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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9 : 백제의 역사 5 (온조왕 시대의 주변 국가들)

두바퀴인생 2010. 11. 3. 01:46

 

 

 

한국의 역사 59 : 백제의 역사 5 (온조왕 시대의 주변 국가들)

 

 

온조왕시대의 주변 국가들

 

대방

백제사와 관련하여 대방이 역사서에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남북조시대 북조의 역사를 다룬 <북사>와 수나라 역사를 다룬 <수서>의 백제 편이다. <북사>는 당나라 태종과 고종 연간인 640~650년사이 이연수가 편찬한 책으로 북위, 북주, 수 등 4왕조 232년간 (386~618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북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가 마한의 색리국에서 나왔다고 했다가 그 다음 내용을 보면 색리국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동부여에서 일어난 주몽의 탄생설화를 끌여들이고 있어 편자가 백제가 마한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고 기록한 것이다.

 

편자는 백제가 동명의 후손 구태라는 사람에 의해 처음에 대방 땅에 세웠다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백제가 마한의 색리국과 연관을 맺은 것은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운 이후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백제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에 건국되었다가 후에 다시 마한으로 들어가 마한의 배려로 색리국에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당 태종 연간인 630년경에 위징 등에 의해 편찬된 <수서>권 81 열전 제46의 백제 편에도 나타난다. 하지만 <수서>에서는 '백제의 선조는 고려(고구려)국에서 나왔다.'고만 쓰고 있고, 마한과 연관을 맺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백제는 처음에 '대방 옛 땅'에서 시작된 것으로 쓰고 있다.

 

<수서>가 <북사>보다 먼저 편찬되었고, <북사>는 백제와 관련해서는 <수서>의 내용을 참고했을 것이다. 그런데 <북사>를 만든 이연수는 왜 <수서>내용을 그대로 취하지 않고 백제를 마한에서 나왔다고 주장해야만 했을까? 이 의문은 이연수가 편찬한 <남사>를 보면 쉽게 풀린다.

 

<남사>를 보면 백제와 대방과의 관계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 그리고 <남사>는 백제를 마한에서 나왔다고 규정짓고 있다.

 

이연수가 <남사>와 <북사>에서 각각 다른 내용으로 기재한 것은 당시 남북조 시대의 남조와 북조가 백제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남조는 백제가 한반도의 삼한 중 하나였다가 점차 삼한의 일부를 잠식하여 결국은 대륙까지 진출하였다고 보았고, 북조는 백제가 원래는 대방의 옛 땅에서 시작하여 동이의 강국으로 성장하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연수는 남조와 북조의 이 같은 다른 기록 때문에 <북사>에서 이중적인 서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조와 북조의 기록을 모두 존중한다면 백제는 대방의 엣 땅에서도 건국하였고, 마한의 색리국에서도 건국하였다는 설정이 가능하다. 백제의 건국은 대방의 옛 땅과 마한의 색리국에서 동시에 진행되었거나 또는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조의 기록에서는 전혀 '대방의 옛 땅'과 백제를 연관시키지 못한 것을 볼 때 대방 옛 땅에서 건국이 마한에서의 건국보다 먼저 이뤄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대방 땅'은 북조에 속한 땅이었기에 대방에서 일어난 일을 남조에서는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제의 건국은 애초에 '대방 옛 땅'에서 건국되었다가 다시 마한의 색리국에서 또 한번 건국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방의 옛 땅'의 위치는 어디인가?

'대방의 옛 땅'은 전한 무제가 설치했다는 4군은 진번, 임둔, 낙랑, 현도군이다. 그런데 서기전 82년에 진번군은 낙랑군에 통합되었고, 임둔군도 현도군에 통합되었다. 그 후 낙랑군은 진번군 땅에 남부도위를 설치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맥의 토착세력이 강성해지자 낙랑의 남부도위는 유명무실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2세기 말 공손씨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낙랑의 남부도위 7현을 대방군으로 삼는다. 따라서 '대방의 옛 땅'은 바로 낙랑의 남부도위에 속한 진번의 땅을 일컫는다.

 

그런데 학계 일각에서는 이 진번군 지역을 한반도 황해도 일원에 설정하고 있다. 전한 무제가 비록 강력한 군주였으나 이동거리나 보급면, 지형면에서 한반도까지 군대를 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비록 고조선을 멸망시키기는 했으나 북쪽 흉노와의 전투에서 전한 무제는 악전고투하면서 온 국력을 투입하여 흉노토벌에 재위기간 내내 고심하였던 인물이다. 그리고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황하 동북부 일대를 장악하였던 공손씨 세력이 황해도까지 세력을 뻗쳤다는 의미인데 이는 당치도 않는 소리이다. 당시 한반도 북부는 고구려와 말갈이 장악하고 있었고, 백제가 황해도 남쪽까지 진출해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진번군을 한반도에서 찿으려는 학자들은 당시 대방군이 황해도 지역에서 요동반도 쪽으로 밀려났다는 주장을 하는바, 이는 근본적으로 전한 무제의 4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을 합리화시키려는 억지 주장일 뿐이다.

 

진 (晉, 서기 265~418년)의 진수가 지은 <삼국지> '위지' 권 30 오환선비동이전 제30 왜(倭) 편에서 대방군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이 책에서 대방군에서 왜국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당시 진나라가 대방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시기로 대방군을 떠나 한국에 이르고, 다시 한국의 해안을 다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동쪽에 이르면 구야한국(가덕도 근처)에 이르고, 다시 1천 리를 항해하면 대마도에 이른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이란 여러 한국으로 이루어졌던 한반도 남쪽 지역을 통칭하는 것으로 백제 땅을 일컬었으며, 구야한국은 김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금관가야를 일컫는다. 즉 그들은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한반도 남부에 이르고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항해하여 구야한국에 이르고, 이 항해 총거리를 7천 리라 했던 것이다(황해도에서는 3천 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이 왜에 이르기 위한 항로를 대방군에서 시작한 것은 대방군이 산동반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대방군이 산동반도에 있지 않고 요동반도에 있었다면 그들은 대방군에서 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이르는 가장 짦은 길은 산동반도를 출발해서 황해를 건너는 것이기 때문이다(당시 진수가 살아있을 시기의 요동은 고구려 땅이었다). 또 요동반도를 출발하여 왜에 이르고자 한다면 항해시간이 길고 고구려 땅이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당시 위나라 사람들은 당연히 산동반도를 항해의 출발점으로 삼았을 것이며 위나라 사람들이 왜로 가기 위해서 택했던 항로의 출발점인 대방군이 산동반도에 있었다. 말하자면 대방군은 하수(황하)의 남쪽인 하남 지역의 동쪽 지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었다. 대방이 이렇게 설정될 때 백제의 첯 도읍지가 하남(하수의 남쪽) 위례성이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성립될 수 있다.

 

 

낙랑군과 낙랑국

백제사에 등장하는 낙랑은 대륙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으로 구분될 수 있다. 대륙의 낙랑군은 전한 무제 때 설치한 4군의 하나이고, 한반도의 낙랑은 흔히 동예로 불리던 나라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편자들은 대륙의 낙랑과 한반도의 낙랑국을 혼동하여 서술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의 왜곡된 역사 서술에 기인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하는 낙랑은 전한의 무제가 설치한 낙랑이다. 하지만 <<백제본기>>에 등장하는 낙랑은 4군의 낙랑군과 한반도 동쪽의 낙랑국이 뒤섞인 상태로 기술된 것이다. 그리고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낙랑은 한반도의 낙랑만을 가리킨다.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은  발해만 연안의 하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아래쪽으로는 진번군이었다. 그리고 그 후 진번군이 폐지되면서 낙랑군은 진번군의 땅에 남부도위를 설치하게 된다. 그 남부도위는 후에 대방군으로 개칭된다.

 

이처럼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은 중국 대륙의 발해만 연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백제가 처음에 나라를 세울 때, 대방의 옛 땅은 낙랑군의 남부도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백제는 나라를 세운 뒤인 서기전 15년에 낙랑군과 우호관계를 맺어야 했으며, 서기전 11년에 목책을 설치하여 국경을 정하려 하다가 낙랑 태수에게 문책을 당한다.

 

<삼국사기>와 <<백제본기>>에 따르면 중국식 직책인 낙랑 태수가 등장하고 그는 위나라 시대에 접어들어 유주 자사의 명령을 받는다. 위나라의 유주는 현재의 북경 주변이므로, 위나라 시대에 낙랑군은 북경 주변의 해안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백제본기>>에는 온조 13년(서기전 6년)의 기사에서 또 하나의 낙랑이 등장하는데, 이 낙랑의 위치는 한반도 백제의 동쪽이고 신라의 북쪽에 있었다. 당시 상황을 이 기록과 연관시켜 보면 한반도에 낙랑이라고 불리는 국가가 별도로 있었으며, 백제의 동쪽, 신라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지>에는 낙랑이 있었다는 그 위치에 '예(濊)'국이 있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바로 '동예(東濊)', 즉 '동쪽의 예국'이라고 일컬었다.

<삼국지>는 예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잇다.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해 있고, 북쪽은 고구려 및 옥저와 접해 있으며, 동쪽은 대해에 닿아 있으니 지금의 조선 동쪽이 모두 그들의 땅이다. 집 수는 2만이다. 엣날에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여떫 조목의 가르침을 짓고 이로써 교화되니, 닫아지는 문이 없었으며, 백성들은 도적질하지 않았다. 그 뒤 40세대 뒤에 조선후 준이 왕을 참칭하였다. 진승 등이 일어나 천하가 진에 반란을 일으키자 연.제.조의 백성들로서 조선으로 피해 간 사람이 수만 명이었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상투를 틀고 동이 복장으로 다시 와서 그 곳의 왕이 되어 다스렸다.

 

전한 무제가 조선을 정벌하여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개의 군으로 삼았다. 그 후로 호(胡)와 한(漢)이 점차 구분되었다. 한 이래 대장군이 없으면 그 관직에는 후읍군(候邑君)과 삼로(三老)가 있어 하층민을 통솔하여 관장하였다. 그 곳의 늙은이들이 옛적에 말하길 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성격이 신중하고 성실하며....

 

단단대산령으로부터 서쪽은 낙랑에 속하고, 산령 동쪽의 일곱현은 도위가 그 곳을 주관하였는데, 모두 예 사람들을백성으로 삼았다. 후에 도위의 직을 폐지하고 그 곳의 우두머리를 봉하여 후로 삼았는데, 지금의 불내예 등이 모두 그들의 종족이라 한 말기에 구려에 속하였다...

 

정시(正始, 240~249년) 6년에 낙랑 태수 유무와 대방 태수 궁준이 단단대산령 동쪽의 예가 구려에 복속된다하여 군대를 일으켜 예를 정벌하니, 불내예 등이 읍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그 8년에 궁궐에 찿아들어 조공하니 조서를 내려 다시 불내예 왕에 임명하였다. 민간에 섞여 거처하며 때마다 군에 찿아들어 예방하고 배알하였다. 두 군에서 군대의 정벌이나 조세의 징수가 있으면 사역을 제공하였으나, 그들을 예우하여 주기를 마치 백성과 같이 하였다.'

 

이 기록의 첯부분에 나타나는 예의 위치는 <<백제본기>>의 낙랑 위치와 동일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삼국지>의 편자 진수는 예의 위치를 거론하면서 그 서쪽에 대한 언급은 유보하고 있다. 그리고 기자 및 위만에 관한 일과 4군 설치 등의 역사적인 사건을 거론하면서 다시 예 사람들의 습속과 품성에 관해 상세히 기술하고서야 비로소 예의 서쪽에 관한 언급을 시작했다.

 

진수가 이처럼 예의 서쪽을 설명하기 위해서 역사적인 사건을 나열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진수가 <삼국지>를 쓸 당시에는 예가 고구려에 복속된 이후였는데, 굳이 그 곳이 낙랑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는 한나라 말기에 구려에 예속되었다고 밝히면서 예가 한때는 한나라 영토였다는 사실을 주장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이는 정시 6년에 유무와 궁준이 공격한 예는 고구려에 복속된 예로, 발해만 연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진수는 한반도 동쪽의 예와 발해만 연안의 예를 동일한 국가로 취급하여 양쪽을 모두 낙랑군에 속한 땅으로 인식시키려 했던 것이다.

 

발해만 연안의 예국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의 예 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원삭(서기전 128~123년) 원년에 예의 임금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여 28만 구(口)를 이끌고 요동에 찿아들어 내지에 복속하니,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가 몇 년 뒤에 파하였다.'

 

이 기록에서는 분명히 예족이 대거 요동으로 이동하여 찿아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수는 무려 28만 구이다. 1구는 1가구 또는  장정 1인을 의미하므로 그 수는 약 1백만에 이른다. 따라서 서기전 128년에 예족 약 1백만이 요동에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인구가 1백만이라면 대단한 숫자이다. 고구려가 한창 번창하였을 때 병력 규모가 약 20만에도 미치지 못하였고, 백제가 고구려 공격에 동원한 총병력이 불과 3만이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1백만이 당시 얼마나 많은 인구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요동으로 찿아든 1백만 인구는 원래 부여 지역에 거주했다가 위씨 왕조에 불만을 품고 대거 한나라로 망명한 것으로 보이야 한다. <후한서>의 '부여는 원래 예의 땅이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말하자면 부여 지역은 원래 예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 무렵 위씨 조선과 대대적인 세력 다툼을 벌이다가 패배하자 대거 남하하여 요동에 터전을 잡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이 낙랑군을 설치한 예국은 바로 서기전 128년에 남려의 영도 아래 요수(난하) 동쪽 지역으로 이동하여 터전을 잡은 사람들이 세운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며, 위나라가 245년에 낙랑 태수 유무와 대방 태수 궁준으로 하여금 공격토록 한 예국 역시 바로 이 나라를 의미한다.

 

때문에 한반도 동쪽에 형성된 동예는 낙랑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국가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들이 발해만 지역의 예족과 같은 부족이며, 또한 낙랑이라는 같은 명칭으로 불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일명 동예로 불리던 한반도의 예족들은 왜 낙랑이라고 불리었을까? 그것은 한무제 시대에 설치한 낙랑이 원래 이름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있던 이름이었다는 점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마한 편에서 인용한 <논어정의>의 다음 기록이 그 점을 말해주고 있다.

 

'(동방의)구이(九夷)는 첯째가 현도, 둘째가 낙랑, 셋째가 고려, 넷째가 만식, 다섯째가 부유, 여섯째가 소가, 일곱째가 동도, 여덟째가 왜인, 아홉째가 천비이다.'

 

이 기록을 보면 현도와 낙랑 등이 부족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현도와 낙랑이 단순히 한의 무제가 설치한 4군의 명칭이 아니라 4군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부족 명칭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에는 낙랑또는 낙랑족이라고 불리는 부족이 바로 예족이며 예족이 머무르던 곳은 모두 낙랑으로 불리었다는 점이며 그들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폭 넓게 분포하여 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이 점을 이용하여 한반도의 낙랑에도 한 무제가 낙랑군을 설치하였다는 것으로 왜곡 기술을 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진수의 의도적인 왜곡으로 지금까지 한반도 평안도 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한 것으로 오해하여 왔던 것이다.

 

일명 동예로 불리던 한반도 예국은 한동안 백제.신라 등과 패권을 다투다가 서기 50년대 중반에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남하하여 동옥저 등의 한반도 북부세력을 멸망시킬 때 함께 몰락한 듯하다. 

 

 

말갈

백제와 말갈의 관계는 백제 건국 초기인 서기전 17년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는 백제가 마한의 배려로 한반도의 한강 이북에 터를 잡기 시작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말갈의 존재는 백제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요소였다.

 

말갈이 백제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는 것은 온조 2년(사기전 17년) 정월에 온조가 군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통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말갈이 우리의 북부 국경과 접하고 있는데, 그들은 용맹스럽고 거짓말에도 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기를 수선하고 식량을 비축하여, 그들을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말갈은 이처럼 위협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당시까지 말갈은 여러 부족 단위로 갈라져 그 때까지 한 번도 통일된 국가를 이룬 적은 없었다.

 

말갈은 총 7부족으로 갈라져 있었으며 읍락마다 추장을 중심으로 자치 구조를 이루고 있었고 그 7부족은 속말부, 백돌부, 안치골부, 불열부, 호실부,흑수부, 백산부 등이었는데 당시 백제를 위협하던 부족은 백산부였다. 백산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족은 한반도 바깥에 있었으며 주로 흑룡강, 송화강, 우수리강 유역에 퍼져 있었다. 그러다 고구려가 팽창함에 따라 점차 송화강에 머물던 세력은 흑룡강과 한반도 쪽으로 밀려왔다. 이 덕분에 압록강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백산부의 말갈이 커져 한반도의 마한과 낙랑국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백제가 한반도로 찿아든 것은 이 무렵이었다. 백제가 마한 왕에게 땅을 요구하자 마한 왕은 선뜻 북쪽의 땅을 내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말갈의 세력이 강화되고 있던 중이라 말갈을 막기 위함이었다. 말하자면 백제를 말갈을 막기 위한 방패막이로 이용하려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백제와 말갈은 향후 수백 년간 치열한 패권다툼을 벌이게 된다. 말갈은 때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공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구려를 대신하여 대리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백제와 말갈의 싸움은 4세기 말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396년에 광개토왕이 한반도 북부를 장악하면서 백산 말갈은 대부분 고구려에 복속되고, 일부는 두만강 너머로 이주하여 흑수 말갈에 편입됨으로써 말갈세력은 한반도에서 점차 세력을 잃는다.

 

 

마한

마한은 백제가 한반도에 정착하는 데 결정적으로 계기를 마련해준 나라이다. 온조 세력이 망명해 왔을 때 당시 한반도는 북쪽의 말갈과 동옥저, 낙랑국(동예) 등이 있었고, 중부 이남에는 마한, 진한과 서라벌, 변한 등이 있었다.

 

마한, 진한, 변한 등은 흔히 삼한이라는 이름으로 대등한 관계에 놓인 국가들로 인식되고 있지만 세 나라의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들은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삼한'으로 묶이는 이들 나라에는 78개 소국이 있었는데, 그 중 54국은 마한에 속하고, 12국은 진한, 12국은 변한에 속했다. 그러나 진한 12국의 왕은 모두 마한 사람이었으며, 마한 왕이 그들을 임명하였다. 따라서 마한이 실제 소유한 소국은 총 66국으로 명실공히 한반도 종주국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한반도의 종주국인 마한의 배려로 한반도에 정착한다.  마한 왕은 북쪽 변경 지역 100리를 온조에게 내주었다. 그래서 마한 왕의 의도대로 백제는 충실히 방패막이를 해주었고 마한은 백제로부터 감사와 고마움의 은인으로 남게 되었다.

 

마한은 그 무렵 조금씩 국력이 약해지고 있었는데, 이는 진한과 변한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당시 진한에는 서라벌(신라)의 세력이 강화되어 점차 주변 소국들을 장악하여 통일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비해 마한은 여전히 54개의 소국들로 분리된 채 중악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북방에서는 낙랑과 말갈의 힘이 점차 강대해지고 있었다. 이에 마한 왕은 마침 백제 유민들이 땅을 요구하자 그들을 북쪽 변경에 유치하여 말갈세력에 대한 방패막이로 이용하려 하였다.

 

마한은 그 무렵 조금식 국력이 약해지고 있었는데, 이는 진한과 변한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당시 진한에서는 서라벌 세력이 강성하여 점차 주변 소국을 장악하여 통일국가를 이루고 있었고 이에 비해 마한은 여전히 54개 소국들로 분리된 채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북방에서는 말갈과 낙랑의 힘이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마한은 백제의 망명세력을 변경에 유치하여 그들의 남하를 저지하고 한편으로는 서라벌과 가야를 견제하려 하였다.

 

마한의 이같은 의도는 적중하였지만, 말갈과 투쟁에서 백제가 점차 힘이 강성해짐에 따라 오히려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백제는 처음부터 통일된 하나의 왕국으로 건국되었기 때문에 급속도로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이루었고, 이에 따라 마한의 소국들이 순식간에 백제에 의해 점차 침흡수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서기 8년 10월에 백제는 마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마한 왕조를 무너뜨렸다. 이에 마한 왕조는 백제에게 땅을 내주고 북쪽의 고구려에 의탁하여 그 곳 귀족으로 흡수된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6대 태조 69년(서기 121년) 기사에 고구려 왕이 마한과 예맥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한의 현도성을 포위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백제의 온조에게 쫒겨 달아난 마한 왕실이 고구려에 의탁해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 때문에 최치원 같은 인물은 고구려의 전신이 마한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마한의 몰락은 소국연합체의 몰락을 의미하며, 동시에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등장을 의미한다. 당시 삼한은 모두 소국연합체적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대륙에서 이주해온 백제, 신라,가야  등의 세력은 중앙집권적 통치제제를 성립시켰다. 그리고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는 급속도로 소국연합체를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한반도에서 삼한시대를 종식시켰던 것이다. 이 같은 소국연합체 시대의 몰락은 100여 개국으로 분립해 있던 일본열도에서도 재현되었는데, 가야와 백제가 그 주도적인 연활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