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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1 : 백제의 역사 7 (제3대 기루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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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1 : 백제의 역사 7 (제3대 기루왕)

두바퀴인생 2010. 11. 5. 01:07

 

 

한국의 역사 61 : 백제의 역사 7 (제3대 기루왕)

 

 
제3대 기루왕

 

기루왕(己婁王, ? ~128년, 재위 : 77년~128년)은 백제의 제3대 왕이다. 다루왕의 장남이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생애

30년에 태자로 책봉 되었다.

 

다루왕이 죽자 77년에 즉위하였고 85년신라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105년 신라와 평화조약을 맺고  그 이후 신라와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125년 말갈의 침입을 받은 신라에 원병을 보냈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

 

 

 

 

 

 

제3대 기루왕 실록

(?~서기 128년, 재위:서기 77년 9월~서기 128년 11월, 51년 2개월)

 

기루왕의 유화정책과 계속되는 천재지변

기루(己婁)왕은 다루왕의 장남이며, 언제 출생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가 다루왕 6년(서기 33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그로부터 44년 뒤인 77년에 왕위에 올라 51년 동안 재위한 사실을 감안할 때, 태어난 뒤 곧바로 태자에 책봉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기 77년 9월 기루왕은 44년 동안의 태자 생활을 청산하고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미 사십대 중반의 나이였고, 오랜 기간 동안 다방면으로 정치적 소양을 쌓은 터라 조정을 쉽게 안정시킬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인품은 식견이 넓고 원대하여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매우 온화하고 유화적인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성격을 대변하듯 그의 재위 중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은 단 한 차례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위 9년(서기 85년) 1월에 군대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입한 것이 유일하며 재위 32년 말갈이 우곡을 침입하여 주민들을 약탈하고 돌아갔으나, 방비만 했을 뿐 보복전을 벌인 기록은 없다.

 

그는 재위 29년(서기 105년) 1월에는 그간 적대시하던 신라에 사신을 보내 파사 이사금에게 화친을 요청하였고, 파사 이사금은 그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였다. 당시 신라는 주변 소국들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가야와 치열한 영토 전쟁을 벌이던 상황이라 백제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기루왕은 이런 신라의 처지를 평화 정착의 호기로 생각했던 것이다.

 

재위 49년(125년)에는 말갈의 침략을 받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다섯 명의 장수를 선발하여 신라를 구원함으로써, 양국의 화친 약조는 마침내 결실을 보기에 이르렀다.

 

신라의 화친은 정치와 외교 양면에서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었지만, 기루왕의 치세는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51년 재위 동안 기루왕을 가장 괴롭힌 것은 천재지변과 나쁜 기후였다.

 

재위 13년(서기 89년) 6월에는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백성들의 가옥이 무너져 숱한 사망자를 내었고, 이듬해엔 봄가믐이 심하게 들어 보리에 싹이 나지 않았다. 또 그해 6월에는 나무가 뽑혀 나갈 정도로 심한 태풍이 불어 민가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천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재위 176년(93년)에는 황악의 거대한 바위가 다섯 개나 굴러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23년(99년) 8월에는 때 아닌 서리가 내려 콩농사를 망쳐버렸다. 두 달 뒤인 10월에는 우박이 내려 또 한차례 농작물 피해가 있었다.

 

32년(108년) 봄과 여름에는 흉년이 심하게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사태까지 발생하였고, 그 여파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35년에는 3월과 10월에 지진이 찿아들었다. 40년 6월에는 한강물이 크게 불어 홍수가 났고, 많은 가옥이 유실되어 수재민이 대거 발생했다. 장마 기간 중의 홍수 사태는 무려 한 달동안 이어졌고, 7월에 이르러서야 겨우 복구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이렇듯 기루왕은 치세 내내 천재지변에 시달리며 노심초사하다가 재위 52년 만인 서기 128년 11월에 백 살에 가까운 나이로 죽었다.

 

그의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묘호는 '기루왕'이라 하였다. 가족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남아 있지 않으며,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른 개루왕에 대해 장남이라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들이 여러 명이었던 모양이다.

 

 

한강에 나타난 두 마리의 용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루왕 21년(서기 97년) 4월 기사에 '두 마리의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사실일까? 아니면 은유일까?

 

용은 원래 기린, 봉황, 거북과 같이 사령이라 불려온 상상의 동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은 많은 전설과 신화를 남겼지만, 서양의 드래곤과 동양의 용은 근본적으로 그 의미가 달랐다. 서양의 드래곤은 인간이 물리쳐야 할 괴물로 인식되는 반면, 동양의 용은 인간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왕의 상징으로 쓸 만큼 신령스럽게 여겨왔다. 그런 탓에 서양에선 용을 물리친 자가 왕이 되었고, 동양에서는 용의 힘을 빌린 자가 왕이 될 수 있었다. 즉 동양의 용은 곧 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용은 인충 중 우두머리로 머리는 낟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중국 문헌 <광야> 익조에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용은 각 동물이 가진 최상의 무기를 두루 갖춘 것으로 상상되었으며, 특히 물과 갚은 관계가 있어 물의 신으로 인식되곤 하였다. 바다의 용을 용왕이라 부르고, 그가 거처하는 곳을 용궁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용은 비단 물과 관련 된 것만은 아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세종실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많은 설화가 나오는데, 그 중 86편이 용과 관련된 것이다. <삼국유사>에 탈해왕, 만파식적, 수로부인, 원성대왕, 처용랑, 거타지, 무왕 등등의 이야기에서 용이 등장하는데, 이 설화에서의 용은 호국적 의믹이거나 종교적, 제왕의 기상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쓰였다.

 

그러나 설화가 아닌 사서에서, 그것도 구체적인 지명과 연도, 해당 월까지 기록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기루왕 21년 4월에 '두 마리의 용이 한강에 나타낫다.'는 기사는 결코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기록이다.

 

용은 종교적 의미에선 신앙의 대상이요, 현실적으론 왕을 상징한다. 특히 용은 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왕의 의자는 용상, 왕의 얼굴은 용안, 왕의 옷은 용포, 왕이 타는 수레는 용거/용가, 왕의 눈물은 용루다. 

 

그렇다면 현실을 다룬 역사서에 기록된 '한강에 나타난 두 마리의 용'은 어떤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종교적 의미나 설화적 기록이 아니라면, 이것은 사실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강 유역에 도읍이 있는 백제에 동시에 두 명의 왕이 출현했다는 의미다. 기루왕 이외에 또 한 사람의 왕이 생겼다면, 그는 누구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기루왕의 장남이다.

 

당시 기루왕은 일흔에 가까운 노인으로 점차 힘과 기력이 노쇠해가던 시기였다. 왕이 노쇠해지면 사람들은 영악한지라 신하들은 다음 대를 생각하고 다음 왕위 계승권자 주변에 몰리게 되어 있으며, 그래서 힘은 자연스럽게 왕위계승권자에게 쏠리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왕에게 엄청난 불안감을 안겨다 줄 수 있으며 자식에 의한 왕위 찬탈을 염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왕이 노쇠하고 왕위 계승권자가 오히려 힘이 강해지면, 자연스럽게 왕권은 분열되고 신하들 또한 분열되기 쉽상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고구려 시대 태조대왕은 오랫동안 재위에 있게되자 왕의 동생이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던 수성이 반란을 획책하자 서로 피를 부르는 살륙전을 벌일 수 없는지라, 할 수없이 상왕으로 물러 앉은 후 17년 동안 별궁에서 지내면서 거의 감금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수성은 왕좌에 오르자 눈에 가시같은 태조왕의 아들인 태자를 포함하여 두 아들이 수성에게 참살되거나 자살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고, 조선 시대 태조 이성계는 아들 방원의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잡자, 상왕으로 물러 앉아 다른 아들이 모두 참살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분노의 세월을 보내다가, 궁궐을 떠나 고향 함경도로 가서 주변 군사들로 하여금 반란을 획책하는 등 다시 권자를 노렸으나 실패하여 결국은 나머지 생을 상왕으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십수년 동안 북경과 심양에서 명의 멸망과 흥기하는 청나라를 보았고 아담 샬을 통해 서양 외래문물을 접하면서 새로운 시각을 갖게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볼모에서 풀려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인조는 청나라의 협박이 계속되고 자신의 왕권이 청나라를 등에 업은 소현세자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한 나머지 돌아온 세자를 면대조차 거절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소현세자를 독살(?)하는가 하면 세자비 강씨와 세손 3명 중 2명을 죽게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또 영조는 그의 아들 사도세자의 힘이 강성해지자 이에 불안을 느낀 영조는 결국 아들을 뒤주속에 넣어 죽임으로써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루왕과 그의 장남 사이에도 이와 같은 갈등이 일어났던 게 아닐까?

 

기루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개루왕이 기루왕의 장남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런 추론에 힘을 실어준다. 별 문제가 없다면 통상 장남이 왕위를 잇는 게 정상이지만 장남이 아닌 다른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면 장남이 죽고 없었거나. 왕위에 오르지 못할 상황이었다는 뜻이 된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서 기루왕의 장남이 기루왕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반정을 도모하여 왕위를 차지해 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루왕의 장남은 반정에 결국 실패하게 된다. 그는 일단 반정을 도모하여 왕위를 차지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오래 지키지 못했다. 누군가 다시 정변을 일으켜 그를 제거하고 기루왕에게 왕위를 되찿아준 것이다. 언제, 누가 그런 정변의 주인공인가?

 

기루왕 27년(서기 103년) 기사에 '왕이 한산에서 신록(神鹿, 신령스런 사슴)을 잡았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일반 사슴도 아닌 '신령스런 사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또 사슴은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신령에 힘입어 장수를 누리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왕위를 찬탈당한 왕이 상왕으로 밀려났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6년만에 왕위를 되찿았다는 것이다. 신록이란 아마 그 도움을 준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신록이란 말인가? 그것은 당연히 다음 왕위를 이은 개루왕이 아니었을까? 은유적인 표현을 이렇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