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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1: 백제의 역사 47 (백제의 역사를 마무리하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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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1: 백제의 역사 47 (백제의 역사를 마무리하며...)

두바퀴인생 2010. 12. 15. 04:18

 

 

 

한국의 역사 101: 백제의 역사 47(백제의 역사를 마무리하며...)

 

 

슬픈 출발

 

백제는 처음부터 슬픈 출발을 시작했다.

 

부여의 후예로서 고구려 건국에 막중한 역활을 했던 계루부 집단의 우두머리 소서노, 그녀는 동부여에서 쫒겨와 의지할 곳을 찿던 남편 주몽을 만나 계루부의 이상을 실현하기를 꿈꾸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던 중, 본처 아들 유리기 찿아와 주몽의 후계자로 선택되자 배신의 눈물을 삼키며 치열한 후계자 쟁탈전을 벌인 결과 패배하자 주몽의 배신을 뒤로하고 눈물을 머금고 아들 비류와 온조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신하와 백성을 이끌고 새로운 땅을 찿아 망명길에 오른 비운의 여인이었다.

 

안개는 자욱하고 파도가 넘실대는 발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며 남으로 향한 그들은 산동반도에 이르렀고, 다시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찿아든 그녀는 고구려보다 훨씬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먼저 산동의 대방 땅에 도착한 그들은 대방 왕의 배려로 산동반도에서 양지바른 곳을 선택하여 위례성을 구축하고 터전을 잡았으나 사사건건 간섭하는 대방 왕의 영역을 벗어나 더 넓고 자유로운 곳을 찿아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찿아든다. 

 

그러나 선발대로 먼저 도착하여 마한 땅에 나라를 구축한 온조가 뒤늦게 도착한 소서노와 비류를 만나주지 않고 멀리함에 소서노는 분노하였고, 그래서 의리와 명분을 져버린 온조를 응징하기 위해 직접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채 군사들을 이끌고 위례성으로 말을 몰았지만, 불행히도 아들의 칼날에 희생되는 불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렇듯 백제는 소서노라는 한 여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의 한과 눈물과 웅지가 뒤엉켜 핏빛 선연한 한 송이 꽃을 피웠으니, 그것이 곧 백제였던 것이다. 온조에게 그것은 형과 어머니를 죽인 악운의 꽃이요, 조국을 등지고 망명한 백성의 설움과 한을 담은 눈물의 꽃이었다.

 

 

대륙의 꿈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듯이 백제인들 역시 자신의 고향인 저 대륙으로 돌아갈 꿈을 꾸며 힘을 키우고 세력을 확대하였고, 드디어 고이왕 대에 이르러 대륙백제를 건설함으로써 고향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백제는 대륙 땅을 더욱 확장하고 양자강 일대까지 영역을 넓히면서 국력을 키웠고 내부적으로는 정쟁과 권력 투쟁의 혼돈을 겪으면서 등장한 야심찬 군주 근초고왕에 이르러 마침내 대국의 위업을 달성하고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오리라는 소서노의 다짐은 그녀가 죽은 지 4백 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던 것이다. 대륙기지를 확장하던 근초고왕은 숙적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위용을 만천하에 떨쳤다. 그후 고구려와 백제는 철천지 원수가 되어 백제는 지속적인 고구려의 압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근초고왕, 근구수왕 이후 백제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복수의 화신 아신왕대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진정책에 의해 패수싸움과 수곡성 싸움에서 연달아 패하고 북방 요충지로 고구려에 빼앗겼던 관미성 수복전에서도 실패하자, 396년 병신년에 광개토왕의 남진으로 백제의 도성 한성이 고구려군에 함락되어 아신왕은 광개토왕 앞에서 무릎을 끓고 항복하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그후 아신왕은 복수의 화신이 되어 국력을 증강하고 군비를 정비한 후 왜, 가야 등 삼국연맹을 결성, 대대적인 신라병합작전을 전개하여 신라 전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고구려군 5만의 남진으로 가야의 정발성이 함락되는 패배를 초래하고 신라병합작전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그 후 아신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땅을 회복하기 위해 왜와 대선단을 형성하여 다시 고구려 대방 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관미성 수복전을 전개하지만 광개토왕이 친히 근위군을 이끌고 나와 방어전을 펼치는 바람에 실패하게 된다.

 

구이신왕 대에는 왜인 출신인 팔수태후의 난정으로 백제 조정은 혼란을 거듭하다가 비유왕이 왕권을 이어받았으나 반정으로 비유왕이 살해되자 우여곡절 끝에 비유왕을 살해한 반정군을 제압하고 개로왕이 즉위하게 되었고 내정이 안정되자 국제외교전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계략으로 승려 도침의 꾀임에 빠져 국력을 낭비하다가 백제 반정군을 앞세운 장수왕의 한성 공격으로 개로왕은 백제 반정 장수들에게 포로로 잡혀 아차산성 밑에서 참수당하는 비운의 왕이 되고 말았다.

 

이후 문주왕은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하여 재기를 꿈꾸었으나 치세가 짧았고, 성왕대에는 다시 사비로 천도하여 백제 중흥을 위해 왜, 가야와 협력하여 임나재건을 추구하는 등 국제적인 공조로 신라와 주도권 다툼을 계속하게 된다.

 

고향 땅에 발을 디딘 것도 잠시, 백제의 땅은 그 뒤로 점차 줄어들어 성왕 대엔 대륙의 땅을 모두 잃고 한반도 남부의 서부 일원에 불과한 땅으로 쪼그라 들기에 이른다. 그리고 백제, 신라 양국은 일시적으로 화친이 성립되었고 힘을 합쳐 고구려의 기세에 대항했다. 그러던 중 백제군이 신라와 더불어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한강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진흥왕이 그 약속을 뒤집고 이 지역 일대를 점령해 버린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태자의 강력한 건의로 대대적인 신라 공세에 나선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과 일전일퇴를 거듭하던 성왕은  전투중인  태자를 위무하기 위해 야밤에 기병 50기만 대리고 이동하다가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 매복하고 있던 신라군에 잡혀 어이없이 죽임을 당한다. 성왕이 전사하자 백제군은 사기가 떨어지고 철수하는 도중에 신라군이 추격전을 벌여 백제군은  4명의 좌평이 죽고, 죽은 군사만도 거의 3만여 명이 전사하는 등 대패를 당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백제 조정은 8대성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은 성왕의 전쟁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해 버린다. 이에 따라 그 다음 왕위에 오른 성왕의 아들 위덕왕은 부왕의 죽음에 죄의식에 빠져 승려가 되고자 하였으나 중신들이 극구말리는 바람에 못이기는 척 왕위에 즉위하였으나 귀족 눈치보기에 바빴고 아좌 태자가 왜에 가 있는 동안 위덕왕이 갑작스럽게 병상에 눕게되자 아우 혜왕이 왕권을 장악하고 귀국한 아좌 태자를 제거한 다음에 왕위에 오른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70세가 넘은 혜왕이 주도하였다기 보다 그의 아들인 50대 법왕이 주도적인 역활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혜왕이 금방 세상을 떠나고 법왕이 즉위하였으나 왕권 찬탈의 오명을 벗어나지 못한체 불교에 심취하는 등 치세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위덕왕계에 의해 제거되고 마를 캐는 일개 서동으로 살고 있던 힘없는 왕족 무왕을 찿아냈다.

 

한편 성왕대에는 그 이전부터 많은 백제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들이 가장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일본 황실 역사의 주인이 되었으며 지금도 일본 왕실의 국보로 보관하고 있는 백제 왕이 하사한 '칠지도'가 그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백제 중흥의 몸부림

 

백제 조정은 혼란한 정국 속에 왕권이 교체되다가 한낱 서동에 불과하던 무왕이 즉위함에 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무왕은 탁월한 지도력으로 조정은 안정되고 국력은 신장되어 수, 당나라와 활발한 국제외교전을 전개하면서 고구려와 신라와의 주도권을 다투게 된다. 무왕은 신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등 백제 중흥을 위해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왕권강화와 개혁추진에 몰두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백제를 통치한 지도자 중에 특출났던 인물로 5대왕(5大王) 즉 온조, 고이왕, 근초고왕, 무령왕 등을 손꼽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5대왕의 또 한 인물이 바로 무왕( ∼641)이다. 그는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마를 캐는 서동이었는데, 몰락한 처지의 왕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당시 백제의 권력투쟁의 결과였고 귀족들에 둘러싸인 채 외롭게 등극했다. 그러나 그의 즉위와 함께 정국은 바뀌게 된다. 

 

왕위에 오른 무왕은 강력한 지도력으로 발빠르게 내정을 안정시키는 한편 백제를 재무장시킨다. 그런 연후에 그는 백제의 오랜 숙원을 풀고자 나선다. 바로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일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영토를 신라에 빼앗긴 백제로서는 신라에 대한 공세가 곧 백제중흥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사실 백제가 늘 4대 선왕 성왕의 억울한 죽음과 한강에 이어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던 가야마저 빼았긴 터에 이를 가슴에 담고 있었던 그인지라 역대 백제 임금들 중에서 가장 집요하게 신라를 공격한다. 그는 대규모의 것만 해도 12회에 걸친 신라침공을 계속했고 자신이 몸소 친정에 나서기도 한다. 그 결과 그는 영토탈환과 확장에 남다른 공적을 남기게 된다.

 

무왕은 그 근거지로 익산을 선택한다. 자신의 고향이고, 넓은 평야가 있어 식량자원이 풍부하고 군사적 가치에서도 적합한 데다 무엇보다 부여의 귀족세력을 몰락시키는 결정적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익산을 국력 결집의 터전으로 삼았고 대외 원정의 전초기지로도 활용했다. 아마도 무왕은 재위 40년 639년에 수도마저 부여에서 익산으로 옮긴 듯하다. 

  

그러나 무왕의 정성이 들어가고 그만한 입지와 여건이 갖추어진 까닭에 신라에 의한 부여 함락이후에도 익산을 중심으로 한 백제부흥운동의 군사활동이 가장 활발했고 훗날 후백제(892∼936)를 세운 견휜의 수도가 되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전략가이자 지도자였던 무왕은 그 익산에 백제인의 단결과 국력결집을 위해 대규모의 사찰을 세우니,  바로 미륵사다. 백제는 물론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규모로 지었는데 절터만 5만여평에 이르러 황룡사보다도 2배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남진책에 대응하는데 노력했고 수·당과의 외교관계에도 신경썼으며 600년에 즉위한 이래 재위 42년 내내 비전을 제시했고 백제중흥의 꿈을 실현해 나갔다.

 

우리는 무왕이라는 인물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을 대함에 출신과 신분을 보고 섯불리 평가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가 민간인 신분으로 살고 있던 한낱 서동에 불과하였으나 백제 왕으로 옹립된 이래 정쟁을 수습하였고, 내치와 외치에서 백제의 어느 왕보다도 백제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던 흔적을 보았다. 중국 전한 시대 무제는 노예 출신의 위청과 곽거병이라는 무장을 등용하여 50년 이상의 치세 동안 대흉노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인 결과 한나라 영토는 만리나 확장하였고 장건으로 하여금 실크로드를 개척하였으며 한나라의 최대 번영기를 구가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미천왕은 머슴,소금장수,거지로 봉상왕의 칼날을 피해 숨어 살면서 창조리의 반정으로 왕에 옹립되었다. 그래서 미천왕은 강력한 영토확장 정책을 추진하여 고구려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왕으로 고구려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세운 왕이다.

 

이와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은 왕제 수업도 받지 않았고 훌륭한 스승을 두지도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유모나 홀어머니에 의해 자랐을 것이며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면서도 미래의 꿈을 키우며 엄격한 가정교육과 정의로운 정신과 태도를 함양하였으며 백성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스스로 봉사하고 희생할 줄 알면서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강력한 추진력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인품과 자질을 키운 것이다. 그리고 치세 동안에는 지혜롭고 현명한 신하를 옆에 두고 그의 조언을 경청하였으며 사리판단을 정확하게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진 능력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고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고 남을 존중하고 포용할 수 있는 인품이 중요한 것이다. 독단적이고 남을 무시하며 사람의 목숨을 파리같이 생각하는 소인배들은 결국 나라를 망쳐먹고 말았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모든 것은 애민정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대부분의 지도층은 백성의 고통과 눈물을 도외시하기 쉽고 대부분 사치와 향락에 빠졌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으며 백성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탐욕에 눈이 멀어 간신을 가까이하고 충신을 멀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짧은 시간의 마지막 무대

 

백제의 쇠퇴와 멸망은 다음 임금이 된 의자왕의 20년에 걸친 통치가 실패한 탓이다.  원래 의자왕은 재위 초기에는 정치를 잘 해 성군으로까지 받들어졌다. 게다가 선대 아버지 무왕이 다져놓은 백제를 물려받았고 인재도 많았다. 성충·흥수·윤충·계백 같은 충신과 명장들이 넘쳐났고 신라에 대한 우세를 지켜 나갔으며 망할 나라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의자왕이 신라의 첩보전과 미인계에 넘어간데다 화려한 사치향락에 빠져들면서 백제는 쇠락한 것이다. 무엇보다 당대의 전략가 성충은 물론이고 흥수 등 많은 인재들이 물러나거나 변방으로 쫓겨갔다. 이러한 와중에 적국인 신라에 김유신과 김춘추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난 것이 무엇보다도 백제의 멸망을 앞당기게 만든 것이다.

 

의자왕은 신라의 변방을 침공하여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최대의 영광을 누리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국운이 기울면서 급기야 고구려와 당의 치열한 주도권 싸움에 휘말려 나당연합군에 수도 사비성이 점령되고 의자왕이 포로로 잡혀 수많은 군신,귀족,백성들이 당나라로 끌려감으로써 백제 땅은 신라에 병합되는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국운의 막을 내렸다.

 

2008년 의자와의 마지막에 대한 단서를 주는 유물 하나가 발견되어 역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중국 북망산에서 '예식진'이라는 사람의 무덤과 묘비가 발견된 것이다. 그는 당나라 좌위위 대장군에 오른 사람으로 백제 웅진 출신이라고 묘비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 대부터 백제의 좌평을 지낸 백제의 귀족 출신으로 당나라의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인데, 우리 역사서 어디에도 그의 이름은 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구당서> '소정방' 편에서 그의 이름을 찿아냈다.

 

"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그 대장 예식이 자왕을 데려와서 항복했다.

 

여기서 예식은 예식진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당나라에 항복한 주체가 의자왕이 아니라 예식진이라는 뜻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도 언급된다.

 

"웅진의 수성 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니 왕이 동맥을 끓었으나 끓기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여 가니..."

 

이 두기록은 의자왕이 스스로 당나라에 항복한 것이 아니라, 믿었던 장수에게 배신 당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의자왕이 예식이 지키고 있던 웅진성으로 들어왔는데, 예식진이 의자왕을 포박하고 당에 항복하였다는 이야기다. 웅진성이 끝까지 나당연합군에 항거한  흔적도 없이 너무나 쉽게 항복하였던 점을 고려할 때 전혀 터무니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당시 기울어져 가는 백제의 신하들과 장수들은 싸움다운 싸움 한 번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대부분 항복하였고 단지 계백만이 5천 결사대와 장렬하게 전사하였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좌평을 포한한 장수들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였다는 점에서도 유추가 가능하다.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왕에 대한 평가가 좋을리는 없지만, 의자왕은 유독 혹독하게 비난의 대상이 되어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의자왕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아왔다. 백제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서가 전하지 않고 신라에 통합된 뒤 신라인의 시각으로 평가하여 전하는 부정적인 것은 어쩔수 없다 하더라도 그 왜곡 정도가 유난히 심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의자왕 하면 많은 사람들이 삼천 궁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의자왕의 궁녀 삼천 명이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함락되자 낙화암으로 몰려가 뛰어내리는 장면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는 전설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당시 사비성 인구가 5만 정도로 추산되고, 남녀 비율과 10~20대의 젊은 여성을 고려할 때 허구일 뿐이다. 낙화암 암자 자리도 협소하여 삼천 명이 줄지어 뛰내려도 하루 이상 걸리는 협소한 장소이다. 또 조선 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여 명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비성에 삼천 궁녀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 당시 기록 어디에도 삼천 궁녀란 이야기는 찿을 수가 없다.

 

조선 중기 시인이었던 민제인의 <백마강부>라는 시에서 '궁녀 수 산천'이라는 말을 처음 찿을 수 있는데, 이는 문인들이 문학적 상징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의자왕의 삼천 궁녀는  후대인들이 백제의 멸망을 의자왕 개인에게서 비롯됨을 강조하기 위해 허구로 만들어낸 상상력일 뿐이다. 

 

 

반토막의 백제 역사

 

패자는 말이 없다 했던가.

 

백제의 몰락 이후 신라는 줄기차게 백제의 역사를 축소해 한반도에 한정시켰고, 그것은 결국 역사 속에서 대륙백제의 존재를 완전히 폐기처분함으로써 백제를 한반도 남부의 자그마한 국가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는 바로 신라 출신 김부식에 의해 쓰여지면서 그런 음모와 왜곡의 결과라 할 것이다. 조선은 김부식의 역사를 그대로 인정하엿고 일제점령기를 거치면서 일제 역사학자들에 의해 한국의 역사는 반도사관으로 극심하게 왜곡된 역사로 변질되었고 이에 편성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직도 한반도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역사학계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백제의 진짜 얼굴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중국의 <남제서>, <송서>, <수서> 등에 백제의 진면목에 대한 기록들이 극히 일부라도 남아 있어 불행 중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위안을 삼을 정도이다.

 

중국 사서에 이런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백제는 영원히 한반도 남부의 별 볼 일 없는 소국으로 기억될 것이고, 우리는 백제의 진면목을 영원히 알지 못한 채 그 역사와 문화와 영토를 논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 사서들에 언뜻언뜻 비치는 백제 관련 기사들을 모두 동원한다하더라도 백제의 광활했던 영토 전체를 알아내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고구려의 백제 58개성의 위치가 중국 대륙에 그 지명이 산재해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광활한 영토를 경영하였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현재 남아 있는 사료만으론 백제인들이 어떤 경로로 대륙에 진출했으며, 어떻게 대륙 백제를 확대해 나갔으며, 어떤 방식으로 경영했으며, 어떻게 수백 년 동안 그 땅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륙백제의 역사가 없는 백제사는 반토막의 백제사다. 따라서 지금까지 쓰여진 백제사는 모두 반토막 백제사다. 그래서 여기서 기록되는 백제의 역사에서 언급되는 백제사는 사료의 부족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백제의 진짜 모습은 여기서 그려진 백제보다 훨씬 크고 대단하였던 것이다.

 

 

승자의 역사속에 묻혀진 거인

 

백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인이었다. 우리는 아직 그 거인의 발크기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겨우 다리 한 쪽을 발견하고 백제라는 거인을 모두 아는 것처럼 떠벌려댄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한 일이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백제를 거인으로 인정하는 일이며 그것은 바로 백제의 발에 묶인 한반도 사관이라는 족쇄를 풀어주는 일이다. 백제사를 쓴다는 것은 키를 알 수 없는 거인의 무덤을 발굴하는 것과 같다. 무덤을 발굴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속단하고 있다. 무덤 속에 묻힌 인간은 우리보다 훨씬 작고 왜소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는 점이다. 그 짐작을 바탕으로 사그라진 거인의 관을 다시 짜고, 찿지도 못한 유골을 복원하려고 한다.

 

역사학은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작업이 아니며, 없는 것을 지어내는 작업도 아니다. 동시에 역사학은 있는 것을 감추는 것도 아니며, 모른 것을 아는 척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틀을 만들어두고 그 틀에 맞게 끼워 맞추는 작업도 아니다. 역사학은 있었던 것에 대해 정직하게 인정하는 작업이다.

 

지금 백제사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남아 있는 기록에 대해 인정하는 학문적인 태도이다. 그래야만 백제라는 거인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거인을 초대하기 위해 초대장을 만드는 심정으로 백제사를 쓰며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백제인에게 보내는 초대장이 될 것이다.

                                                                                                                          

 

불타는 사비성, 백제의 눈물

 

누구나 부여 낙화암을 가보면 범상한 아름다움에 놀라기도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 무언가 찡하고 저며드는 비애의 쓰라림은 백제 망국의 아픔이 곳곳에 서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위틈에 '백마강 달밤'의 노래 가사에 나오는 고란초를 찿으려고 둘러보아도 고란초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바위틈에 파란 모습으로 물에 젖어 있는 모습이 마치 백제인들의 눈물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나당연합군 18만이 사비성을 점령하여 미친듯이 벌이는 방화와 학살로 아비규환의 피바다 속에서 7일 낮 7일 밤 동안 사비성은 불타고 파괴당해 지상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소정방의 전공을 새긴 석탑 뿐이었다. 그 석탑이 바로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백제 말기에 이르러 소행이 도리에 어긋남이 많고, 또한 대대로 신라와는 원수가 되고 고구려와는 친하여 신라를 침략하매 당 고종이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그 원한을 풀도록 했으나 겉으로는 따르면서 속으로는 어겨 대국에 죄를 지었으니 그 멸망은 당연하다고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보면 신라인 출신 김부식이 얼마나 중국에 대해 사대사상이 깊은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신라 또한 말년에는 사치와 방탕으로 나라가 부패하였고 왕위 쟁탈전으로 피비린내 나는 세월이었음을 감안할 때 신라 또한 멸망은 당연하다고 했을지 궁금하다. 

 

멸망 당시 백제는 5방 37군 200여 성으로 인구는 76만여 호로 350만~ 4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러한 국세로 한 달은 커녕 열흘도 버티지 못하였다는 것은 의문이다. 당시 사비성 인구 5만으로 볼 때 3천 궁녀는 과장된 이야기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과 조선 시대에 문인들이 지어낸 상상력의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적의 침공에 대응한 백제군은 좌평 의직의 서부전선 군대와 계백의 5천 결사대를 제외한 다른 백제 군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백제군의 동원과 대비에도 이해할 수 없는 의문 투성이다. 

 

의자왕은 641년 3월 즉위초부터 윤충, 성충, 의직, 은사 등의 장수들과 함께 신라를 지속적으로 공략하였고, 고구려와 동맹을 맺는 등 국력을 신장하여 영토 확장에 주력하던 의자왕이었다. 이렇게 총명하고 담대하던 의자왕이 어느날 갑자기 태자궁을 수리하고 망해정을 짓는 등 사치와 방탕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충신을 멀리하였다는 이야기도 의문이다.

 

일설에는 백제 조정이 친신라파와 친왜파가 갈려 암투를 벌였고 의자왕의 정비가 왜인 출신의 왕비 은교라는 여자로 무왕의 부인 대비와 고부간에 심각한 갈등이 존재하였으며, 많은 후궁들과 그녀들의 자식들인 41명의 왕자들간에 후계자 다툼도 치열하였을 것이다. 그 증거가 태자 태가 태자 효로 중간에 바뀌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태자가 바뀌었다는 것은 내부적으로 엄청난 정쟁이 있었다는 것이며 권력투쟁 결과 태자 태의 주변 인물들이 대거 몰락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몰락한 인사들은 죽거나 유배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당과 신라와 내통하거나 낙향하여 반백제 운동에 앞장서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또 백제인의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역사적으로 보기드문 명콤비를 이룬 신라 김춘추와 김유신의 등장이다. 김춘추는 대야성 함락시 죽은 자신의 딸과 사위에 대한 한깊은 원한이 가슴속 깊이 내재되어 있었고 김유신은 병법과 전략.전술이 줄충한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의 보기드문 명장으로 백제 조정 내부에 간첩 조미암, 간신 좌평 임자, 요녀 금화를 조종하여 정보를 빼내고 내부적으로 혼란을 야기토록한 것이 치명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일설에는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대피하였을 때 웅진성에서 끝까지 항거하지 못하고 웅진성 방령이 의자왕을 나포하여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였다는 설과 의자왕이 웅진성을 몰래 빠져나가 계룡산 토굴속에 숨어 있었는데, 김유신이 백제의 점술가를 불러 고문 끝에 찿아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암튼 백제의 멸망에 대해서는 의문투성이다. 후대의 사가들이 자기 편리한 대로 사실을 왜곡하여 승자의 역사를 기술하였고 고구려에 이어 신라를 고통스럽게 하던 숙적 백제에 대한 기록을 곱게 기록하였을리가 없을 것이다. 장점은 축소하고 단점은 과장하여 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백제로 왜곡 기록하였던 것이다.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운동이 3년이나 끌면서 들불처럼 백제 전역에 피어 올랐던 것을 보아도 백제는 그리 쉽게 망할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도자와 권력층의 정쟁, 충신들의 내침, 간신의 등용, 그리고 내부에 암약하던 적의 동조세력, 지방 세력의 이반, 군부의 사기저하와 전비태세 부족, 사치와 방탕, 부패와 비리 그리고 권력자들의 치부, 국론 갈등 등이 어우러져 멸망은 한순간에 다가왔던 것이다. 

 

 

백제의 멸망과 오늘의 현실

 

백제의 멸망을 보면서 회한이 서려오는 것은 오늘의 우리 현실과 너무나 비슷하기에 착찹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다.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의 군부 대숙청은 '하나회'를 척결하는 공을 세웠는지 몰라도 군대를 오합지졸로 만든 공이 더 크다고 할 것이다. 이어 햇빛정책 10년 동안 김대중, 노무현 두 정상은 김정일을 만나 남북합의서를 만들고 평화상까지 받았으나 퍼주기만 했을 뿐 이산가족상봉 정례화,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설치 뿐이다. 북한은 이러한 돈으로 군비를 증강하고 핵무기를 개발하면도 주민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두만강을 건너 탈북 사태가 속출하는 등 아사자가 넘쳐나고 있는 현실이다. '자살위장' 탈북이 속출하고 북한 주민들이 떼를 지어 월경하여 중국 지역에 식량, 벌목, 약초 등 '원정절도'를 벌이는 사태도 속출하고 있다. 수많은 북의 '꽃제비'가 거지 행색으로 북한 지역을 떠돌면서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있다. 그래서 김정일은 남한의 지원이 중단되자 지금의 이명박 정권을 적대적으로 대하면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으로 앙갚음을 하였다. 그러나 북의 이러한 도발에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정부와 군부는 대량보복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피해만 당하자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있는 현실이다.

 

조폭은 말로해서는 절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반드시 주먹이 날아가야 정신을 차리며 자기보다 더 센눔의 한 방에 무릎을 끓게 되어 있다. 2012년에는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다. 적의 도발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수도권이 근거리에 있는 우리는 입장에서 아킬레스같은 취약한 점이 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 수도권 포격으로 엄청난 피해와 혼란은 가중될지 몰라도 한국은 용공분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케네디의 쿠바사태나 장개석의 금문도 사태처럼 한 나라의 위대한 지도자는 충분한 심사숙고후에는 단호한 결단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무능한 지도자 밑에 유약한 안보수석, 그리고 위만 쳐다보는 국방장관이 존재하는 한 단호한 대응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암약하는 좌익간첩들이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있고, 종북.친북 세력들이 나팔수를 동원하여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군부는 사기가 저하되어 자존심도 의지도 없는 오합지졸 군대가 되어 버렸고, 각종 비리와 부패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하늘에서, 바다에서, 땅에서 떨어지고 침몰하고 깨지고 부수지고 터지는 사건이 연속이다. 군기강도 땅에 떨어져 있고 사기도 바닥이다. 군부대가 이전하려도 갈곳이 없어 이 땅의 노숙자 신세가 된 지 오래다.

 

육군참모총장이 말썽난 부동산 건으로 사의를 표하고 전역 지원을 하여 군을 떠난다고 한다. 여론의 희생타로 청와대에서 주문을 했을 것인지도 모른다. 육군총장이 어떤 자리인가? 소위 임관 후 40년 가까이 군에 몸담으면서 수많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험지와 사지를 거쳐오면서 바라던 최고의 자리이며 성공의 결정판이 아닌가! 그리고 차후 합참의장과 국방장관을 바라 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한 게 아닌가! 최근 철원.화천 지역구 보선에서 당선된 한나라당 한기호 국회의원은 군단장 출신이며, 현 한민구 합참의장, 황의돈 총장은 모두 육사 31기로 같은 동기생들이다. 황총장은 이라크 파병 사단장까지 역임한 동기생 중에서도 뛰어난 훌륭한 인재이다.  황의돈 총장의 어렵지만 단호한 결정에 찬사를 보낸다. 자의던 타의던 군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짐이 된다면 그리고 그동안 군 생활을 통해 조금이라도 부정과 부패에 연루되었다면, 그리고 자신이 무능하여 군 개혁에 짐이 된다고 판단된다면 스스로 군복을 벗는 장군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와 아울러 신임 김관진 국방장관은 목숨을 걸고 국방선진화에 매진하지 않으면 이러한 국가의 안보의 위기를 탈출하기 힘들 것이다.

 

한편으로 정부에 버림받고 국민들이 군을 천시하는 나라, 바로 백제의 말기 현상과 너무나 비슷하여 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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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백제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신 블로그 방문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능력도 미천하고 아는 것도 없어도 최선을 다해 우리의 역사를 재조명해 보았으며 저 자신도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고 우리 역사에 대해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되었읍니다.

 

어슬프게만 알고 있던 백제 역사를 숨가쁘게 다시 기술하면서 마지막 장까지 달려왔읍니다. 백제 역사를 기술하면서 저 스스로 새롭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되었읍니다. 역사란 과거와의 만남이라고 했던가요?  지난 역사를 되살피면서 오늘을 되돌아 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자신들의 역사를 홀대하는 민족은 결코 장수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유태인의 역사인식 자세를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역사를 성경처럼 바이블화하여 생활하하며 역사에 대한 이해와 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부와 교육계는 역사를 선택으로 바꾸고 청소년들에게 역사를 모르는 후대를 키우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해야 할 것입니다.

 

저도 좀 쉬었다가, 다음에는 신라의 역사에 대하여 기술토록 하겠읍니다. 항상 즐겨 방문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년말년시 건강유의하시고 즐거운 성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서초동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