의 근거지로 삼고 후에 요서군과 진평군을 차지하여 대륙백제를 일궜다는 뜻이다.

 

중국이 백제라는 나라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개척한 서진 이후부터였다. 그 전까지 중국에선 한반도 중부 이남을 삼한의 땅으로 인식했고, 때문에 백제가 대륙에 진출하기 전에는 삼한의 맹주인 마한과 마한의 중심국인 목지국에 의해 그 땅이 다스려지고 있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백제가 처음 대륙에 진출할 때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은 백제를 마한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송서>와 <남제서>, <위서>, <주서>에 백제 편은 있으나 신라 편은 없는 것도 당시에 중국은 신라를 진한의 한 소국으로 인식하는 한편, 백제는 대륙에 진출한 비교적 큰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남사>에서는 신라의 위치를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에 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백제의 대륙 영토를 중심으로 기술한 것이다. 5천여 리라는 개념은 백제를 대륙에 설정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대륙백제의 위치는 어디인가?

 

그러면 고이왕이 개척한 대륙 백제의 위치는 관연 어디일까? <송서>와 <양서>에는 대륙백제의 위치를 요서 지역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요서 지역은 요수 서쪽 일대를 통칭하는 것이므로 그 범위가 매우 넓다. 때문에 요서 지역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대룩백제의 위치를 정확히 비정하기가 어렵다.

 

북위의 역사서를 다룬 <위서>의 다음 내용은 대륙백제의 위치를 좀더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1천 리 떨어져 있으며,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땅은 매우 낮고 습기가 많기에 거의 모두가 산에 기거한다.'

 

북위는 386년에 창업되어 528년에 망한 나라로 한 때 백제와 직접적인  전쟁을 치른 나라이기도 하다. 때문에 북위의 기록을 바탕으로 형성된 <위서>는 당시의 영토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위서>의 기록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 붙어 있지 않았으며, 그것도 1천 리나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백제의 위치를 소해의 남쪽이라고 구체적으로 쓰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소해란 발해를 의미한다. 즉, 대륙백제는 요서 지역으로서 고구려 국경과 1천 리 이상 떨어진 발해 남쪽 일대에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기후와 거주 지역에 대한 설명은 그 위치를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땅은 매우 낮고 습하며 저지대로 대부분 산에 주거지를 만들어 살고 있다는 설명은 발해 남쪽 요수 서쪽 일대와 산동 반도 지형과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발해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로 둘러싸인 내해로 '안개바다'라는 뜻인데, 지대가 낮고 깊은 만이 형성되어 있는 까닭에 늘 안개가 끼어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면적은 총 7만 제곱키로미터이고, 크게는 네 부분으로 나누는데, 서부는 발해만, 북부는 요동만, 남부는 내주만, 가운데는 발해중앙분지이다.

 

발해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대륙의 영향을 심하게 받아 수온의 연 변화가 크고, 황하를 비롯하여 난하.요하.해하 등의 거대한 하천들이 모두 흘러드는 곳이라 늘 습기가 많은 곳이다.

 

발해 남쪽은 내주만과 산동반도 지역으로 지표면은 장기간 침식되어 대부분 구릉지이고, 아주 일부만 1천 미터 이상의 높은 봉우리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구릉지에 기거하고, 농작물도 구릉지에 적합한 사과와 배를 대량 생산한다. 이 곳의 수목으로는 구릉산지에 잘 자라는 참나무가 가장 많은데, 이것은 멧누에인 작잠의 사료로 쓰인다. 이 곳의 연 강수량은 650에서 950밀리미터 사이로, 다른 화북 지역 강수량보다 200밀리미터 이상 많은 지역이다.

 

이 곳 사람들이 발해만 주변의 저평원 지대에 기거하지 않고 산간 지역인 구릉지에 기거하는 또 다른 이유는 평원 지역이 모두 '염화저평원'이기 대문이다. 이 곳에서는 해수가 들어온 후 조수가 빠지지 못해 해수가 증발되고 지하수 염분 농도가 증가되어 고등식물이 번식할 수가 없다. 산동,하북.강소 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열거한 사실들은 <위서>의 '땅은 매우 낮고 습기가 많기에 모두 산에 기거한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즉, 대륙백제는 발해 남쪽의 산동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후에 세력이 팽창되면서 하북성과 강소성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대륙백제의 확장과 주변국과 충돌 

 

그 후 백제는 꾸준히 대륙에서의 기반을 확충하다가 연이 전진에 밀리는 상황이 되자 369년을 전후하여 다시 요서 지역으로 진출한다.

 

역사적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첯 접촉은 서기 286년에 있었는데, 백제가 나라를 건국한 지 무려 3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두 형제국의 접촉이 있었다.

 

서기 286년은 고구려 서천왕 17년, 백제 책계왕 원년에 해당된다. 이 때 고구려의 서천왕은 북진정책에 성공하여 부여 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다시 남진정책을 감행하여 대방을 쳤다. 그런데 당시 책계왕은 대방 왕의 딸 보과를 왕비로 맞아들인 상태였기 때문에 대방을 지원했다. 대방이 고구려의 침략을 받자 백제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백제의 책계왕은 대방과 백제가 옹서지간이 되는 나라이니 당연히 도와야 한다면서 구원병을 보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서천왕의 대방 공략은 무위로 끝나고, 고구려 조정은 백제를 원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백제와 고구려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83년이 지난 369년에 서로 적대관계로 만났던 것이다. 그들은 발해만과 요서 지역의 관할권을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다.

 

백제의 팽창정책은 370년에 연나라가 전진에 멸망하면서 더욱 가속화되는 데, 이 때 고구려도 연나라의 패망을 계기로 요서 지역을 회복하려 했다. 369년에 있었던 '치양전투'도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역사 학계는 치양을 한반도 황해도 배천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잘못이다. 요서 지역의 한 지역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충돌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요서 지역을 노리자 발해 연안을 빼앗길 것을 염려한 고구려는 369년 9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선제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백제는 모용씨의 전연이 전진에 의해 멸망을 눈 앞에 두자 발해 연안에서 힘을 형성하여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서기 369년 9월에 2만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치양전투'에서 백제의 태자 금구수가 이끄는 군사에 패해 군사 5천을 읽고 오히려 몰리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370년에 진나라 왕맹이 연을 격파하였고, 백제의 근초고왕은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북진정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에 고구려는 371년 9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선제공격하였다. 하지만 패하 강가에 숨어있던 백제의 복병에게 기습을 당해 패하여 퇴각하였다. 백제는 승세를 놓치지 않고 고구려를 향해 진군하였고, 마침내 서기 371년 10월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자신이 직접 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이 있던 고구려의 평양성을 급습하기에 이른다. 이 때 백제의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와 함께 군사 3만을 이끌고 직접 출전하였다. 백제의 과감한 공격에 당황한 고구려는 미쳐 대처하지도 못하고 평양성을 중심으로 수성전에 돌입하였으나 이미 사기가 치솟은 백제군을 당해내지를 못하고 고전하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백제군은 평양성을 함락시키지를 못했다. 비록 고국원왕이 쓰러지기는 했지만 태자 구부의 통솔력에 힘입어 고구려군은 잘 버티었고, 적진 깊숙히 먼 거리를 행군한 백제군은 속전속결을 노리다가 고구려군의 포위를 고려하여 고국원왕에 치명상을 입힌 것에 만족하고 급히 퇴각을 하였다. 더 오래 버티다가는 고구려군의 반격에 전군이 전멸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근초고왕은 백제군을 급거 철수시키게 된다.

 

백제군이 물러간 다음 고국원왕은 화살에 맞은 상처가 도져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백제군은 사기가 충천되어 그 이후에도 고구려와 대등한 싸움을 벌이며 영토확장에 주력한다.

 

동명성왕에게서 나온 형제국인 고구려와 백제는 이처럼 다시 원수로 만나 패권을 다투며 한반도와 중국에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인 것이다.  

 

 

대륙백제의 기상

 

백제란 본디 고구려와 더불어 국제무대를 누비는 해상제국이었다.

 

중국 사서들을 보면 일치하는 점을 찾을수 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을 비슷하게 보고 있다.  고구려가 당나라와 싸워 여러번 이긴것처럼  백제군 또한 북위와 5차례나 전쟁을 치러 모두 승리한 것이 중국 사서에 분명히 기록 되어있다.

 

무적 기질은 고구려에 비하여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을뿐 아니라 국세(國勢) 또한 강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당서(舊唐書)에 『
西渡모모모, 比渡海모高모, 南渡海모모』라고 하 여 백제의 강통가 중국 산동절강(山東浙江) 일대까지 이르고 일본을 속국 으로 두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남제서(南濟書)에는 기원 490년에 위 (魏)가 두번이나 기병, 보병 수십만을 내어 백제를 침범하였다가 모두 격 퇴된 사실을 적고 있는데 삼국시대에 중국대륙의 10만 이상의 군대를 쳐부 순 것은 백제의 동성왕(東城王)때가 처음으로 당시 백제의 강력한 무력 을 나타내는 기록들이다.

 

미수(眉수) 허목(許穆)은『싸움을 좋아하는 나라로 백제만한 나라가 없 다고 하였고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은 세나라 중에서 백제가 가장 전쟁을 좋아한다고 일컬어진다』고 하여 백제인이 날래고 사나우며 싸움을 잘한다고 말하고 있다.

 

고구려가 뛰어난건 더욱히 사실이나 백제 또한 고구려에 비해 뒤지지 않았음을 중국 사서에 기록으로 말해주고 있는것이다.

 

이야기를 돌리자면 대륙백제에 대한 시기와 반발이 오가지만 이미 학계에서 대륙백제를 인정했으며 대규모 사서들과 일치하는 대목을 봐서는

증거가 너무나도 정확하다.

 

신라를 찬양하는 사람에겐 백제란 작은 국가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대륙백제』에 대하여 알아보게 된다면, 실제로 신라는 백제에 비하여

외소한 국가임을 깨닫게 되는게 사실이다.

 

당대 중국에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높게 평가 헀지만 신라 라는 나라는 매우 낮게 평가하였다. 백제와 고구려는 우리나라의 자랑거리가 아닐수 없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396년에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 58성은 위와 같이 비정된다. 대백제국의 영역을 살펴볼 수 있다.

 

 

 

위 그림을 보면 알수 있듯이  교과서에서 나온 백제와는 전혀 틀리다. 그렇지만 이것이 진정한 백제이다. 아니 이것보다 훨씬 클수도 있다.

 

박영규 교수는 백제를 쇄족에 묶인 거인이라 표현하였고, 이도학 교수는 백제를 동방로마제국 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이외에 여러 학자들이 백제를 크기를 알 수 없는 거인이라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