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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6 : 백제의 역사 2 (건국과정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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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6 : 백제의 역사 2 (건국과정 1)

두바퀴인생 2010. 10. 31. 01:23

 

 

 

 

 

한국의 역사 56 : 백제의 역사 2 (건국과정 1) 

 

비류와 온조의 출생과 성장

 

<삼국사기>에는 백제를 건국한 비류와 온조의 출생에 대해서 서로 다른 두 가지 견해를 전하고 있다. 첯 번째는 그들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친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들이 주몽의 양자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친자라는 주장에 무게를 싣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 볼 때 그들이 주몽의 친자라는 주장보다 양자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삼국사기> 편자들은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자임을 내세우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가 추모(주몽)이다. 주몽은 북부여로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곳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주몽을 대하자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채고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 얼마 후에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아들을 둘 낳았는데, 첯째는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이다(혹은 주몽이 졸본에서 월군 출신의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온조와 비류는 분명 주몽의 친자식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편자들은 이 내용이 미심쩍었던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덧붙였다.

 

"일설에는 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북부여 왕 해부루(삼국사기에서는 해부루를 동부여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의 서손인 우태이고 어머니는 졸본 사람 연취타발의 딸 소서노라고 전한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얻었는데, 장자는 비류, 차자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은 뒤에 그녀는 졸본으로 와서 혼자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서한) 건소 2년(서기전 37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 곳을 도읍으로 삼아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후로 삼았다.

 

주몽이 창업의 기초를 다지는 데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컸다. 그런 까닭에 주몽은 소서노를 무척 아꼈으며, 비류 형제를 자신의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삼국사기>의 편자들에 의해 보충된 이 내용은 비류와 온조의 어버지는 주몽이 아니라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이고, 어머니는 졸본 사람 연취타발의 딸 소서노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기록에 따른다면 주몽은 졸본에 망명한 이후 졸본의 유력가인 연취타발과 손을 잡았으며, 이를 위해 두 아들을 둔 과부인 소서노에게 장가를 들었다는 결론이 된다. 이는 곧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자가 아니라 양자라는 뜻이 된다.

 

한낱 망명객에 불과한 주몽이 어느날 갑자기 졸본부여 왕의 부마가 되고, 다시 왕위를 이어받는다는 내용보다는 과부 소서노를 통하여 졸본의 유력가 연취타발의 후광을 입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고구려를 건국한다는 내용이 훨씬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주몽의 두 번째 아내이자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는 주몽보다 8살이나 많은 연상의 여인이었다. 즉 주몽이 졸본에 망명해 왔을 때 21살이었다면 소서노는 29살의 성숙한 여인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소서노가 졸본부여의 공주였다면 서른이 가깝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공주가 아니고 졸본부여 유력가 집안의 딸이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과부인 여인에게 주몽이 장가를 들어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여 설득력이 있다.

 

이에 따라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친자가 아니라 양자이며,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가 그들의 친아버지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말하지면 비류와 온조는 동부여 계통의 우태라는 인물과 졸본의 유력가 연취타발의 딸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쯤 태어났으며, 어떻게 자랐을까? 삼국사기는 비류와 온조의 출생 년도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소서노의 나이를 통해 대략 추측이 가능하다.

 

당시 고구려 여인들의 결혼 적령기는 대개 15세에서 18세 사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15세 이상되는 남자를 부역에 동원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15세부터 장정의 대열에 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장정은 성인이며 여자 역시 이 기준에 따랐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여인들은 대개 20세 이전에 시집을 갔다고 생각한다면 귀족 집안의 딸은 더욱 나이를 지켰을 것이므로 소서노는 대략 18세 쯤 시집을 갔다고 보면 20세를 전후하여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소서노가 서기전 66년 태생임을 감안한다면 비류는 서기전 47년을 전후하여 태어났을 것이고, 온조는 2년 정도 뒤인 서기전 45년 전후하여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주몽이 소서노와 결혼한 시기를 서기전 38년으로 본다면, 이 때 비류는 10살, 온조는 8살 정도 되었을 것이다.

 

주몽은 이 두 어린 소년을 친자식처럼 대하여 주었다. 그 이면에는 소서노와 그녀가 속해 있는 부족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한낱 망명객에 불과했던 주몽 입장에서는 소서노와 그 친족들의 도움 없이는 고구려 건국이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때문에 소서노와 그 친족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몽은 소서노의 아들들을 태자로 삼지 않았다. 그는 비류국 및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켜 나가면서 독자적인 힘을 키웠고, 소서노와 그 친족들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주몽은 동부여에 두고 온 친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가 결국 친자 유리를 졸본으로 불러들여 그를 태자에 책봉하기에 이른다.

 

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근왕파와 소서노파 간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전개되었다. 소서노는 자신의 부족인 계루부 출신의 신하들을 앞세워 비류를 태자에 봉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고, 근왕파는 왕의 원자가 있는데 양자를 태자로 세울 수 없다고 맞섯을 것이다. 결과는 근왕파의 승리였다.

 

비류와 온조는 이같은 치열한 권력다툼 속에서 성장기를 보내다가 결국 근왕파의 승리로 유리가 태자에 오르자 급기야 자신들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이끌고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가 각각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비류는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났고, 온조는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 났다고 주장한다. 즉 그들은 서로 이부동복의 형재라는 이야기다. 그 이유는 온조가 나라를 세운 뒤 동명성왕의 사당을 세운 것도 이같은 추론의 단초로 작용했다. 만약 온조가 양자라면 굳이 주몽의 사당을 새울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이유다.

 

그러나 <삼국 사기>의 기록은  둘 다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형제로 기술하고 있다. 온조가 백제를 세운 뒤 자신의 성씨를 고씨나 해씨가 아닌 부여 씨를 삼은 이유이다. 온조는 자신이 졸본부여의 후예이자 부여 왕족 출신인 우태에게서 태어난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고 판단된다.

 

 

망명, 그리고 백제의 탄생

 

유리가 즉위하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망명길에 오르는데, 그 망명 행렬에는 그녀를 지지하던 세력들이 대거 동참하였다. 이들 망명 세력의 대부분은 계루부 출신들이었을 것이다.

 

5부족 연맹체인 구려(고구려의 전신)는 원래 연노부에서 왕을 배출하다가 주몽이 고구려를 일으키면서 계루부 중심의 사회로 전환되었다.  이는 주몽을 왕으로 등극시킨 중심 세력이 계루부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시 주몽의 정치적 기반이 소서노의 아버지 연취타발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연취타발이 계루부 족장이었음을 감안하여 주몽이 연취타발의 사위로서 연취타발이 죽자 계루부의 족장직을 승계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노부를 제치고 왕으로 등극하여 고구려를 개국했다.

 

계루부는 주몽의 등극에 핵심적인 역활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정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고구려의 국력을 신장시키면서 점차 계루부를 소외시키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태자 책봉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계루부는 소서노의 장자이자 계루부의 혈통을 이어받은 비류를 태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주몽은 동부여에 머무르고 있던 자신의 친자 유리를 불러들여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이 때문에 소서노와 주몽은 대립으로 치달았고 두 사 사람의 대립은 급기야 조정의 양분사태를 불러일으켰다.

 

태자 책봉 문제에 휘말린 고구려 조정은 순식간에 근왕세력과 소서노 세력간으로 양분되어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고, 결국 근왕세력이 승리를 거둔다. 이에 따라 동부여 머물고 있던 주몽의 친자 유리와 그의 어머니 예씨가 고구려로 오고, 주몽은 자신의 소원대로 서기전 19년 4월에 유리를 태자에 책봉한다. 그리고 5개월 뒤 주몽이 죽자 유리가 즉위한다.

 

이에 반발한 계루부 세력 및 소서노 일파는 유리의 즉위를 인정할 수가 없다며 망명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들의 망명 행렬에는 오간, 마려, 울음 등 열 명의 중신과 졸본의 많은 백성들이 동참했다. 말하자면 계루부 전체가 대이동을 했던 것이다. 물론 이 이동행렬에는 계루부에 예속된 병력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들의 망명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찿아와 태자에 오르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들이 태자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또는 유리)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 후 유류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 그러자 비류는 아우 온조에게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 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를 세우는 일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공로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승하하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머물러 있으면 괜히 쓸모없는 사람들처럼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니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별도의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 그리고 비류는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거하게 되었다.'

 

이 기록에서처럼 망명길에 오른 소서노 일행은 남쪽으로 갔다. 그리고 서기전 18년 10월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후에 백제(百濟)로 개칭한다. 망명길에 오른 때가 서기전 19년 9월이었기에 명명지를 전전한지 13개월 만에 비로소 터전을 잡아 개국의 대업을 이뤘던 것이다.

 

처음 국호를 '십제'로 한 것은 아마도 열 명의 신하가 보좌한 것에 근거한 듯하다. 그러다가 다시 '백제'로 개칭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애초에 백성들이 즐겨이 따라왔다고 하여 백제로 바꾸었다고.'고 기록하고 있고, <북사>와 <수서>에는 '처음에 일백 가구가 건너왔기 때문에 백제라 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부여'를 왕실의 성씨로 삼았는데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남 위례성의 실체와 계루부 집단의 망명 경로

 

백제를 건국한 계루부의 망명 집단이 어떤 경로를 통해 한반도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은 백제의 초기 역사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주몽의 고구려 건국과정과 마찬가지로 백제의 건국세력의 망명 경로에 대해서도 몇 가지 다른 견해를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백제의 망명 경로와 초기 정착지에 대한 사학계의 해석이 분분하다. 많은 학자가 다음 기록을 바탕으로 백제의 망명 경로를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비류와 온조는 자신들이 태자 유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 백성들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한산에 도착하여 부여악에 올라 거주할 만한 곳을 찿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했다. 이에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하였다.

 

" 이 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 한수가 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막혀 있습니다. 이같은 천혜의 땅은 다시 얻기 어려우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이들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거기서 머물렀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 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서기전 18년)이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볼 때 비류가 이끄는 계루부 망명세력은 우선 남쪽으로 향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들이 처음 도착한 곳은 한산이었으며, 도읍을 정하기 위해 부아악이라는 곳에 올라갔다. 부아악에 올라간 그들은 도읍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상충되어 양분된다. 결국 그들은 서로 나누어져 동생인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에 정착하고 비류는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가서 정착하게 된다.

 

학계 일각에서는 여기서 등장하는 한산을 현재의 북한산, 부아악을 인수봉으로 보고 있으며, 미추홀은 인천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하남 위례성이 한강 북쪽에 놓이게 되어 하북 위례성이 된다.  이런 혼선은 <삼국사기>에서 위례성이 한수 북쪽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미추홀은 삼국사기의 지리지에 따른 것이며 일각에서는 충남 아산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혼선이 벌어진 것은 하남을 한강 남쪽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졸본을 떠난 망명 집단은 동쪽으로 향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다시 남쪽으로 향해 현재의 서울 지역에 당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서울에 당도한 그들은 의견 차이로 온조는 한강 남쪽의 강남에 자리 잡고 비류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바닷가인 인천 지역에 자리 잡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강단 사학의 주류(식민사관 학파)라고 말하는 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주된 근거 사료인 이 같은 기록을 무시하고 <삼국사기> 본문에 의존하여 한산을 한강 북쪽의 북한산으로, 부아악을 인수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남'을 한강 남쪽이라고 해석하면서도 한편으론 위례성은 한강 북쪽에다 설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남을 한강 남쪽으로 해석하는 것은 '북쪽으로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다'는 위례성에 대한 설명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온조는 이같은 입지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한강 남쪽에 도읍지를 정하지 않았으며, 위례성 역시 한강 북쪽에 건설했다. 다음의 <삼국사기> << 백제본기>> 온조 13년 , 14년, 15년의 기사는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13년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범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황차 근래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니 필히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그래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편안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야겠다."

 

가을 7월, 한산 아래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이 확정되었다. 북으로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대해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14년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15년 봄 정월, 새 궁실을 지었다. 궁실은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이 기록들은 온조가 처음에는 한수 북쪽에 도읍을 세우고 위례성을 건설했다가, 온조 13년인 서기전 6년에야 비로소 한수 남쪽으로 옮겨온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온조 17년 봄인 서기전 2년의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는 기록과 온조 41년인 서기 23년 2월의 '한수 동북의 모든 부락의 15세 이상 되는 장정을 소집하여 위례성을 수리했다.'라는 기록에서 위례성은 새 도읍지에서 바라볼 때 한수 동북방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는 새 도읍지가 위례성 서남쪽에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온조가 처음부터 한수 남쪽에 위례성을 건설했다는 기록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위례성의 입지 역시 조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히려 <<백제본기>> 온조 편의 도입부에 있는 북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다.'는 내용은 위례성이 아닌 한강 남쪽의 새 도읍지에 대한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