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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5 : 백제의 역사 1 (개관)

두바퀴인생 2010. 10. 30. 02:02

 

 

 

 

한국의 역사 55 : 백제의 역사 1 (개관) 

 

백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백제라는 이름을 반복해서 불러보면 이상하게도 쓸쓸하고 측은한 느낌이 든다. 부여의 후예로서 고구려 건국에 막중한 역활을 했던 계루부 집단의 우두머리 소서노, 그녀는 남편 주몽에 이어 유리가 왕위에 오르자, 아들 비류와 온조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신하와 백성을 이끌고 새로운 땅을 찿아 망명길에 오르는 비운의 여인이었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발해를 건너 산동반도에 이르고, 다시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찿아든 그녀는 고구려보다 훨씬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위를 두고 비류와 온조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소서노는 의리와 명분을 져버린 온조를 응징하기 위해 직접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채 위례성으로 말을 몰았지만, 불행히도 아들의 칼날에 희생되는 불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렇듯 백제는 소서노라는 한 여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의 한과 눈물과 웅지가 뒤엉켜 핏빛 선연한 한 송이 꽃을 피웠으니, 그것이 곧 백제였던 것이다. 온조에게 그것은 형과 어머니를 죽인 악운의 꽃이요, 조국을 등지고 망명한 백성의 설움과 한을 담은 눈물의 꽃이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듯이 백제인들 역시 자신의 고향인 저 대륙으로 돌아갈 꿈을 꾸며 힘을 키우고 세력을 확대하였고, 드디어 고이왕 대에 이르러 대륙백제를 건설함으로써 고향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근초고왕에 이르러 마침내 대국의 위업을 달성하고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오리라는 소서노의 다짐은 그녀가 죽은 지 4백 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백제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 땅에 발을 디딘 것도 잠시, 백제의 땅은 그 뒤로 점차 줄어들어 성왕 대엔 대륙의 땅을 모두 잃고 한반도 남부의 서부 일원에 불과한 땅으로 쪼그라 들기에 이른다. 백제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들이 가장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일본 황실 역사의 주인이 되었으며 지금도 일본 왕실의 국보로 보관하고 있는 백제 왕이 하사한 '칠지도'가 그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었고 신라의 변방을 침공하여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최대의 영광을 누리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국운이 기울면서 급기야 고구려와 당의 치열한 주도권 싸움에 휘말려 나당연합군에 수도 사비성이 점령되고 의자왕이 포로로 잡혀 수많은 군신,귀족,백성들이 중국으로 끌려감으로써 백제 땅은 신라에 병합되는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국운의 막을 내렸다.

 

패자는 말이 없다 했던가. 백제의 몰락 이후 신라는 줄기차게 백제의 역사를 축소해 한반도에 한정시켰고, 그것은 결국 역사 속에서 대륙백제의 존재를 완전히 페기처분함으로써 백제를 한반도 남부의 자그마한 국가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는 바로 신라 출신 김부식에 의해 쓰여지면서 그런 음모와 왜곡의 결과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백제의 진짜 얼굴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중국의 <남제서>, <송서>, <수서> 등에 백제의 진면목에 대한 기록들이 극히 일부라도 남아 있어 불행 중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위안을 삼을 정도이다.

 

중국 사서에 이런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백제는 영원히 한반도 남부의 별 볼 일 없는 소국으로 기억될 것이고, 우리는 백제의 진면목을 영원히 알지 못한 채 그 역사와 문화와 영토를 논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 사서들에 언뜻언뜻 비치는 백제 관련 기사들을 모두 동원한다하더라도 백제의 광활했던 영토 전체를 알아내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고구려의 백제 58개성의 위치가 중국 대륙에 그 지명이 산재해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광활한 영토를 경영하였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현재 남아 있는 사료만으론 백제인들이 어떤 경로로 대륙에 진출했으며, 어떻게 대륙 백제를 확대해 나갔으며, 어떤 방식으로 경영했으며, 어떻게 수백 년 동안 그 땅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륙백제의 역사가 없는 백제사는 반토막의 백제사다. 따라서 지금까지 쓰여진 백제사는 모두 반토막 백제사다. 그래서 여기서 기록되는 백제의 역사에서 언급되는 백제사는 사료의 부족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백제의 진짜 모습은 여기서 그려진 백제보다 훨씬 크고 대단하였던 것이다.

 

백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인이었다. 우리는 아직 그 거인의 발크기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겨우 다리 한 쪽을 발견하고 백제라는 거인을 모두 아는 것처럼 떠벌려댄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한 일이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백제를 거인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백제의 발에 묶인 한반도 사관이라는 족쇄를 풀어주는 일이다. 백제사를 쓴다는 것은 키를 알 수 없는 거인의 무덤을 발굴하는 것과 같다. 무덤을 발굴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속단하고 있다. 무덤 속에 묻힌 인간은 우리보다 훨씬 작고 왜소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는 점이다. 그 짐작을 바탕으로 사그라진 거인의 관을 다시 짜고, 찿지도 못한 유골을 복원하려고 한다.

 

역사학은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작업이 아니며, 없는 것을 지어내는 작업도 아니다. 동시에 역사학은 있는 것을 감추는 것도 아니며, 모른 것을 아는 척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틀을 만들어두고 그 틀에 맞게 끼워 맞추는 작업도 아니다. 역사학은 있었던 것에 대해 정직하게 인정하는 작업이다.

 

지금 백제사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남아 있는 기록에 대해 인정하는 학문적인 태도이다. 그래야만 백제라는 거인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거인을 초대하기 위해 초대장을 만드는 심정으로 백제사를 쓰며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백제인에게 보내는 초대장이 될 것이다.

                                                                                                                             ('백제 왕조실록' 저자 박영규 서언 요약) 

 

 

 

 

백제의 역사 1 : 개관

백제(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는 한국의 고대 국가로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의 하나이다. 남부여(南扶餘)라고도 한다.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기원전 18년 현재의 한강 하류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건국되었다. 삼국지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중부의 소국들 및 한사군과 대립하면서 성장하였으며 4세기부터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근초고왕 때는 전라도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북쪽으로의 진출, 고구려와 대립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초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아신왕이 직접 항복을 하기도 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475년에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기도 하였다.

 

이후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섰으며, 성왕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다시 상실하였으며, 관산성에서 전사하였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역사

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연표)  v  d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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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국
삼한

 



 
 
 


 
 
 


   

   
 


고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삼별초의 항쟁
홍건적의 고려 침공
조선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백제의 국가 성립

백제건국 시기에 관해 다양한 해석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삼국사기》기록에 실린 온조설화에 따라 기원전 18년부여 또는 고구려 계통의 유민 세력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의 백제의 이름은 십제였다.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고구려 유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설화에 따르면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온조가 남쪽으로 함께 내려온 뒤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각기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비류가 죽자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겨오므로 비로소 백제(百濟)라는 큰 나라로 성장했다고 한다. 온조설화 외에 비류 혹은 구태, 도모가 건국 했다는 비류설화, 구태설화도 전해져 온다.

 

온조집단이 한강유역에 정착하였을 때 이 지역은 직산-천안을 중심으로한 목지국 중심의 마한연맹체에 속하여 있어 목지국으로 100리의 땅을 할애받아 십제를 세우고 미추홀 지역의 비류집단과 연맹을 형성하여 초고왕때 목지국을 대신하여 지역연맹의 맹주가 되어 백제라고 이름을 고쳤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차츰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소금의 산지였던 인천까지 영향권에 넣었다. 중국과의 무역로를 확보한 백제는 중국 대륙의 선진 문물들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16관등과 공복제정함과 함께 6좌평과 상좌평까지 제정(260년)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고이왕 이후 낙랑과의 계속되는 대결에서 298년에는 책계왕이 살해되었으며, 304년에는 분서왕이 살해되었다.

 

민족과 언어

중국의 '후한서' 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는 일명 이나 따로 별종이 있어 작은 물가에 의지하여 살아 소수맥이라 불린다. 좋은 활인 맥궁을 생산한다.' 이처럼 후한서로 알 수 있듯 고구려를 세운 종족은 예맥족이다. 예맥족예족맥족으로 구성된 종족인데, 예족고조선신라를 세운 종족이고, 맥족부여고구려, 백제를 세운 종족으로 이들이 한민족의 직계조상이다. 예맥족은 고대 동이족의 일파로 중국을 형성한 화화족과 고구려를 형성한 예맥족은 본래 근본이 다른 민족이다. 

 

백제 민족의 주류를 이룬 민족은 예맥족으로 예맥(濊貊)은 숙신(肅愼), 동호(東胡)와 함께 고대 중국의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 거주한 민족으로 일명 (貊·貉) 혹은 (濊·穢·薉)로도 불렸다. 예맥족은 기원전 126년 이후 압록강두만강 유역은 물론 한반도의 동부 및 중부에 정착했다.

 

중국인의 시선에서 본다면 부여부터 왜인까지 각종의 '동이(東夷)'들은 상당한 정도로 서로 흡사해 보였다. 한반도 삼국을 서술할 때 중국 사서(史書)들은 늘 그 공통점들을 부각했다. 예를 들어 <양서>가 백제의 언어와 복장을 “고구려와 같다”고 했는가 하면, <수서>와 <위서>는 “복장이 고구려식”이라고 하고, <북사>는 “음식과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고 했다. “우리와 고구려는 똑같이 부여 계통”이라고 백제 개로왕(455~475 재위)이 위나라에 보낸 편지 문장을 부연 설명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같은 종족이었던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백제 지배층의 건국 신화가 고구려 주몽 신화와 연결돼 있었다는 측면에서 적어도 지배층에 한해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도 있지만, 중국 사서의 설명대로라면 백제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언어부터 사뭇 달랐다. 

 

<주서>에 따르면, 백제 왕을 지배층은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고 백성은 ‘건길지’(鞬吉支 )라고 불렀다. ‘길지’란 신라의 길사(吉士), 길지지(吉之智) 등 제14관등의 명칭과 통하는 용어로 아마도 진한과 마한(韓) 계통의 언어에서 ‘높은 사람’을 지칭한 말이었을 것이다. ‘건’(큰)길지라면 마한 언어로 ‘임금’이었던 셈인데, 이는 마한 소국들을 정복 내지 포섭해 백제를 세운 부여 계통 귀족들의 언어와 달랐다는 것이다.

 

또 백제에서는 부여계마한계만 사는 것도 아니었다. <북사>에 따르면, 고구려인신라인, 왜인까지도 함께 섞여 살았던 것이다. 중국인이 신라를 설명하는 방식도 백제를 서술하는 태도와 같았다. <북사> <수서> <구당서>는 하나같이 신라의 풍속, 형벌, 복식 등을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라고 기술했다. 즉, 외부 타자인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삼국의 공통 종족적 정체성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이다.

 

백제의 정치적 발전

4세기 중반 백제는 근초고왕 때 크게 발전하였다. 이때 백제는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모두 정복하여 그 영토가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점차 전제군주화가 되어가고 부자 상속에 따른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아울러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백제의 흥성

백제의 왕관 장식(무령왕)

 

 

4세기 근초고왕은 남으로 마한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고 탐라를 복속시켰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고, 북진하여 오히려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371년)시켰다. 일부 학자들은 근초고왕 때 중국의 요서 일대 및 산둥 반도, 일본 큐슈에 세력을 뻗었다고 주장한다.

 

송서, 양서 등의 남조 계열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이 랴오둥 일대를 점령한 시기(397년 이후)에 백제가 랴오시 지역에 영토를 획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백제는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아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그러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개로왕 전사와 함께 웅진으로 수도(475년)를 옮기면서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양직공도에 의하면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북제서에는 571년 위덕왕을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로 임명한 기록이 있어 재야사학자들과 대륙사관론자들은 이를 백제가 산둥 반도를 점유한 근거로 보기도 한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538년), 국호를 남부여로 개명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지만, 얼마 안 가 배신한 신라에게 빼앗기고(551년) 성왕 자신도 신라군과 싸우다 관산성에서 전사(554년)하고 말았다.

 

멸망과 부흥운동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백제에서도 무왕과 의자왕이 신라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자왕 2년에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성 40여개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삼국을 통일하려 하였다.

 

의자왕은 당나라와의 외교적 목적이 신라에 의해서 달성되지 않자, 대당 외교가 아니라 신라와 직접 군사 대결을 시도하여 659년 4월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군사 개입을 불러왔다. 당나라는 660년 6월 구원병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다.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만다.

 

이때 왜가 백제에 원군을 보내어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돌하였다 (백촌강 전투). 그러나 백제-왜 연합군은 대패하여 백제 부흥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900년부터 936년 동안 신라의 장군이었던 견훤이 백제라는 이름의 국가를 다시 세우지만 역사가 짧고 연관성이 비교적 적다. 학계에선 이를 편의상 후백제로 부른다.

 

통치 기구

중앙 관제

백제의 관서는 현저히 분화·발전하여 크게 내관 12부와 외관 10로 나누어져 도합 22부가 있었다.

 

내관에는 전내부(前內部)·곡부(穀部)·육부(肉部)·내경부(內경部)·외경부(外경部)·마부(馬部)·도부(刀部)·공덕부(功德部)·약부(藥部)·목부(木部)·법부(法部)·후궁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왕실·궁내에 속하는 관서였다.

 

외관에는 사군부(司軍部)·사도부(司徒部)·사공부(司空部)·사관부(司冠部)·점구부(點口部)·외사부(外舍部)·조부(綢部)·일관부(日官部)·시부(市部)가 있었다. 이들은 일반 정무를 담당하였다. 종래의 족장 선거의 유풍이 남아 각 관서의 장은 3년마다 교체되었는데, 이것은 귀족 간의 세력 균형을 위한 것이었다.

 

행정 구역

백제의 지방 행정은 원래의 부족 세력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방위로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수도를 5부로 구분하고 전국을 5방으로 나누었다.

 

방 밑에는 10군을 두었으며, 방에는 장관격인 방령과 차관격인 방좌를 두어 통솔케 하고, 군마다 3인의 장이 있어 700~1,200명의 군인을 거느리게 하여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밖에 전국 22개처의 주요 읍에는 왕자·왕족을 분거케 하였으며, 이를 ‘담로’라 하였다. 이것은 군을 거점으로 하는 제도가 정비되기 전의 일이다.

 

경제

백제는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여 삼한 시대부터 벼농사와 수리시설이 발달하였고, 직조술 ·염색술 등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금속공업도 발달하여 무기 ·금관 ·금은 장식품 ·불상 등을 만들었다. 토지제도는 국유가 원칙이고 토지의 측량방법은 두락제를 썼으며 조세는 조를 쌀로, 세(인두세)로 포목, 비단 실과 삼, 쌀을 내었고,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2월에 한수 북부 사람 가운데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백제의 대외무역을 보면 중국 남부 및 일본과 교역이 성행하여 일본에 말 ·누에 ·직조법 ·양조법 등의 생산품과 그 기술이 전파되었다. 백제의 무역항으로는 영암당항성이 크게 번성하였다.

 

사회

<양직공도>에 나오는 백제 사신의 모습

 

 

백제의 언어, 풍속, 의복은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상무적인 기풍을 간직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에서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반역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범은 목을 베었고, 도둑은 귀양을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형에 처하였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선진문화를 수용하였다.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관청의 세무에도 밝았다. 투호와 바둑, 장기는 백제 지배층이 즐기던 오락이었다.

 

문화

한학

오경박사·의박사·역박사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학의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자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증거로 472년(개로왕 18) 북위 (북조)에 보낸 국서가 《위서》에 실려 있다. 또한 541년(성왕 19) 양나라 사신 육허가 와서 <예론>을 강의하였으며, 근초고왕 때의 아직기근구수왕 때의 왕인이 일본에 한학을 전하였다.

 

또한 무령왕단양이·고안무 등이 일본에 유학을 전하였다.

 

197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해서체금석문인 지석(왕 523, 왕비 526)이나 사륙변려체로 된 사택지적비 등은 한문학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려준다.

 

국사편찬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국사를 편찬하였다. 375년(근초고왕 30)에 고흥이 《서기》를 편찬하였다. 또한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등의 역사책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시가

그리고 백제의 시가로는 작자 ·연대가 미상인 《정읍사》가 《악학궤범》에 전해지며, 노래의 제목만이 《고려사》 <악지>에 전해지며 《지리산가》 《무등산가》 《방등산가》 《선운산가》 등이 있다.

 

종교와 사상

불교는 384년(침류왕 1) 서역의 승려인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 이듬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다.

 

599년(법왕 1)에는 불교적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국왕의 명이 있었으며,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불태운 적도 있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600년(법왕 2)에 착공해 634년(무왕 35)에 완성된 왕흥사(王興寺)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백제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으며 겸익이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한편 백제금동대향로로 미루어 보아 도가사상과 신선사상이 발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경문전이나 사택지적비에도 도교사상의 영향이 발견된다.

 

또 백제는 낙랑·대방의 한인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역사서인 〈서기 (역사서)〉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를 둘 정도로 유교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했다.

 

건축

동성왕 때의 임류각, 의자왕 때의 태자궁·망해정 등을 비롯해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으며, 익산의 미륵사지를 비롯한 절터와 석탑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등이 유명하다. 불교와 관련된 조각품으로는 석불과 금동불, 불상 등이 있다. 고분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와 공주시·부여군 일대에 많이 있는데,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후기에는 중국 남조 (왕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축분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양과의 활발한 교류를 반영하는 국제적으로 세련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의 건축은 절터 ·탑 ·고분에서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절터로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소재의 백제 최대의 미륵사지가 있고 이 곳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동양 최대의 것으로 목조탑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우아하고 세련되어 안정감을 주며 삼국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하다.

 

백제의 분묘는 시체를 가매장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발굴해 내어 그 뼈를 깨끗이 씻고 장례 의식을 행한 후 다시 매장하는 복장이 가능한 석실묘의 전통과 현실 벽화의 내용면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에 중국 남조의 전실 고분의 형태까지 받아들인 것으로, 당시 그들과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한성시대의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것이 대표적인데, 이는 졸본 지방의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적석총이며, 웅진시대의 공주시 송산리 고분굴식 돌방 고분이다.

 

또한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무령왕릉은 연화문의 벽돌로 된 아치형의 벽돌무덤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 ·석수 ·동자상 ·청동경 ·자기 ·지석 ·금은 장신구 등이 있는데, 이 고분을 통해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를 지내는 예법은 물론, 특히 삼국간의 문화교류,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고분이다.

 

또 사비시대의 부여 능산리 고분굴식 돌방고분으로 송산리 고분보다 규모는 작으나 건축기술과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가 세련되었다. 그리고 충남 서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상은 백제 말기에 화강암벽에 새긴 마애석불인데, 소박한 옷차림, 엷은 미소를 띤 온화한 아름다움은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금동관세음보살입상, 무령왕릉의 출토품인 금제 관식 ·석수 ·동자상, 금은 장식품인 목걸이 ·팔찌 ·귀걸이 등이 유명하며 산수문전 ·연화문전 등과 기와 등에도 백제미술의 우수성이 나타나 있는데, 고구려의 와당은 힘과 정열(와당의 귀신상)을 표현한 데 비하여 백제의 와당(기와의 막새나 내림새의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은 온화한 아름다움이 그 특색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 조각가로서는 신라의 황룡사 9층탑을 건축한 아비지가 있다.

 

미술

백제의 그림은 능산리 고분의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와 송산리 고분의 신수도가 우아하고 섬세한 면을 표현해 주고 있으며, 화가로는 위덕왕의 왕자로 일본에 건너가서 쇼토쿠 태자를 그린 아좌태자와 백제 말기에 일본에 건너가 산수화를 전하고 사천왕상을 남긴 하성이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사택지적비문(사륙변려체), 무령왕릉의 지석(해서체) 등이 있다.

 

백제의 음악은 5∼6세기에 중국 남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음악이 소개된 것이 있고,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의 음악가가 일본에 건너가 음악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에는 고 ·각 ·공후 ·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7세기 초 백제의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에서 배운 음악을 일본에 전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국제적인 문화교류

백제는 을 비롯한 중국 남조의 각국과 활발하게 문화를 교류했다. 양나라에는 사신을 보내어 불교 등의 경서와 모시박사·공장·화사를 청하는 등 문화수용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백제의 사상과 문화는 에 전파되어 그들의 고대문화에 큰영향을 주었다. 한성시대에는 아직기·왕인 등이 왜에 한학과 유교를 전했는데, 특히 왕인은 〈천자문〉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오경박사가 교대로 국에 파견되었으며 기술자인 봉녀·야공·양주인을 비롯해 와박사·조사공 등의 건축기술자도 파견되었다. 백제문화는 일본 고대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아스카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과의 교류

칠지도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와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고 당시 백제가 에 보낸 칠지도는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364년 근초고왕은 탁순국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366년에 왜에서 탁순국을 통해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백제는 왜의 사신을 맞아 오색의 채견 1필, 각궁의 화살, 그리고 철정(쇠막대기) 40매를 선물하였다. 백제는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하구에 위치한 하동을 대왜교역을 거점으로 확보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한성에서 천안을 거쳐 금강상류로 와서 남원에서 섬진강을 타고 하동으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하동에서 대마도 축으로 해서 일기도, 그리고 북구주의 송포반도에 이르는 길과 대마도에서 충도, 복강현 북쪽 해안에 이르는 길이 생겨났다. 

 

 는 백제로부터 불교한자등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며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고 백제는 로부터 군사인력을 제공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 중 백제가 왜와 교류가 가장 깊었기 때문에 왜의 귀족층에는 백제계 도래인의 자손이 많이 있었다. 풍장의 남동생·선광의 자손은 왜 왕실으로부터 구다라노 고니키시('백제왕')의 성을 받아, 백제의 왕통을 전하게 된다. 간무 천황의 어머니인 다카노노 니이가사는 무령왕을 조상으로 하는 도래인 야마토씨의 출신이다. 현존하는 인물화상경은 백제의 무령왕이 게이타이 천황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로 백제와 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또한 오늘날까지 당시 백제인이 만든 관계용 저수지인 백제지가 남아 있다. 또한 백제씨 일족이나 백제 마을 등도 남아 있다. 일찍이 한반도 남쪽에서 배를 타고 거센 물결을 헤치며 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오사카 시에 몰려 살면서 "백제주"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어로는 "구다라스(百濟洲, くだらす)"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기 때문이다.

 

약 2000년 전에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벼농사법을 전수해주었다는 것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토기,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교토대학 사학과의 가도와키 데이지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국 특유의 바둑판형 지석묘가 기타큐슈조몬 시대(BC 3세기 이전) 후기 말경부터 야요이 시대(BC 3∼AD 3세기)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한국의 지석묘에 있는 특유한 마제석기가 기타큐슈의 야요이 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 등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한국과 기타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 반도에 있는 하라야마 유적을 조사하였더니 조몬 시대 만기의 토기와 함께 한국식 지석묘 무리가 발견됐다.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 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이처럼 벼농사는 오랫동안 조선을 경유한 것으로 얘기되어 왔으나, 이와 대조적으로, 벼 유전자 연구와 각종 유적에서의 출토품, 수경재배 흔적의 증거등으로부터 남쪽의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전래되고, 이후,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것이라는 학설이 일본 고고학계에서의 주류가 되었다.[20] 따라서 일본의 각종 역사 교과서의 벼농사의 전래 경로도 수정되고 있다.

 

문자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지만 일본 사가 현에서 생산되었던 흑요석이 한반도에서도 발굴되고 있으며, 매우 광범위한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요서 경략설

백제가 중국의 랴오시 지방에 진출했었다는 이른바 ‘백제요서경략설’은 《송서》, 《양서》 등의 남조계 사서에서 비롯한 것이다. 다만 지리적으로 랴오시 지방과 인접한 북조계 사서에서는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학계에서 지속적인 논란이 되어왔다.

 

일반적으로는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계의 시각이 대세이지만, 최근에는 다시 백제의 요서 진출을 신중하게 실재한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는 《국사》교과서에는 1990년 이전까지 백제가 요서를 공격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1990년 이후부터 진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편, 재야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 경략을 인정하는 편이다. 대륙사관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백제의 위치를 한반도 서남부가 아닌 황하장강 사이에 비정하면서, 백제의 요서 경략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백제의 요서 경략 시기에 대한 문제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송서》, 《양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요서 경략 시기는 (晉) 말기로,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이후라고 한다. 고구려가 요동을 명백하게 점령한 시기는 광개토대왕 때(391년~413년)의 일로 이 시기의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요서에 진출할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385년 일시적으로 요동을 점유하였을 때 백제의 요서 진출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한편 요서 경략 시기에 대해 신채호근구수왕 때, 정인보책계왕·분서왕 때, 김상기·김철준은 근초고왕 때로 보는 등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백제시대 주요 문화재

 

주요 국보

 

주요 보물

 

주요 사적

  • 425호 : 부여화지산일원유적
  • 427호 : 부여왕흥사지
  • 428호 : 부여관북리백제유적
  • 434호 : 부여능산리사지
  • 435호 : 부여금강사지
  • 474호 : 공주정지산유적
  • 산성 : 부여성흥산성(4호), 부소산성(5호), 공주공산성(12호), 부여청마산성(34호), 부여나성(58호), 부여청산성(59호), 부여석성산성(89호), 증산성(156호)

 

백제의 인물들

승려


예술가


학자
장군


외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