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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6 : 백제의 역사 12 (제8대 고이왕 1) 본문
한국의 역사 66 : 백제의 역사 12 (제8대 고이왕 1)
고이왕(古爾王, ? ~286년, 재위 : 234년~286년)은 백제의 제8대 왕이다. 《신찬성씨록》에는 구이(久爾) 또는 고모(古慕)로 표기되어 있다. 고이왕은 즉위 후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권 강화에 주력하여 고대국가로서의 백제의 기반을 다져놓은 인물이었다. 집권력의 강화를 위하여 좌장(左將)을 설치하여 내외 병마권을 관장하게 함으로써 족장들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기원전 18년 ~ 660년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생애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초고왕의 동생으로 구수왕이 죽은 뒤 종손이자 구수왕의 장자인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어려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자,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기간 중 괴곡(槐谷: 충청북도 괴산군)·봉산(烽山: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다. 내정면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 제도와 복식 제도를 제정했으며, 그것은 고이왕이 죽은 뒤에도 지속되어 그 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4백 년간이나 이어져 백제의 기본 제도로 유지되었다.
재위 27년(260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여섯 개의 좌평(佐平)을 두고, 그들에게 왕명 출납과 창고 관리, 의례 제정, 형벌 제도, 군사 업무를 각각 분담시켜 맡아보게 했다. (자세한 것은 좌평(佐平) 참조.) 또한 16품의 관등 체계를 정비했으며, 관직의 위계에 따라 자주색[紫色], 다홍색[緋色], 푸른색[靑色] 옷을 입게 하는 등 품계에 따른 왕과 귀족의 공복에 관한 제도도 정했다. 이러한 지배체제의 정비를 통해 왕권의 강화를 이루어냈고, 그 성장한 힘을 바탕으로 대외 팽창을 시도하여, 낙랑과 신라 그리고 말갈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며 세력을 키워 갔다.
또한 중국 대륙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강원도 북부에 자리잡은 말갈(동예라고 불리는)족이 자주 침범해 왔는데, 고이왕대에는 말갈과 우호관계가 조성되었다.
재위 13년(246년) 위나라가 낙랑군(樂浪軍)과 삭방(朔方)과 합공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徵出)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려 기강을 바로잡았고,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평가
한강 유역의 여러 부족 사회를 보다 큰 연맹체로 결속하는 데 중심 역할을 담당하여 백제를 고대 왕국으로 성장케 하였다.
가계
고이왕의 이름은, 먼저 《주서(周書)》 및 《수서(隋書)》의 백제전에 백제의 시조라 기록된 '구태(仇台)'라는 이름을 ‘구이’로 읽어 이것은 ‘고이’와 음운상으로 통한다고 보아 ‘구이=고이’로 해석함으로써 고이왕을 백제 고대국가의 실질적 건국자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고이왕을 “초고왕모제(肖古王母弟)”라고 한 것을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하여,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優台) - 비류계(沸流系)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천관우(千寬宇)는 백제왕계를 "우태(優台)-비류(沸流)-고이계(古爾系)"와 "주몽(朱蒙)-온조(溫祚)-초고계(肖古系)"로 보았다.
고이왕은 대방군의 왕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중국 군현과의 관계를 긴밀히 유지 하였다.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 왕호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1 | 온조왕(溫祚王) | 온조(溫祚) |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 |
2 | 다루왕(多婁王) | 다루(多婁) | 기원후 28년 ~ 77년 | 온조왕의 아들. | |
3 | 기루왕(己婁王) | 기루(己婁) | 77년 ~ 128년 | 다루왕의 아들. | |
4 | 개루왕(蓋婁王) | 개루(蓋婁) | 128년 ~ 166년 | 기루왕의 아들. | |
5 | 초고왕(肖古王) | 초고(肖古) | 166년 ~ 214년 |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 |
6 | 구수왕(仇首王) | 구수(仇首) | 214년 ~ 234년 |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 |
7 | 사반왕(沙伴王) | 사반(沙伴) | 234년 |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 |
8 | 고이왕(古爾王) |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 234년 ~ 286년 | 개루왕의 차남. | |
9 | 책계왕(責稽王) | 책계(責稽) | 286년 ~ 298년 |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 |
10 | 분서왕(汾西王) | 분서(汾西) | 298년 ~ 304년 | 책계왕의 아들. | |
11 | 비류왕(比流王) | 비류(比流) | 304년 ~ 344년 | 구수왕의 차남. | |
12 | 계왕(契王) | 계(契) | 344년 ~ 346년 | 분서왕의 아들. | |
13 | 근초고왕(近肖古王) | 초고(肖古), 여구(餘句) | 346년 ~ 375년 |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 |
14 | 근구수왕(近仇首王) | 구수(仇首), 수(須) | 375년 ~ 384년 | 근초고왕의 아들. | |
15 | 침류왕(枕流王) | 침류(枕流) | 384년 ~ 385년 | 근구수왕의 장남. | |
16 | 진사왕(辰斯王) | 진사(辰斯) | 385년 ~ 392년 | 근구수왕의 차남. | |
17 | 아신왕(阿莘王) | 아신(阿莘) | 392년 ~ 405년 | 침류왕의 아들. | |
18 | 전지왕(腆支王) |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 405년 ~ 420년 | 아신왕의 아들. | |
19 | 구이신왕(久爾辛王) | 구이신(久爾辛) | 420년 ~ 427년 | 전지왕의 아들. | |
20 | 비유왕(毗有王) | 비유(毗有), 여비(餘毗) | 427년 ~ 455년 | 구이신왕의 아들. | |
21 | 개로왕(蓋鹵王) | 경사(慶司), 여경(餘慶) | 455년 ~ 475년 |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 |
22 | 문주왕(文周王) | 모도(牟都), 여도(餘都) | 475년 ~ 477년 |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 |
23 | 삼근왕(三斤王) | 삼근(三斤) | 477년 ~ 479년 | 문주왕의 아들. | |
24 | 동성왕(東城王) | 동성왕 |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 479년 ~ 501년 |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
25 | 무령왕(武寧王) | 무령왕 | 사마(斯麻), 여융(餘隆) | 501년 ~ 523년 |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
26 | 성왕(聖王) | 성왕 | 명농(明襛) | 523년 ~ 554년 | 무령왕의 아들. |
27 | 위덕왕(威德王) | 위덕왕 | 창(昌) | 554년 ~ 598년 | 성왕의 장남. |
28 | 혜왕(惠王) | 혜왕 | 계(季) | 598년 ~ 599년 | 성왕의 차남. |
29 | 법왕(法王) | 법왕 | 선(宣), 효순(孝順) | 599년 ~ 600년 | 혜왕의 아들. |
30 | 무왕(武王) | 무왕 | 장(璋), 서동 | 600년 ~ 641년 |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
31 | 의자왕(義慈王) | 의자 | 641년 ~ 660년 | 무왕의 아들. |
제8대 고이왕 실록
(?~서기 286년, 재위:서기 234년 모월~ 286년 11월, 약 52년)
고이왕의 왕위 찬탈과 왕실의 분란
사반(沙半)왕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고이왕에 대해 <삼국사기>는 개루왕의 돌째 아들이자, 초고왕의 동복 아우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 개루왕은 서기 166년에 죽었고, 그 뒤로 초고왕이 48년, 구수왕이 20년을 재위했다. 설사 개루왕이 죽은 해에 고이왕이 태어났다고 해도 그는 즉위 당시 이미 68세의 노인이어야 한다. 하지만 고이왕은 무려 52년이나 왕위에 있었다. 즉 고이왕이 개루왕의 아들이라면 최소한 120세를 살았다는 것인데, 이는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그가 개루왕의 아들이자 초고왕의 동복 아우라는 기록은 조작되엇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가 개루왕의 아들일 수 없는 증거는 또 있다. 고이왕이 재위 9년(서기 242년) 4월에 '숙부인 질을 우보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숙부라면 개루왕의 동생이라는 뜻이다. 개루왕의 동생이라면 기루왕의 아들이라는 것인데, 기루왕은 서기 128년에 죽었다. 만약 그때 질이 태어났다면 우보에 오르는 242년에는 나이가 무려 114세나 된다. 이것 또한 용납하기 힘든 내용이다.
게다가 고이왕 27년(서기 260년)에는 '왕의 아우 우수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대로라면 우수 역시 개로왕의 아들이어야 한다. 이 역시 신뢰하기 힘든 내용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고이왕은 누구의 혈통이며, 왜 개루왕의 아들이라고 했을까?
고이왕이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된 것은 고이왕이 개루왕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즉, 고이왕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은 아니지만, 개루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이왕은 개루왕의 혈통이라는 것만으로는 왕위를 차지할 명분이 서지 않는다고 보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덧붙인 것이 초고왕의 동복 아우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초고왕이 개루왕의 장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초고왕이 개루왕의 장남이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물리적으로도 초고왕이 개루와의 장남일 수 없다. <삼국사기>는 장남으로 왕위에 오른 왕에 대해서는 반드시 장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초고왕에 대해서는 그저 개루왕의 아들이라고만 쓰고 있다. 이는 초고왕이 개루왕의 장남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초고왕의 동복 아우는 결코 개루왕의 차남이 될 수 없다. 즉, 개루왕의 차남과 초고왕의 동복 아우는 같은 인물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고이왕의 혈통이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고이왕은 왜 혈통을 조작해야만 했을까? 혈통이란 바로 명분이다. 힘으로 사반왕을 내쫓긴 했는데, 그 명분을 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적당한 혈통을 끌어다 붙인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며, 초고왕의 동복 아우라고 우기며 왕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고이왕이 비록 혈통을 끌어다 붙이긴 했지만, 그것이 먹혀들었다는 것은 그 주장이 상당 부분이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가정 아래 추론해 보면, 그는 개루왕의 혈통이긴 하나 적출이 아닌 서출 계통, 즉 직계가 아닌 방계일 것이다. 초고왕의 동복 아우라는 내용을 덧붙인 것도 그런 사실을 감추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초고왕은 비록 장자는 아니지만 개루왕의 직계이고, 따라서 초고왕의 동복 아우라는 주장은 자신이 직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고이왕과 반정세력이 혈통을 조작하면서까지 직계라고 우긴 것은 사반왕이 방계라는 사실 때문인 듯하다. 방계의 사반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보다 직계인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명분에 맞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억지로 자신을 초고왕의 동복 아우라고 우겼다는 뜻이다. 그러나 후에 고이왕계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비류왕은 아들 근초고왕이 초고왕의 적통임을 자처하고,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이 또한 구수왕의 적통임을 내세운 것을 보면, 고이왕은 구수왕의 직계도, 초고왕의 동복 아우도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의 혈통 조작은 사반왕을 쫓아내고 난 뒤에 신하들과 백성들을 무마하기 위해 행한 책략의 하나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고이왕의 왕위 찬탈은 향후 백제 왕실 내부 분란을 일으키는 불씨가 된다. 고이왕 이후 그의 직게인 책계왕(제9대)과 분서왕(제10대)으로 이어지지만, 분서왕이 낙랑의 자객에게 목숨을 잃자, 평민으로 살고 있던 비류왕(제11대)이 구수왕의 둘째 아들을 자처하며 왕위를 차지하고, 다시 분서왕의 아들인 계왕(제12대)이 왕위를 되찿았다가 불과 2년 만에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에게 목숨을 내주고 왕위를 빼았기는 왕위쟁탈전이 이어졌던 것이다.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 초고왕의 2세라는 뜻의 '근초고'라는 묘호를 받은 것이나, 근초고왕의 아들이 구수왕 2세라는 뜻의 '근구수'라는 묘호를 받은 것도 모두 이 사건에서 기인한 것이다.
고이왕의 대륙 진출과 백제의 위상 정립
고이왕은 개루왕의 방계 후손이며, 이름과 출생 관련 기사는 남아있지 않다. 234년에 구수왕이 죽고 어린 사반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이 52년이나 되는 점을 미루어 볼 때, 고이왕은 즉위 당시 혈기 왕성한 20대 청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재위 3년(236년)에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여 직접 40마리의 사슴을 잡았다는 기사와 재위 7년에 군대를 사열하는 중에 냇가에서 오리 한 쌍이 날아가는 것을 직접 활로 쏘아서 모두 적중시켰다는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무예가 출중하였고 호방한 성격이었다. 이런 성품은 그의 치세 가운데도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특히 중국 대륙에 진출하는 과감한 면모는 백제의 세력 팽창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당시 중국은 위,촉.오 삼국이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런 난세를 이용하여 고구려는 위의 요서 지역을 공략하여 영토를 확대하고 있었다. 고이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륙 진출의 꿈을 꾸게 된다.
재위 13년(246년) 8월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낙랑 태수 유무와 대방 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 공략에 나서자, 대륙 진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고이왕은 좌장 진충에게 군사를 주어 산동반도의 바닷가를 습격, 낙랑의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온다. 이에 낙랑 태수 유무가 분개하자, 고이왕은 포로들을 돌려주고 유무를 다독였다.
하지만 낙랑과 백제는 외교적인 문제로 극한 상황을 치닫는다. 당시 위나라의 부종사로 있던 오림이라는 인물이 낙랑이 본래 한나라가 통치하였다고 말하면서 진한의 여덟 나라에 대한 권리를 낙랑에 이양했다. 낙랑은 오림의 말을 빌미로 마한 땅을 장악한 백제에 그 권리를 주장한다. 그 말을 듣고 고이왕은 분개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략하였고, 그 과정에서 대방 태수 궁준이 전사하였다.
궁준의 전사로 한동안 백제와 대방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지만, 후에 서로 결혼 동맹을 맺는 것으로 화해했으며, 백제는 대방에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대륙백제 건설의 터전으로 삼는다.
한편, 고이왕은 신라와의 대적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재위 7년(240년)에는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고, 22년(255년) 9월에는 신라군과 괴곡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고, 신라 일벌찬 익종을 죽였다. 그해 10월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이렇듯 신라에 대해 강경책으로 일관하던 고이왕은 28년(261년) 3월에는 뜻밖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다. 이 때 고이왕은 화친을 요청한 것은 대륙 정책을 가속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라는 그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자 고이왕은 33년 8월에 신라의 봉산성을 공략한다.그러나 봉산성 성주 직선의 반격을 받아 패퇴하였다. 그 뒤로도 고이왕은 39년 11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였고, 45년 10월에는 신라의 괴곡성을 포위하였으나, 신라의 피진찬 정원의 군사에 밀려 괴곡성 함락에 실패하였다. 50년 9월에도 군대를 보내 신라 변경을 공략하였고, 10월에는 괴곡성을 다시 포위하였으나 신라의 일길찬 양질에게 밀려 실패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를 공략하였지만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하자, 고이왕은 53년 정월에 다시 한 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이 때 고이왕은 칠십대의 고령이었고, 그 해 11월에 죽은 것으로 봐서 이미 와병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신라는 미추 이사금이 죽고 유례 이사금이 새롭게 왕위에 올라 있었기에 신라도 백제와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또한 왜의 대대적인 침입이 예상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유례 이사금은 고이왕이 회친제의를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다. 회친을 받아들였다는 기사는 없지만, 그 뒤로 수십 년간 백제, 신라 양국의 전쟁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화친에 응한 것이 분명하다. 유례 이사금 12년에 왜국의 침입이 빈번하자, 왕이 신하들에게 "내가 백제와 함께 계획을 세워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라고 묻는데, 이 또한 화친에 응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고이왕 대외 외교 관계는 이렇듯 강온 전략이 함께 구사되었고, 특이하게도 그간 적대 관계에 있던 말갈과는 평화를 유지했다. 재위 25년 봄에 말갈의 추장 나갈이 고이왕에게 좋은 말 열 필을 바쳤고 왕이 그 사자를 유대하여 돌려보냈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는 말갈이 백제에 화친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해석된다. 말갈이 백제에 회친을 제의한 것은 백제의 힘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의미이며, 고이왕 이후 말갈과 백제의 전쟁 기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평화 관계가 지속되었다는 뜻이다.
고이왕이 외교적 업적 중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대방 태수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한 일이다. 책계왕 원년(286년) 기사에 책계왕이 즉위 이전에 대방 왕의 딸 보과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고이왕 대에 대방 태수의 딸이 백제 태자비가 되어 시집왔다는 뜻이다.
247년에 대방 태수 궁준을 죽였는데, 그 집안에서 며느리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대방과 화해했음을 의미하는 한편, 대방 태수가 백제에 딸을 보냈다는 것은 대방이 백제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고이왕 대에 중국 산동 지방에 자리한 대방 땅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곧 대륙 백제의 터전이 고이왕 대에 마련되었음을 증명한다. 책계왕 원년에 고구려가 대방 땅을 침략하자, 백제가 병사를 보내 고구려를 내쫓은 것도 백제가 대방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고이왕의 업적은 외교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27년(2690년) 정월에 장관격인 6좌평제도를 도입하고, 관등을 16품계로 나누어 대대적인 행정 개혁을 실시하여 조정의 조직을 혁신하였다. 비서기관에 해당하는 내신좌평은 왕명을 출납을 맡았고, 경제기관에 해당하는 내두좌평은 물자와 창고를, 법무기관에 해당하는 내법좌평은 예법과 의식을,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하는 위사좌평은 숙위 병사에 관한 일을, 사법기관에 해당하는 조정좌평은 형벌과 송사를, 국방기관에 해당하는 병관좌평은 지방의 군사를 맡게 하였다. 또 각 관리에겐 품계를 내렸는데, 좌평은 모두 1품, 그, 아래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었다.
또 6품 이상은 자주빛 옷을 입고 은꽃으로 장식하고, 11품 이상은 붉은 옷을 입었으며,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게 했다. 고이왕 자신은 자줏빛으로 된 큰 소매가 달린 도포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을 쓰며, 흰 가죽 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신을 신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6조평과 관복을 그대로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시행령을 공포한 지 한 달 뒤인 그해 2월이었으며, 좌평에 처음으로 지명된 사람은 자신의 아우 우수였다. 그는 비서실장 격인 내신좌평에 임명되었으며, 다른 좌평은 이듬해 2월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 임명된 인물로는 내두좌평에 진가, 내법좌평에는 우두, 위사좌평에는 고수, 조정좌평에는 곤노, 병관좌평에는 유기였다. 우두는 우수와 같은 항렬인 것으로 봐서 이 때 임명된 좌평들은 대부분 고이왕 혈족들이엇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고이와은 좌평제도를 확립하면서 철저하게 혈통을 중심으로 한 측근 정치를 했다는 뜻이다.
재위 29년 정월에는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적질을 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 세 배를 배상하며, 종신 금고형에 처한다는 강력한 법을 만들어 관리의 기강을 확립했다.
그는 경제 정책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재위 9년 2월에 남쪽 지방의 소택지를 개간하여 논을 만들도록 했다. 소택지란 늪지로 그 곳을 메워 논을 만들었다는 것은 일종의 간척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소택지는 주인이 없이 버려진 땅인데, 이를 백성들을 동원하여 논으로 개간토록 한 것은 국유 농지 확보를 통해 국고를 늘리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택지 개간 사업 덕분인지 알 수 없으나 고이왕 당시 백제 국고는 매우 견실했던 게 분명하다. 15년 봄과 여름에 걸쳐 가믐이 들었고, 이 때문에 백성들이 굶주리자, 고이왕은 국고를 풀어 백성을 구제하고, 그들에게 1년간의 조세를 면제시켰다. 국고를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들에게 1년간의 조세까지 면제시켰다는 것은 그만큼 국고가 견실했다는 의미다.
286년 11월에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52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왕위를 유지한 고이왕은 국가 전반에 걸쳐 획기적인 발전을 도모함으로써 백제의 국가 위상을 높이고, 대륙 진출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국가 기강을 확립한 왕이었다.
그의 가족과 능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으며, 아들 책계왕이 장남이 아닌 것으로 봐서 여러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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