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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1 : 백제의 역사 37 (제26대 성왕 2)

두바퀴인생 2010. 12. 4. 03:27

 

 

한국의 역사 91 : 백제의 역사 37 (제26대 성왕 2)

 

관산성 싸움과 백제 성왕의 최후

554년 5월 3일, 왜의 전함 40척이 축자국을 출발하여 백제로 향했다. 승선 병력은 총 1천, 군마는 1백 필이었다. 성왕의 끈질긴 파병 요청이 마침내 왜의 조정을 움직인 것이다. 파병된 왜군은 1천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백제.신라.고구려 삼국의 각축전에 왜가 국운을 걸고 뛰어든 중요한 사건이었다.

 

성왕이 처음으로 파병을 요청한 것은 541년이었다. 이 때의 명분은 임나를 재건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왜는 쉽게 이에 응하지 않았다. 신라와 고구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은밀히 신라와 내통하여 가야 지역에 터전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왕은 줄기차게 특사를 보내 백제, 가야, 왜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신라와 고구려에 대항해야만 임나를 재건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왜 조정을 설득했다. 당시 왜는 자유무역 도시인 임나가 분쟁지역으로 변함에 따라 한반도 및 중국 대륙과 무역 거래가 거의 중단된 상태로 이에 따른 경제적 피해가 막심했다. 성왕은 그 점을 십분 이용하여 임나 재건을 외치며 왜군을 백제에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성왕의 파병 요청은 무려 1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그동안 국제 정세도 크게 변하였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신라의 성장이었다. 신라는 가야 땅 절반 이상을 수중에 넣었고, 한강 유역은 물론이고 그 북방의 고구려 땅 중 10개 군을 장악한 상태였다. 게다가 백제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와 뒷거래를 하며 백제를 압박했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가 의지할 곳은 오랜 동맹국인 가야와 왜였다. 그러나 가야나 왜도 내부적으로 복잡한 상태에 있었는데, 가야는 신라파와 백제파가 갈려 세력을 다투고 있었고, 왜는 백제의 임나 장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신라와 고구려의 공조는 왜와 가야를 몹시 불안하게 하였는데, 고구려와 신라의 공조로 백제가 무너지면, 가야는 필연적으로 신라에 병합될 수 밖에 없었고, 왜 역시 외톨이로 남아 고구려와 신라에 머리를 숙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백제의 위기는 곧 가야와 왜의 위기이기도 했다. 왜 조정이 늦게나마 성왕의 파병 요청에 병력을 파견한 것은 이러한 위기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왜의 군대가 백제에 도착하자, 성왕은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출정식을 거행했다. 금지옥엽 같은 딸을 진흥왕의 소비로 내주면서까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터라, 성왕은 목숨을 걸고 일전을 치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성왕의 첯 목표는 관산성(옥천)이었다. 관산성은 소백산맥 동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백제의 도성인 사비까지 한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때문에 그곳에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백제에게 큰나큰 위협이 아닐 수가 없었다. 신라의 기병이 언제라도 달려올 수 있었으며 그래서 관산성의 신라 병력은 성왕의 눈알을 노리는 창날같은 존재였다.

 

성왕은 백제,가야,왜의 병력으로 연맹군으로 편성하여 노도와 같이 군대를 몰아 관산성을 압박했다. 성왕의 군대가 몰려오자, 신라는 우덕과 탐지가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성왕의 군대를 당해내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이렇듯 신라에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한강 유역에 머물고 있던 아찬 김무력이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으며 삼년산군(보은)의 비장 도도까지 가세했다.

 

한성의 군대를 이끌고 달려온 김무력은 가야 왕 구형의 막내아들이었다. 따라서 그가 이끌고 있던 군대의 상당수는 가야 출신 병력이었고, 그것은 백제 연맹군에 가담하고 있던 가야 군대를 몹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가야 군대의 그러한 혼란은 성왕의 지휘체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그것은 결국 백제 연맹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무력은 태자 창이 이끌고 있던 백제군의 선봉과 맞섰다. 그 소식을 들은 성왕은 군대의 사기를 높이고 태자 창을 격려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50명의 호위병만 대리고 밤길을 달려갔다.

 

성왕이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삼년산군의 비장 도도는 은밀히 성왕이 지나갈 길목에 매복하고 있다가 성왕을 급습하였다. 성왕의 호위병들이 일당백의 근위병들이지만, 50명으로 수천명의 군대를 당히기란 역부족으로 결국 성왕은 도도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성왕을 붙잡은 도도는 노비 출신의 장수로서 공을 세워 신분이 상승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던지 성왕의 목을 얻고자 하였다. 그는 일단 성왕에게 왕에 대한 예의를 갖추면서 큰절을 두 번하고, 이렇게 말했다.

 

"대왕의 머리를 베도록 해주소서!"

 

그러자 성왕은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대꾸했다.

 

"왕의 머리를 종눔의 손에 맡길수 없다."

 

하지만 도도는 물러서지 않고 성왕을 힐난했다.

 

"우리 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국왕이라고 해도 마땅히 종의 손에 죽습니다."

 

성왕은 딸을 진흥와에게 시집보낼 때, 신라와 화친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했던 모양이다. 도도가 성왕에게 맹세를 어겼다고 한 것은 바로 화친의 맹약을 깨고 관산성을 공격한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 소리에 성왕은 의자에 걸터앉은 채 차고 있던 자신의 칼을 내주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쏟아내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목을 내밀고 말했다.

 

"짐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구차한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다, 자, 내 목을 베라."  

 

도도는 그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곧 칼을 휘둘러 성왕의 목을 쳤다. 그리고 성왕의 시신을 서라벌로 보냈다. 성왕의 시신을 접수한  신라 조정은 그의 두개골을 수습하여 도당이 있는 북청 계단 밑에 묻고, 나머지는 백제에 보냈다.

 

성왕이 참수되었다는 소식은 이내 백제군에 전해졌고, 그로 인해 백제 연맹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했다. 신라군은 달아나는 백제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약 3만의 병력을 몰살시켰고, 태자 창도 포위되어 생포될 처지에 놓이자 그때 궁술에 능한 축자 국조가 신라군의 선봉에 선 장수를 활로 쏘아 넘어뜨리고 활로를 뚫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의 패배는 백제에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는데, 성왕의 죽음으로 가야와 왜, 백제를 묶을 수 있었던 영도자를 잃은 것이 문제였으며, 3만의 병력을 잃게 되어 향후 방어 일변도의 전쟁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고, 다음으로 백제 연맹군의 붕괴로 연맹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팽배해졌다는 점이다.  

 

또 태자 창은 개인적으로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불효를 저질렀고, 장수로서는 패전 장수로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야 했으며, 그는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머리를 깍고 중이되려고도 했다. 다행히 신하들의 만류로 그는 출가를 포기했지만, 성왕이 죽은 후 3년 동안 그는 왕위를 비워두고 참회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