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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5 : 고구려 역사 8 (제5대 모본왕) 본문
한국의 역사 25 : 고구려 역사 8 (제5대 모본왕)
제5대 모본왕
모본왕(慕本王, 30년경~53년, 재위: 48년~53년 음력 11월)은 고구려의 제5대 왕이다. 이름은 해우(解憂) 또는 해애루(解愛婁)로 해씨(解氏)일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다. 대무신왕의 원자(元子)이자 둘째 아들이다.
생애
32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나이가 어려서 숙부 해색주(解色朱, 민중왕)가 왕위에 올랐고, 48년에 민중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모본왕은 성격이 포악하고 국사를 살피지 못해 백성들이 원망했다고 한다.
49년에 장수를 보내 후한(後漢)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이에 후한의 요동 태수 제융(祭肜)이 화친을 청해와 화친하였다.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음력 8월에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51년에는 기록하기를 “왕이 날로 포악해져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베어 사람이 혹시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고 하였다. 이에 53년에 신하 두로(杜魯)에게 살해당했다.
가계
- 고익(高翊) : 48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이후의 생애는 알 수 없다.
동시대 백제,신라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BC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8~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해우).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8~53) (53~146) (146~165) (165 ~ 179)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l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0~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1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련)(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3)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8~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
│ │ (부마도위)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 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제5대 모본왕 실록
( ?~ 53년, 재위 서기 48년 모월- 53년 11월, 약 5년)
모본왕은 대무신왕의 아들로 대무신왕의 첯번째 왕후의 소생이며, 이름은 해우이다. 서기 32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서기 44년 대무신왕이 죽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대신 숙부인 민중왕(해색주)가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48년 민중왕이 짧은 재위를 마치고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제5대 모본왕이다.
기원전 37년 ~ 668년
476년 고구려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졸본 (기원전 37년 ~ 3년)
국내성 (3년 ~ 427년)
평양성 (427년 ~ 668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8년69만호 (약 3,500,000명)
성립
기원전 37년
멸망
668년
초대 군주
동명성왕
기원전 37년 ~ 기원전 18년
최후 군주
보장왕
642년 ~ 668년
성립 이전
부여
해체 이후
발해, 신라
모본왕의 즉위 과정은 순탄하지는 못했다.
모본왕의 어머니는 대무신왕의 정비였다. 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 때문에 대무신왕은 후궁을 맞이하게 된다. 새로 후궁으로는 갈사왕의 손녀 해씨였다. 그녀는 얼마가지 않아 아들을 낳았는데, 대무신왕은 득남의 기쁨으로 아이의 이름을 호동이라 지었다.
호동은 총명하고 뛰어난 아이로, 장성함에 따라 그의 뛰어남은 주변 국가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게 호동의 명성이 드높아지고 있을 때 뜻밖에도 제1왕후가 아들을 낳았다. 대무신왕은 그 아이의 이름을 해후라 지었다.
해후가 아직 어린 나이였을 때 호동은 이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낙랑 정복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호동은 차기 왕감으로 지목되었고, 그때부터 고구려 조정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암투가 시작된다.
암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제1왕후는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기 위해 호동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말하지면 호동이 태자에 책봉되리라는 생각에 거만하고 방자하여 어머니인 자신을 능멸하고 심지어는 욕보이려 했다는 말을 꾸며 호동을 벌 줄 것을 왕에게 간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대무신왕은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여 호동에게 사실 진위를 추궁하자 호동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살을 감행한다.
이 사건은 서기 32년 11월에 발생한다. 그리고 다음달에 대무신왕은 해후를 태자에 책봉한다. 이 때 해후는 기껏 1-2살 정도밖에 안되었다. 그후 12년 후에 대무신왕이 죽었으니 이 때 해후는 아직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섭정할 모후도 죽고 없는지라 태자는 졸지에 천덕꾸러기로 전락한다.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해후는 민중왕이 왕위에 올라있던 4년 동안 누차에 걸쳐 죽음의 위기를 넘겼을 것이다. 해후는 민중왕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고 어떤 빌미만 있으면 그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제2왕후와 호동과 낙랑공주를 따르던 사람들로부터 미움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요행히도 해후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4년만에 민중왕이 죽자 꿈에도 그리던 왕의 자리에 오른다. 이 때 해후는 기껏 17-18세 정도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모본왕에 대한 기록은
"모본왕은 성질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나랏일을 돌보지 않으니, 백성들이 그를 원망하였다."
이처럼 모본왕은 그다지 어질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다고 한다.
모본왕은 즉위 이듬해인 서기 49년 2월에 대군을 동원하여 한의 북평,어양,상곡(현재의 북경 근처),태원(현재 화북 지방의 태원시로 황하 동쪽 근거리에 있음) 등을 습격하여 빼았는다. 이 지역들은 장안에서 그리 멀지 않는 지역으로 요서 지역을 정벌하고, 황하 동쪽을 거의 장악하였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한의 유수는 고구려에 한의 요동 태수 채용을 보내 화친을 제의한다. 요동 태수는 고구려가 점령한 지역을 통치하던 한의 지방 관리였다.
한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인 고구려는 한과 한동안 평화가 지속된다.
이무렵 고구려는 이상 기후로 홍수로 20여 개의 산이 무너지고 이듬해에는 서리와 우박이 심해 농사를 망치자 국고를 열어 빈민을 구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재해는 정세의 불안을 가져와 어린 시절 불안한 세월을 보낸 모본왕은 주변 사람들과 신하들을 불신하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 모본왕 4년, 왕이 갈수록 포악해져, 앉을 때눈 사람을 깔고 앉으며,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만약 사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가차없이 목을 베었다.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잇으면 그에게 활을 쏘았다."
이 짧은 기록은 그의 폭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잘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폭정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모본왕의 충직한 근신 가운데 두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항상 불안해 하였다. 아무리 충직한 신하라도 언제 죽을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찿아와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에게 "사내 대장부가 왜 눈물을 흘리는가. 옛 사람의 말에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 했다. 백성의 원수인 왕을 죽이라" 고 했다.
이 말에 용기를 얻은 두로는 칼을 품고 궁궐로 왕을 찿아가서 단번에 모본왕의 목을 쳤다. 모본왕은 즉사하였고, 신하들은 유리명왕의 여섯째 아들 재사에게서 태어난 아들 궁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이가 바로 고구려 제6대 태조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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