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피곤한 삶에 찌든 새벽길... 본문
피곤한 삶에 찌든 새벽길...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저전거를 타고 달리다보면 손이 시릴 정도다. 바람에 가로수 낙엽이 딩굴고 겨울이 성큼 다가온 듯 하다. 아마 겨울 동안에는 추운 날씨와 빙판길, 눈길 등으로 인해 자전거 타기가 어려울 것 같다. 새벽 자전거를 언제까지 탈수 있을 지는 몰라도 가능한 날씨까지 탈 예정이다.
새벽 강남고속터미널 건너편
새벽길은 참으로 삶에 바쁜 나날이다.
4~5시 경에 이미 집을 나서는 사람들, 베낭을 메고 새벽길을 나서는 사람들은 공사 현장으로 일자리를 찿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다. 아침 교대조로 출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일을 마치고 새벽에 퇴근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삶에 분주한 새벽 풍경은 활기가 넘치기도 하지만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나이가 많은 분들이 새벽길을 나서는 분들이 많아 안타까울 뿐이다.
지하상가 입구
반포대교 교차로
새벽 센터럴 시티
꽃 도매상가와 귀금속 타운
교차로
새벽 운동을 하는 주부들을 포함하여 교회로 새벽기도를 가는 사람들도 많다. 큰 교회, 좋은 교회로 사람들이 새벽잠을 설치면서 몰려들고 있다. 현 정권에 영향력 있는 소망교회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다는 것도 동일하다. 수많은 신도들이 낸 헌금으로 옛 궁성같은 초호화 성전을 증축하고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모든 종교단체가 교주는 황제처럼 호의호식하면서 살고 재산이 늘어나면 분쟁은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리 똑똑한 판검사라도 감언이설과 혹세무민하는 그들의 설교에 빠져들면 군중심리에 휩쓸려 전재산을 헌납하고 광신도가 되기 쉽다. 그런 예는 수없이 많다. 병을 치유한다고? 그렇다면 의사가 필요없고 병원이 존재할 리가 없다. 몸이 허약한 사람과 정신적으로 심약한 사람일수록 빠져들기 쉽다. 최근 말이 많던 강남 봉원사 주변에 개신교인들이 땅 밟기로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다. 누가 무슨 의도로 한 짓일까? ㅎㅎ
새벽 기도...그런 열성으로 모두의 소원이 진정 이루어진다면 참으로 좋겠다. 목회자는 그랬다. 약한 신앙심이 문제지...
사회가 어지럽고 어려우면 반드시 별의별 신흥 종교가 번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세 이전까지는 영토분쟁이 대부분이었으나 중세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분쟁이 종교분쟁의 시대를 이어오고 있다. 그리스교가 공인된 이래 예수를 고발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신으로 인정하기를 부정하였던 유태인에 대한 처절한 복수전이 전개되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600여만 명이 나치스 히틀러에 의해 희생되기도 하였다.
마호메트에 의해 이슬람교가 생겨나면서 무력을 바탕으로 무차별적인교세 확장에 나서자 그리스도교도들은 이슬람교도들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다.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간의 전쟁은 교세를 확장함과 동시에 영역을 확장하려는 목적과 경제권역의 쟁탈전으로 비화되면서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였다. 미국은 대전 중반에 전쟁에 참전하여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면서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1차 대전후에는 식민지 쟁탈전과 경제권역 확장이 가열되면서 일본 군국주의와 나치스 히틀러에 의해 세계는 다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미군 주도하 태평양과 대서양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당연히 세계 초강대국으로 자리메김하게 되었고 어부지리로 우리는 일제치하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유교의 공리공론과 당파싸움,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조선은 결국 나라를 망해 먹었고 60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전쟁터로, 겅제노역으로, 위안부로, 카미카제 조종사로, 독립군으로 이름모를 산하에 피를 뿌렸다. 2차 대전후에는 소련을 주축으로 한 공산이데올로기와 미.영을 주축으로 한 자본이데올로기가 대치하면서 냉전시대를 열었고 양 진영은 최근까지 싸움을 해오다 소련을 비롯하여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지금은 종교분쟁과 아울러 떠오르는 중국과 미.일, 그리고 유럽권의 경제분쟁이 더하여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종교(이데올로기)는 인류의 역사를 피비린내나는 역사를 만들고 있다. 뿌리가 같은 유태교.천주교.기독교.이슬람교는 같은 조상이며 종파를 달리하는 종교일 뿐이다. 원류 유태교에서 이단이 나타났고 그 이단에 대해 또다른 이단이 태어난 것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가지고 서로 종교적인 이론을 달리하면서 갈라져 종파를 이루었고 교세를 확장하면서 서로 편가르기를 하며 오늘날까지 인류의 역사에 서로 싸우고 죽이며 자신들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
어떤 종교던지 이상적인 종교는 없다. 이 땅의 민중들은 자신들 본래의 전통종교는 내팽개치고 버림받고 쫒겨난 종교인 다른 나라 종교를 받아들여 지금 서로 아우성들이다. 포용심도 없고 사로 인정도 하지 않는다. 너가 없어져야 내가 살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너를 죽여야 한다는 살인적인 행태뿐이다. 성서의 가르침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이단을 멸하라...,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 등 등
그러나 종교란 북한 김정일 집단처럼 집권 공산당의 일당독재로 그들만이 호의호식하며 축복을 누리자는 인간 본연의 탐욕만이 지배할 뿐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자본주의의 맹점을 비난하면서 맑스-레닌이 세운 새로운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다. 그들은 민중들을 선동하여 구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이상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하면서 폭력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도 결국은 가난의 평준화를 구축하고 말았고 일당독재의 부패가 만연하면서 독재의 치부를 어김없이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중국 청조 말기 홍수전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킬 때 그는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는 이상국가를 꿈꾸었다. 그러나 중세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유럽은 암흑기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홍수전도 결국은 남경에서 연합군과 정부군에 저항하면서도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황제처럼 살다가 부하들의 권력에 대한 파벌싸움으로 결국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지만...
종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종교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천국같은 세상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이 오면 인류는 과연 행복한 이상국가를 이룰 수가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탄압받던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래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힘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던지 급속하게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중세가 되면서 유럽은 명실공히 교황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모든 국가의 왕은 교황에 의해 지배되었고 모든 사회 공리공론은 오로지 성서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과학이 부정되었고 예수를 부정하고 고발한 유태인과 타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고 마녀사냥식의 무차별적인 살륙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성지를 회복하다면서 십자군을 동원하여 여러차례에 걸쳐 '약속의 땅'이라며 성지탈환을 외치며 팔레스타인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십자군 전쟁이 탐욕과 치부로 일관되었고 결국은 실패한 전쟁이 되었다.
이러한 부패한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이 지속되었고 권력을 잡은 종교인들의 부패와 비리, 그리고 탐욕이 정점을 달리고 있을 때, 이를 본 루터와 캘빙이 새로운 종교개혁을 주창하면서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 세력이 급속하게 세력이 확산되면서 종교전쟁이 발발하는 등 서로 피나는 싸움질을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차별과 억압, 살륙을 피해 유럽을 떠나 신천지인 신대륙으로 이주하였고 원주민 인디언들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신대륙에 정착이 시작되면서 그들은 원주민이던 인디언들을 무차별적인 살륙을 전개하면서 땅을 빼았고 씨를 말리면서 미 대륙을 차지하여 오늘의 미국이 건국되었다. 그후 인디안들은 대부분 멸종되었고 지금은 거주제한 지역에 20만 명 정도만 명맥을 유지하면서 남아있다고 한다.
세계 1,2차 대전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카스피해 바쿠의 석유 송유관 설치와 보호 문제로 유고슬라비아를 공중분해시켰고, 송유관 설치를 반대한 탈레반 정권인 아프칸을 침공하였다. 그리고 석유 위에 떠 있는 섬나라 이라크를 침공하여 막대한 원유를 차지하였다. 무소불위의 개신교 국가인 미국은 형제 종교이며 예수를 부정하는 이슬람과 지금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 종교와 그 파벌들이 인류에 끼친 영향은 구원의 축복보다는 엄청난 해악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종교가 존재하는 한 종교적인 이상국가는 절대로 이 지구상에 구축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인류의 원죄 때문이라고 그들은 성서를 들먹이며 말할 것이다...
새벽 반포 오거리
서울의 밤을 지배하는 것은 길 고양이들이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보면 고양이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음식물 쓰레기 톻을 넘어뜨려 먹이를 먹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 통은 찌꺼기가 지저분하게 달라붙어 냄새가 고약하다. 어떤 사람은 고양이를 위해 음식물을 담은 그릇을 내 놓기도 한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하다. 그러나 그들이 쓰레기 봉지를 뜯고 음식물 쓰레기 통을 넘어뜨려 길 바닦에 흩어놓아도 치울 줄을 모른다. 서울은 고양이를 키우는 도시이다. 아빠. 엄마. 형제들이 가족을 이룬 고양이들도 많다. 서로 영역을 다투고 싸움도 한다, 사람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차량밑으로 숨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별로 놀라지도 않고 빤히 쳐다보다가 숨는다. 그들도 삶을 살아가기 위해 도시의 담벼락을 넘나들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이수역 근방
새벽길에는 폐지와 고물을 줍는 사람들이 많다. 차량, 오토바이, 경운기, 손수레, 리야카, 자전거 등 각종 운반도구를 동원하여 골목마다 다니면서 남보다 먼저 페지와 고물을 줍기 위해 경쟁이 치열하다. 대부분 나이가 많으신 어른들이며 하루 용돈이나 생게비를 벌기 위해 새벽잠을 설치면서 열심히 수집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의 노인복지가 이 정로라면 경제발전은 허울에 불과한 것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번에는 자전가를 타고 다니면서 고물을 수집하던 사람이 차량에 치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것도 여러 대의 차량이 반복적으로 치고 달아났다. 결국은 모두 잡혓지만...이처럼 새벽길은 매우 위험하다. 헬멧을 포함하여 전조등, 후미등 기타 경고등을 켜도 위험한데 아무런 조명도 달지 않고 헬멧도 쓰지않고 자전가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듯 서로의 삶이 너무나 다르다. 가진자들과 갖지 못한자들 사이가 너무나 간격이 크고 삶의 질 또한 천양지차이다. 이 사회가 배고파 죽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남은 인생을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정부 혜택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 노인들이 너무나 많은 듯 하다. 삶이 피곤하고 희망이 없고 꿈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는 사회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 정의가 사라진 사회, 양심과 신뢰가 무너진 사회,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사회, 생계를 위해 용돈을 벌기 위해 원조교제와 매춘이 비일비재한 사회다.
사당역 14번 출구 앞
착하게 열심히 살아온 사랍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아니라 착한 사람이 바보요, 양심적인 사람이 병신이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불쌍할 뿐이다. 정의롭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하고 청렴하지 못한 사회... 불신과 거짓과 위선이 넘치는 사회...비리와 부패가 만연하고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듯 하다. 정부 부처 공무원을 포함하여 교육계는 물론이요 스폰서 검사를 포함하여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조계, 공기업 등 말할 것도 없고 대학들의 치부, 종교계의 재산분쟁 추태, 대기업의 불법 재산 승계, 장애인 시설 등 복지 시설의 비리, 각종 사학재단 비리, 금감원, 은행 등 금융기관의 비리, 국토해양부를 포함한 개발업무, 각종 인허가 및 검사기관의 비리, 연예계 및 언론계의 비리 등 할 것 없이 우리 사회가 전방위적으로 부패와 비리가 만연하고 있다.
정상적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사회적 약자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피곤이 찌든 사회이며 모든 것이 불공평하고 불평등하여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일 것이다.
하루하루가 전쟁같은 삶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순간순간이 전쟁이다. 아침 출근길, 후다닥 일어나 뛰쳐 나간다. 밥 한 숟갈 제대로 먹었나. 자동차 행렬, 끝이 없다. 지하철역에 늘어선 사람들, 문 열리기가 무섭다. 우르르 올라탄다.
이렇게 시작한 아침, 이런 전쟁터 같은 일상은 하루종일 계속된다. 얼굴 펼 시간이 없다. 온통 인상을 쓰고 산다. 길거리에서 부딪치는 사람들, 그들도 죄다 상을 찌푸리고 있다. 화가 난 것일까, 무슨 일에 저렇게 쫓기고 있는 것일까. 내 얼굴도 똑같겠지? 오죽하면 외국인들이 길 물어보기가 무섭다고 할까.
사람들이 집단화되면 더 전쟁같다. 기업·국가의 전쟁은 더 크고 끝이 없다. 열받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고운 말이 나오지 않는다. 거칠다. 대화는 대결이 되고 경쟁은 전쟁이 된다. 정치판의 전쟁놀이, 환율전쟁·무역전쟁·판매전쟁 등 경제전쟁, 입시전쟁, 취업전쟁, 취재전쟁, 이념전쟁… 전쟁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우린 전쟁하기 위하여 사나? 아니다. 살다 보니 전쟁을 하게 된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전쟁처럼 사나? 아니다. ‘전쟁처럼’이 아니라, 따뜻하고 화목하고 평화롭게 사는 사람도 많다. 어디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
근본적인 차이는 꿈과 비전, 목표를 설정하는 데서 나타난다. 어떤 이는 일등, 일류, 최고를 목표로 삼는다. 그것의 대상은 늘 돈, 권력, 지위, 명예, 인기 등등이다. 이런 사회적 결과물들은 달콤하다. 그러니 그것들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된다. 그것을 위한 열정, 노력, 의지 등이 최고의 덕목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그것을 쟁취했을 때의 성취감,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은 어느새 우쭐거리는 자만심으로, 최고를 누리는 오만함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우리네 삶의 진정한 목표는 과연 그것들, 돈과 권력 등등을 획득하는 데 있을까. 오히려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가 함께 따뜻하고 화목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아닌가.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일 뿐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획득하는 과정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돈, 권력, 지위, 명예, 인기 등등은 정말 달콤하다. 그것들은 크면 클수록 더 달콤하다. 그러니 그처럼 목표와 수단이 뒤바뀌면 당장의 그 달콤함은 우리네 삶의 행태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된다. 지나친 성취욕구, 과욕이 그것이다. 돈, 권력 등등을 찾으며 눈앞의 욕망에 빠져든다. ‘과욕사회’가 된다. 이런 과욕들이 충돌하면 ‘전쟁적 사회’가 된다. 이런 전쟁적 삶은 사람을 힘들게 한다. 장래를 불안하게 한다. 조증(躁症)과 울증(鬱症)을 오고가다가 사고를 치게 한다.
전쟁 같은 삶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트라우마(trauma)다.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난, 멸시, 학대, 애착 부족 등으로 이런저런 정신적 상처를 받는다. 이 상처들은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 이에 굴복해 실패한 이들은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반면 상처를 이겨낸 성취욕구가 과잉으로 나타날 때도 문제가 생긴다. 이 나라 국민은 지난 짧은 역사 속에서 기막힌 상처들을 받았다. 그것은 집단적 트라우마가 되었다. 지금 그것들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충동적인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돈? 벌어야 한다. 밥 먹고 살고 자식들 키우기 위해 돈은 벌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 돈·돈하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감투? 권력? 명성? 인기? 그것들도 마찬가지다. 제 적성에 맞는 한 얻으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손바닥 비비고 뒷돈 먹어가며 물불 가리지 않고 해서는 안 된다. ‘적정사회’, ‘적정욕구’의 길을 찾아야 한다.
돈 좀 벌었다고, 권력 좀 쥐었다고, 명성·인기 좀 얻었다고 잘난 체하는 이들, 그들의 내면에는 깊은 트라우마가 자리잡고 있다. 호화 사치하는 이들, 사람 함부로 대하고 화 잘내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 전염병 같은 사회적 질병에 국가적으로 시급히 대처해야 한다.
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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