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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2 : 백제의 역사 8 (제4대 개루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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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2 : 백제의 역사 8 (제4대 개루왕)

두바퀴인생 2010. 11. 6. 03:42

 

 

 

 

 

 

한국의 역사 62 : 백제의 역사 8 (제4대 개루왕)

 

 
제4대 개루왕

 

개루왕(? ~166년, 재위 : 128년~166년)은 백제의 제4대 왕이다. 기루왕의 아들로 성격이 공손하고 품행이 방정하였다고 한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생애

132년 봄 2월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

 

 155년에는 당시 신라 사람 아찬 길선이 반란을 일으켜 백제로 망명하게 되었는데, 개루왕은 도망친 길선을 정성껏 대접하여 결국 망명을 허가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서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서는 "개루왕이 나라를 배신할 지도 모르는 길선을 데리고 왔으니 왕이 매우 어리석다." 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길선이 망명한 것에 대해서 신라 정부에서는 백제와 대립하려는 세력이 늘어갔으며, 마침내 신라군이 백제의 국경을 침략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

 

 

 

 

 

 

제4대 개루왕 실록

(?~서기 166년, 재위:서기 128년 11월~서기 166년 모월, 약 38년)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딛고 왕위에 오른 개루왕

개루(蓋婁)왕은 기루왕의 아들이며, 촐생 연도와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서기 128년 11월에 기루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위 계승 과정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가 기루왕의 장남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기루왕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것으로 보아 정실이 아닌 후실 소생, 즉 서자일 것이다.

 

서자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기루왕의 자식들 간에 왕위계승전쟁이 있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하는데, '한강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났다.'는 기루왕 21년의 기사가 바로 이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기루왕이 개루왕에게 왕위를 물려 준 사실을 감안할 때, 개루왕은 기루왕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즉, 늙은 기루왕이 자신의 장남이나 적자를 후계자로 삼지 않고, 후실 태생인 개루왕을 후계로 삼자, 장남을 위시한 적자들이 정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와 유사한 예는 후백제의 역사에서도 찿아볼 수 있다. 후백제의 왕 견훤은 적장자 신검을 못마땅하게 여겨 후실 태생인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는데, 이 때문에 신검과 그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감금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던 것이다.  신검은 왕위 찬탈에 성공하였지만, 하지만 기루왕의 적자들은 후계자로 지목된 개루왕을 비롯한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실패하였다. 때문에 백제 도성은 둘로 갈라져 전쟁을 벌이는 상황으로 치달았고, 그런 기간은 기루왕 27년 '왕이 한산에서 신록을 잡았다.'라는 기사가 나올 때까지 약 6년 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결과는 적장자 쪽의 패배였다.

 

왕자들 간의 이러한 왕위 다툼은 신라와의 외교 관계에도 큰 영향을 끼친 듯 하다. 개루왕 38년 1월 신라의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주해오자, 신라는 소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개루왕은 길선을 신라에 보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라의 아달라 이사금이 분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하였고 신라군은 결국 스스로 물러갔다. 이 사건은 양국간의 관계를 악화시키게 된다.

 

백제는 기루왕 29년에 화친을 제의한 이후 신라와 평화를 유지하였는데, 사신을 주고 받거나 원군을 보내거나 도움을 주기까지 하는 등 대단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분위기가 기루왕대까지 유지되었으나 개루왕이 즉위한 이후에는 양국이 사신을 주고 받은 기록이 없다. 그기다 아찬 길선이 백제로 도주해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찬 길선은 백제가 자신을 받아줄 것으로 확신한 것으로 양국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개루왕이 즉위하면서 신라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무슨 이유이며 혹시 신라쪽에서 개루왕의 즉위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않았을까?

 

당시 양국은 상호 군사동맹 관계에 있었고 백제의 내분에 신라가 어떤 방식으로던지 입장 표명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신라가 개루왕의 즉위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신라가 개루왕을 지지하지 않은 것은 적자도 아닌 서자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명분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개루왕은 서기 128년 11월에 즉위하여 166년까지 약 38년간 재위하였지만, <삼국사기>에는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는 성격이 공손하고 품행이 방정했다.' 는 극히 형식적인 인물평만 남아 있을 뿐, 구체적인 행적에 대해선 사냥을 했다는 기록밖에 없다. 그의 업적에 관한 기록 중 유일한 것은 재위 5년(서기 132년)에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내용뿐이다.

 

개루왕이 쌓은 북한산성은 토성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북한리 산성에 그 일부 성곽과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성은 말갈의 침입을 막고 도성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북한산성은 이처럼 처음엔 방어적인 목적으로 축성되었지만, 백제가 전성기를 맞이하는 근초고왕 대에 이르면 북진 정책의 교두보로 활용되었다. 때문에 백제의 운명은 이 북한산성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