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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0 : 백제의 역사 36 (제26대 성왕 1) 본문
한국의 역사 90 : 백제의 역사 36 (제26대 성왕 1)
성왕(聖王, ? ~ 554년, 재위:523년 ~ 554년 음력 12월)은 백제의 제26대 군주이며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명농(明襛)이며 성명왕으로도 불린다. 무령왕의 아들이다.
기원전 18년 ~ 66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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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 |
공용어 | 고대 한국어 |
수도 |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
정치체제 | 군주제 |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
76만호(3,800,000명 추정) |
성립 | 기원전 18년 |
멸망 | 660년 |
초대 군주 |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
최후 군주 | 의자왕 641년 ~ 660년 |
성립 이전 | 마한, 부여 |
해체 이후 | 신라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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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성왕의 생애는 이러하다.
523년 음력 5월에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그해 음력 8월 패수(浿水)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知忠)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다.
524년 양(梁)나라 고조(高祖)와 국교를 강화하여 양 고조로부터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에 임명되었다.
529년 음력 10월 고구려 안장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에 있는 혈성이 함락되었다. 성왕은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을 이끌고 싸우게 했지만 오곡원(五谷原)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자가 2천여 명이나 되었다.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뒤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538년 봄에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불교를 진흥했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여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다.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했다.
553년 음력 7월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신라에 빼앗겼다.
음력 10월에 왕녀를 신라의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다.
554년 일본에서 병사를 모으는 한편, 왕자 부여창(扶餘昌:27대 위덕왕威德王)과 함께 친히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그 해에 신라의 복병에게 살해당했다.
사비 천도
임나 재건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은 재위 19년에 해당하는 서기 541년부터 가야 제국과 신라, 왜국까지 끌어들인, '임나 재건'이라는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삼서의 하나인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참조한 《일본서기》의 '임나 재건'의 개요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 541년 여름 4월, 성왕은 안라국과 가라, 졸마국, 산반계국, 다라국, 사이기국, 자타국 등 임나 소국의 한기(旱岐)들과 일본부의 기비노오미(吉備臣)를 불러 처음으로 '천황이 조(詔)한 바의 임나 재건'의 안건을 제기하며,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들을 것인지 듣지 말 것인지를 묻겠다는 발언을 하다. 가을 7월에 안라와 일본부가 성왕의 발언과 계획을 신라와 누설한 것에 대해, 안라국과 일본부의 가와치노 아타이(河內直)에게 계획 누설에 대한 책임을 묻다. 따로 신라로부터 소환한 임나의 집사에게는 '신라에게 빼앗긴 남가라와 훼기탄을 빼앗아 예전처럼 임나에 옮긴다'는 발언과 함께 '신라에게 속지 말라'는 당부를 가야와 왜의 관리들에게 똑같이 통보하다.
서기 543년 겨울 11월, 츠마모리노 무라지(津守連)가 백제에 와서 '임나를 재건하라'는 천황의 조칙과 함께, '임나의 변한에 있는 백제의 군령과 성주를 일본부에 귀속시키겠다'고 발언하다. 이에 백제가 반발하다. 겨울 12월, 백제에서 '가와치노 아타이와 이나사, 마도를 일본으로 송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다. 따로 시덕(施德) 고분(高分)을 시켜 임라집사와 일본부집사를 소환했으나 이들은 '정월 초하루를 쇠고 난 뒤에 가겠다'며 성왕의 소환을 거절하다. 서기 544년 정월, 백제에서 또다시 임라집사와 일본부집사를 소환했으나 이들은 '제사가 끝나면 간다'는 말과 함께 다시 한번 소환 요청을 거절하다. 이후 다시 소환 요청이 있었으나 책임자가 오지 않고 말단 관리가 오는 바람에 무산되다.
2월, 왜국에서 온 츠마모리노 무라지를 백제에 잡아두고, 일본부와 임나에 '천황의 조(詔)를 들으라'며 다시 한번 요인들을 소환하다. 또한 가와치노 아타이를 불러 '너희들을 그 전에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통보하다. 이때 임나에서는 '일본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부에서는 천황이 '신라에 가서 조칙을 얻어 들어라'고만 했고 백제에 가서 조칙을 얻어들으라는 말은 없었다는 말로 백제에 변명하다. 츠마모리노 무라치는 '임나를 재건하라'는 천황의 말을 백제에만 통보하고 임나나 일본부에는 얘기해주지 않은 것이다. 3월 10일, 백제에서 왜국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츠마모리노 무라지를 돌려보내고, 아현이나사와 좌로마도가 일본부의 관리들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며 이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천황에게 요청하다. 겨울 10월, 백제 사신이 귀국하였으나 송환을 요청한 가와치노 아타이, 아현이나사, 좌로마도 세 사람에 대해서는 천황으로부터 어떠한 말도 듣지 못하다.
겨울 11월, 일본부의 기비노오미와 안라, 가라, 사이기국, 산반계국, 다라국의 군주와 신하들이 성왕의 소환요구에 따라 백제에 도착하다. 이 자리에서 성왕은 '임나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 세 가지를 내놓다.
1. 신라와 안라의 접경에 있는 큰 강을 따라 여섯 개의 성을 쌓고 왜병 3천을 나누어 백제군과 함께 주둔시킨다. (병사의 의복과 식량은 모두 백제에서 부담) 2. 남한의 요충지마다 백제의 군령과 성주를 두어 고려를 막고 신라가 차지하지 못하게 지키면서 임나를 보존한다. 3. 기비노오미와 가와치노 아타이, 아현이나사와 좌로마도를 일본으로 송환한다.
545년 가을 9월에 중부호덕 보제 등을 임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일본부의 관료와 임나의 한기들에게 오(吳)에서 얻은 보물을 나눠주다. 548년 봄 정월 9일에 고구려와 예의 군사가 백제의 마진성(馬津城)을 포위하다. 이 과정에서 사로잡은 고려인 포로로부터 '안라와 일본부로부터 요청을 받고 백제를 치러 왔다'는 정보를 접하고 사실 확인을 위해서 안라국과 일본부에 사신을 보내 소환했으나 세 번 모두 거절하다. 여름 4월, 중부한솔(中部韓率) 약엽례(掠燁禮)를 시켜 천황에게 이 사실을 고했으나 천황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며 의아해하다. 아울러 왜국에 요청했던 구원군도 잠시 미뤄줄 것을 백제에서 요청해오다. 겨울 10월, 왜국에서 370명을 보내어 백제가 득이신에 성을 쌓는 것을 돕다.
549년 여름 6월, 왜국에서 이나사와 마도가 몰래 고구려에 사신을 보낸 것에 대해서 천황이 나서서 해결할 것과, 백제의 요청대로 구원병은 일단 유보하겠다는 것을 밝히다.
550년 봄2월, 왜국에서 백제에 화살 서른 구와 서방(庶防) 한 곳을 보내다.
일본 내에서도 '임나 재건'을 기록한 《일본서기》의 기록에 문제가 많다는 점은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특히 표면적으로는 일본 천황의 명령으로 진행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천황의 직속기관인 일본부에서는 그러한 천황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과 천황이 자신의 의사를 본국의 기관이 아닌 외국 정부에 전달하고 일임하려 했던 까닭, 그리고 마찬가지로 외국에 불과한 왜국의 천황이 내리는 명령을 직속 기관인 일본부가 아닌 백제가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같은 학자는 '일본 사신이 무능한 탓에, 임나 제국이 신라로 귀순하는 사태를 막아보려는 시도를 백제에서 주도하게 되었다'[4]는 주장을 제기했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왜국에는 백제만큼의 유능한 인물이 없었다'는 논리로 귀결되어 결국, 그들 관료들의 지도자인 천황과 당시 야마토 조정의 집권층을 무능한 것으로 몰아버리는 꼴이 되며, 일본 내에서도 현재 이 학설을 믿는 사람은 없다. 이노우에 히데오는 '일본부가 관리하던 지역이 일본 천황에게 형식적으로만 복속된 자치구역이어서'라고 주장했지만, 이 경우 어째서, 백제나 왜 모두가 자국의 중앙정부보다 힘이 약한 자치구역인 일본부를 통해 임나 재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느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기록에도 나오듯이 천황의 명령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깃장만 놓고 결국에는 고구려에 독단으로 사신을 보내어 군사까지 끌어들인 일본부를 의식할 필요없이, 백제와 왜 양국 정부끼리 임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편리한 방법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른 대안으로 제기된 주장은, '임나 재건'의 목적이 앞서 신라에게 멸망당한 남가라(금관가야)와 훼기탄 같은 가야 소국들을 신라로부터 분리독립시키려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게이타이 천황 23년조에 "근강모야신을 안라에 보냈다. 명하여 신라에게 남가라와 훼기탄을 다시 세우도록 권하게 했다"는 기록과 긴메이 천황 2년조 7월 기사에 나오는 성왕의 발언 가운데 "천황의 명을 받들어, 신라에 빼앗긴 나라인 남가라와 훼기탄 등을 취하여 본래대로 돌이켜 임나에 옮기고, 길이 부형의 나라가 되어 일본을 섬기려 한다"고 하는 기록을 들고 있으나, 실제 남가라와 훼기탄 같은 나라들은 신라에게 합병당한 뒤 신라로부터 분리된 적도 없을 뿐더러, 남가라 즉 금관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어 있었다. 더욱이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맹국인 신라와의 마찰을 불사해가면서까지 성왕이 두 나라를 신라로부터 분리시킬 필요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더 극단적으로는, 《일본서기》찬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첨삭시킨 구절이라는 말도 있다.
임나 재건에 대해, 최근 이희진 교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이 천황의 명령에 따라 임나 재건을 추진했다고 적고 있지만, 천황을 중국의 천자와 맞먹는 지위에 올려놓고 일본 국내뿐 아니라 일본 바깥의 일들을 모두 천황이 명령을 내려 시행하는 것처럼 왜곡한 《일본서기》의 기록을 무조건 믿을 수만은 없다. 특히 천황이 '임나 재건'의 명령을 내리면서도 외국인 백제의 왕에게는 자세한 계획과 방법을 모두 말해주고, 자신의 직속기관인 일본부(日本府)에 대해서는 "가야와 함께, 백제에 가서 천황의 조칙(詔勅)을 들으라"고 하는 등의 비정상적인 외교방식이나, 일본부의 주요 인물들이 '천황의 명령'이라는 임나 재건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이고 무심한 태도를 견지하며 어떻게든 무산시키려고 애쓰는 모습, 그것이 발각되어 성왕이 직접 천황에게 "이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천황 자신이 자신의 명을 어긴 일본부 요원들에게 어떤 처벌을 내렸다는 기록을 《일본서기》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처음부터 '임나재건'이라는 문제를 천황의 명령이 아닌 백제 성왕 본인의 발안에 의해서 계획되고 추진되었으며 후대에 《일본서기》편찬자들에 의해 주객(主客)이 서로 전도된 채 전해지게 되었다고 봐야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임나 재건'을 외치는 자리에서 성왕은 시종일관 옛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그리고 그들과 가야와의 '형제나 아들과도 같았던' 특별한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임나란 마치 지금의 나토(NATO)와도 같이, 서기 369년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왜와 함께 정복했다는 가야 7국을 하나로 묶은 일종의 정치적 공동체, 국가와 국가 사이의 군사경제적 연합기구와도 같은 것이었으며, 일본부는 임나와 왜국 사이의 교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때 함께 설치된 '임나 주재 왜국 대사관'과도 같은 기관이었다. 이들은 가야 제국에서 파견된 요원들과는 따로 구별되어 취급을 받았으며, 유사시 백제의 요청에 의한 군사적인 원조도 맡고 있었다. 4세기 말엽에서 5세기 초엽까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했고 396년에는 백제의 아신왕에게 노객(奴客)의 맹서와 함께 백제왕의 아우와 열 명의 대신, 58개의 성과 700개의 마을을 빼앗기는 등 백제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를 공격하는 대신 고구려의 동맹국이었던 신라를 치는 전략을 선택하고, 임나에게 그에 필요한 원조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왜도 참전해 백제측에서 고구려에 맞서며, 임나를 거점으로 신라를 공격한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에 지원요청을 하게 되고, 고구려는 5만 명이라는 대군을 동원해 백제가 개입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왜군을 축출하고 단기간에 임나를 제압하고 만다.
한성 함락 이후 6세기를 거치면서 중흥을 이룩한 백제에게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고, 아울러 고구려군에게 시해된 개로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국가적인 과제가 주어져 있었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성왕은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만든 임나의 존재를 기억해냈고 고구려를 치기에 앞서 임나라는 정치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전쟁 수행에 용이하도록 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이전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려온 직후 백제가 주변국에 대해 '협조'를 구하기 위해 취했던 다소 저자세로도 보일 수 있는 외교양상이, 백제의 국력 회복과 함께 거꾸로 협조를 구하던 나라들을 '압박'하는 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5세기처럼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에 말려들어 피해를 보고 싶지 않았던 가야는 백제의 임나 재건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왜는 백제가 언제든지 자신들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탓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 한편 백제와 동등한 동맹관계였던 신라는 백제가 주도하는 동맹체에 속박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임나 재건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이러한 백제 주변국들의 이해관계와 과거 백제 때문에 전쟁에 말려들었던 기억에 의한 반감 때문이었다. 그 반감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549년 안라가 고구려의 군대를 끌어들여 백제를 치려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가 '임나 재건'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결국 흐지부지 끝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록 '임나 재건' 자체는 흐지부지 끝났지만, 이후 임나 즉 가야 제국은 551년 백제가 고구려를 칠 때를 비롯해 554년 관산성을 공격할 때에도, 별다른 이익도 얻지 못한 채 백제쪽에 참전해 싸우는 것이 기록에 드러난다. 이미 534년에 안라에 진주해 걸탁성을 쌓고, 가야의 요충지에 자국의 군령과 성주를 두고 있던 백제로서는 굳이 신라나 왜의 반발을 무릅써가면서까지 임나 재건을 밀어붙일 필요도 없었다. 동등한 동맹을 유지하고 있는 신라에게는 고구려의 반격을 받아도 최소한의 협조를 얻어낼 수 있고, 선진문물 수입이나 교역 문제처럼 백제에게 아쉬운 것이 신라나 가야보다 훨씬 더 많은 왜는 더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결국 가야 세력만 장악하면 고구려와의 전쟁에 주변 세력을 이용할 수 있었던 백제로서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때의 그것과 같은 동맹체 정도까지는 이루지 못하더라도 가야의 소국들을 필요할 때마다 조종할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한 것이다.
성왕의 사망에 대하여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성왕의 사망년도는 554년이다.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신라와 전쟁을 벌이다 전사한 것은 현존하는 기록들 모두가 증언하고 있지만,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이 모두 다른 의견을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권26 백제본기4에 "32년(554년)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步騎]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伏兵)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고 하고,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5년(551년)조 기사에 "백제왕 명농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軍主)였던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이 주병(主兵)을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우도도(高于都刀)가 백제왕을 급히 쳐서 죽였다[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 急擊殺百濟王]."고 하여 성왕이 밤에 몰래 신라를 기습하려다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성왕이 데리고 갔던 군사가 불과 50명에 불과했다는 기록을 볼때 내용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태자 여창이 직접 참여한 관산성 전투는 오히려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으며, 성왕은 전후 수습을 위해 측근들을 데리고 관산성으로 가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니혼쇼키》에 보면 음력 12월 아들인 여창이 신라로 쳐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쌓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전장에서 침식도 잊고 지내던 아들을 안쓰럽게 여긴 성왕은 이를 위로하러 관산성으로 향했다. 한편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신라군은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성왕에 대한 기습을 감행했고, 불과 50명밖에 데리고 있지 않았던 성왕은 신라의 고도(古都)가 이끄는 군사에 사로잡혔다. 고도는 성왕에게 "왕의 목을 베게 해주시오."라고 요청하고, 성왕은 "왕의 목을 천한 종의 손에 넘길 수 없다"며 거절했으나 고도는 "우리 국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긴 자는 왕이라 해도 종의 손에 죽소."라며 잘라 말해버렸다. 이에 성왕은 "과인은 지금껏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안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때 성왕의 목은 신라 왕궁 북청(北廳)의 계단 밑에 묻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나머지 몸은 백제로 반환되었다. 관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에 있었으며, 지금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은 성왕사절지(聖王死節地), 즉 성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과의 외교
성왕은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성왕은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의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가계
- 부왕 : 무령왕
- 모후 : ?
- 왕후 : ?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 왕호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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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온조왕(溫祚王) | 온조(溫祚) |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 |
2 | 다루왕(多婁王) | 다루(多婁) | 기원후 28년 ~ 77년 | 온조왕의 아들. | |
3 | 기루왕(己婁王) | 기루(己婁) | 77년 ~ 128년 | 다루왕의 아들. | |
4 | 개루왕(蓋婁王) | 개루(蓋婁) | 128년 ~ 166년 | 기루왕의 아들. | |
5 | 초고왕(肖古王) | 초고(肖古) | 166년 ~ 214년 |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 |
6 | 구수왕(仇首王) | 구수(仇首) | 214년 ~ 234년 |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 |
7 | 사반왕(沙伴王) | 사반(沙伴) | 234년 |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 |
8 | 고이왕(古爾王) |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 234년 ~ 286년 | 개루왕의 차남. | |
9 | 책계왕(責稽王) | 책계(責稽) | 286년 ~ 298년 |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 |
10 | 분서왕(汾西王) | 분서(汾西) | 298년 ~ 304년 | 책계왕의 아들. | |
11 | 비류왕(比流王) | 비류(比流) | 304년 ~ 344년 | 구수왕의 차남. | |
12 | 계왕(契王) | 계(契) | 344년 ~ 346년 | 분서왕의 아들. | |
13 | 근초고왕(近肖古王) | 초고(肖古), 여구(餘句) | 346년 ~ 375년 |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 |
14 | 근구수왕(近仇首王) | 구수(仇首), 수(須) | 375년 ~ 384년 | 근초고왕의 아들. | |
15 | 침류왕(枕流王) | 침류(枕流) | 384년 ~ 385년 | 근구수왕의 장남. | |
16 | 진사왕(辰斯王) | 진사(辰斯) | 385년 ~ 392년 | 근구수왕의 차남. | |
17 | 아신왕(阿莘王) | 아신(阿莘) | 392년 ~ 405년 | 침류왕의 아들. | |
18 | 전지왕(腆支王) |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 405년 ~ 420년 | 아신왕의 아들. | |
19 | 구이신왕(久爾辛王) | 구이신(久爾辛) | 420년 ~ 427년 | 전지왕의 아들. | |
20 | 비유왕(毗有王) | 비유(毗有), 여비(餘毗) | 427년 ~ 455년 | 구이신왕의 아들. | |
21 | 개로왕(蓋鹵王) | 경사(慶司), 여경(餘慶) | 455년 ~ 475년 |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 |
22 | 문주왕(文周王) | 모도(牟都), 여도(餘都) | 475년 ~ 477년 |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 |
23 | 삼근왕(三斤王) | 삼근(三斤) | 477년 ~ 479년 | 문주왕의 아들. | |
24 | 동성왕(東城王) | 동성왕 |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 479년 ~ 501년 |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
25 | 무령왕(武寧王) | 무령왕 | 사마(斯麻), 여융(餘隆) | 501년 ~ 523년 |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
26 | 성왕(聖王) | 성왕 | 명농(明襛) | 523년 ~ 554년 | 무령왕의 아들. |
27 | 위덕왕(威德王) | 위덕왕 | 창(昌) | 554년 ~ 598년 | 성왕의 장남. |
28 | 혜왕(惠王) | 혜왕 | 계(季) | 598년 ~ 599년 | 성왕의 차남. |
29 | 법왕(法王) | 법왕 | 선(宣), 효순(孝順) | 599년 ~ 600년 | 혜왕의 아들. |
30 | 무왕(武王) | 무왕 | 장(璋), 서동 | 600년 ~ 641년 |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
31 | 의자왕(義慈王) | 의자 | 641년 ~ 660년 | 무왕의 아들. |
제26대 성왕 실록
(?~서기 554년, 재위:서기 523년 5월~ 554년 7월, 31년 2개월)
희대의 책략가 성와의 불운과 추락하는 백제
성(聖)왕은 무령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명노이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없으나, 무령왕의 첯 번째 태자가 죽은 513년 즈음에 책봉된 것으로 보이며, 523년 5월에 무령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그에 대해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결단성이 있었다.'고 쓰고 있으며, <일본서기>는 '천도 지리에 통달하여 이름이 사방에 널리 알려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성왕이 꽤 판단력이 뛰어나고, 여러 면에서 두루 능통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523년 당시, 백제 주변을 둘러싼 국제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 임나의 영유권 문제로 가야와 백제는 등을 지고 신라와 손을 잡으면서 백제, 왜, 가야 삼국의 혈맹 관계는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여전히 백제를 응징하기 위해 다각도로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신라는 그 같은 역학관계를 이용하여 영토 확장의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한편, 고구려를 견제하고 있던 북위도 내부적으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위 왕 탁발원굉은 한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한족과 선비족 간의 결혼을 장려하고 선비족의 성을 한족의 성으로 바꾸도록 하는 등 한족동화정책을 실시했는데, 이 때문에 선비의 귀족들이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는 결국 523년 하북성 일대에서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으며, 이후 산동성, 감숙성, 섬서성 등에서도 잇따라 대규모 군사 봉기가 발생했다. 그러자 북위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남조의 양나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성왕은 대륙백제의 영토를 확대하려 하자, 이를 눈치 챈 고구려구는 성왕 즉위년 8월에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대륙백제를 공격해 왔다. 이에 성왕은 고구려 군사가 패수(浿水)에 이르렀을 때, 좌장 지충에게 기병 1만을 안겨 격퇴시켰다. 흔히 이 전쟁을 한반도 예성강 근처에서 일어난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패수를 예성강으로 비정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이다. 당시 백제는 예성강까지 진출도 하지 못했고 임진강에도 못미치는 상태였다. 여기서 말하는 패수는 지금 중국 황하 남쪽 산동성에 있는 패수, 즉 소청하이다.
비록 고구려군을 격퇴시키기는 했지만, 백제의 힘만으로 대국 고구려를 상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성왕은 먼저 524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양국 우호 관계를 확인하고, 525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두 나라 관계의 돈독함을 과시했다. 내부적으로 웅진성을 축성하는 등 방비책도 강구했다.
그 무렵, 백제에 임나 4현을 빼앗긴 가야는 신라와 관계를 다지고 있었고, 무령왕이 죽기 2개월 전인 523년 3월에 가야의 구형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으며, 신라는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또 524년 9월에는 신라의 법흥왕이 남쪽을 순시하자, 구형왕은 그를 찿아가 회견하면서 가야의 북쪽 땅을 신라에게 내주고 그 대신 서로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렇게 되자, 왜와 백제는 가야를 응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백제는 고구려와 대치 상황에 있었기에 왜를 움직여 가야를 치고자 하였다. 이에 왜 조정은 백제파와 가야파 간에 내분이 발생했다. 근왕 세력인 백제파는 백제를 도와 가야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축자국(지금의 기타 큐슈) 등 가야와 친밀한 관계에 있던 세력은 가야 공격을 반대했다. 때문에 결국 양 세력 간에 무력 충돌까지 발생하게 된다.
축자국의 국조 반정은 원래 가야 출신으로 백제가 장악한 가야 땅은 마땅히 가야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근왕 세력인 백제파는 근강모야에게 병력 6만을 주어 반정을 압박하였고, 반정은 자신을 옹호하던 주변 세력과 힘을 합쳐 모야의 군대를 저지했다.
결국 모야는 반정군에게 패배하여 퇴각했고, 계체천황은 조정 대신들과 숙의하여 물부대련 녹록화로 하여금 반정군을 공격토록 했다. 그래서 528년 11월에 반정과 녹록화 사이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반정의 목이 달아났다. 그러자 반정의 아들 갈자가 충성을 맹세하고 병력을 거둬들이므로 왜의 내분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신라와 가야 사이엔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는데, 523년에 가야 구형왕에게 시집 온 신라 이찬 비조부의 딸은 가야에 온 뒤에도 신라의 예복을 입고 지냈으며, 자신을 따라온 1백 명의 시종에게도 모두 신라의 옷을 입도록 했다. 이에 가야 조정은 여러 처례 가야 조정의 예복을 입도록 요구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결국 분노한 가야 왕은 529년에 왕녀를 따라온 시종들을 모두 신라로 돌려보내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라의 법흥왕이 노발대발하여 왕녀를 돌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가야측에선 '이미 부부관계를 맺었고, 자식까지 있는데 어떻게 돌려줄 수 있느냐'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야 왕이 자신의 요구를 무시하자, 신라의 법흥왕은 곧 군대를 동원하여 가야를 압박하고, 도가, 고파, 포나모라 등 세 성을 장악했다. 또 가야 북쪽 국경의 5개 성을 빼앗았다.
이 문제로 가야는 신라를 비난하며 백제와 왜에 왕족을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백제 장군 윤규와 마나갑배, 마도 등을 파견하였고, 왜는 모야를 파견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가야, 왜, 백제의 대신들은 서로 협력하여 가야 땅을 회복하기로 하고, 신라에 사람을 보내어 그 내용을 전했다. 그러자 법흥왕은 이사부에게 병력 3천을 주어 가야 남쪽 지역을 공략하여 유린해 버렸다.
신라가 이렇듯 막무가내로 나왔지만, 왜와 백제는 별다른 대응을 할 수가 없었고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다. 왜는 내정이 안정되지 못한 데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함부로 신라와 싸울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그해 10월 고구려 안장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대륙백제의 북변 요새인 혈성을 공략하여 함락시켜 버렸다. 이에 성왕은 장수 연모에게 병력 3만을 내주어 막도록 했으나, 연모는 오곡 벌판에서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하고 말았다.
오곡 벌판 패배 이후, 백제 대륙군은 계속 내몰렸고, 그 같은 전쟁은 3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백제군은 수세로 몰렸고, 결국 532년 7월에 백제군은 또 한번의 대패로 장수 연모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장수들이 전사하는 등 대륙기지를 거의 상실하기 이른다.
성왕이 이렇듯 대륙에서 곤경에 처하여 있을 때, 군대를 이끌고 가야에 와 있던 사신 근강모아는 자의적으로 구사모라 성을 차지해 버린다. 이 때문에 가야는 백제와 신라에 도움을 청해 모아의 군대를 몰아내 줄 것을 청하였고, 결국 백제와 신라 연합군이 모아를 성안에 몰아넣고 공격을 가하였다.
근강모아가 구사모라 성을 장악한 것은 혼란한 틈을 타서 가야 땅을 점령하려는 일본 계체천황의 밀명이 있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협공을 해오고, 왜에 머물고 있던 가야 사신들이 모아의 행위를 따지고 들자, 계체천황은 모아에게 밀사를 보내 귀환을 명령했지만 모아는 '명령을 이룬 후에 조정에 돌아가 사죄할 것이니 기다려 주십시요.'라고 회신했다.
이러한 가운데 대치 상황은 계속되었고 사태는 나제 연합군에 포위된 모아에게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에 계체천황은 모아가 포로로 잡힌다면 자신의 밀명이 탄로날 것을 우려하여 다시 목협자를 모아에게 보내 철수할 것을 종용했다. 모아도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는 관계로 구사모라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하지만 대마도에 이르러 살해되고 만다. 일본서기는 모아가 병들어 죽었다고 했지만, 정황으로 보아 계체천황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왜의 계체천황이 죽고 왜 조정은 왕위계승권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을 즈음, 532년 금관가야 왕 김구해는 왕비 및 그의 세 아들 노종, 무덕, 무력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버린다. 결국 가야 땅을 장악하려던 왜의 노력은 신라의 가야 장악을 도운 꼴이 되고 말았다.
한반도에서 가야를 둘러싼 이러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북위는 우문 선비 출신의 우문태와 한인 출신 고환이 권력을 양분하여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급기야 북위의 붕괴로 이어지고, 국토가 양분되고 동서로 왕조가 양립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북위는 남경을 중심으로 동위와 서위로 나누어지고 남경과 그 동쪽을 차지한 동위는 산동성으로 그 세력을 팽창하였고, 이는 고구려에 밀려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던 대륙백제의 몰락을 자초했다.
고이왕 대에 개척하고, 근초고왕 대에 숱한 세파를 이겨내며 줄기차게 견디어 오던 대륙백제는 한 때 크게 위축 되었으나 동성왕과 무령왕 대에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성왕 대에 와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이에 백제인들은 엄청난 충격이었으며 절망감에 휩싸인 것은 당연했다.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성왕은 538년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부여의 옛 영토를 차겠다는 옹골찬 의지의 표출이며, 노골적인 북진 정책을 천명한 것이다.
성왕은 그 첯 번째 조치로 540년 장군 연회에게 병력을 주어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토록 했다. 하지만 연회는 별다른 성과 없이 퇴각하고 말았고 이에 성왕은 단독으로 고구려와 대적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일단 한 발 물러서서 외교관계에 주력하였다.
541년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학자, 기술자,서적 등을 요청하였다. 그 무렵, 신라에서는 법흥왕이 사망하고 진흥왕이 7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가 섭정를 맡았다. 성왕은 지소태후에게도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확인하였고 가야에 머물고 있던 왜국 객관(일본부)의 집사(대사격의 외교 관리)와 가야의 집사를 불러 임나의 재건을 논의했다. 성왕은 임나를 재건하여 가야에 힘을 실어주어 가야, 왜, 신라, 백제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려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임나의 재건은 복잡한 역학관계로 인하여 성왕의 바램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성왕의 임나 재건 의도가 신라에 내통하고 있던 왜국 객관에 의해 전해지면서 백제와 신라의 공조 관계는 균열만 나타나게 되었고, 가야는 임나의 영유권 문제로 백제를 불신하고 있었기에 성왕을 믿지 않았으며, 왜국도 백제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성왕은 가야와 왜를 끈질기게 설득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545년 고구려에서 내분이 발생했다. 안원왕이 중병이 들자 외척들 간에 왕위 계승권을 놓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그 해 3월에 안원왕이 죽자 내전으로 비화되어 1년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성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으나 신라는 물론이고 가야와 왜가 호응하지 않았다.
그로인해 성왕의 계획은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말았고, 이 정보를 들은 고구려는 548년 정월에 예족을 앞세워 백제의 한강 북쪽 독산성을 공격해 왔다. 고구려의 침입에 놀란 성왕은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신라의 섭정 보도태후는 장군 주진으로 하여금 병력 3천을 주어 백제를 돕도록 했다. 덕분에 고구려는 패퇴했고, 독산성은 무사했다.
3년 뒤인 551년에 성왕은 자신이 직접 병력 수 만을 이끌고 보복전에 나섰다. 신라와 가야의 연합군도 이 전쟁에 합세하였는데, 성왕은 우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성을 쳐서 되찿고, 장군 달기에게 병력 1만을 주어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하지만 고구려의 반격에 밀려 오히려 금현성를 빼앗기고, 신라 장군 이사부가 고구려와 백제 양쪽 군대가 피로해진 틈을 타서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차지하고, 군사 1천을 머물게 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후 백제.신라.가야 연합군은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하평양(현재의 평양)까지 밀고 올라갔다. 그 결과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도 6개의 군을 회복하는 큰 성과를 올렷다.
고구려가 이렇듯 백제와 신라 연합군에게 맥없이 무너진 것은 돌궐의 갑작스런 침입으로 신성이 포위되고 도성이 위험에 처하는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군 고흘의 활약으로 돌궐군이 물러나자. 고구려는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가해 왔다. 이에 신라는 마음을 바꿔 고구려와 손을 잡고 되려 백제를 공격하였다.
신라의 배반으로 백제 성왕은 당황하였고, 그러는 사이 신라는 한강 이북의 백제 땅을 모두 차지하고 한성까지 장악해 버렷다. 궁지에 몰린 성왕은 자신의 딸을 신라에 시집보내는 굴욕적인 조치를 취하여 가까스로 신라의 맹공을 누그러뜨렸다.
눈물을 머금고 사비성으로 돌아온 성왕은 복수를 다짐하고, 왜에 파병을 요청하여 일전을 준비했다. 554년 5월 왜의 수군이 도착하자, 성왕은 가야 군대와 함께 신라의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했다. 하지만 선봉대를 이끌던 태자 창(위덕왕)을 위로하고 지원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 50명만 이끌고 밤길을 가던 그는이 정보를 미리 간파한 신라의 복병에게 구천에서 습격을 당해 포로로 잡히고 말았고, 급기야 현장에서 적장에게 목이 달아나 그 머리는 신라 북청의 계단 아래 묻히고, 목이 잘린 몸만 백제에 보내졌다.
둘도 없는 책략가요, 희대의 영웅이요, 존경받던 군왕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비참하고 하무한 결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성왕의 가족 사항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부인은 여럿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아들로는 창(위덕왕), 계(혜왕) 두 아들과 신라 진흥왕의 소비가 된 딸 하나가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자식이 있었을 것이나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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