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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0 : 백제의 역사 6 (제2대 다루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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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0 : 백제의 역사 6 (제2대 다루왕)

두바퀴인생 2010. 11. 4. 02:34

 

 

 

한국의 역사 60 : 백제의 역사 6 (제2대 다루왕)

 

 
제2대 다루왕

 

다루왕(多婁王, ? ~77년, 재위: 28년~77년)은 백제의 제2대 왕이다. 일부 학자는‘다루’는 지배자’를 뜻하는 당시 말이며 몽골어의 '다루'(daru)가 그 어원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온조왕(溫祚王)의 첫째아들이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생애

10년에 태자(太子)로 책봉되었고 28년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성격이 관대하고 후덕하며 위망(威望)이 있었다고 한다.

 

29년 봄 정월에 시조 동명(東明)의 묘(廟)에 배알하고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고,

 

33년에는 남부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벼농사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38년에 흉년으로 백성의 살림이 곤란하자 전국적으로 양주(釀酒)를 금지시키고 지방을 친히 순시하며 빈민을 구호했다.

 

여러 차례 말갈(靺鞨)과 싸워 이를 격퇴하고 56년에는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동북지방의 방비를 정비했다.

 

63년 겨울 음력 10월에 낭자곡성(娘子谷城, 현재의 청주)까지 영토를 넓히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신라 탈해 이사금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64년 가을 음력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음력 10월에 또 신라의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자 신라탈해 이사금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쳐서 쫓아보냈다.

 

66년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신라에게 곧 다시 빼앗겼다.

 

70년에 다시금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는다.

 

74년에 신라의 변방을 노략, 탈해 이사금이 병사를 보내 격퇴당했다.

 

75년 음력 10월 신라의 와산성을 다시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그러나 76년 가을 음력 9월에 신라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하여 와산성을 다시 빼앗고, 백제로부터 와서 살던 사람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신라,가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

 

 

 

 

 

 

제2대 다루왕 실록

(?~서기 77년, 재위:서기 28년 2월~서기 77년 9월, 49년 5개월)

 

다루왕의 조직정비와 영토확장

다루(多婁)왕은 온조의 맏아들로 이름과 태어난 시기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서기 10년 2월에 태자에 책봉되어 도성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다가 서기 28년 2월에 온조가 죽자 백제 2대왕에 즉위하였다.

 

다루왕이 즉위할 무렵,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마한의 거의 몰락하여 소국연합체 정권은 완전히 붕괴되고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는 백제와 신라, 가야 등이 아직 병합시키지 못한 소국들을 흡수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마한의 잔여세력은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에 투항하거나 신라와 연합 전선을 구축하였고, 신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한의 잔여세력을 흡수하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

 

마한의 멸망으로 남방이 혼란을 거듭하자, 북방의 말갈은 남하정책을 지속하며, 서기 30년 10월에는 백제의 동부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장수 흘우로 하여금 말갈군과 대적하게 하여 마수산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죽이거나 생포하는 등 대승을 거둠으로써 말갈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8월에는 다시금 쳐들어온 말갈군을 고목성의 장수 곤우가 적군 2백 명을 죽이고 패퇴시켰다. 하지만 말갈의 침입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다루왕 7년인 서기 34년 9월에는 마수성을 침략하여 함락시키고 읍락에 불을 질러 백성들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그해 10월에는 병산에 설치한 목책을 무너뜨리고 내침하였다. 또한 서기 55년에는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백제의 도성을 위협하였다.

 

말갈의 침략이 계속되자 위협을 느낀 다루왕은 말갈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서기 56년에 동부에 명하여 우곡성을 쌓토록 하는 한편, 백성들의 터전을 넓히기 위해 남쪽과 동쪽으로 영토를 확대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서기 63년 10월에는 마한의 잔병들을 물리치고 영토를 낭자곡성(청주 일대)까지 확대하여 신라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마한의 잔병들은 일부 신라에 망명하거나 마지막 보루였던 복암성을 바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다루왕은 신라의 탈해왕에게 사람을 보내 서로 만나 영토 문제를 의논하자는 제의를 하게 된다. 하지만 탈해왕은 다루왕의 제의에 응하지 않았다.

 

다루왕은 신라 왕을 만나려고 한 것은 서기 1년에 마한 장수 맹소가 신라에 바친 복암성 때문이었다. 마한 왕조가 북방으로 달아난 이후 백제는 마한의 잔병 축출 작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마한의 잔병들은 점차 설자리를 잃게되고 계속밀리다가 결국 신라에 의탁하게 되었고, 급기야 상황이 불리해지자 마지막 보루였던 복암성을 신라에 바쳐버렸다. 다루왕은 백제가 마한 왕조를 무너뜨렸기 때문에 복암성 및 신라가 차지한 마한의 옛 영토는 모두 백제에게 예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신라의 탈해왕은 그 같은 주장을 묵살하고 영토 문제와 관련하여 백제의 대화 요청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다루왕은 신라와 결전을 결심하게 되고, 급기야 서기 64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함으로써 신라와 백제의 양국은 운명의 기나 긴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번번이 백제는 신라의 저항에 밀려 패퇴하였고, 그래서 다시 구양성을 공격하였는데, 이번에도 신라의 기병 2천(백제본기에는 5천)에 밀려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다루왕은 와산성 공격에 전 병력을 동원하였고, 이에 따라 와산성의 탈환과 수성을 목표로 한 백제외 신라의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서기 66년에는 백제가 와산성을 점령하여 군사 2백을 주둔하게 하였으나 그 얼마 뒤 다시 신라에 빠앗겼고, 4년 뒤인 서기 70년에 다루왕은 다시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다루왕은 서기 74년 다시 신라를 침공하였고, 이듬해인 75년에는 그토록 끈질기게 공격했던 와산성을 결국 점령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서기 76년 신라의 대대적인 반격에 밀려 와산성은 다시 신라에게 빼앗기고 백제 주둔 병력 2백 명은 모두 전멸하였다.

 

이와 같은 다루왕의 와산성 쟁탈전쟁은 무려 10년 동안 계속되었으나, 결국 신라의 강력한 저항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신라가 와산성을 점령한 후 1년 뒤 다루왕은 50년간 지속되던 자신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다루왕의 치세 동안 백제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제도와 생활면에서도 뚜렷하게 발전하였는데, 우선 정치제도면에서 재상격인 우보 1인이 운영하던 조정이 서기 37년 좌, 우보 제도가 생기면서 2인의 협의에 의해 운영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생활면에서 쌀농사가 국가적 차원에서 보급되면서 장려되기 시작하였고 식량생산의 대변화를 예고하게 되었다.(쌀농사는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나 이 때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보급 및 장려되어 식량 생산량의 확충을 가져온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의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묘호는 다루왕이라 하였다.

 

흔히 '다루'를 이름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이는 이름이 아니라 묘호다. 또한 다루왕 이후 백제 왕들의 묘호가 '기루(己婁)', '개루(蓋婁)' 등으로 이어지면서 3대에 걸친 묘호에 공통적으로 '루(婁)'가 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때 '루(婁)'는 아마도 '왕' 또는 '지배자'를 칭하는 마한식 표기로 생각된다. '루'는 흔히 별 이름을 쓸 때 사용하는 글자인데, 왕을 '하늘의 별' 같은 존재로 보았다면 묘호에 이 글자를 공통적으로 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개념은 '다루가치'라는 단어 속에서도 찿을 수 있는데 '다루가치'란 원나라에서 고려에 보낸 '총독'을 일컫는 단어이다. 그 어원은 몽골어의 '진압하다', '속박하다' 라는 뜻을 가진 '다루(daru)'에 명사형 어미 '가(gha)'와 사람을 뜻하는 '치(chi)'를 붙여 '총독'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즉 '다루'라는 묘호는 이미 '지배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 그 자체로 '왕'을 의미하는 것이다.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뒤에도 약 200년간 마한의 묘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개루왕에게 묘호를 올린 '초고왕' 대까지 백제는 대외적으로 마한의 국호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뜻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 역사서인 <송서>에 백제 편에 처음 나타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다루왕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장남이 '기루왕'이라는 기록을 통해 부인이 있었음을 확인할 뿐이다.

 

 

 

다루왕 시대의 인물

 

해루(解婁) 서기전 56년~서기 34년)

원래 부여 사람이다. 미류 일행과 함께 망명한 것으로 보아 그는 온조의 외가 집안인 계루부 귀족 출신일 것으로 짐작된다.

 

온조 41년(서기 23년)에 온조의 재종숙부이자 우보의 직위를 맡고 있던 을음이 죽자 79세의 늙은 나이로 우보 직위에 올랐다.  우보의 주요 업무가 국방에 관련되 것이므로 나이에 비해 벅찬 자리였으나, 나이에 비해 체력이 건강하였던 관계로 등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인품은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었다'라고 <삼국사기>에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우보에 오른 그는 온조 말기에 정치적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온조가 죽고 다루왕이 등극한 이후에도 우보 직위를 유지했다. 다루왕 7년인 서기 34년에 90세를 일기로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재상직을 수행하며, 백제의 국력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흘우(屹于, ?~서기 48년)

출생년대는 기록이 없으며 동부 사람이다.  다루왕 3년(시서기 30년) 10월 마수산(경기도 포천 또는 강원도 김화) 서쪽에서 말갈군을 대파하면서 다루왕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였다. 마수산 전투에서 흘우가 죽이거나 생포한 말갈군 수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나, 다루왕이 승전에 대한 포상으로 말 열 필과 벼 5백 석을 내린 것으로 보아 그 수가 대단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수산 전투에서 승리로 다루왕의 눈에 든 흘우는 다루왕 7년(서기 34년) 우보 해루가 죽자, 그를 이어 우보 직위에 오른다. 또 3년 뒤 서기 37년 좌보 자리에 올라 백제 조정의 중심이 서게 된다.

 

그는 그로부터 11년간 좌보 직위에 있다가 다루왕 21년 서기 48년 3월에 생을 마감한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죽기 한 달 전에 왕궁 뜰에 있는 큰 회나무가 말라 죽었으며, 그가 죽었을 때 다루왕은 아주 슬프게 울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는 백제 조정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던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