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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3 : 고구려 역사 6 (제3대 대무신왕) 본문
한국의 역사 23 : 고구려 역사 6 (제3대 대무신왕)
제3대 대무신왕
대무신왕(大武神王, 4년~44년)은 고구려의 제3대 왕(재위 : 18년~44년)이다.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무휼(無恤)이고,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생애
즉위 이전
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로 다물후 송양의 딸 송씨의 소생이다. 유리명왕은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첫째인 도절(都切)은 요절하였고, 둘째 해명(解明)은 황룡국(黃龍國)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일로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셋째인 무휼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장성하면서 영특하여 큰 지략이 있었다고 전한다. 서기 9년에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하자 당시 왕자였던 무휼은 부여의 사신에게 부여의 내부 사정부터 잘 다스리라 충고하였다. 또한 13년 음력 11월에 부여가 침공하자 무휼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매복작전을 펼쳐 부여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14년에는 태자로 책봉되어 국정을 맡아 보았으며 18년 음력 10월에 유리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37년 ~ 668년 | |
---|---|
476년 고구려 전성기 때의 지도 | |
공용어 | 고대 한국어 |
수도 | 졸본 (기원전 37년 ~ 3년) 국내성 (3년 ~ 427년) 평양성 (427년 ~ 668년) |
정치체제 | 군주제 |
인구 최대치 668년 |
69만호 (약 3,500,000명) |
성립 | 기원전 37년 |
멸망 | 668년 |
초대 군주 | 동명성왕 기원전 37년 ~ 기원전 18년 |
최후 군주 | 보장왕 642년 ~ 668년 |
성립 이전 | 부여 |
해체 이후 | 발해, 신라 |
즉위 초기
동부여와의 전쟁
서기 20년 음력 10월, 부여의 대소왕은 대무신왕에게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사신을 통해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전하며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으로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도다.”라며 까마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대소왕에게 전하였다. 대소왕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서기 21년 음력 12월 대무신왕은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22년 음력 2월 고구려의 장수인 괴유(怪由)가 대소왕을 죽였으나 부여군에게 포위 당한 끝에 후퇴하였다. 대소왕을 잃은 부여는 분열되어 대소의 동생은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웠으며 음력 7월에는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부여 백성 1만 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다.
한나라와의 전쟁
26년 음력 10월 개마국을 공격하여 복속시켰고, 음력 12월에는 구다국이 항복하였다. 또한 을두지(乙豆智), 송옥구(松屋句) 등을 등용하여 내치를 다졌다.
28년 음력 7월에 한(漢)나라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에 고구려군은 을두지의 진언을 따라 위나암성에서 수십 일 동안 농성하였다. 한(漢)군이 포위를 풀지 않자 을두지가 계책을 내기를 위나암성이 암석의 땅으로 물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니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에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퇴각하였다.
재위 후반
낙랑 정벌
32년에는 낙랑(樂浪)을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낙랑국 정벌에 앞서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왕 최리(崔理)와 만나 사위가 되었다. 호동은 귀국한 후 최리의 딸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고 이후 낙랑국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기 위해 호동을 최리의 딸과 정략혼인시키고,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이 낙랑 정벌 기록은 현재까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낙랑을 한군현(漢郡縣)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한 기록이 없으며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찾을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한편 낙랑국과 낙랑군이 병존하였던 정치체로서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國邑)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도 있다.
37년에도 낙랑을 정벌하여 병합한 기사가 있는데, 이를 32년 낙랑 정벌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며, 독립적인 기록으로 판단하여 고구려가 한군현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을 정벌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44년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다시 낙랑을 정복하여 살수(薩水) 이남을 한나라 영토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광무제가 낙랑을 회복하였던 것은 30년의 일로, 이 시기에는 군사 활동이 없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이 오기(誤記)이며 살수가 실질적인 경계선으로 확정되었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멸망한 낙랑의 유민 5000명은 신라로 투항하였다.
만년
32년 음력 11월에 왕자 호동이 대무신왕의 첫째 왕후의 모략에 빠져 어머니를 간통했다는 누명을 받았으며,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하였다. 음력 12월에는 적자인 해우(解憂)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이해에 후한(後漢)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여 광무제로부터 왕호를 인정받았다.
44년 음력 10월 대무신왕은 향년 41살의 나이에 서거하였다.
가족관계
- 왕비 : 특별한 기록 없음.
- 해씨 부인 : 갈사부여의 갈사왕의 손녀
동시대 백제,가야,신라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BC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8~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해우).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8~53) (53~146) (146~165) (165 ~ 179)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l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0~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1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련)(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3)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8~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
│ │ (부마도위)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 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제3대 대무신왕 실록
( 서기 4~서기 44년, 재위:서기 18년 10월- 서기 44년 10월, 26년)
유리명왕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첯째 도절은 유리명왕의 화친제의에 반대하다 원인을 알 수 없이 죽었다. 둘째 혜명은 황룡 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사건으로 유리명왕의 명에 따라 자결했다. 이에 세째 아들 무휼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3대 대무신왕이다.
무휼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불과 10세 되던 해인 유리명왕 32년(서기 13년) 11월에 고구려를 침략한 부여군을 방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무휼은 적을 산골 깊숙히 끌여들여 골짜기에 적을 가두고 기습전을 펼치는 계책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11세 되던 해에는 태자에 책봉되어 유리명왕을 대신하여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으며 4년 뒤인 서기 18년 10월 무휼은 유리명왕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과감한 팽창정책을 펼쳐 나간다.
당시 중국은 한나라에서 왕망이 왕위를 찬탈하고 신나라를 세운 이후 중원은 왕망군과 농민군의 전쟁에 휩싸인다. 이에 따라 국제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고구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영토확장을 위한 정복전쟁에 나선다. 그러나 후한 광무제의 출현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대무신왕이 왕위에 오를 무렵 왕망의 신나라는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부패한 정권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산동 지방의 '번승'이 일으킨 <적미의 난>과 녹림산에서 '왕광'과 '왕봉'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녹림의 난>이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대무신왕은 대대적인 팽창정책을 감행한다. 대륙의 맹주였던 한나라의 붕괴와 한나라를 붕괴시킨 왕망 정권의 몰락은 곧 북방의 맹주를 자처하던 고구려와 부여에겐 영토확장의 기회였다.
부여의 대소왕은 고구려 대무신왕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고구려 장수 괴유에게 목이 베인다. 대소의 죽음은 부여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 주는데 왕을 잃은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고,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대소의 막내 동생은 부여를 탈출하여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운다. 또한 대소의 사촌 동생이 백성 만여 명을 대리고 고구려에 귀순해 온다.
이 무렵 중원에서는 한 왕조의 후예인 '유연'과 '유수' 형제가 한의 재건을 맹세하고 신의 군대와 격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23년에 마침내 왕망을 제거하고, 2년 뒤 서기 25년에 유연의 동생 유수가 유연을 제거하고 한의 왕으로 등극한다.
중원이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가운데 고구려는 안으로 관제를 정비하고 밖으로는 꾸준히 팽창정책을 추구하여 서기 26년 10월에는 '개마국'을 복속시키고, 같은 해 12월에는 '구다국'을 복속시켰다. 이 때 대무신왕은 직접 정벌전쟁에 나서 개마국 왕을 죽이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팽창정책이 가속화 되고 있을 무렵 유수는 한의 요동 태수를 앞세워 고구려를 침략한다. 서기 28년 한의 요동 태수가 백만의 군사를 이끌고 위나암을 향해 밀려들자, 고구려 조정은 수성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한의 요동군은 위나암을 겹겹이 에워싸고 장기전 태세에 들어갔다. 이 때 좌보로 있던 재상 '을두지'는 적이 위나암성의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판단하고 연못의 잉어를 수초에 싸서 적장에게 보냈다. 그러자 적장은 단시일 내에 성을 점령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물러난다.
이에 대무신왕은 팽창정책을 지속하여 낙랑을 정복하는데 선봉에 선 사람은 바로 대무신왕의 둘째 아들 왕자 '호동'이었다. 호동은 낙랑 정복을 위해 낙랑 왕 최리의 딸과 결혼을 하면서까지 철저하게 정복야욕을 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호동은 낙랑 정복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대무신왕의 왕후가 자신의 아들을 태자에 책봉시키기 위해 간계를 꾸미는데, 바로 왕자 호동이 자신을 간통했다는 계략에 누명을 쓰게 되자 , 결국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로부터 5년 후 대무신왕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낙랑을 복속시키게 된다.
이와 관련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고구려 시대의 대표적인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남아 있다.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조국을 선택할 것인가?' 결국 낙랑공주는 사랑을 선택하여 자신의 적이 국경을 침범하면 스스로 울리면서 나라를 지켜주던 '자명고'를 찟는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나고 아버지의 나라인 낙랑국이 고구려군에게 멸망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사랑의 힘은 이렇게 위대한 것인가? 결국 호동왕자도 고구려의 왕이 되지 못하고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는데 바로 왕후의 간계로 인해 아버지의 노여움을 쌌고,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끓는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다. 이와같은 수많은 러브 스토리가 영화와 연극으로 재생되어 우리들에게 아름다우면서도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로 가슴속에 남아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낙랑 복속은 후한의 반발에 부딪힌다. 후한은 낙랑 지역이 원래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돌려 줄 것을 요구한지만 고구려는 이에 응하지 않는다. 이에 후한의 유수는 서기 44년에 바다를 통해 낙랑 지역에 군사를 투입하였고, 결국 고구려는 낙랑지역을 후한에게 다시 빼았기게 된다.
<삼국사기>는 이 사건 이후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 때의 살수는 한반도의 청천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요서 지방의 강을 가르킨다고 보아야 한다.
낙랑국의 위치에 대한 이설들
낙랑(樂浪)이라는 말을 풀이해보면 '물결을 즐긴다'는 뜻이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파도를 즐긴다'는 뜻이다. 이는 곧 낙랑이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낙랑은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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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이라는 이름이 처음 언급된 <한서>에는 한사군의 순서가 진번.임둔.낙랑.현도 순으로 되어 있다. 이 배열은 아마도 한나라 수도 장안에서 가까운 순서에 따랏을 가능성이 높다. 이 논리에 의하면 낙랑은 현도보다 장안에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살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최근한 역사학자 박사 학위 논문에서 비정한 한사군의 위치는 당시 문헌을 근거로 지리적인 거리를 연구한 결과 아래의 그림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에 대해 거리 단위가 시대별로 다른점을 들어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다. 그만큼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한반도 일대라느니, 압록강 딜애 및 만주지역 일대라느니, 한하.갈석산 일대를 포함하여 북경과 요서지역 일대라는 주장들이 팽팽이 맞서고 있다.
그런데 <후한서>의 '부여국'편에서 "부여국은 현도 북쪽 1천리에 있다."고 쓰여 있다. 다시 말해서 부여국은 현도 남쪽의 경계선으로부터 1천 리 북쪽에 있다는 뜻이 된다. 또 <후한서>는 "부여의 남쪽은 고구려와 접한다."고 쓰여 있다. 따라서 현도는 구구려의 서남쪽에 잇어야 한다. 그러나 ,후한서> '동옥저'편에는 현도군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의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후에 이맥들의 침략을 받게 되자 군을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기고, 다시 옥저를 현으로 삼아 낙랑의 동도위부에 예속시켰다."
이 기록에서는 현도가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 갔다고 했다. 이는 같은 책 '부여국'편의 "부역국은 현도의 북쪽 1천 리에 있다.", "부여의 남쪽은 고구려와 접한다."는 기록과 모순된다. 또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하면 군의 위치가 상황에 따라 옮겨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후한서>의 편자가 고구려 땅을 자신들이 지배했다는 논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현도의 위치를 조작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 어떤 기록도 현도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주장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또한 낙랑이 현도보다 한의 장안에 더 가까이 있었다는 논리를 여기에 대입한다면 낙랑 역시 한반도 안에 있을 수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낙랑의 위치를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았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대무신왕 27년 9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태조 94년 8월)
이 두 기록을 분석해 보면 낙랑의 위치는 더욱 명확해진다. 대무신왕 27년(서기 44년) 9월에 한나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낙랑은 고구려 대무신왕 20년에 정복한 곳이다. 그렇다면 낙랑은 한에 복속되었다는 뜻이고, 그 때부터 102년 후인 제6대 태조 94년(서기 146년) 8월 기사에 언급되는 낙랑 태수는 바로 한이 서기 44년에 정복한 낙랑 지역의 태수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고구려군은 낙랑 태수 부인을 한의 요동 서안평현에서 붙잡아 왔다. 이는 서안평현에 낙랑 태수가 있었다는 뜻이고, 낙랑 역시 한의 요동 서안평현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황해도 안악3호분 안 칸 동북벽 회랑의 대행렬도.
말을 탄 기병중 철갑으로 무장한 개마기병을 화면 중앙 위아래로 각각 4명씩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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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요동은 난하 동쪽, 라오허(요하) 서쪽 지역을 의미하므로 낙랑은 난하와 라오허 사이에 있으면서 난하쪽으로 지우친 바닷가에 있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결론은 대무신왕 27년 기사에 나오는 '살수'는 현재 북한에 있는 청천강이 아니라 라오허 강과 그 주변의 어떤 강을 가르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612년에 벌어지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청천강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려준다.
하지만 한의 요수를 현재의 황하로 설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 5대 모본왕 2년 기사이다.
"2년 봄, 장수를 보내 한의 북평, 어양,상곡,태원을 습격했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용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점령한 북평, 어양, 상곡은 현재의 북경 근처이며, 태원은 당의 이연이 일어났던 곳으로 황하 조금 못미처에 있는, 현재의 태원시이다. 그리고 북평을 제외하고는 모두 난하 서쪽에 있다. 그런데 이곳을 고구려가 점령하자 한 왕 유수는 요동 태수를 보내 화친을 제의한다. 이들 지역은 모두 한나라의 요동에 속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며 요수는 바로 황하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황하를 한나라의 요수로 설정할 경우 낙랑은 황하와 라오허 사이에 있으면서 황하쪽으로 지우친 바닷가에 있어야 한다. 또 살수는 라오허와 황하 사이에 있는 어떤 강을 지칭하게 되는데, 황하와 라오허 사이에 난하를 포함하여 큰 강만도 5개 이상 있으므로 그 중 하나를 살수로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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