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22 : 고구려 역사 5 (제2대 유리왕) 본문
한국의 역사 22 : 고구려 역사 5 (제2대 유리왕)
제2대 유리왕
유리명왕(瑠璃明王, 기원전 38년 ~ 기원후 18년)은 고구려의 제2대 왕(재위 : 기원전 19년 - 기원후 18년)으로 휘는 유리(榴璃 또는 類利) 또는 유류(孺留)이다. 동명성왕과 왕후 예씨의 맏아들이다. 기원전 3년에 졸본에서 수도를 위나암(국내성)으로 옮겼고, 계비 치희를 그리워해서 지었다는 황조가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재위 33년인 서기 14년에 무휼을 태자로 삼았고, 2만 명의 군대와 오이와 마리 장군을 보내 서쪽의 양맥(梁貊)을 치고, 또 현도군의 고구려현(高句麗縣 또는 高句驪縣)을 쳐서 복속시켰다.
탄생과 즉위
유리명왕은 동명성왕의 맏아들로 동부여 출신의 왕후 예씨의 소생이다. 동명성왕이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망명한 이후에 태어났으므로, 출생년도는 기원전 38년 혹은 기원전 37년이다. 동부여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로 와서 기원전 19년 음력 4월에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이 때, 동명성왕이 남긴 부러진 칼 조각이라는 징표를 주춧돌에서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유리왕이 부여에서 탈출하는 과정은 주몽의 탈출 신화와 흡사한 면이 많고, 유리왕 이후 모본왕까지의 왕성이 해(解)씨로 나타나는 등의 문제로 인해 유리왕의 왕위 계승을 찬탈이나 개국의 형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고구려에 돌아오자마자 왕태자에 책봉된 유리는, 음력 9월에 동명성왕이 서거하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때 동명성왕의 두 번째 부인인 소서노와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 온조는 유리가 태자로 책봉된 이후 백성들을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
기원전 37년 ~ 668년 | |
---|---|
476년 고구려 전성기 때의 지도 | |
공용어 | 고대 한국어 |
수도 | 졸본 (기원전 37년 ~ 3년) 국내성 (3년 ~ 427년) 평양성 (427년 ~ 668년) |
정치체제 | 군주제 |
인구 최대치 668년 |
69만호 (약 3,500,000명) |
성립 | 기원전 37년 |
멸망 | 668년 |
초대 군주 | 동명성왕 기원전 37년 ~ 기원전 18년 |
최후 군주 | 보장왕 642년 ~ 668년 |
성립 이전 | 부여 |
해체 이후 | 발해, 신라 |
치세
유리왕은 기원전 18년 음력 7월에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왕비 송씨가 죽고 다시 골천(鶻川)사람의 딸 화희(禾姬)와 한(漢)나라 사람의 딸 치희(稚姬)를 후처(候妻)로 삼았다. 기원전 9년에는 고구려를 위협하던 선비족을 부분노(扶芬奴)의 계책을 사용해서 토벌하였다. 부여의 대소왕은 기원전 6년에 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하였고 유리왕은 부여의 강력한 국력을 꺼려하여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았다. 이에 대소는 음력 11월 군사 5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폭설로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하였다.
기원전 1년 음력 8월 교제(郊祭)에 쓰일 돼지가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자 유리왕은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 쫒게 하였다. 탁리와 사비는 돼지를 잡은 후 돼지 다리의 힘줄을 끊었고 유리왕은 제사에 쓰일 돼지에 상처를 냈다 하여 이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처형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대(對)부여 강경파를 숙청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서기 1년 정월에는 태자 도절이 죽었다. 도절의 죽음은 탁리, 사비의 죽음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서기 2년 음력 3월,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이에 장생(掌牲)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를 쫓게 하였으며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서 잡는 데 성공하였다. 왕궁으로 돌아온 설지는 위나암이 새 수도로 알맞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고하였고 유리왕은 그해 음력 9월에 위나암에 가서 지세를 살폈다. 서기 3년에는 국내(國內)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이러한 국내성 천도에 대해서 이반한 민심에서 벗어나 정권을 장악하고 동부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실시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유리왕은 치세 전반에 걸쳐서 매우 많은 사냥을 했다. 총 5번에 걸친 사냥 기록은 유리왕이 사냥을 통해서 고구려 내에서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리왕은 사냥을 통해서 서기 2년에 위사물(位沙勿), 서기 5년에 우씨(羽氏)를 등용하는 등 충실한 정치적 기반을 다졌으며, 서기 3년에는 개국공신 중 하나인 협보(陜父)의 관직을 빼앗는 등 확고한 기반을 다지는 데 사냥을 이용하였다.
서기 4년에 해명(解明)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해명은 서기 8년에 옛 수도인 졸본성에 머물고 있었는데 힘이 세고 무용이 뛰어나다고 알려졌다. 이에 이웃의 황룡국왕은 해명의 힘을 시험해보려고 강한 활을 선물하였다. 해명은 황룡국왕이 고구려를 업신여길까 염려하여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부러뜨리면서 “내가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활이 강하지 못한 탓이다.”라고 하여 황룡국왕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유리왕은 노하여 황룡국왕에게 해명을 죽이도록 하였으나 황룡국왕은 해명을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이에 유리왕은 서기 9년에 해명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해명은 자결하였다.
서기 9년 음력 8월, 부여의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부여를 섬길 것을 종용하였는데 유리왕은 국력이 부족한 것을 알고 부여에 신속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왕자 무휼(無恤)이 사신에게 부여의 내정이나 잘 다스리라는 의미의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사신이 돌아가도록 하였다.
서기 12년에 신나라의 왕망(王莽)이 흉노 정벌을 위해 고구려군을 징발하려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장수를 보내 공격하여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를 죽이고 하구려후(下句麗侯)라 비하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신나라를 공격하였다. 서기 13년에는 부여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무휼이 매복 작전을 써서 부여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서기 14년에는 양맥(梁貊)을 정복하고 현도군(玄菟郡)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
서기 18년, 유리왕은 두곡(豆谷)의 별궁에서 죽었으며 두곡의 동원(東原)에 장사지냈다.
가족 관계
- 왕후 송씨(松氏) :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 왕후 송씨가 기원전 17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아래의 아들들은 또다른 송씨부인으로부터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 화희(禾姬), 치희(雉姬) : 기원전 17년에 맞아들인 후궁들로, 화희는 골천(鶻川)사람의 딸, 치희는 한나라 출신이다.화희에 비해 치희가 아름다웠다는데,화희가 치희를 천하게 여겨 자주 다투자, 치희는 수치심을 느껴 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치희를 되찾기 위해 유리명왕이 따라갔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에 유리명왕이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노니는 모습을 보며 지었다는 노래가 바로 '황조가'라고 전해진다.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BC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8~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해우).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8~53) (53~146) (146~165) (165 ~ 179)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l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0~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1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련)(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3)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8~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
│ │ (부마도위)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 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유리왕 실록 (?~AD18, 재위 BC 19년 9월~AD18년 10월 36년 1개월)
유리왕은 주몽과 예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주몽이 졸본으로 망명하기 전에 부여 여자 예씨와 혼례를 올린 몸이었다. 주몽은 모친 유화부인으로부터 금와와 맏아들이 대소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듣고 오이,마리,협보 등의 친구들과 같이 급히 졸본으로 몸을 피한다. 당시 예씨는 이미 임신한 몸이었다.
주몽이 떠난 뒤 예씨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유류(유리)라고 지었다. 유류는 자라면서 아비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모양이다. 유류는 자라면서 어머니 예씨로부터 아버지 주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주몽이 남긴 부러진 칼 조각을 힘들게 �아서 그것을 들고 옥지,구주,도조 등의 친구들과 의논한 후 어머니 예씨와 함께 고구려로 탈출할 것을 다짐하고, 서기전 19년 4월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여 고구려 땅을 밟고 아버지 주몽을 만난다. 당시 주몽은 중병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던지라 아내와 아들이 찿아오자 매우 기뻐하였고, 유류를 태자에 책봉하였다.
유류의 태자 책봉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먼저 지금의 부인인 계루부 출신 소노서를 비롯한 아들 비류와 온조 등 반대파들이 들고 일어났으나 유류는 친주몽파의 힘을 빌어 반대파인 비류파, 즉 현재의 부인인 소노서의 지지기반이었던 계루부 출신의 관리들과 오간,마려 등의 중신들이었는데, 그들의 중심에는 소노서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있었다. 하지만 이 두파의 대립은 결국 유류파의 승리로 끝난다. 고구려 개국 이후 계루부는 동명성왕 주몽이 거의 장악한 상태였으며 주몽의 친구들인 오이,마리,협보 등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도 유류파가 승리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유류는 힘겹게 태자에 책봉되었고,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비류파는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소노서와 그녀의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비롯하여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들은 머물 곳을 �아 남쪽으로 떠난다. 이때 졸본의 많은 백성들이 따라 나섰는데 그들은 남으로 내려가 일부는 산동반도에 자리잡고 대부분은 한반도에 정착하여 백제를 세우게 된다. 이 때문에 유류는 민심이 이반되어 즉위 후에도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급기야 도성을 옮기기에 이른다.
왕위에 오른 유리명왕은 즉위 이듬해인 서기전 18년 7월에 다물후 송양의 �째 딸을 황후로 맞아들여 지지기반을 닦는다. 다물후 송양은 한 때 비류국의 왕이었으며 고구려에 복속된 이후에는 동명성왕의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류국인 다물 자치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외척으로 삼는 것은 유리명왕에게 여러 모로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양의 딸은 이듬해 10월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유리명왕은 왕후 송씨의 동생인 송양의 둘째 딸을 맞아들여 왕후로 삼는다. 그리고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개국공신들과 혼인관계를 맺는다. 지지기반이 없던 유리명왕은 이와 같은 혼인관계를 통해 반대세력들을 무마시키면서 점차 지지기반을 확대하다가 재위 11년인 서기전 9년 선비족 토벌전쟁을 계기로 힘을 강화하여 조정을 장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선비족은 고구려 변방 지역을 대상으로 노략질을 감행하고 전세가 불리해지면 요서 지역의 험한 산악지대로 숨어버리는 일종의 게릴라 전술을 쓰고 있었다.
백성들의 불안감이 짙어지자 유리명왕은 드디어 선비를 토벌하기로 결심하고 부분노에게 대군을 내주어 토벌작전을 감행한다. 토벌작전의 선봉장으로 나선 부분노는 동명성왕과 함께 고구려 영토확장 전쟁에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동명성왕 6년 서기전 32년에 태백산 동남방의 행인국을 정벌하였던 장수였다. 결국 부분노는 선비족을 정벌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유리명왕은 이 선비족 토벌을 직접을 직접 지휘하고 참가함으로써 군주로서의 위엄을 갖추게 되었고 이같은 무력적 기반을 바탕으로 왕권을 튼튼히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무렵 고구려와 동부여 사이에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는 대소가 동부여의 왕이 되면서 고구려를 적대시하고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오랜 소모전으로 내부적인 어려움을 겪던 대소는 유리명왕 14년 서기전 6년에 인질 교환 화친을 제의하였으나 고구려는 태자 도절과 중신들의 반대로 응하지 못하였다.
화친제의를 거절당한 대소는 그해 11월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동절기 폭설과 동사자 발생으로 퇴각하였다. 그후에도 대소는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유리명왕은 항상 불안에 떨고 있다가 드디어 화친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러자 강경론자들이 강력하게 반대하자 제사에 쓸 돼지를 들판에 놓아주고, 반대론자인 탁리와 사비로 하여금 그 도망간 돼지를 잡아오도록 하였다. 그들은 돼지를 잡자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리 힘줄을 잘라버렸는데, 유리명왕은 제사에 쓸 돼지에 상처를 냈다는 이유로 그들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그후 유리명왕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중병을 앓기도 하고 한편으로 태자 도절이 죽는다. 도절은 화친제의를 강력하게 반대하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도절이 왜 죽었는지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태자는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고 스스로 자살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던 그의 죽음 이면에는 유리명왕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리명왕은 이 같은 난국을 타개하고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천도를 결심한다. 측근인 설지에게 새로운 도읍지를 알아보도록 하고 국내의 위나암이 새 도읍지로 적당하다고 보고하자 직접 도읍지를 돌아보고 도성을 쌓게하여 서기 3년 10월 마친내 도읍을 위나암으로 옮겼다. 이로써 졸본성 시대는 종결되고 위나암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남은 물론 왕권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된다.
위나암으로 천도한 유리명왕은 오랫만에 사냥을 즐기며 국정을 소홀히 하자 협보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인 새 도읍지에서 왕의 적절치 못한 행동을 직언하다가 유리명왕으로부터 파면되어 농원지기로 귀양조치나 다름없이 보내 버린다. 이에 협보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구려 땅을 떠나 남으로 가서 다파라국을 세운다.
이처럼 위나암으로 옮겨간 이후에 유리명왕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그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마저 정적으로 간주되면 가차없이 죽여버렸다.
맏아들 도절이 죽은 후 둘째 아들 혜명이 태자에 책봉되었는데, 그는 천도 이후에 졸본성에 남아 그 곳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힘이 세고 용감하였기에 황룡국 왕이 보낸 활을 당겨 꺽으면서 '활 자체가 강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리명왕은 자기의 힘을 자랑한 혜명을 자신을 능멸하고 반역을 도모할 인물이며 불효자로 간주하고 몹시 분개하면서 한편으로 민심을 안정시킨 점을 몹시 불편하게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터라 황룡국에 사람을 보내 혜명을 죽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황룡국 왕은 혜명을 초대하자 태자의 측근들이 가지말 것을 주장하였으나 태자는 반대를 뿌리치고 황룡국을 �아간다. 황룡국 왕은 스스로 �아 온 혜명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여 죽이지 않고 돌려 보낸다.
이처럼 황룡 왕이 혜명을 살려놓자 유리명왕은 졸본으로 사람을 보내, 혜명에게 칼을 내주고 자결 할 것을 명한다. 이에 혜명은 순순히 명령에 복종하여 자결하였고, 이로써 유리명왕은 두 아들을 죽인 잔혹한 임금이라는 백성들의 원성을 듣게 된다.
서기 12년 중원의 내분을 틈타 동호와 흉노가 대거 남하하였고, 한에 예속되어 있던 요서의 맥족이 대거 봉기하였다. 이에 당황한 신나라의 왕망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고구려는 거절한다. 이에 왕망은 요서 대윤 전담을 시켜 고구려를 치게하나 고구려군의 반격에 밀려 한군은 대패하고 전담도 전사하고 말았다.
전담의 전사 소식을 접한 왕망은 엄우를 시켜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고 이 때 엄우의 계략에 고구려의 장수 연비가 죽게 된다.
이 때부터 우리명왕은 한나라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고, 이 틈을 노린 부여군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태자 무휼이 이끌던 수비군의 전략에 말려 전멸한다.
고구려군이 이렇게 승전을 거듭하자 유리명왕은 서기 14년 8월 오이와 마리에게 군사 2만을 내주어 고구려 서쪽 양맥을 치게 하여 아우르고, 다시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고구려현은 한의 동방정책을 담당하던 요서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에, 고구려현을 차지하는 것은 한의 동방정책을 무력화시키는 획기적인 성과였다.
이렇듯 만년에 과감한 영토확장 전쟁에 몰두하던 유리명왕은 서기 18년 4월에 넷째 아들 여진이 물에 빠져죽는 불행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해 7월 병약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휴양처인 두곡에 행차하여 휴양타가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재위 36년 1개월 만에 두곡의 이궁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57세 가량이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24 : 고구려 역사 7 (제4대 민중왕) (0) | 2010.09.26 |
---|---|
한국의 역사 23 : 고구려 역사 6 (제3대 대무신왕) (0) | 2010.09.25 |
한국의 역사 21 : 고구려 역사 4 (역대 왕조 실록 : 동명성왕, 주몽) (0) | 2010.09.23 |
한국의 역사 20 : 고구려 역사 3 (개요) (0) | 2010.09.22 |
한국의 역사 19 : 고구려 역사 2 (개관 2) (0) | 2010.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