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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7 : 백제의 역사 3 (건국과정 2) 본문
한국의 역사 57 : 백제의 역사 3 (건국과정 2)
백제 역사 기술과 대륙 백제의 실체
그렇다면 왜 이같은 조작된 기사가 등장하였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우선 최초로 백제의 역사가 기록된 순간이 언제부터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백제가 최초로 역사서를 만든 것은 근초고왕 30년인 375년이다. <삼국사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남기고 있다.
'근초고왕 30년. <고기>에는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 때에 와서 박사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백제는 건국 후 약 400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역사서를 편찬한 것이다. 사실은 건국 당시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처지에서 역사를 기록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기>를 바탕으로 <삼국사기>가 편찬되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백제의 첯 도읍지가 '하남 위례성'이라는 내용이 쓰였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적어도 그들이 '하남의 위례성'을 고의적으로 설정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따라서 '하남의 위례성'은 <서기> 또는 <고기>에 적혀 있는 내용을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남이 사학계 일각의 주장대로 한강 남쪽을 가리킨다면 한강 남쪽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위례성이 한강 동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하남의 위례성은 한강과는 무관하며, '하남'이 '한강의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남(河南)'의 '하(河)'가 한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이를 증명하듯 한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광개토왕릉비문'은 '한강'을 '아리수'로 표기하고 있다. '아리수'는 고구려 말로는 '큰 물'이라는 뜻이며, 이를 한반도 토착어로 바꾸면 '한물'이 된다. 이를 다시 한자로 표기하면 '한수(漢水)' 또는 '한강(韓江)'이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이를 '한수(漢水)' 또는 '한강(漢江)'이라고 썼고, 이를 한자 뜻대로 풀이하면 '한(漢)나라의 강'이 된다.
우리말 '아리수' 또는 '한물'이 '한나라의 강'이 된 것은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 이후의 표기일 것이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통일신라 이후의 표기법에 따라 아리수를 '한강(漢江)' 또는 '한수(漢水)'로 표기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말의 '큰 물'이 '한나라의 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당시 세계에서 '하(河)'라고 하면 흔히 황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때문에 백제의 첯 도성인 하남의 위례성은 한강의 남쪽이 아니라 황하의 남쪽에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 편자들이 백제의 땅이 대륙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 뿐 아니라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일과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을 마구 뒤섞어 놓은 점을 감안할 때 하수(황하)와 한강을 같은 곳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하남 위례성'이라는 용어는 이 같은 추론에 가장 확실한 단초를 제공한다. 백제 건국 당시 '하남이란 곧 하수의 남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의 중국 하남의 산동성 지역을 일컬었다. 그렇다면 '하남 위례성'이란 말은 '한강의 남쪽 위례성'이 아니라 '하수의 남쪽 위례성'을 의미하게 된다. 한반도의 한강 남쪽에는 위례성이 건립된 적이 없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들 역시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아래 삼국사기의 기록은 백제의 초기 정착지가 '중국 황하 남쪽'이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북사>와 <수사>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탁)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북사>와 <수서>에는 백제가 처음에는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쓰고 있으며, <삼국사기> 편자들은 이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알지 못한 채 다만 보충적인 의미로 덧붙여 놓았다.
또 이 기록을 바탕으로 사학계 일각에서는 대방의 옛 땅을 한반도 황해도 일대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이른바 '한반도사관'에 한정된 시각이다. '동명의 후손 구태(혹은 구이)를 제8대 고이왕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는 단순히 '구이'와 '고이'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사실에 의존한 억측 논리이다.
대방의 옛 땅은 한나라 무제가 서기전 108년에 조선을 치기 위하여 설치한 전진기지인 4군 중 진번 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한반도의 황해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의 황하 남쪽, 즉 하남과 산동 일원에 설정되어야 하며, '구태'는 망명세력을 이끌었던 비류왕의 이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 기록은 백제가 처음에 황하 남쪽의 대방 옛 땅인 진번 지역에 무물렀다는 추론에 더욱 확신을 준다.
'책계왕 원년(286년),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 왕 딸 보과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왕은 "대방은 우리와 옹서지간이 되는 나라이니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였다. 책계왕 13년(298년), 한(漢)나라가 맥 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한(漢)'은 서진 말년에 흥기한 흉노 귀족 유연의 세력을 일컫는 것으로 이들이 백제를 침략했다는 것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대방에서 왕비를 간택했다는 것은 대방 땅 또는 대방 주변에 있었다는 뜻이다. 대륙에 진출한 백제가 건국 초기에 대방 옛 땅에 머물렀다면 백제의 첯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은 하수 남쪽의 대방의 옛 땅, 즉 진번 지역 근처에 설정될 수 밖에 없다.
백제가 황하 남쪽에 정착하였다는 것은 <북사>와 <수서>의 '처음에 1백 가구가 바다를 건넜다고 하여 백제라 부르게 되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더욱 확실해 진다. <수서>의 기록은 백제의 망명객들이 육로를 통해 망명한 것이 아니라 해로를 통해 망명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말해 비류가 이끄는 계루부 망명객들은 졸본을 출발하여 배로 발해를 건너 하남 지역인 산동반도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계루부 망명객들이 초기에 산동성에 머물렀다는 증거는 '비류가 그의 아우와 함께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백제 건국 세력이 육로를 통해 한반도에 진입했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지금껏 비류 일행이 건넜다는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한반도 안에 있는 강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이 같은 추론은 그 구체적인 증거가 전혀 없다. 다만 <삼국사기>의 기록은 한반도 지리에 끼워 맞추면서 생긴 정황적인 주장일 뿐이다.
비류 일행이 건넜다는 패수와 대수는 한반도 안에 있는 강이 아니라 중국의 황하 남쪽 산동 지역에 있는 강이다. 현재 황하 남쪽을 흐르는 강 중 소청하(小淸河)는 진(秦)나라 시대에는 제수(濟水) 또는 패수(沛水)로 불리다가 백제 건국 당시인 서한 무렵부터는 패수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기수는 소청하 바로 아래쪽을 흐르는 강으로 현재도 기수(대수)로 불리고 있다. 비류 일행이 건넜다는 패수(浿水)와 산동 지역의 패수(沛水)는 서로 글자는 다르나 그 뜻(물)과 음(패)이 같기 때문에 같은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수를 대수라고 부른 것은 기수가 대방 지역의 중앙을 흘렀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기수의 또다른 이름이 '대방의 물'이란 뜻의 대수(帶水)였을 것이란 뜻이다. 이같은 예는 패수(沛水)를 제수라고 불렀던 사실에서도 찿아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보면 졸본을 떠난 비류 일행은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 황하 남쪽산동반도에 도착하여 대방에 의지하고, 대방의 배려로 패수와 대수를 건너 정착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대방이 자신들을 위로와 예로 대해준 것을 기리기 위해 도성 이름을 '위례성(慰禮城)'이라고 붙엿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온조 편에 나오는 '하남 위례성'의 실체이다.
하남 위례성에 정착한 비류 일행은 열 명의 중신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세우게 되지만 대방 땅은 낙랑의 간섭을 받는 처지였기 때문에 백제 유민들도 낙랑의 간섭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비류는 온조에게 군사와 백성의 반을 내주고 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마한 땅으로 가서 새로운 정착지를 물색할 것을 명령한다. 비류의 명령을 받은 온조 일행은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미추홀(인천)에 도착하여 마한 조정의 배려로 마한의 북방 지역에 터전을 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의 한강 북쪽에 건설된 위례성으로, 하남의 위례성과 마찬가지로 '마한의 위로와 예'에 보답한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대륙백제에 대하여...
백제란 본디 고구려와 더불어 국제무대를 누비는 해상제국이었다.
중국 사서들을 보면 일치하는 점을 찾을수 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을 비슷하게 보고 있다. 고구려가 당나라와 싸워 여러번 이긴것처럼 백제군 또한 북위와 5차례나 전쟁을 치러 모두 승리한 것이 중국 사서에 분명히 기록 되어있다.
무적 기질은 고구려에 비하여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을뿐 아니라 국세(國勢) 또한 강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당서(舊唐書)에 『西渡모모모, 比渡海모高모, 南渡海모모』라고 하 여 백제의 강토가 중국 산동절강(山東浙江) 일대까지 이르고 일본을 속국 으로 두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남제서(南濟書)에는 기원 490년에 위(魏)가 두번이나 기병, 보병 수십 만을 내어 백제를 침범하였다가 모두 격퇴된 사실을 적고 있는데, 삼국시대에 중국 대륙의 10만 이상의 군대를 쳐부 순 것은 백제의 동성왕(東城王)때가 처음으로 당시 백제의 강력한 무력을 나타내는 기록들이다.
미수(眉수) 허목(許穆)은『'싸움을 좋아하는 나라로 백제만한 나라가 없다'고 하였고,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은 '세나라 중에서 백제가 가장 전쟁을 좋아한다고 일컬어진다'』고 하여 백제인이 날래고 사나우며 싸움을 잘한다고 말하고 있다.
고구려가 뛰어난건 사실이나 백제 또한 고구려에 비해 뒤지지 않았음을 중국 사서에 기록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돌리자면 대륙백제에 대한 시기와 반발이 오가지만, 이미 학계에서 대륙백제를 인정했으며 대규모 사서들과 일치하는 대목을 봐서는 증거가 너무나도 정확하다.
신라를 찬양하는 사람에겐 백제란 작은 국가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대륙백제』에 대하여 알아보게 된다면, 실제로 신라는 백제에 비하여 외소한 국가임을 깨닫게 되는게 사실이다.
당대 중국에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높게 평가 헀지만, 신라라는 나라는 매우 낮게 평가하였다. 따라서 백제와 고구려는 우리나라의 자랑거리가 아닐수 없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396년에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 58성은 위와 같이 비정된다. 대백제국의 영역을 살펴볼 수 있다.
위 그림을 보면 알수 있듯이 교과서에서 나온 백제와는 전혀 틀리다. 그렇지만 이것이 진정한 백제이다. 아니 이것보다 훨씬 클수도 있다.
박영규 교수는 백제를 쇄족에 묶인 거인이라 표현하였고, 이도학 교수는 백제를 '동방의 로마제국' 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이외에 여러 학자들이 백제를 크기를 알 수 없는 거인이라 표현하였다.
온조파와 비류파의 왕위 다툼
비류 일행이 대방 땅에 도착했을 때, 이 지역은 낙랑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서기전 108년에 한나라의 무제가 설치한 현도, 낙랑, 임둔, 진번 등의 이른바 전진기지 4군 중 임둔과 진번은 설치 26년 만인 서기전 82년에 각각 현도와 낙랑에 폐합되었다. 이에 따라 낙랑은 진번 지역에 남부도위를 설치하고 소명, 대방, 함자, 열구, 장잠, 제혜, 해명 등 7현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던 것이다(이들 7현중 대방현은 후한 말에 공손씨 세력에 의해 대방군으로 승격된다. 따라서 옛 대방 지역이란 진번 지역 전체를 일컫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기원전 18년 ~ 66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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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 |
공용어 | 고대 한국어 |
수도 |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
정치체제 | 군주제 |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
76만호(3,800,000명 추정) |
성립 | 기원전 18년 |
멸망 | 660년 |
초대 군주 |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
최후 군주 | 의자왕 641년 ~ 660년 |
성립 이전 | 마한, 부여 |
해체 이후 | 신라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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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낙랑의 남부도위인 대방에 의탁하게 된 비류는 우선 낙랑과 화친을 맺는다. 하지만 낙랑의 간섭이 계속될 것을 염려하여 온조에게 한반도 마한 땅으로 가서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미추홀(인천)에 도착한 온조는 마한 왕의 배려로 동북방 100리 땅을 온조에게 내주었었는데, 그 곳은 색리국으로서 마한 54국 중 가장 북단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온조 일행이 정착한 색리국은 북으로 말갈과 이웃하고 있었으며, 동으로는 한반도 낙랑국(동예)과 이웃하고 있었다. 온조는 말갈, 한반도 낙랑국 등과 대치하면서 한편으로는 마한에 속한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국력을 신장시켰다.
한편, 이 무렵 대방 땅에 남아있던 비류 일행은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성을 쌓고 목책을 설치한다. 이에 낙랑 태수는 크게 반발하여 성과 목책을 헐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비류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선전포고를 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시도한다. <삼국사기>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온조왕 8년(서기전 11년) 7월,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다.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 말했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한집안처럼 지내던 터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 영역에 접근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이는 우리 땅을 점차적으로 차지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만일 옛날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면 성을 허물고 목책을 제거하여 즉시 억측과 의심을 하지 않도록 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투로 승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왕이 이에 답했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수비하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다. 어찌 이 문제로 화친과 우호에 변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당연히 그대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일 그대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우리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관계가 단절되었다.
이후 누차에 걸쳐 낙랑의 침략을 받던 비류는 마침내 더 이상 대방 땅에 머무르지 못하고 일부 신하와 군사들만 이끌고 온조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온조는 비류 일행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마한 땅에 도착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점차 한반도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류가 온다면 그는 왕위를 내주어야 했다. 이 때문에 온조는 비류 일행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심한다. 그리고 비류 일행이 미추홀에 도착하였다고 소식을 접한 뒤에도 내부 사정을 핑계로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는다. 비류 일행은 별수 없이 임시로 미추홀에 머물면서 온조가 자신들을 맞아들일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일이 흘러도 온조가 사람을 보내지 않자, 비류와 그의 신하들은 온조를 의심하기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온조가 왕위를 내주기 싫어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무력으로 응징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온조의 그같은 처사에 가장 분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인 소서노였다. 그녀는 비록 여자의 신분이었지만 계루부 망명세력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또한 온조로 하여금 마한 땅에 가서 새로운 도읍을 건설할 것을 명령한 것도 그녀였다. 그래서 그녀는 망명세력의 실질적인 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왔는데도 온조는 왕위를 유지할 욕심으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소서노는 자신이 직접 갑옷을 입고, 군사들을 진두지휘하여 온조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녀는 온조에게 패배하며 전투 중에 전사하고 만다.
이 같은 상황을 <삼국사기>는 은유적인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온조왕 13년(서기전 6년) 봄 2월, 경성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나이 61세였다.'
이 은유적인 내용이 지금까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해석하여 왔다. 하지만 이 내용은 투구와 갑옷을 입고 전투를 지휘한 소서노와 그녀를 호위하는 다섯 명의 중신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 대목 뒤에 이어지는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기록은 바로 소서노가 싸움 중에 전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온조는 비류세력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스스로 어머니를 죽이는 불륜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 때문에 온조는 그해 5월에 한수 북쪽에 건설했던 위례성을 버리고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다. 도읍을 옮길 때 온조는 심리적인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데 그것은 소서노의 죽음 뒤에 숨어 있는 변란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미추홀에 머물고 있던 비류는 소서노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달려온다. 그리고 자신이 소서노를 말리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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