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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5 : 백제의 역사 11 (제7대 사반왕)

두바퀴인생 2010. 11. 9. 00:58

 

 

 

한국의 역사 65 : 백제의 역사 11 (제7대 사반왕)

 

 
제7대 사반왕(사비왕, 사이왕)

 

사반왕(沙伴王, ?~?, 재위 : 234년)은 백제의 제7대 왕이다. 사비왕(沙沸王) 또는 사이왕(沙伊王)으로도 부른다. 선왕(先王) 구수왕의 장자이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생애

구수왕이 234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지만, 나이가 어려서 즉시 고이왕(제5대 초고왕의 남동생)이 왕위에 올랐다.

 

사반이 어린 나이에 구수왕의 유언으로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후비 소생으로 적통이 아니며 나이도 어린 관계로 신하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야기하게 된다. 결국 고이왕의 반정으로 사반은 폐위되어 살해되었다.

 

이로인해 백제 왕실은 왕위 승계에 대한 일대 혼란을 겪게 되면서 많은 의문과 억측이 난무하는 왕족 계보를 이루게 된다.

 

70년이 지난 후 평민으로 살고 있던 사반의 형제들 후예 중에서 비류왕은 분서왕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된 틈을 타서 왕위를 장악하게 된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

 

 

 

 

 

 

제7대 사반왕 실록

(생몰년 미상, 재위:서기 234년 ~ 234년)

 

모래 반쪽 인생, 사반왕

사반(沙半)왕은 구수왕의 장남이다. 구수왕이 234년에 죽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하지만 그는 왕위에 오래 있지 못했다. 그의 묘호 사반은 '모래 반쪽'이라는 뜻인데, 그의 재위 기간은 그야말로 모래 반쪽에 비유될 만큼 짧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즉위 당시 그는 십대의 어린 소년이엇던 모양인데, 그 때문에 제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역모가 일어나 폐위를 당하였다.

 

개루왕이 38년 재위했고, 초고왕이 48년이나 재위하였기 때문에 구수왕은 적어도 40대 이상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 사반은 구수왕이 20년 재위한 뒤에 불과 십대의 어린 소년이었다면, 사반은 결코 구수왕의 정비 소생일 수가 없을 것이다. 즉. 구수왕은 정비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하였고, 후비 중에서 그것도 나이가 아주 많이 차이 나는 어린 후궁 중에서 사반을 얻었을 것이다. 즉, 사반은 구수왕의 장남이기는 하지만 적자가 아닌 서자였고, 그것은 곧 방계에 의한 왕위 계승을 의미한다. 방계승통에다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사반은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얻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반에게 왕위가 이어졌다는 것은 구수왕이 그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방계승통과 어린 왕을 즉위시키는 문제는 왕실과 신하들의 불만을 사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구수왕의 유명을 따르는 파와 그 반대파의 대립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다. 사반왕이 폐위된 것은 바로 그런 대립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고이왕 기사에서 '사반이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하므로, 초고왕의 동복 아우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사반왕과 관련된 기록의 전부이다. 하지만 이 기록의 행간을 읽어보면 왕위 찬탈의 징후를 쉽게 찿을 수 있다. 마치 순리에 따라 고이왕이 왕위를 이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고이왕이 왕위를 찬탈한 것이 확실하다. 만약 고이왕이 왕위를 찬탈하지 않았다면, 고이왕이 죽은 후에 사반에게 왕위가 이어지는 것이 순리이다. 또 그때 사반이 살아 있지 않았다면 명분을 살려 사반의 장남이 왕위를 이었어야 한다. 하지만 고이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고이왕의 아들 책계왕이었다. 이는 고이왕이 사반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사반이 내쫓고 왕위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조선 시대의 단종 폐위 사건과 영창대군 살해 사건이 원인이 된 인조반정과 광해군 폐위사건이다.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숙부 수양은 결국 왕이 어린 것을 핑계 삼아 왕위를 찬탈하였는데, 고이왕이 왕위에 오른 것도 세조 수양이 왕위에 오른 것과 유사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광해군은 세자로 임진왜란 중에도 분조를 이끌고 전국을 다니면서 민심을 달래고 근왕병을 모집하는 등 나라에 큰 공을 세운 탓으로 선조가 나이 50줄에  십대의 어린 정비를 간택하여 영창대군이 태어나게 되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선조는 세자를 영창으로 바꾸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선조가 졸하고 나자 정비 소생의 어린 영창대군이 강보에 싸여 있었지만 왕위를 잇는다 해도 큰 풍파는 불을 보는 듯 한 관계로 고심하던 어린 대비는 단호한  결단으로 광해군이 왕위를 잇게 교지를 내린다. 왕위를 이은 광해군은 적통과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면서 대비의 견제를 심하게 받았고 한편 광해군은 대북파의 압력으로 결국 눈에 가시같은 어린 영창을 살해하게 되고 대비를 감금하게 된다. 결국 이와같은 패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하여 반정이 성공하자 광해군은 폐위되고 말았다.

 

<삼국사기>는 고이왕을 개루왕의 돌째 아들이자, 초고왕의 동복 아우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것은 시간상으로 불가능한 일이므로, 이는 조작되었거나 잘못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고이왕은 개루왕의 돌째 아들이 아니라 둘째 아들의 후예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유사한 기록이 제11대 비류왕 대에도 있고, 비슷한 상황의 왕위 계승 경우가 고구려와 신라에도 있었다.

 

어쨌던 사반왕은 왕위에 오른 지 며칠 만에 반정을 일으킨 고이왕에게 왕위를 내줬다. 이 사건은 백제 왕실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켜, 결국 왕실이 왕위 승계를 놓고 내부 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백제왕들 중에 근구수, 근초고, 근개루(개로왕) 등의 묘호를 쓰는 왕들이 나오게 되는 것도 근본적으로 이 사건이 뿌리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백제 왕통에 대한 사학계의 해석과 의문이 분분한 것도 사반왕 폐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사반왕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며, 이후에도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봐서 폐위 이후 피살된 것으로 보인다. 제11대 비류왕이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사반에게는 아우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아우의 후예로 추정되는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적어도 고이왕이 사반왕을 죽였을 지라도 그 형제들은 모두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 평민이었던 비류왕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분서왕이 살해된 틈을 타서 왕위를 장악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사반의 형제들은 사반왕이 폐위된 234년에서 분서왕이 죽은 304년까지 70년 동안 평민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고이왕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