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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4 : 고구려 역사 37 (에필로그 3)

두바퀴인생 2010. 10. 29. 13:23

 

 

 

한국의 역사 54 : 고구려 역사 37 (에필로그 3) 

 

 

 

 

 

고구려 역사 37 : 에필로그 3

 

 

연개소문 동상, 천안 국학원 내의 한민족 역사문화공원

 

                                                  

 

 


 

  

 

 

 

 

 

 

 

고구려- 당 전쟁

 

고구려-당 전쟁645년에서 668년까지 고구려당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고구려-당 전쟁
날짜 645년-668년
장소 만주한반도 북부, 황해
결과 당나라신라의 승리
이유 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
교전국
고구려
말갈
당나라
신라
지휘관
연개소문
양만춘
보장왕
연남건
고연수*
고혜진*
연남생*
연남산*
당나라:
당 태종
이치
이세적
장량
장손무기
이도종
설인귀
당 고종
소정방
신라:
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병력
20만여명 이상 (645년) 30만여명 이상 (645년)
피해 상황
고구려인 4만여명/말갈인 3,300명 알 수 없음
* = 전쟁 도중 적진에 투항한 자.

 

 

배경

당나라의 건국

수 양제(煬帝)는 고구려-수 전쟁에서 크게 패하였으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양저우의 별궁에서 사치스러운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수나라 내부에서는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엄청난 대토목 공사로 이미 국력이 피폐해져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으며, 지방의 호족들도 독립적인 정부를 세웠다. 또한 귀족 계층인 관롱 집단(關隴集團)마저 등을 돌려 수나라는 정치적인 기반마저 잃어버렸다.

 

617년, 태원 유수 이연 역시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연은 수의 수도인 장안으로 들어가, 황태손인 양유를 황제로 잇게 했다. 또한, 자신은 수의 대승상이 되었다. 때마침 수 양제가 강도에서 그의 시위장이자 우문술(宇文述)의 아들인 우문화급(宇文化及)과 우문지급(宇文智及) 형제에게 암살되자, 이연은 국호를 (唐)으로 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으며, 공이 컸던 둘째 아들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당 태종의 즉위

이세민은 또한 각지에서 당나라를 따르지 않는 지방의 호족 세력과 반란군들을 모두 제압하고, 624년 중국을 재통일 하였다.

 

이후 이세민의 인기가 높아지자 이를 불안하게 여긴 형 황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막내동생 제왕(齊王) 이원길은 이세민을 죽일 모책을 세웠고, 급히 자신들 계파의 대신들을 불렀다. 이건성파 중에는, 위징(魏徵), 왕규, 배적(裵寂) 등이 있어, 이세민 제거 작전을 세운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챈 이세민은 처남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장군 이정(李靖), 서세적(徐世勣) 등을 이용해, 도리어 역으로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

 

626년 7월 2일, 이세민은 부황 이연에게, 형제들이 자기를 죽이려 모함한다 아뢰었고, 이연은 그들을 장안의 궁성으로 불렀다. 그들이 궁성의 현무문으로 들어온 순간, 매복한 이세민의 군사들이 이건성과 이원길에게 화살을 쐈고, 그 자리에서 그들은 살해당했는데, 이를 현무문의 변이라 한다. 3일 뒤에 이연은 할 수 없이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2개월 뒤에 그에게 양위하였다. 이에 이세민이 9월 4일에 황제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하니, 이가 바로 당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이다. 태종은 630년 동돌궐을 제압하였다. 이에 거란, , 실위가 당에 스스로 속하였다.

 

고구려의 정세

한편, 중국에서 이와같은 소용돌이가 한참일 때, 고구려는 전쟁으로 흐트러진 국내의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당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내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했으며, 당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맺고자 했다. 고구려 영류왕은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 때 포로가 된 한인(漢人)을 송환하고 고구려의 포로를 찾아왔다. 624년 당에 조공(朝貢)하고 당 고조(高祖)로부터 상주국(上柱國)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왕에 봉해졌다. 영류왕은 당에 봉역도(封域圖)를 바치고 제후국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세민이 태종으로 즉위한 뒤로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 행위를 감행했고, 631년에 당나라가 고구려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경관(京觀)을 헐어버렸다. 같은해 영류왕은 동북쪽의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의 축조를 시작하였고,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역사(役事)의 감독을 맡겼다. 연개소문은 강경파 외교론자였으며, 이는 온건파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당의 세력은 점점 더 강해져 635년에는 토욕혼을, 640년에는 고창국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당나라에 대항할 세력은 대부분 소멸되었다.

 

640년 영류왕은 세자 고환권(高桓權)을 보내 당의 국자감에 입학시켰다. 이는 당나라에 대항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그러나 641년에 당나라 사신 진대덕(陳大德)이 고구려 지리를 정찰하는 등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는 점차 긴장되어 갔다.

 

연개소문의 정변

642년 연개소문의 세력이 강해지자 여러 대인(大人)들이 왕과 상의하여 연개소문을 죽이려 하였다. 그것을 미리 안 연개소문은 자기 부(部)의 군사를 모아 거짓으로 열병(閱兵)한다면서 잔치를 베풀어 대신들을 초대한 뒤 모두 죽였는데, 이때 죽은 자가 1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궁궐로 가서 영류왕을 죽이고 대신 왕의 동생인 장(臧)을 새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이다.

 

연개소문은 막리지에 오르고 이전 귀족회의가 가지고 있던 병권(兵權)과 인사권(人事權)을 장악하였으며,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 자리에 오르며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연개소문은 외교정책을 대당강경책(對唐强硬策)으로 이끌었다.

 

당나라의 침략야욕

한편,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받은 신라는 위기를 느끼고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견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중재에 나선 당나라가 고구려로 사신으로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고구려를 협박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우리가 신라와 간극이 벌어진 지는 벌써 오래다. 지난번 수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 우리 땅 500리를 빼앗아 그 성읍을 모두 차지했으니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은 그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사신에게 대답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받고 태종은 다시 644년에 장엄(蔣儼)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하고 그를 토굴에 가둔다. 이로서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에 당 태종은

요동은 원래 중국 땅인데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취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동정(東征)함은 중국을 위해 자제(子弟)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위하여 군부의 치욕을 씻으려 할 뿐이다. 또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더 늙기 전에 이를 취하려 한다.

라고 하였다.

 

당 태종은 장작 대감을 설치해 전선을 제조하고, 식량을 영주로 집결하여 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많은 대신들이 수나라의 예를 들어 고구려 정벌에 반대하였으나 태종은 자신감에 충만하여 이를 강행하였다.

 

결국 644년 10월,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시역을 성토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제1차 고구려-당 전쟁

제1차 고구려-당 전쟁 지도

 

644년 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 공격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3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또한 돌궐군과 거란군도 동원되었다.

 

당 태종은 정예군 6만 명을 유주에 집결시키고, 요동을 향해 세 갈래 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총 사령관인 이세적(李世勣)이 선발대 6만 명을 이끌었고, 당 태종의 친정군 20만이 뒤를 따랐다. 또한 장량(張亮)이 수군 4만 3천 명과 500척의 함대로 등주에서 출발하였다.

 

영주 도독 장검이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와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였다. 또한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신성(新城)공격에서는 실패했지만,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켰다. 당나라는 개모성의 인구 2만 호와 양곡 10만 석을 탈취한 후, 개모성을 개주(蓋州)로 개칭하였다.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킨 후 남녀 8천 명을 죽였다. 고구려도 당군의 공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파악하고, 곧바로 신성의 병력 4만을 요동성으로 급파하였다.

 

마침 신성의 구원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 당군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이세적의 주력군은 미처 도착하지 않았고, 당 태종은 요의 늪 지대에 이르렀는데, 진흙이 2백여 리나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 대장 염입덕이 흙을 퍼부어 다리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지 않고 늪 지대 동쪽으로 통과하였다. 이때 보장왕은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을 구원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이도종(李道宗)은 도주하다가 고구려 군에 허점이 생기자 수천 기를 거느리고 고구려 군을 기습하였다. 이때 마침 이세적군의 주력이 도착하여 고구려군은 1천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결국 신성의 지원군은 요동성에 합류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645년 5월 당군은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공격을 개시하였고, 요동성은 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을 막아내어야만 하였다. 요동성 내부에선 미인을 부신으로 분장시켜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반드시 보전될 것이다"라고 하며 성 안 군사들과 백성들의 동요를 막고자 하였다. 이세적이 포차를 열지어 놓고, 큰 돌을 3백 보 이상 날려 보냈다. 돌이 맞는 곳마다 모두 허물어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누대를 만들고 그물을 쳤으나 돌을 막을 수 없었다. 당나라 군사는 충거로 성 위의 집을 부수었다.

 

이 때 백제가 황색 칠을 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다. 남풍이 세게 불자 당 태종은 민첩한 군사로 하여금 장대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성의 서남루를 불사르게 하였다. 불이 성 안으로 타들어가자 황제는 곧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에 오르게 하였다. 고구려 군사들은 12일간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사망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 나라는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주민 4만 명을 생포하고, 양곡 50만 석을 탈취하였으며, 요동성을 요주(遼州)로 개칭하였다. 당군은 뒤이어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했다.

 

연개소문을 백암성을 구원하기위해 오골성(烏骨城)에서 1만명을 출동시켰다. 이 지원군은 백암성 부근에서 계필하력의 부대와 싸워 계필하력은 옆구리가 창에 찔리는 부상을 입고 고구려 지원군은 백암성에 입성하는 전략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백암성주 손대음(孫代音)은 당군이 두려워 전투를 치르지 않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태종은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개칭하였다.

 

당나라는 함락시키지 못한 신성을 다시 공격하였으나 또다시 함락에 실패하였다. 건안성(建安城) 역시 당나라 장검부대가 와해되며 방어에 성공하였다.

 

이후 건안성은 당나라 장량부대도 기습에 성공하는 등으로 당나라군을 계속 괴롭혔다. 이때 당나라의 진영에서는 건안성(建安城) 공격을 앞두고 많은 의견이 오고갔다. 이세적은 건안성이나 오골성(烏骨城)이 중요하지만 안시성을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배후로부터 공격을 받아 당나라의 군량미 수송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안시성 성주가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으나, 항복시키지 못한 점을 들어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태종은 이세적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왼쪽에 주위의 산을 이용하여 만든 안시성이 있고 오른쪽으로 당 태종이 만들었다는 토산의 흔적이 보인다.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이 일으킨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에서, 고구려는 전쟁초기 개모성·요동성·백암성·비사성을 적에게 빼앗기며 수세에 몰렸으나, 안시성전투에서 승리하여 당나라를 물리 칠 수 있었다.

사진에서 왼쪽으로 안시성으로 추측되는 영성자성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당 태종 이세민이 매일 일만 여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60일 동안 쌓았다는 토산의 흔적이 보인다.

                                중국 요녕성 해성시에 위치한 안시성

                           중국 요녕성 해성시 팔리진에 위치한 안시성
현재 안시성은 중국 요녕성 해성시 팔리진에 있는 영성자성(英城子城)으로 추측되고 있다. 대규모 중화학공업단지가 있는 중국 요녕성에는 중화학 생산재의 원활한 이동수단으로 고속도로가 잘 건설되어 있다. 심양에서 대련, 대련에서 단동, 단동에서 심양까지 편도 4차선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있어 고구려의 산성유적을 답사하기에는 편리하다.

 

                              안시성으로 추측되는 영성자산성 표지석
안시성은 둘레 2.5킬로미터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로 서남쪽 앞은 비교적 평지이며 동북쪽은 높은 산으로 막혀있다. 안시성은 중국 당나라가 고구려에게 패배한 전투지역이어서 그런지 중국 정부에서 관광지로 개발하지 않아 영성자산성이라는 표지석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또한 흙과 돌을 섞어서 성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성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곳 안시성은 고구려 군인과 주민 10만 여명이 당나라의 30만 대군과 4개월동안 전투하여 그때까지 전쟁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당 태종 이세민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겨준 장소로 조국을 지켜낸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안시성 동쪽으로 당나라 군인들인 만든 인공 토산의 흔적이 보인다.

                       요동성과 건안성 사이에 위치한 안시성의 위치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은 3갈래의 길로 30만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입하게 된다. 요동대행군 대총관으로 임명된 이세적은 6만의 선발대로 심양지역에 위치한 개모성을 함락 시키고 남쪽으로 내려와 당 태종의 친정 군 20만과 합류하여 요양지역에 위치한 요동성마저 함락시켰다.

이어 요동성 북쪽 등탑시에 위치한 백암성에 다다르자 백암성주는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을 하게 된다. 또한 남쪽으로는 당나라 장량이 이끄는 500여 척의 배와 수군 4만3천 여명이 비사성에 상륙하여 비사성을 함락하게 된다.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든 천리장성에 있는 산성 중 안시성과 건안성 신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나라에 함락되어 안시성마저 당나라에게 빼앗긴다면 당나라군이 막 바로 수도 평양성으로 향하게 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성주 손대음이 당 태종에게 항복한 백암성
이때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고연수, 고혜진 장군에게 15만의 고구려, 말갈 연합군을 안시성 동남쪽에 주둔시켜 당나라 군대와 대치하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 장수 고연수, 고혜진은 안시성 동남쪽 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주필산 전투에서 당나라 군에 포위되어 당 태종 이세민에게 항복하고 만다.

                                                  안시성 모습
고구려 지원군이 패한 후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진 안시성 군인과 주민은 스스로의 힘으로 당나라 대군에 맞서야 되는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된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군인과 주민 10만 여명과 함께 4개월 동안 당나라 군대와 싸워 안시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고구려를 지켜내게 된다.

주필산 전투

이때 연개소문은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의 지휘 아래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전시켰다. 대대로인 고정의는 당 태종을 경계할 것을 고연수에게 당부하였으나, 고연수는 이를 간과하였다. 태종은 사자를 보내 고연수를 안심시킨 뒤, 이세적과 장손무기(長孫無忌)로 하여금 고연수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혼란에 빠진 고구려군은 퇴각로마저 잃었으며, 이때 용문 출신의 설인귀(薛仁貴)가 큰 공을 세웠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군사 3만 6천 8백 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당나라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태종은 욕살 이하의 관장 3천 5백 명을 선발하여 당 나라 지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 3백 명은 전부 생매장 하였다. 또한 말 5만 필·소 5만 두·명광개 1만 벌을 노획하였으며, 기타의 기자재도 이 정도 노획하였다. 태종은 전투가 일어난 산의 명칭을 주필산(駐蹕山)으로 개명하고, 고연수를 홍려경, 고혜진을 사농경에 임명하였다.

 

 

안시성 전투

 

644년 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 공격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3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또한 돌궐군과 거란군도 동원되었다.

 

당 태종은 정예군 6만 명을 유주에 집결시키고, 요동을 향해 세 갈래 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총 사령관인 이세적(李世勣)이 선발대 6만 명을 이끌었고, 당 태종의 친정군 20만이 뒤를 따랐다. 또한 장량(張亮)이 수군 4만 3천 명과 500척의 함대로 등주에서 출발하였다.

 

영주 도독 장검이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와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였다. 또한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신성(新城)공격에서는 실패했지만,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켰다. 당나라는 개모성의 인구 2만 호와 양곡 10만 석을 탈취한 후, 개모성을 개주(蓋州)로 개칭하였다.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킨 후 남녀 8천 명을 죽였다. 고구려도 당군의 공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파악하고, 곧바로 신성의 병력 4만을 요동성으로 급파하였다.

 

마침 신성의 구원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 당군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이세적의 주력군은 미처 도착하지 않았고, 당 태종은 요의 늪 지대에 이르렀는데, 진흙이 2백여 리나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 대장 염입덕이 흙을 퍼부어 다리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지 않고 늪 지대 동쪽으로 통과하였다. 이때 보장왕은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을 구원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이도종(李道宗)은 도주하다가 고구려 군에 허점이 생기자 수천 기를 거느리고 고구려 군을 기습하였다. 이때 마침 이세적군의 주력이 도착하여 고구려군은 1천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결국 신성의 지원군은 요동성에 합류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645년 5월 당군은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공격을 개시하였고, 요동성은 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을 막아내어야만 하였다. 요동성 내부에선 미인을 부신으로 분장시켜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반드시 보전될 것이다"라고 하며 성 안 군사들과 백성들의 동요를 막고자 하였다. 이세적이 포차를 열지어 놓고, 큰 돌을 3백 보 이상 날려 보냈다. 돌이 맞는 곳마다 모두 허물어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누대를 만들고 그물을 쳤으나 돌을 막을 수 없었다. 당나라 군사는 충거로 성 위의 집을 부수었다.

 

이 때 백제가 황색 칠을 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다. 남풍이 세게 불자 당 태종은 민첩한 군사로 하여금 장대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성의 서남루를 불사르게 하였다. 불이 성 안으로 타들어가자 황제는 곧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에 오르게 하였다. 고구려 군사들은 12일간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사망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 나라는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주민 4만 명을 생포하고, 양곡 50만 석을 탈취하였으며, 요동성을 요주(遼州)로 개칭하였다. 당군은 뒤이어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했다.

 

백암성주 손대음(孫代音)은 당군이 두려워 전투를 치르지 않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태종은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개칭하였다. 이때 당나라의 진영에서는 건안성(建安城) 공격을 앞두고 많은 의견이 오고갔다. 이세적은 건안성이나 오골성(烏骨城)이 중요하지만 안시성을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배후로부터 공격을 받아 당나라의 군량미 수송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안시성 성주가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으나, 항복시키지 못한 점을 들어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태종은 이세적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은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의 지휘 아래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전시켰다. 대노인 고정의는 당 태종을 경계할 것을 고연수에게 당부하였으나, 고연수는 이를 간과하였다. 태종은 사자를 보내 고연수를 안심시킨 뒤, 이세적과 장손무기(長孫無忌)로 하여금 고연수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혼란에 빠진 고구려군은 퇴각로마저 잃었으며, 이때 용문 출신의 설인귀(薛仁貴)가 큰 공을 세웠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군사 3만 6천 8백 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당나라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태종은 욕살 이하의 관장 3천 5백 명을 선발하여 당 나라 지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 3백 명은 전부 생매장 하였다. 또한 말 5만 필·소 5만 두·명광개 1만 벌을 노획하였으며, 기타의 기자재도 이 정도 노획하였다. 태종은 전투가 일어난 산의 명칭을 주필산(駐蹕山)으로 개명하고, 고연수를 홍려경, 고혜진을 사농경에 임명하였다

 

  

이세적은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안시성 사람들이 당군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니 태종이 분노하였다. 이세적은 성이 함락되는 날 안시성의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릴 것을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게 수비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오랫동안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때 고연수·고혜진 등이 태종에게 안시성 대신 오골성을 공격할 것을 주청하였다. 태종이 이를 따르려 하자 장손무기가 보급로 차단을 이유로 이에 반대하였다.

 

어느 날 태종은 성 안에서 들리는 닭과 돼지의 소리를 듣고 이세적에게 밤 중 안시성에서의 기습 공격에 대비할 것을 명하였다. 이날 밤, 안시성의 군사 수백 명이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다. 태종은 이 말을 듣고 직접 성 밑에 와서 군사를 소집하여 재빨리 공격하였다. 안시성 군사 중에 사망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그럼에도 안시성의 저항이 완강하자, 당군은 강하왕 이도종의 건의로 성의 동남 쪽에 토산을 쌓아 점점 성으로 접근해왔다. 성 안에서도 역시 성벽을 더욱 높게 쌓아 굳게 방어하였다. 양군은 하루에도 6, 7회씩 교전하였다. 당나라 군사의 충거와 포석이 누대와 성위의 작은 담을 허물었으나, 성 안에서는 그 때마다 목책을 세워 부서진 곳을 막았다.

 

당나라 군사는 밤낮을 쉬지 않고 60일 동안 50만 명이 동원되어 토산(土山)을 쌓았다. 토산이 완성되자, 이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 높게 되어 밖에서는 성 안을 내려볼 수 있었다. 이도종이 과의(果毅)부복애(傅伏愛)를 시켜 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정에 주둔하여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에 산이 폭우로 허물어지면서 성을 덮치는 바람에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토산이 무너지자 안시성의 군사 수백 명이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탈취하여 그곳에 참호를 파고 수비하였다. 태종은 토산을 빼앗기자 진노하여 부복애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결국 이길 수 없자, 도종이 맨발로 황제의 깃발 아래 가서 죄를 청했다. 이에 태종은 이도종에게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는 전한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이 진 목공이 맹명을 등용한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너는 개모성과 요동을 점령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한다.

라고 하였다.

 

전투는 그만큼 치열했으며, 심지어 당 태종이 안시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전설까지 남게 되었다. 당의 공격을 막아낸 안시성의 성주에 대하여 역사서에는 어떠한 자료도 없이 그냥 "안시성의 성주"로만 기록되고 있었다. 특히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안시성주에 대해 크게 칭송하면서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 혹은 "양만춘"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나라의 퇴각과 평가

645년 9월 당 태종은 요동이 추워지고, 병사들과 군마를 관리하기 힘든 것과 군량이 떨어질 것을 예측하여 군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안시성주는 성에 올라가 절을 하며 작별하였다. 태종은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백 필을 주었다.

 

이때 안시성의 성주에 대하여 역사서에는 어떠한 자료도 없이 그냥 "안시성의 성주"(安市城主)로만 기록되고 있었다. 특히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안시성주에 대해 크게 칭송하면서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나라 군대는 요택으로 달아났다. 당나라 군대가 선택할 수 있는 퇴각로는 3개가 있는데, 요하 하구는 고구려 건안성이 버티고 있어 갈 수가 없다. 따라서 당나라 군대는 진흙밭인 요택을 건너는게 아닌 요하 중류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당나라 군대는 이 길을 가지 않았다. 이는 요동 지역의 고구려군을 의식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태종은 이세적과 이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후군으로 서게 하였다. 그들이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려 하였다. 그러나 습지 때문에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태종은 장손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로 삼아 건너도록 하였다. 태종이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와 주었다.

 

겨울 10월, 태종은 포구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진흙길 메우는 작업을 독려하였다고 좋게 말했지만, 이세민 조차 나서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사지(死地)를 건너고 있었다. 20일동안의 퇴각은, 바람과 눈이 휘몰아쳐 군사들의 옷이 젖고 폭풍과 눈 엄청난 추위에 동사하여 죽은 군사가 매우 많고 소,말 10마리중 일고여덟마리가 죽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혹자는 고구려군이 후미를 공격해 피해를 입은것을 모두 추위때문에 죽었다고 핑계한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태종은 퇴각하는 길에서

"만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

라고 말하였다. 이때 당 태종의 퇴각에 관련하여 많은 이견이 있는데, 근대의 역사학자인 신채호는 태종이 패전의 수치를 감추고자 일부러 자신들의 전과를 부풀리고, 피해는 최소화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베이징 일대 또는 중국 내륙까지 당 태종을 추격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현토(玄菟城)·횡산(橫山城)·개모(蓋毛城)·마미(磨米城)·요동(遼東城)·백암(白巖城)·비사(卑沙城)·협곡(夾谷城)·은산(銀山城)·후황(後黃城) 등 10개 성이 함락 당하였고, 요주·개주·암주의 3개 주에서 7만 명의 주민을 중국에 빼앗겼다. 그러나 당나라군의 피해는 경미했으며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에 따르면 그 수는 2천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를 두고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당나라군이 퇴각로를 함락시킨 요동성 일대로 하지않고, 진펄지대인 요택(遼澤)으로 한 점과 많은 양식을 이전에 고구려에게서 탈취하였는데, 군량미가 떨어진다는 것을 핑계로 당군이 서둘러 퇴각한 점. 그리고 황제가 직접 퇴각을 도왔다는 점과 자신들의 구체적인 피해상황은 정확히 하지 않은 점을 들어 이 전쟁을 당나라의 패배로 보고있다.

 

한편, 항복한 고연수는 항복한 뒤로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홧병으로 죽고,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도착하였다.

 

제2차 고구려-당 전쟁

당나라는 655년659년 음력 11월에 설인귀를 앞세워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고, 이듬해 음력 6월에는 소정방이 군사 13만 명을 이끌고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침략하였다.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로 진격하였다. 당나라군은 평양을 직접 공격하였고, 당 고종은 4만 4천 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신라군이 다시 남진하여 백제부흥군과 싸워야 했으며, 그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서북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당나라군은 그 해 음력 4월에 다시금 대군을 거느리고 수륙양공 작전을 구사하며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나라군이 패하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으며, 이에 밀린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중지하였다.

 

661년 음력 8월에 당나라는 드디어 총력을 다해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당군은 총 44만의 대군을 6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다. 소사업의 부여도행군과 정명진의 누방도행군은 육군으로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은 해로로 공격하였다.

 

바다를 건너온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압록강에 상륙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맏아들 연남생에게 5만의 군대를 내주며, 압록수 수비를 맡겼다. 연남생은 그동안 설필하력 군대를 잘 막아내었으나, 겨울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압록강이 얼자 강을 건널 필요가 없어진 당군은 대군을 한꺼번에 이동시켰고, 이에 고구려군 3만이 죽고 2만이 투항하였으며, 연남생은 목숨만 살아남았다. 

 

평양을 향해 바다로 직접 건너온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은 상륙하여 평양 부근의 사수에 주둔하였다. 임아상의 패강도행군과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역시 평양에 주둔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직접 출격하여 662년 방효태가 이끈 옥저도행군을 사수에서 몰살시켰다. 이 전투에서 사령관 방효태는 물론이고 그의 13명의 아들이 모두 죽었다.

 

역시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을 공략하던 소정방의 평양도행군도 크게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원정군의 도움을 받자마자 바로 탈출하였다.

 

소사업의 부여도행군은 전투 도중 전선을 이탈하였고, 정명진은 군중에서 돌연히 죽었다. 바다를 통해 건너와 상륙한 4개 부대는 압록강 인근에서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연남생의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했으나 당 고종의 철군명령이 떨어져서 퇴각했으며, 패강도행군과 옥저도행군은 완전히 궤멸 되었다. 여세를 몰아 연개소문이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을 공격하자 당군은 신라군의 지원을 받아 곧장 퇴각하였다.

 

한편 소정방의 당군은 평양성을 포위하고, 소모전을 벌여 고구려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군량미가 떨어진 소정방은 한편으로는 신라에게 군량미를 요청하고, 방효태는 20만으로 다른 성을 공격하여 군량미를 빼앗을 계획이었다.

 

이 사실을 안 연개소문은 5,000의 군대로 사수 작은 강가에 진을 친 다음, 당군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결과는 고려의 대승이었다. 해가 중천에 뜨기도 전에, 방효태는 기습을 하려 하였으나 연개소문은 강의 얼음을 투석기로 깨버렸고, 20만 군사와 방효태는 물고기밥이 되었는데, 이 대첩이 바로 사수대첩 이었다. 한편, 소정방의 군대는 신라군의 군량미가 도착하자, 밥을 지어먹고 곧바로 퇴각하였다.

 

전쟁은 고구려가 승리했지만 그 여파는 고구려와 당 모두에게 심각했다. 우선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경제 활동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나라는 계속된 실패로 인해 고구려를 침공할 뜻을 잃어버렸다.

 

제3차 고구려-당 전쟁과 고구려 멸망 

그 후 보장왕은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하였다. 하지만 조정은 이미 많은 신하가 제거되어 어수선하였고, 민심도 연남건 형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668년2월,당 고종이 요하 근처에 주둔해있던 당군에 원군을 보내자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로 진격하였다.

 

당 고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남생을 앞장세워 이적, 설필하력, 학처준, 백안륙 등에게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재침략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한반도 쪽의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당은 항복한 연남생을 이용하여 신성 부여성을 쉽게 함락시켰고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은 사실상 붕괴되었으나 대막리지 연남건은 이에 포기하지않고 요동에서 5만의 군사로 대항했지만 크게 패하여 2만의 군사만을 이끌고 압록강 이남으로 퇴각했다. 이후 나당연합군은 평양성을 향해 진격했다. 668년8월,당의 50만 군사는 평양성을 포위했으며 신라군도 뒤를 따라 포위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포위당한 고구려군은 설상가상으로 평양성과 장안성 간의 연계마저 이루어지지 않았다.

 

667년부터 당나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40여개의 성과 마을이 함락되었고, 평양성이 포위당하자 668년 9월, 연남건의 동생 연남산은 군량이 부족하여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연남건과 보장왕에게 항복할 것을 건의했으나 실패하였고 고구려는 결사항전을 하였다. 그러나, 당에 항복한 연남생의 밀지를 받은 승려 '신성'이 평양성의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나당연합군이 밀려들어오자 연남건은 자결하려했으나 실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연남산은 멸망하기 전에 항복하였다, 보장왕이 항복을 선언하고 당군에 사로잡힘으로써 당나라로 끌려가고 고구려는 패망하였다. 이 때가 서기 668년 9월21일이었다.

 

고구려 조정인 수뇌부가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던 고구려 병사들은 여전히 당나라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                                       *                                         *                                    *

 

아! 슬프도다!

민족의 웅비를 마음껏 펼치던 동북아의 최강자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더넓은 만주 요동벌판을 종횡무진하면서 백발을 휘날리며 말을 타고 앞장서서 달리던 왕과 개마무사들...

울리는 북소리에 비호처럼 달려가 적진을 쳐부수던 무적의 철기군,

수나라 수백만 대군 앞에서도 당당하게 마주하여 물리쳤던 고구려 용장들,

안시성의 함성이 지금까지 들리는 듯 하구나!

 

고구려가 우리들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고구려의 위대한 역사와 그 대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 고구려만 망하지 않았어도...

 

이토록 우리들은 고구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들 스스로는 그들에 대해 망각속에 버려지고 있다.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송두리채 중국에 던져놓고 동북공정속으로 끌고가 그들의 역사로 둔갑시키려하지만 누구도 발벗고 나서지 않고 있다.

 

조상의 위대한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후세들에게 남기지 못한다면 그런 민족은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를 포함하여 우리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바이블화하여 후세들에게 남겨야 한다.

 

성경의 모세 5경이 우리들의 역사냐?

남의 역사 그것도 남의 나라 역사를 모방하고 신화를 조작하여 자신들의 역사로 만든 것이 성경이거늘, 그들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의 위대한 역사를 눈을 뜨는 순간부터 매일 교육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2000년 동안 잃어버렸던 나라도 되찿았고, 세계 노벨상의 30% 이상을 휩쓸고 있는 그들이다. 지금 그들은 세계 금융을 지배하며 월가를 짓주무르고 있으며 어둠속에서 그림자 정부로 군림하고 있다.

 

고구려를 신라,백제와 비교하지 말지어다

유구한 역사도 더 길었고 활동 영역도 만주와 중국 대륙을 넘나들었다.

 

수많은 중국 대륙의 나라들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어느 나라도 고구려를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그들은 요동반도와 요하, 살수,요택, 안시성,요동성,백암성, 비사성,신성,오골성,안시성 등지에서 고구려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모두 쫒겨갔다.

 

수.당의 수백만 대군도 을지문덕,강이식 장군 등이 신출귀몰한 유인책과 매복작전으로 물리쳤던 동북아의 최강자였다.

 

고구려는 건국 후 300년 동안 백제와 접촉이 없었고 백제가 대륙에서 세력을 확장한 고이왕 이후부터이다. 신라와는 5세기까지는 고구려 역사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렇게 고구려 역사는 건국 후 수백년 동안 백제, 신라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었던 나라였다.

 

고구려는 중국 대륙의 국가들과 패권을 다투며 성장하였고

그러면서 동북 아시아 북방 맹주로 군림했다.그 과정에서 힘이 강성할 때는 황하를 넘나들기도 하였고, 약할 때는 요하까지 축소되기도 하였다.

 

이 역경의 세월을 이기며 고구려는 동명성왕 이후 28대에 걸쳐 700년을 지속했다.

그 기간 동안 중국 대륙은 서한,신,동한,위,촉,오 삼국시대,진, 서진과 동진, 변방 5족의 16국,남북조의 송,제,양,진, 북위,동위,서위,북제,북주,수,당 등이 몰락과 성장을 거듭했다.

 

이렇듯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나 되는 나라가 발전과 멸망을 거듭하는 가운데 고구려는 무려 700년 동안이나 북방의 맏형으로, 동이족의 버팀목으로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전장터에서는 왕과 귀족들이 직접 앞장섰고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동명성왕이 나라를 건국한 이래 졸본에 도읍하여 유리를 받아들였고,

 

유리명왕은 정권장악에 노력하는 한편 새로운 도읍지 위나암으로 천도한 후 한나라,신나라와 대적하는 한편 부여와도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다.

 

뒤를 이은 대무신왕이 급변하는 국제정세속에서 팽창정책을 가속화 하여 부여를 정벌하고 한나라의 침공을 을지도의 잉어계책으로 물리쳤으며 낙랑국을 정복하였고 왕자 호동이 정비의 계략으로 자결하는 비극을 낳게 되었다.

 

뒤를 이은 민중왕의 짧은 치세를 거쳐 모본왕 시대에는 모본왕의 폭정으로 두로의 반정이 일어났으며,

 

뒤를 이은 태조대왕은 동한을 상대로 고토회복전쟁을 벌이면서 대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동생 수성의 왕위 찬탈음모를 알고 스스로 왕위를 물려주어 20년 동안 상왕으로 감금되어 생활하면서 태자 등 두 아들을 차대왕(수성)에게 잃는 등 가슴아픈 시련을 겪었고,

 

폭군 차대왕은 피의 숙청을 단행하여 수많은 신료들과 왕족들을 죽이는 패륜을 저질러 명립답부 반정에 의해 시해되고 뒤를 이어 신대왕이 즉위하였다. 신대왕은 조정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좌원대첩에서 승리하여 기세를 올렸다.

 

뒤를 이은 고국천왕은 개혁정책으로 외척들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좌가려의 반란, 발기의 역모 등이 일어났다. 그러나 을파소 재상의 현명한 정치보좌로 국력을 키웠으며

 

뒤를 이은 산상왕은 우왕후의 계략과 발기의 난을 겪으면서 환도성으로 천도하였으며 중국은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뒤이은 동천왕은 평양으로 천도하였고 서진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위나라와 패권다툼이 전개되었다.

 

뒤이은 중천왕은 국력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평양성 시대를 열었고,

 

서천왕은 평화정착 노력을 전개하는 한편 북방 정책을 전개하여 부여를 완전히 소멸시켰으며

 

봉상왕은 폭정으로 창조리의 반정을 유발하여 패위되었으며, 창조리는 봉상왕의 살해 지시로 머슴으로 숨어살던 왕손 을불을 찿아내 왕위를 잇게 하니 그가 바로 미천왕이라,

 

당시 중국은 5호 16국 시대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던 차 미천왕은 과감한 퍙창정책을 추진하여 영토를 확장하였고,

 

뒤를 이은 고국원왕은 모용 선비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불타고 미천왕 시신을 도굴하여 가져가는 수모를 당하였으며 평양성을 기습한 백제와의 싸움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비운의 왕이 되었다.

 

소수림왕은 문치를 내세우며 중앙집권화와 백제 정벌정책을 추진하였고, 불교를 공인하고 태학을 설립하는 한편 율령을 반포하여 내실을 기하는데 주력하였다.

 

뒤를 이은 고국양왕은 후연과의 투쟁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였고,

 

뒤를 이은 광개토대왕 대에는 고구려가 가장 강성한 시대가 열렸다. 국력신장 정책과 팽창정책을 추구하여 고구려의 영토의 최대판도를 그렸으며 관미성 전투, 패수 싸움, 병신대원정, 경자대원정, 갑진왜란, 정미대출병 등의 활발한 대외원정을 진행하였다. 이렇듯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죽자,

 

뒤를 이은 장수왕은 태평성세를 이루었고 중국의 남북조 국가들과 강온양면전략을 구사하면서 을묘정벌로 백제를 징벌하여 개로왕을 전사시켰다.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은 영토수호 노력을 배가하였고, 나제연합군의 협공을 받기도 하였다.

 

안장왕-안원왕의 치세는 계속된 천재지변과 복구노력으로 내치에 힘쓰기 바빴고,

 

뒤를 이은 양원왕은 백제,신라와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하였고 중국은 혼란을 거듭하였지만 고구려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양원왕의 뒤를 이은 평원왕은 화친정책을 추진하여 새로 중국을 통일한 신흥국가인 수나라와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수나라 침공에 대비하였으며 온달장군을 등용하여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장안성으로 일곱번 째 도읍을 옮기면서 수나라와 전쟁에 대비하였다.

 

평원왕의 뒤를 이은 영양왕은 강병책을 고수하면서 수나라와 일전이 불가피하자 말갈군 1만을 동원하여 선제공격으로 먼저 포문을 열었다. 수나라 1차 침입은 강이식 장군의 대활약으로 수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쳤으며, 제2차 침입에는 수나라가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침공하였으나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으로 참패하여 물러났으며, 제3차 침입시에는 요동성과 신성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물리쳤고, 제4차 침입에는 비사성 싸움이 전개되었으나 고구려의 화친제의로 전쟁을 종식을 맞게 되었다.

 

평원왕의 뒤를 이어 영류왕이 등극하자 온건주의가 팽배해지면서 강경론자들이 대거 한직으로 쫒겨낫으며 이에 분개한 연개소문이 반정을 일으켜 신료 수백명과 영류왕을 참살하는 비극이 발생되었다.

 

연개소문의 주도하에 등극한 보장왕은 허수아비왕으로 연개소문의 일인독재체제가 구축되었고, 당태종의 침입으로 20만 대군을 동원한 고구려는 요동성,백암성, 안시성 등지에서 당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으며 수차레의 침공에도 고구려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연개소문이 죽자 이들 남생을 비롯한 세 아들의 권력다툼으로 인하여 고구려는 내분이 일어나고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남생이 당으로 도망하여 당군의 앞장이가 되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남생의 계책으로 대부분의 성이 성문을 열고 당군에 항복하는 등 계속 당군에 밀려 고구려는 결국 평양성에서 나당연합군 50만 대군 앞에 보장왕이 항복하는 비운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 고구려~~우리들의 가슴을 감동의 물결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고구려의 위대한 역사를 되새기며 오늘의 현실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그들의 위대한 위업을 조금이라도 기억하고 현실의 문제를 다같이 극복하여 미래를 위한 설계를 해야 될 것이다. 우리들의 영역은 한반도의 반쪽이 아니라 만주의 더넓은 벌판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