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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6 : 부여 2 본문
한국의 역사 16 : 부여 2
동부여
동부여(東夫餘)는 부여의 일부 세력이 동쪽으로 이동해 세운 나라이다. 두만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동부여는 410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는 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가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해부루왕이 훈춘에서 동부여(東夫餘)로 나라를 옮긴 후, 그에 이어 금와왕, 대소왕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고, 22년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죽자 동부여에 극심한 분열이 일어나 대소왕의 아우가 갈사국을 세워 떨어져 나가고 그 사촌동생은 고구려에 항복해 동부여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한다. 그러나 동부여가 완전히 고구려에 복속된 것은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구려와 더불어 북방의 강국으로 군림하던 부여가 이 때를 계기로 고구려에 그 지위를 넘겨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121년 고구려가 후한과 충돌할 때 부여 왕자 위구태(尉仇台)가 현도성을 침공한 고구려의 군사를 공격하여 현도성을 구원한다. 중국의 《북사》와 《수서》는 눙안에서 이를 오해해 구태가 백제의 시조인 것으로 기록해 시조 구태설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북사》와 《수서》의 오류이다. 167년에는 부여왕 부태가 후한 본토와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현도성과의 무역 마찰이 생겨 선비족과 고구려의 묵인하에 현도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는 3세기 후반 북방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남하할 때 이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해 급격히 쇠약해졌다. 285년의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침공으로 인해 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았으나 옥저로 도피했던 그 다음 왕 의라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하였다. 346년 전연의 침공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입은 부여는 결국 고구려에 항복하여 그 왕실만을 이어갔다. 결국 410년 광개토대왕의 침공을 받고, 고구려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한국의 역사 (연표) | |||||||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
환인 환웅 | ||||||
시 대 구 분 ‥ 원 삼 국 | 삼 국 | 남 북 국 | 후 삼 국 |
고조선 | ||||||
진국 | |||||||
삼한 | 옥 저 |
동 예 |
부 여 | ||||
진 한 |
변 한 |
마 한 | |||||
가 야 |
백 제 |
||||||
고 구 려 | |||||||
신 라 | |||||||
발 해 | |||||||
후 백 제 |
태 봉 | ||||||
고려 | |||||||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삼별초의 항쟁 ・ 홍건적의 고려 침공 | |||||||
조선 | |||||||
・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 |||||||
대한제국 |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 |||||||
군정기 |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졸본부여
졸본부여(卒本夫餘)는 《삼국사기》가 기록하는 고구려의 도읍지 명칭이나, 《삼국유사》에서는 도읍지를 졸본이라 칭하고 졸본부여는 그 자리에 세워진 나라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도, 졸본 부여의 왕이 주몽을 사위로 삼아 그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다는 이설을 적어두고 있다. 〈백제본기〉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이 아예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삼국사기》에서는 시조 비류설을 언급하면서, 졸본 지방의 유력자 연타취발이 주몽을 사위로 삼고, 주몽이 그 집안의 세력과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여 그 지방의 다른 부족들을 제압하면서 고구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보아 졸본부여는 고구려의 전신 국가이거나 고구려의 별칭일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졸본부여는 고주몽이 건국한 기원전 37년의 고구려 이전에 많은 문헌에서 등장하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졸본부여라는 이름은 고구려가 부여계의 국가임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남부여
남부여(南夫餘)는 백제 성왕이 새롭게 지정한 국호이다. 이 국호나 건국 신화, 무덤 양식 등을 보면 백제는 부여로부터 갈라져 나왔고 그를 오래도록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
부여에는 임금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군주가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새 군주를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군주에게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군주가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채,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가
부여 사회의 중심적 지배 계급을 형성한 부족장의 칭호인 ‘가’(加)는 씨족장·부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구려에서도 사용되었다. 부족장 중에서 가장 유력한 자는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 가축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는데, 이들은 각기 사출도(四出道)의 하나씩을 주관하였다. 이들 대가(大加)는 왕과 마찬가지로 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 등의 직속 가신(家臣)을 갖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왕과 동질적인 성격을 가진 대가는 군주(君主)인 왕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여러 가(家)는 각자가 무기를 가지고 전쟁에 출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였다. 비록 국내에서는 흰옷에 가죽신을 신었으나 사신으로 외국에 갈 때에는 비단옷과 중국인이 부러워하는 값비싼 털옷을 입었으며, 모자는 금·은으로 꾸미는 사치스런 옷차림을 하였다. 또한 조두(俎頭)라는 고급 밥그릇을 사용하였고, 죽으면 많은 사람을 같이 순장하였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권력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富)의 소유자로서 많은 노예를 소유하였다.
행정 구획
부여의 행정 구획은 사출도(四出道)라 불렀다. 이는 국도(國都)를 중심으로 하여 거기서 사방으로 통하는 네 갈래의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앙에는 왕이 있고 4가(加)가 사출도에 있어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를 지배하였다.
사회와 문화
부여의 법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결국 고조선의 8조법과 비슷한 종류임을 알 수 있다.
부여에는 임금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는데, 이것은 수렵 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12월마다 열렸다. 이 때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기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우제점법)
하호
하호(下戶)는 부여에서 대부분의 생산 활동을 담당한 일반 사람이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양인(良人)이었지만 노복(奴僕)과 같이 사역을 받는 무력한 예민(隸民)이었다. 또 전쟁이 있을 때는 무기를 들고 싸우지 못하고 군량(軍糧)을 운반하였다. 아마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양인이었겠지만 씨족적인 공동체의 유제(遺制) 속에서 제가들의 강력한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법률
부여에서의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던 법률은 초기의 정치적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엄격한 것이었다. 현재 알 수 있는 부여의 법조목은 다음과 같다.
- ①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며 그 가족은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
- ② 절도를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한다.
- ③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 ④ 부인의 투기(妬忌)를 특히 미워하여 이를 사형에 처하되, 그 시체를 수도 남쪽 산 위에 버려서 썩게 한다. 단 그 여자의 집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나 말을 바쳐야 한다.
- ② 절도를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한다.
이상의 조목은 고조선의 법조목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개인의 생명과 사유 재산 및 가부장제적인 가족 제도의 옹호를 위한 것이라는 근본정신은 동일하다. 부여는 특히 가족 제도를 중요시하여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았다. 투기죄(妬忌罪)에 대한 가혹한 규정은 아마도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의 풍습이 상류층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제점법
부여에서 행해진 점복(占卜)의 습관. 부여에서는 전쟁이 있을 때도 제천의식을 행하고 소(牛)를 죽여 굽(蹄)이 벌어지면 흉(凶), 합치면 길(吉)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점복은 은(殷)의 갑골점법(甲骨占法)과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여겨진다.
유적과 유물
유적군은 확인되지 않으나, 길림 주변에 독특한 철기 시대의 유적(포자연유형)들이 발굴되어 이로부터 세력의 범위를 추정하고 있다.
기타
중국 사서에 나타난 부여 기록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다. 북쪽에는 약수가 있는데, 지방이 이천 리로서 본래 예 땅이다.
부여의 역대 국왕
- 해부루왕(解夫婁王)
- 금와왕(金蛙王)
- 대소왕(帶素王)
- 시왕(始王)
- 부태왕(夫台王)
- 위구태왕(尉仇台王)
- 울구태왕(蔚仇台王)
- 간위거왕(簡位居王)
- 마여왕(麻余王)
- 의려왕(依慮王)
- 의라왕(依羅王)
- 현왕(玄王)
- 울왕(蔚王)
동부여의 왕
후부여
- 갈사왕(曷思王) (21 CE-?)
- 도두(都頭) (?~68 CE)
- 위구태왕(慰仇太王) (?-?, 2세기)
- 간위거왕(簡位居王) (?-?, 3세기)
- 마여왕(麻余王) (?-?, 3세기)
- 의려왕(依慮王) (?-285 CE)
- 의라왕(依羅王) (286 CE-?)
- 현왕(玄王) (?-346 CE)
- 여울왕(餘蔚王) (?-384 CE)
- 잔왕(孱王) (?-494 CE)
위구태(慰仇太)의 기록은 후한서 동이열전에서 처음 나타나며, 삼국지 동이전에서 그 후계들이 자세하다.
현왕(玄王)은 사서에서 '346년 1월에는 모용준과 모용각이 부여를 쳐서 그 왕 여현(餘玄)을 사로잡고 5만여명을 끌어갔다.' 라는 기록으로 존재하나 여울은 단지 부여 왕자로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郞)을 지내고, 후연의 재상을 한 자라 왕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잔왕(孱王)은 나약한 군주라는 뜻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494년의 부여 멸망까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누군가 첨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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