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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4 : 백제의 역사 10 (제6대 구수왕) 본문
한국의 역사 64 : 백제의 역사 10 (제6대 구수왕)
구수왕(仇首王, ? ~234년, 재위 : 214년~234년)은 백제의 제6대 왕이다. 귀수왕(貴須王)이라고도 부른다. 초고왕의 아들로 키가 7척에 풍채가 빼어나 비범했다고 한다.
기원전 18년 ~ 660년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생애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말갈·신라 등과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대부분 백제의 참패로 끝난다. 또, 재위 말에는 혹심한 가뭄이나 기근 등의 재난까지도 겹치고 있다.
216년 음력 8월에 말갈이 적현성(赤峴城)을 침범하였으나 성주가 굳게 지켜 막아 물러가게 했고, 왕이 기병 8백명을 이끌고 적을 추격하여 사도성(沙道城) 아래에서 크게 이겼다.
217년 음력 2월에 사도성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赤峴城)의 군졸을 나누어 보내 지키게 하였다.
218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자 신라 내해 이사금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여 백제군이 패하였다.
234년 구수왕이 죽은 후, 아들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초고왕의 아우인 고이왕이 즉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이왕이 초고왕의 아우라 하는 것은 연대상으로 모순되기 때문에 고이왕은 구수왕과는 온조계 왕실 내의 서로 다른 지파 출신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 왕호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1 | 온조왕(溫祚王) | 온조(溫祚) |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 |
2 | 다루왕(多婁王) | 다루(多婁) | 기원후 28년 ~ 77년 | 온조왕의 아들. | |
3 | 기루왕(己婁王) | 기루(己婁) | 77년 ~ 128년 | 다루왕의 아들. | |
4 | 개루왕(蓋婁王) | 개루(蓋婁) | 128년 ~ 166년 | 기루왕의 아들. | |
5 | 초고왕(肖古王) | 초고(肖古) | 166년 ~ 214년 |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 |
6 | 구수왕(仇首王) | 구수(仇首) | 214년 ~ 234년 |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 |
7 | 사반왕(沙伴王) | 사반(沙伴) | 234년 |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 |
8 | 고이왕(古爾王) |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 234년 ~ 286년 | 개루왕의 차남. | |
9 | 책계왕(責稽王) | 책계(責稽) | 286년 ~ 298년 |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 |
10 | 분서왕(汾西王) | 분서(汾西) | 298년 ~ 304년 | 책계왕의 아들. | |
11 | 비류왕(比流王) | 비류(比流) | 304년 ~ 344년 | 구수왕의 차남. | |
12 | 계왕(契王) | 계(契) | 344년 ~ 346년 | 분서왕의 아들. | |
13 | 근초고왕(近肖古王) | 초고(肖古), 여구(餘句) | 346년 ~ 375년 |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 |
14 | 근구수왕(近仇首王) | 구수(仇首), 수(須) | 375년 ~ 384년 | 근초고왕의 아들. | |
15 | 침류왕(枕流王) | 침류(枕流) | 384년 ~ 385년 | 근구수왕의 장남. | |
16 | 진사왕(辰斯王) | 진사(辰斯) | 385년 ~ 392년 | 근구수왕의 차남. | |
17 | 아신왕(阿莘王) | 아신(阿莘) | 392년 ~ 405년 | 침류왕의 아들. | |
18 | 전지왕(腆支王) |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 405년 ~ 420년 | 아신왕의 아들. | |
19 | 구이신왕(久爾辛王) | 구이신(久爾辛) | 420년 ~ 427년 | 전지왕의 아들. | |
20 | 비유왕(毗有王) | 비유(毗有), 여비(餘毗) | 427년 ~ 455년 | 구이신왕의 아들. | |
21 | 개로왕(蓋鹵王) | 경사(慶司), 여경(餘慶) | 455년 ~ 475년 |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 |
22 | 문주왕(文周王) | 모도(牟都), 여도(餘都) | 475년 ~ 477년 |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 |
23 | 삼근왕(三斤王) | 삼근(三斤) | 477년 ~ 479년 | 문주왕의 아들. | |
24 | 동성왕(東城王) | 동성왕 |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 479년 ~ 501년 |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
25 | 무령왕(武寧王) | 무령왕 | 사마(斯麻), 여융(餘隆) | 501년 ~ 523년 |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
26 | 성왕(聖王) | 성왕 | 명농(明襛) | 523년 ~ 554년 | 무령왕의 아들. |
27 | 위덕왕(威德王) | 위덕왕 | 창(昌) | 554년 ~ 598년 | 성왕의 장남. |
28 | 혜왕(惠王) | 혜왕 | 계(季) | 598년 ~ 599년 | 성왕의 차남. |
29 | 법왕(法王) | 법왕 | 선(宣), 효순(孝順) | 599년 ~ 600년 | 혜왕의 아들. |
30 | 무왕(武王) | 무왕 | 장(璋), 서동 | 600년 ~ 641년 |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
31 | 의자왕(義慈王) | 의자 | 641년 ~ 660년 | 무왕의 아들. |
제6대 구수왕 실록
(?~서기 234년, 재위:서기 214년 10월~서기 234년 모월, 약 20년)
털북숭이 거인 구수왕의 20년 치세
구수(仇首)왕은 귀수(貴須)라고도 불리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초고왕의 장남으로 214년 10월에 초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구수왕은 신장이 7척이고, 풍채가 특이했다고 전한다. 당시 1척이 몇 센티미터인지 분명치 않지만, 1척이 삼십 센티미터 정도로 볼 때 그의 신장은 2미터가 넘는 셈이다. 거기다 풍채가 특이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묘호에서도 엿볼 수 잇다. 그의 묘호 구수는 짝머리 또는 거만한 머리 라느 뜻이고,또 귀수라는 별칭도 귀한 수염 또는 귀한 털을 의미한다. 묘호에까지 이렇게 생김새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외모는 확실히 남달랐던 게 분명하다.
구수, 즉 짝머리라는 것은 머리 양쪽의 균형이 맞지 않아 한쪽이 불쑥 튀어 올랐거나, 또는 짐승의 머리나 궤짝처럼 아무렇게나 생긴 머리통을 일컫는다. 그것을 미화해서 사람들은 거만한 머리통 이라고 미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쨋던 구수라는 묘호 속에는 그런 뜻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또 귀수는 귀한 수염이란 뜻으로 보기 드물게 희한하게 생긴 수염을 미화한 것인 듯한데, 아마도 그의 수염은 말이나 사자의 갈기처럼, 아니면 돼지털처럼 억세고 특이한 형태였던 모양이다. 짝머리에다 갈기 수염, 또는 돼지털 수염의 털북숭이, 게다가 키가 2미터가 넘는 7척 장신에, 장수라면 모를까 한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의 모습으로 뭔가 어울리지 않는 풍채다. 하지만 구수왕 본인은 물론이고, 백성들과 신하들, 그리고 후손들까지도 그의 특이한 외모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묘호에까지 그의 외양을 들먹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외모에 걸맞게 구수왕은 꽤나 호전적인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구수왕 재위시에는 말갈과 신라 양쪽 군대와 줄기차게 전쟁을 치렀는데, 시작은 말갈 쪽이 먼저 했다. 재위 3년(216년) 8월에 말갈군이 적현성을 포위하자, 그 곳 성주는 수성전을 펼치며 버텼고, 말갈군은 스스로 지쳐 물러났다.
말갈군이 퇴각하자, 구수왕은 자신이 직접 기병 8백 명을 이끌고 말갈군을 추격하여 사도성 외곽에서 말갈군을 괴멸시켰으며, 그 주변에 목책을 세워 말갈군의 재침에 대비했다.
사도성에서 패배한 말갈은 그 뒤로 한동안 백제를 침입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재위 7년(220년) 10월에 백제의 왕성 서문에 불이 나자, 그 기회를 틈타 공격해왔다. 그러나 말갈은 이번에도 별 성과를 얻지 못하고 패퇴하였고, 16년(229년) 11월에 백제 전역에 전염병이 돌자, 다시 한 번 공격을 가해왔다. 말갈은 우곡으로 밀고 내려와 백성과 재물을 약탈하였고, 백제 병력 300명이 대적 하였으나 오히려 말갈의 복병에 뒤를 맞아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민간에 대한 약탈이 목적이었던 말갈은 그 길로 되돌아갔다.
말갈이 적현성을 공격한 것은 초고왕 49년(214년) 9월에 북부의 진과가 말갈의 석문성을 빼았은 것에 대한 보복전이었는데, 그해 10월에 우술천으로 달려와 반격을 시작했고, 그 와중에 초고왕이 죽자 공세를 강화했던 것이다.
말갈과 함께 백제를 괴롭힌 것은 또 하나의 숙적 신라였다. 신라와의 전쟁은 백제가 먼저 시작했다. 사도성 근처에서 말갈을 궤멸시킨 데 힘을 얻은 구수왕은 5년 (218년)에 신라의 장산성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내해 이사금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공격하는 바람에 패퇴하고 말았다. 이에 구수왕은 9년 (222년) 10월에 신라의 우두진을 습격하여 민가를 약탈했다. 그러자 신라 장수 이벌찬 충훤이 병력 5천을 이끌고 달려와 양쪽 군대는 웅곡에서 접전이 벌어졌는데, 이번에는 신라군이 패배하여 신라 장수 충훤은 단신으로 적진을 빠져나와 달아났다.
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신라는 224년 7월에 일길찬 연진을 시켜 백제를 공격해왔다. 양쪽 군대는 붕산 아래서 격돌했는데, 여기서 백제군이 크게 패했고, 그 뒤로 구수왕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자제함으로써 재위 21년(234년)에 죽을 때까지 더 이상 신라와 전쟁은 없었다.
구수왕 재위 시절 동안 말갈과 신라 양국과의 전쟁보다 더 심각한 재난이 수차례 있었다. 8년(211년) 5월 동부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무려 40여 곳의 산이 무너졌는가 하면, 14년 4월에는 가믐이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왕이 직접 기우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18년 4월에는 밤 정도 크기의 우박이 내려 날아가는 새가 맞아 죽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로인한 엄청난 농작물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홍수와 가믐 말고도 다른 재난에 대한 기록들도 남아있다. 7년 10월에는 왕성 서문에 화재가 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아 말갈군이 침입한 것을 보면 대단한 화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성이라 함은 도성인 한성 안에서도 궁궐을 의미하고, 그 서문에 큰 불이 났다는 것은 왕성의 일부가 전소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니, 큰 재난이 아닐 수 없다. 16년 11월에는 전염병이 돌아 전국이 몸살을 앓았는데, 이 때에도 말갈군이 침입한 것을 보면, 국방이 허술해질 정도로 매우 혼란스런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대개 전염병은 봄이나 여름철에 돌게 마련인데, 음력 11월인 한겨울에 전염병이 돌았다는 것은 매우 돌발적인 사태였음이 분명하다.
구수왕의 능과 가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장남이 사반왕이라는 것과 제11대 비류왕이 구수왕의 차남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반왕 이외에도 아들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류왕 실록에서는 비류왕이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는 구수왕의 차남 후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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