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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 : 고구려 역사 3 (개요)

두바퀴인생 2010. 9. 22. 03:50

 

 

 

한국의 역사 20 : 고구려 역사 3 (개요)

 

 

고구려 역사 개요

 

 

                                          

                                                 광개토태왕릉비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나라였다.

 

광개토태왕릉비가 고구려 장수왕이 세운 이래 만주 벌판에 우뚝 솟아 수천 년을 찬바람 눈.비 맞으며 묵묵히 서 있었으나, 통일신라 이후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도, 그리고 1870년대 일본인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그 어느 조선인도 그 비석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한탄스런 일이었다. 그 비석은 금나라 황제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는 것이다. 신라통일 이래 고구려에 대한 역사 연구와 역사서는 전래되는 것이 없음이 안타까운 일이며, 조선의 수많은 문헌과 보물이 도굴, 약탈해 간 중국, 유럽, 미국, 일본, 러시아의 어느 박물관이나 사료 보관소, 약탈자 후손의 개인 사저에 잠들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기술할 때 남의 나라 역사학자가 쓴 왜곡된 역사서나 참조하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특히 격변기에 고려가 살아 남기 위해서 쓴 역사서라지만 고려 시대 김부식과 같은 사대주의에 빠진 문신이 쓴 삼국사기가 유일하게 전해오고 있는 실정이며, 일제시대 식민역사학자 이병도를 포함하여 그의 제자들이 식민사관을 국정교과서에 삽입하여 오늘에 이르도록하여 한국 역사로 이해하고 있는 실정인바, 이는 온 국민이 자주성을 상실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무관심 할 뿐만 아니라 조상의 위대한 업적과 뿌리를 상실하게 만든 원흉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학자는 이병도의 제자와 후학들로 역사학계를 주름잡고 있는 현실이라, 뜻있는 일부 역사학도를 제외하고는 어느 역사학자도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이 세간의 화두로 떠오르자 몇 몇 역사학자들이 고구려와 대륙백제에 대한 흥미위주의 상업적인 책자들을 출간하고 있으며, 텔레비젼에 역사 드라마가 재미위주의 픽션으로 꾸며져 시청률이 높아지면 뒤따라 관련 역사이야기를 다룬 책을 내놓는 등 뿌리와 줄기도 없는 단편적인 상업적인 저술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래서 역사를 전공으로하는 역사학자들은 근거와 자료가 부족하고 현지를 방문하여 답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남겨진 왜곡된 역사서에 의존하며 안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죽하면 70년대 중반에 어느 육사 출신 육군 포병 중위가 전쟁사를 전공하였는데, 임관 후 전방 지역 GP에서 관측장교로 근무시 비무장 지대내에서 삼국시대의 전적지를 연구하다가 비무장 지대내에서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추가로 발견하여 역사학계를 놀라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구려 역사의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광개토태왕릉비는 1870년대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 포병 중위이며 첩보요원이었던 '사오쿠' 중위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일본군은 이 비석을 일본으로 밀반출을 시도하였으나 집안현 지사 '오광국'이 거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만약 이때 일본으로 반출되었다면 비문은 일제 침략을 합리화하는 내용으로 변조되었을 것이 분명하였다. 발견후 중국인들에 의해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최초 원본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비석의 많은 부분을 훼손시켜 지금 그 정확한 뜻을 해석하는데 국가별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등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이 그 빛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있다.

 

 

중국은 위와 같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며 그런 역사와 관련된 사적을 동북공정에 유리한 사적만 보수 보강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기타 불리한 사적은 지우고 없애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식민사고나에 빠져 잇는 동안 중국은 우리 고구려 역사를 탈취하고 그들의 지방정권으로 폄하하여 한반도를 식민화하는데 그 기초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우리 역사를 잊어버리고 방황하는 사이 우리 조상들의 역사는 사라질 운명에 처하였으며 국사 교육이 선택으로 바뀐 오늘날의 우리들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유태인들은 그들 조상의 역사인 '모세 오경'이 비록 모방되고 날조되엇다 하더라도 그들의 위대한 조상들의 역사로 간주하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매일 학업과는 별도로 유태인 집회당에 모여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 민족의 전통과 관습을 이어오고 있고 그것을 통해 그들은 2000년 동안 나라없이 세계 각지를 떠돌아 다니면서 극심환 박해와 차별 속에서도 그들 조상의 위대한 역사를 잊지 않았기에 오늘날 다시 그들의 고토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까지 세우지 않았는가! 자신들 조상들의 역사를 잊은 자는 결국 이 지구상에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망각하고 있다는 점과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정신을 잊어버린 민족은 결코 위대한 역사를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데, 중국의 동북공정은 무슨 의도일까? 그들이 반드시 목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무너지고 파괴된 고구려의 성곽과 봉분을 제대로 된 고증도 없이 보수를 하고 덧칠을 하는 등 자기들 속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유네스코에 등제하려고 까지 하고 있다. 이 문제는 북한과 같이 공동으로 강력대처해야 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난 번 남북정상회담의 주요 안건으로 제안하고자 하는 역사학자나 정치가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탁발씨가 건국한 선비족의 나라 위나라, 글안족이 세운 금나라,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주변 소수민족이지만 중원을 장기간 점령하여 한족을 통치하였으나, 그들 소수민족은 몽고를 제외하고는 국가다운 국가를 지금까지 유지해온 민족은 없다. 현재의 그들은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소수 민족으로 한족의 지방 자치구로 차별받으며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그들이 세운 나라는 사라졌다.

 

그러나 중국의 수.당나라의 침공에 대항하여 수백 만 군대를 저지한 고구려는 그 후 당의 집요한 공격과 신라의 외부 세력을 이용한 통일 전쟁을 통하여 결국 멸망하였으나, 고구려 후예인 대조영에 의해서 대발해의 재건과 부흥으로 수백 년 간 명맥을 유지하였다. 비록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은 달성하였지만 지금은 재평가 되고 있는 것은 만주 강역의 고구려 고토를 상실하고 오로지 반도내에서 안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중국의 수와 당은 고구려 정벌로 인하여 수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고, 당태종도 중국 역사에서는 '정관의 치'라 칭송하며 중국 역사에서 가장 현명한 성군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치적 말년에 고구려를 3차에 걸쳐 침공했던 것이 당나라 국운이 쇠약해지는 가장 큰 요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비록 고구려와 벽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였으나 그들은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닌 당당한 개별국가로 자리메김 하였던 것이다. 수나라 인구수는 당시 2000만 명 정도였는데, 전투 참가 병력이 100만 명이라면 그 지원병력은 전투병력의 2배 정도로 보았을 때, 거의 300만 명에 가까운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던 것이며, 결국 약 30만 명의 수나라 별동대인 육군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에서 대부분 전멸되었고, 수군 30만 명도 대동강 입구 전투에서 상륙하다가 고구려 군에게 전멸되었던 것이다. 그후 중국의 당나라와 원나라, 청나라는 고구려, 고려, 조선 정벌시 엄청난 전비와 병력으로 나라가 망했던 수나라를 상기하고, 한반도 지배에 연연하지 못하고 군신관계, 형제관계, 조공관계, 상국대우만 요구하고 물러났던 것이다. 한반도는 그들 입장에서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사지이며 망지였던 것이다.

 

그러면 중원을 정복한 고구려의 건국과 영토 팽창, 그리고 중흥, 쇠퇴, 멸망까지 실록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 내용은 박영규 역사학자가 쓴 실록을 중심으로 요약하여 기술하겠다.                                                                               

 

 

 

해모수에서 주몽까지 

 

 

 

 

                                        

 

 

 

해모수 

 

해모수(解慕漱)는 북부여의 시조이다. 고리국 사람으로서 일찍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뒤 천제의 아들이라 자칭하였다. 흘승골의 승(升)은 본(本)의 오기에 기인한다. 왕이 되어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하백의 딸 유화와의 사이에서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이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국호는 부여였지만 후대에서 여러 부여계 국가를 구분하기 위해 북부여로 붙여진 것으로 본다. 졸본(卒本), 홀본(忽本), 골본, 흘본(흘승골), 솔빈 등은 다 같은 이름을 지칭한다. 골(忽)은 고을이라는 뜻인데 중국사서의 기록 특징 상, 蒙, 匈처럼 졸(卒, 죽음)한다는 뜻으로 그리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야 사학자 중에는 단군조선의 말기 나라 이름이 이미 부여로 바뀌었으며 허약해진 단군조선을 이어 고리국의 해모수가 세력을 모아 B.C. 239년 4월 8일에 부여를 세웠다고 말한다. 석가탄신일로 기념하는 사월 초파일은 불교 전래 후 해모수의 건국일과 합쳐져서 생겼다고도 한다.(마치 예수탄생일이 로마의 태양축제일인 동지 즈음과 결합되어 생긴 것 처럼) 그리고 주몽은 해씨로서 해모수의 후손 중의 하나이며,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의 전 남편 우태 역시 해씨로서 해모수의 후손이라고 한다.

 

북부여 성립 당시 남쪽에서는 역시 단군조선의 옛 땅을 이어 후조선의 부왕(비왕)이 들어 있었다. 후조선은 기씨(箕氏) 조선이라고도 하지만 성씨에 대해 논란이 많아 부왕, 준왕이라고 부른다. 해모수의 고리족에 대해서 8 세기경 코리(Khori)나 그 후 몽골의 할흐(Khalkh) 족으로 이어졌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해부루 

 

해부루동부여의 창건자이다.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천제를 올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바위를 굴려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해부루가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고 말했다. 이가 곧 금와(金蛙)이다.

 

또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 속에 천신이 나타나 부루왕에게 그의 나라를 옮기게 조언하니, 해부루는 나라를 가섭원으로 옮겼고 나라의 이름도 동부여가 되었다.

 

이후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기원전 60년 경)

 

 

금와

 

금와(金蛙)는 동부여의 제2대 군주이며 주몽 설화에서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과 관련하여 자주 나타난다. 성은 해(解)씨이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금와

금와는 해부루의 아들이며 태자이다.

 

동부여의 왕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천제를 올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바위를 굴려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해부루가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고 말했다. 이가 곧 금와이다. [금와란, 금개구리로서 개구리는 고구리로부터 기인된 말로 보인다. 북방어에 알틴, 알탄, 알지, 알신 등이 한자로 금(金)으로 표기된다.] 훗날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북부여를 창건한 후, 해부루는 도읍을 옮겼으며, 이후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얼마 후,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이가 바로 유화부인이다. 해모수와 강제로 잠자리를 함께 한 유화부인은 부모에게 버려져 그곳에 있었는데, 금와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궁으로 맞아들였다. 이후 유화부인이 알을 하나 낳았고, 이 알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주몽이다.

 

이후 주몽이 장성하자, 대소를 비롯한 금와의 일곱 친자인 왕자들이 그를 시기하여 주몽의 제거를 부탁하나, 금와는 이를 허락치 않는다. 이후 대소가 주몽을 제거하려 하자, 주몽은 동부여를 떠나 졸본부여로 도피하여 고구려를 건국한다.(기원전 37년)

 

금와의 재위 기간

금와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유화부인에게서 주몽이 태어났다. 주몽의 탄생 연도가 기원전 58년이므로, 금와의 등극 시기는 기원전 6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금와가 왕위에 내려온 시기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기원전 19년 4월에 유리명왕이 어머니인 왕후 예씨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한 때를 전후로 대소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대소

 

대소(帶素, 기원전 60년?~서기 22년)는 동부여의 제3대 군주이며, 금와의 첫째 아들이다. 성은 해(解).

대소와 동명성왕

대소는 금와의 큰아들로, 6명의 형제가 있었다고 한다. 금와의 아들들과 주몽이 모두 장성하여, 금와의 후계자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주몽이 항상 금와의 친아들보다 뛰어나 대소의 시기를 사게 되었다. 대소가 주몽을 미워하여 금와에게 주몽을 제거할 것을 간언하나, 거부당한다.

 

이에 대소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주몽을 추격하던 중, 엄호수에 이르러 물고기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몽을 강 건너로 보내주는 바람에, 대소는 주몽을 더이상 추격할 수 없었다. 역사는 이 사건을 가리켜 어별성교(魚鼈成橋)라 일컫는다. 이후 주몽졸본부여로 건너가 고구려를 창건한다.(기원전 37년)

 

대소와 유리왕

유리왕이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한 기원전 19년을 전후로 대소는 동부여의 권력자가 되었다.(왕위에 등극하였는지는 불명확) 이후 유리명왕이 고구려의 왕위에 오르자, 대소는 고구려에 대한 본격적인 전쟁을 개시한다.

 

유리명왕 14년인 기원전 6년, 대소는 유리명왕과 화친을 제의하고 인질교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유리명왕이 이를 거부하였고, 그해 11월 50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략한다. 그리고 고구려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후 대소는 직접적인 전쟁보다 고구려 내부의 대(對)부여 강경파온건파의 다툼을 지켜보는 쪽으로 정책을 바꾼다. 유리명왕 역시 건국 초기에 지나친 전쟁은 원하지 않았으며, 대부여 강경파였던 탁리사비를 죽임으로써, 의지를 보인다.

 

이후 왕자 도절해명이 잇달아 죽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민심이 흔들리는 현상이 도래한다. 10년경, 대소는 다시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하나, 유리명왕이 동부여에 화친을 청하면서, 전쟁은 벌어지지 않는다.

 

대소와 대무신왕

유리명왕의 다음 대인 대무신왕 대에도 대소는 동부여 군주의 자리를 굳게 지킨다. 대무신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째가 되는 20년, 대소는 고구려 측에 몸통은 두 개인데 머리는 하나뿐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

이에 대무신왕은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구나."

 

이러한 답변을 들은 대소는 크게 노하였고 고구려에 대한 전쟁준비를 서두른다. 대무신왕은 이에 선제공격으로 맞섰다. 21년 12월, 대무신왕은 괴유를 앞세워 부여를 침공했고, 22년 2월의 전투에서 대소는 패하여 참수당한다.

 

대소가 죽은 후 대소의 동생인 갈사왕갈사국를 세웠으며, 22년 7월에 대소의 사촌동생이 백성 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귀순하는 등, 동부여는 큰 혼란에 빠진다.

 

대소의 생몰년

대소는 주몽의 탄생년인 기원전 58년 이전에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대무신왕과의 전쟁에서 죽었을 때는 서기 22년 2월로, 80대의 나이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