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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3 : 백제의 역사 9 (제5대 초고왕) 본문
한국의 역사 63 : 백제의 역사 9 (제5대 초고왕)
초고왕(肖古王, ? ~214년, 재위 : 166년~214년)은 백제의 제5대 왕이다. 개루왕의 장남으로 소고왕(素古王) 또는 속고왕(速古王)이라고도 불렸다.
기원전 18년 ~ 660년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생애
선왕(先王) 시절인 155년에 신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망명해온 아찬(阿飡) 길선(吉宣)의 송환문제로 양국 사이에 불화가 생겼으며 개루왕의 즉위 후에도 신라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167년에는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하였고,
188년에는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다.
189년 음력 7월에는 구양(狗壤, 현재의 충북 옥천)에서 신라와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190년 신라 서쪽 국경에 있던 원산향(圓山鄕, 현재의 경북 예천)을 공격하였고, 추격해오는 신라군을 와산(蛙山, 현재의 충북 보은)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204년에는 신라의 요차성(腰車城, 요거성. 현재의 경북 상주)을 함락하고 성주(城主)인 설부(薛夫)를 죽였다.
또, 북한강 상류를 타고 내려오는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210년 적현성(赤峴城)과 사도성(沙道城)을 쌓아 동부의 민호를 이주시켰다.
214년 북부출신 진과(眞果)에게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공격하여 탈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말갈의 날랜 기병으로 인해 술천(述川, 현재의 경기 여주) 지역까지 침범 당하기도 하였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 왕호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1 | 온조왕(溫祚王) | 온조(溫祚) |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 |
2 | 다루왕(多婁王) | 다루(多婁) | 기원후 28년 ~ 77년 | 온조왕의 아들. | |
3 | 기루왕(己婁王) | 기루(己婁) | 77년 ~ 128년 | 다루왕의 아들. | |
4 | 개루왕(蓋婁王) | 개루(蓋婁) | 128년 ~ 166년 | 기루왕의 아들. | |
5 | 초고왕(肖古王) | 초고(肖古) | 166년 ~ 214년 |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 |
6 | 구수왕(仇首王) | 구수(仇首) | 214년 ~ 234년 |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 |
7 | 사반왕(沙伴王) | 사반(沙伴) | 234년 |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 |
8 | 고이왕(古爾王) |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 234년 ~ 286년 | 개루왕의 차남. | |
9 | 책계왕(責稽王) | 책계(責稽) | 286년 ~ 298년 |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 |
10 | 분서왕(汾西王) | 분서(汾西) | 298년 ~ 304년 | 책계왕의 아들. | |
11 | 비류왕(比流王) | 비류(比流) | 304년 ~ 344년 | 구수왕의 차남. | |
12 | 계왕(契王) | 계(契) | 344년 ~ 346년 | 분서왕의 아들. | |
13 | 근초고왕(近肖古王) | 초고(肖古), 여구(餘句) | 346년 ~ 375년 |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 |
14 | 근구수왕(近仇首王) | 구수(仇首), 수(須) | 375년 ~ 384년 | 근초고왕의 아들. | |
15 | 침류왕(枕流王) | 침류(枕流) | 384년 ~ 385년 | 근구수왕의 장남. | |
16 | 진사왕(辰斯王) | 진사(辰斯) | 385년 ~ 392년 | 근구수왕의 차남. | |
17 | 아신왕(阿莘王) | 아신(阿莘) | 392년 ~ 405년 | 침류왕의 아들. | |
18 | 전지왕(腆支王) |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 405년 ~ 420년 | 아신왕의 아들. | |
19 | 구이신왕(久爾辛王) | 구이신(久爾辛) | 420년 ~ 427년 | 전지왕의 아들. | |
20 | 비유왕(毗有王) | 비유(毗有), 여비(餘毗) | 427년 ~ 455년 | 구이신왕의 아들. | |
21 | 개로왕(蓋鹵王) | 경사(慶司), 여경(餘慶) | 455년 ~ 475년 |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 |
22 | 문주왕(文周王) | 모도(牟都), 여도(餘都) | 475년 ~ 477년 |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 |
23 | 삼근왕(三斤王) | 삼근(三斤) | 477년 ~ 479년 | 문주왕의 아들. | |
24 | 동성왕(東城王) | 동성왕 |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 479년 ~ 501년 |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
25 | 무령왕(武寧王) | 무령왕 | 사마(斯麻), 여융(餘隆) | 501년 ~ 523년 |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
26 | 성왕(聖王) | 성왕 | 명농(明襛) | 523년 ~ 554년 | 무령왕의 아들. |
27 | 위덕왕(威德王) | 위덕왕 | 창(昌) | 554년 ~ 598년 | 성왕의 장남. |
28 | 혜왕(惠王) | 혜왕 | 계(季) | 598년 ~ 599년 | 성왕의 차남. |
29 | 법왕(法王) | 법왕 | 선(宣), 효순(孝順) | 599년 ~ 600년 | 혜왕의 아들. |
30 | 무왕(武王) | 무왕 | 장(璋), 서동 | 600년 ~ 641년 |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
31 | 의자왕(義慈王) | 의자 | 641년 ~ 660년 | 무왕의 아들. |
제5대 초고왕 실록
(?~서기 214년, 재위:서기 166년 모월~서기 214년 10월, 약 48년)
초고왕의 영토확장 노력과 신라와의 세력 다툼
초고(草古)왕은 소고(素古)왕이라고도 불리며, 이름은 남아있지 않다. 개루왕의 아들인 것은 분명하나 장자는 아니며, 서기 166년에 개루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개루왕 28년에 신라의 망명객 길선을 받아들인 이후 양국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그 때문에 초고왕은 즉위 직후부터 신라와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재위 2년(서기 167년) 7월에 초고왕이 신라 서쪽 변경에 군대를 보내 두 개의 신라 성을 격파하고 , 백성 1천 여 명을 포로로 잡아오자, 신라의 아달라 이사금은 일길찬 흥선에게 군사 2만을 주어 즉각 반격을 가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기병 8천을 이끌고 백제 한강까지 밀고 왔다. 초고왕은 신라군의 위세에 겁을 먹고 포로로 잡아온 신라 백성을 돌려주고, 빼앗은 두 개의 성도 내놓으며 화친을 제의하였다.
이후 아달라 이사금 14년(167년) 8월 기사에는 이 때의 상황을 '백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를 돌려주고 화친을 애걸하였다.'고 쓰고 있다. '화친을 애걸했다'는 문장은 '걸화'를 번역한 말인데, '걸화(乞和)'는 그야말로 '구걸하듯이 화친에 임했다'는 뜻이다.
신라왕 아달라가 이끌고 온 병력 2만 8천은 가히 대군이라 할 만했다. 더구나 당시 신라는 지금의 경상도 일원을 장악한 소국에 불과했는데, 보병 2만에 기병 8천을 이끌고 왔다는 것은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백제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이고 즉각 불러났다는 것은 애초부터 신라는 한성을 공격할 의도가 없었음을 시사한다. 말하자면 대군의 위용을 앞세워 일종의 무력 시위를 벌인 것인데, 이는 신라 나름대로 한성을 공격하지못할 속 사정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2만 8천의 병력이 강을 건너자면 많은 부교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만드는 시일이 너무 오래 걸리고 설사 강을 건넜다고 할지라도 불리할 경우 퇴각이 용이하지 않다는 문제점도 잇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병력의 구성도 당시 소국에 불과하던 신라군이 2만 8천의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는 것은, 군대의 대부분이 정예 병력이 아니라 육신만 멀쩡하면 남자면 모두 끌고 나왓다는 이야기다. 만약 그러한 군대로 백제군과 실제 전투가 벌어질 경우에는 승리를 장담하기가 어려운 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던 초고왕은 아달라 이사금의 무력 시위에 손을 들고 빼앗았던 성과 포로로 잡은 백성들을 돌려줄 수 밖에 없었고, 신라의 단호한 무력 시위에 꼬리를 내리고 만 꼴이었다.
잉리로 자존심이 상한 초고왕은 3년 뒤인 재위 5년(170년) 10월에 다시 한 번 신라 변경을 침입하였다. 하지만 이 때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 뒤로 한동안 신라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다가 23년(188년) 2월에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였지만 신라 장수 구도에게 패배하여 병력 5백을 잃고 퇴각해야만 했다.
이처럼 계속 신라와의 전투에서 패배만하던 초고왕은 25년 8월에 신라 서쪽 국경인 원산향을 공격하고. 승기를 잡아 부곡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번에도 구도가 기병 5백을 이끌고 나와 대적해왔다. 이에 백제군은 겁먹은 척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자 구도는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하여 백제군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백제군의 계략으로 구도가 와산까지 줄기차게 추격해 들어가자 백제군의 함정에 빠져 대부분의 군사를 잃고 쫓겨와야만 했다.
초고왕 34년(199년) 7월에 다시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략하였고, 39년(204년) 7월에는 신라의 요사성을 공격하여 그 곳 성주 설부를 죽였다. 신라의 나해 아사금이 이에 분개하여 왕자 이음에게 군대를 주어 백제의 사현성을 공격했다.
이렇듯 백제와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북쪽의 말갈이 호시시탐탐 남진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북쪽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신라를 203년에 먼저 공격하였다. 또한 백제의 국경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해왔다. 이에 초고왕은 말갈의 공격을 예상하고 210년 10월에 적현성과 사도성을 쌓고 동부의 백성들을 그곳으로 옮겼다. 그 한 달 뒤에 말갈이 사도성을 공격해왔지만, 미리 방어망을 구축한 백제군에 쫓겨 달아났다. 이에 초고왕은 214년 9월에 북부의 장수 진과에게 군사 1천을 주어 말갈의 석문성을 공격하여 탈취하자, 말갈은 반격을 가해 우술천까지 밀고 내려왔다. 불행히도 초고왕은 그런 경황 중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치세에서 알 수 있듯이 초고왕은 국방과 영토 확장에 대단히 집착한 왕이었지만 숙적 신라에 대한 잦은 침입과 전쟁에도 불구하고 영토 확장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들에게부담만 안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또한 말갈과도 적대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아들 구수왕 대에 이르러서는 말갈과 숱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초고왕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맏아들 구수왕이 왕위를 이은 것으로 보아 왕실은 안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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