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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1 : 고조선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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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1 : 고조선 1

두바퀴인생 2010. 9. 13. 03:07

 

 

 

 

한국의 역사 11 : 고조선 1
 
고조선에 대한 진실
 

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연표)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환인
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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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진국
삼한

 



 
 
 


 
 
 


   

   
 


고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삼별초의 항쟁
홍건적의 고려 침공
조선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고조선

 

고조선(古朝鮮,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08년)은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일컬어지는 고대 국가이다. 연대나 국가의 성격, 강역 등에 대해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어 많은 논란이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하여 만주한반도 북부에서 존속하였던 고대 국가라고 파악하고 있다.

 

고조선에 대한 구체적인 학설이 분분한 것은 사서 기록이 서로 다르고 유적을 발견할 수가 없을뿐만 아니라, 각 시대마다 자신들에게 편리한 대로 판단하여 사실을 알 지 못한채 해석하고 기록하여 왔다.

 

우선 고조선의 위치에서 만주 지역과 한반도 지역으로 의견이 다르며 이에 따라 한사군의 위치도 달라지게 된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심하게 왜곡되었음은 물론 한국측에는 기록이 거의 없는 편이며 단지 중국측 기록에 의존하다보니 중국측의 입맛에 맞게 조작되거나 축소.왜곡되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고조선의 왕조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누어져 각 시대마다 다르게 인정하고 있는 실정인바, 그 진실성이 의문시 되는 상태이다.  그래서 정확한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찿을 수 있는 사실을 규명하는 방법은 유물과 유적에 의한 방법뿐일 것이다. 그래서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 문제점을 아래 글에서 살피고 그 실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각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지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물론 역사의 기록은 대단히 중요하다. 역사 기록이 없는 민족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만 이스라엘을 세운 유태인처럼 '모세 5경'을 남겨 남의 역사라도 자신들의 역사처럼 기록하여 조상들의 위대성을 후손들에게 철저하게 교육시킨 결과  2000년이 지난 후 쫒겨났던 땅에서 다시 자신들의 나라를 되찿는 것이다. 

 

 

건국

고조선의 건국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한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무진년)에 아사달 또는 평양에서 단군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인 국가의 명칭은 조선이지만 일반적으로 한국사에서 근대에 건국된 조선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옛 고(古)를 덧붙여 고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은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명을 가진 외래 세력과 웅녀로 대표되는 토착 세력의 결합을 통해 건국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조선으로 지칭되는 불특정한 소규모 지역 집단의 집합체가 초기 고조선의 모습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일대의 청동기는 기원전 15세기 정도가 상한으로, 이에 따라 고조선의 실질적인 성립 연대를 기원전 12 ~ 10세기 무렵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조선의 건국 신화

 

고조선 건국신화는 한국 최초의 나라로 여겨지는 고조선의 건국에 대한 이야기로, 삼국유사제왕운기 등 고려 시대에 저술된 사서의 내용을 기초로 한다. 고조선의 건국 신화는 흔히 단군 신화(檀君神話)로 불린다.

옛날, 환인서자(庶子) 환웅인간세계를 다스리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아버지 환인이 인간세계를 굽어보니 삼위태백(三危太伯)이 인간을 유익하게 하기(弘益人間)에 적합한 곳으로 여겨지므로,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며 환웅으로 하여금 그곳으로 가 인간세계를 다스리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자 환웅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비롯한 3,000명의 수하를 이끌고 태백산 정상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신시라 칭하며 다스리니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불렸다. 그는 곡(穀, 곡식), 명(命, 목숨), 병(病, 질병), 형(刑, 징벌), 선함(善), 악함(惡) 등 360가지 일을 맡아 인간세계를 다스렸다.

그러자 같은 동굴에 사는 호랑이 한 마리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늘 간청해왔다. 이들의 간청을 들은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神靈)한 1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며 이것만 먹고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곰은 인내하고 근신하여 삼칠일(3×7, 21일) 만에 인간 여자로 변하였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자신과 혼인하는 사람이 없자 신단수 아래에서 환웅에게 아이 갖기를 기원했다. 그러자 환웅은 잠시 인간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였다. 그 후 웅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이다. 왕검은 당고(唐高, 당고는 요임금을 말함) 즉위 50년 후인 경인년(요임금이 즉위한 때는 무진년으로 그 50년 후는 정사년임. 따라서 기록의 오류로 보임)에 평양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 훗날 도읍지를 백악산〔白岳山, 또는 궁홀산(弓忽山),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함〕 아래 아사달로 옮겼다. 단군은 이후 1,500년간 조선을 다스리고 주나라 무왕(武王, 삼국유사에는 고려 혜종의 이름인 武 대신 虎로 표기됨) 즉위년에 기자를 조선 왕으로 봉하고 자신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뒷날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는데 그때 단군의 나이 1,908세였다.

 

해석

단군 신화는 간단히 말해 천신이 나라를 세우고, 그 왕위가 이어져갔다는 것이다. 이는 앙권의 정통성과 국가의 존엄성을 수식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관념에 따르면, 천신의 자손인 현왕(現王)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로, 영계(靈界)와 인간계(人間界)를 매개할 수 있는 샤먼(shaman)과 같은 특이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고조선의 왕은 매년 그의 조상신인 천신께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그때 베풀어진 의식은 단군 신화의 내용을 재현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이 제의에 고조선을 구성하던 모든 집단의 장들이 참여해 정치적 통합을 강화하고 결속력을 높였을 것이다. 곧 단군 신화는 고조선 당대의 정치이데올로기였고, 그 제의는 정치적 집회의 기능을 지닌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은 다음 시기인 삼국시대에도 이어졌다. 천신의 자손이 강림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신화는 동북아시아 지역 고대국가의 건국신화에서 흔히 보인다. 또한, 자신의 조상이 곰이었다고 하는 전승과 곰 숭배 신앙은 시베리아 퉁구스(Tungus)족의 여러 종족 사이에서도 널리 존재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 고대문화의 기저에는 시베리아 지역 주민들의 문화와 연결되는 면이 존재함을 재확인할 수 있다.

 

단군 신화는 이를 통해 고조선인의 의식세계를 살필 수 있다는 점 외에, 그것이 후대인들에 의해 시기마다 새롭게 재해석되면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12세기 후반 장기간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 이후, 단군은 한국사의 독자성과 유구성 및 한국인 동질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초기

고조선이 최초로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7세기로, 이 무렵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관자(管子)》에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에 성립된 기록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 바다의 북쪽에 있다고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특정한 국가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요동지방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 집단을 통칭한 것으로 본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 집단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이 큰 세력으로 통합되면서 고조선이라는 고대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통합한 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중반에는 연나라와 관련된 사료에서 조선이 연나라 동쪽의 유력한 세력으로 언급된다. 적어도 이 무렵에 고조선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여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국가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말에는 연나라와 분쟁이 일어나 고조선 측이 선제 공격을 꾀하였다가 중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중국은 종주국인 주나라가 쇠퇴하고 각 지의 제후들이 왕을 칭하고 있었는데 연나라가 기원전 323년에 왕을 칭하자 고조선의 군주도 ‘왕’이라 칭했다고 한다.

 

기원전 4 ~3세기경에 한족흉노족의 활발한 움직임에 따라서 고조선에는 스키타이 계통의 청동기 문화와 중국 전국시대 계통의 철기문화가 전해졌다. 발전된 금속문화의 전래는 고조선 사회의 생활 모습을 크게 변화시켰다. 새로운 난방 장치나 목조 가옥이 등장하였고, 분묘 형식에서는 널무덤독무덤의 양식이 생겨났다. 견고한 중국식 토기인 회도(灰陶)가 나타났다. 철기문화가 전해지면서 철제 농기구가 사용되었고 농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그밖에 철제 무기와 장신구가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철기는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유물과 각지에서 발견되는 용범(鎔范)이 뒷받침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새로운 금속문화는 고조선인에게 수용되어 독특한 형식으로 변형·발전, 토착문화의 발달을 가져왔다.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연나라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고조선은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겼으며,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연나라가 고조선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에는 요동군(遼東郡)이 설치되었고 장성도 쌓았다. 이때 고조선이 상실한 지역은 랴오닝 성 일대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패배로 고조선이 본래 중심지인 요동 지방을 상실하고 한반도 서북지방으로 중심지를 옮겨갔다고 본다. 연나라와의 경계인 만번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요동 지역, 압록강 인근, 청천강 인근 등 여러 가지 이견이 많다.

 

기원전 221년(秦)이 중국을 통일하고 기원전 214년만리장성을 건설하자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복속하였다. 그러나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한 것으로 보아 표면적인 복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왕의 뒤를 이은 준왕(準王) 시기 진나라에 내란이 발생하고 뒤이어 유방항우가 전쟁을 벌이는 등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중국 유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이주하였다. 기원전 202년에 중국을 통일한 전한은 연·진 시기의 장성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포기하고 요동의 옛 장성을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단군조선(檀君朝鮮)

 

단군조선은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전해지는 신화적인 나라이다. 일반적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왕조 또는 지배자에 따라 구분하여 단군이 다스렸던 첫 번째 시기를 지칭한다. 단군이 나라를 세워 1000여 년 동안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에는 ‘전조선(前朝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역사

근대 역사학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지배자의 이름에 따라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3개 시기로 구분하였다. 단군조선은 단군이 무진년(기원전 2333년)에 아사달(阿斯達) 또는 평양(平壤)에서 건국하였다고 한다. 단군은 약 1000여 년 동안 단군조선을 다스리다가 기묘년(기원전 1122년)에 기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사달의 산신(山神)이 되었다. 또는 기자가 오기 164년 전인 기원전 1286년에 왕위를 떠났다고 하기도 한다. 현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원전 11세기 무렵에 단군조선이 소멸되었다는 내용 역시 인정되지 않으며 위만조선이 성립되는 기원전 194년까지의 역사를 모두 단군조선 및 고조선의 역사로 보고 있다.

 

초기 단군조선의 강역은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주장과 요동 일대를 중심으로 요동반도와 한반도 북부(평안도황해도)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이 양립하고 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난하 요서설" 등을 근거로 요서 일대를 단군조선의 강역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단군조선(고조선)의 유물로 추정되는 미송리형 토기비파형동검을 통해 추측되는 강역은 랴오닝 성한반도 북부 지역이다. 단군조선의 유물이 두 유물인 것은 확실시되고 있으나 두 유물의 출토지가 모두 단군조선의 강역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 일부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있는 대제국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현전하는 중국의 조선에 대한 기록으로는 기원전 7세기 무렵의 문헌인 《관자》에 등장하는 것이 가장 오랜 것이다. 기원전 323년 중국 전국시대의 과 외교적 마찰이 있었으며, 서기전 3세기 초에 연의 공격으로 2천여 리의 강토를 상실하고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 이 무렵에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으로 옮겨 갔다는 주장이 있다. 《위략》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2세기 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 조선왕 (否)가 진나라에 복속하였다고 한다. 이후 진 말기의 혼란기에 중국 유민들을 많이 받아들였으며 특히 기원전 195년, 위만의 망명을 받아들여 서쪽 변경의 수비를 맡겼다. 기원전 194년, 위만은 준왕을 쫒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위만조선을 세웠다.

 

 

역사적 평가

조선시대에 단군조선은 기자조선과 함께 국가의 시초로서 중요시되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지배자인 단군과 기자는 국조(國祖)로서 제사를 지냈으며 단군조선은 조선의 역사가 중국에 못지 않게 오래되었다는 자부심으로 강조되었다. 그러나 단군조선과 관련된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정확한 연대도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편찬된 많은 역사서들은 대부분 단군조선부터 역사를 기록하지 못하고 기자조선 또는 삼국을 기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단군조선은 기자조선의 기록에 부기(附記)되거나 별도의 기록으로 다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단군조선은 고조선과 함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역사적 실체를 부정당하였다. 일제는 단군조선과 단군신화가 신화에 불과하고 역사성이 없어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식민사관의 일환인 ‘타율성론’에 입각하여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군현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식민지배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에 대한 문헌적 연구가 병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박은식, 신채호 등은 민족사학을 주창하며 단군조선을 민족의 시초가 되는 국가로 강조하였다. 또한 한민족뿐만 아니라 만주, 몽골 등을 모두 단군조선의 후계 국가 또는 민족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으로부터 고조선의 역사와 사회상을 분석하고 있다. 기자조선과 함께 단군조선이라는 왕조는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2개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있어서도 다양한 견해가 나타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단군조선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23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형성되지 못하였던 때로 본다. 한편 단군에 대해서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분포하던 여러 촌락 또는 부족 국가의 정치·종교적 지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북조선의 역사학계는 1990년대 이전까지 사회주의 역사학에 입각하여 단군조선 및 기자조선의 실체를 모두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이라는 국가로 이해하였다. 또한 고조선의 강역을 랴오닝 성 중심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입장을 바꿔 단군릉을 발굴하는 등 단군신화를 역사적 실체로 이해하고 평양 일대를 고조선의 중심지로 강조하였다.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북조선의 이러한 입장 변화를 주체사상이 북한의 역사관으로 강조되게 된 정치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문헌 기록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 전해지는데,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의 내용이 알려져 있다. 단군신화라고도 부르는 이 건국신화는 고조선의 건국과 사회상을 알려주는 기록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기록은 없다.

 

20세기 초에 일반에 알려진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 《부도지》 등의 역사서의 형식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한 서적들이 있으나 현재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들을 위서로 판단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일부 재야사학자들과 네티즌들은 이들 기록이 사실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기자조선(箕子朝鮮)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왕조 중 하나로 여겨졌던 고대국가이다.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고조선을 셋으로 구분하였는데 기자가 세웠다고 하는 기자조선은 이 중 두 번째 시기에 해당된다. 명칭은 단군조선과 같은 ‘조선’이지만, 구분을 위해 후조선(後朝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기자조선은 실재 여부를 비롯하여 건국 과정, 성격에 대한 인식이 시대에 따라 논란이 되었다. 현재 한국북조선의 사학계는 일반적으로 기자조선에 대한 고전적인 인식(기자동래설,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승계 등)을 부정하며, 그 유래와 실체에 대한 여러 주장이 있다.

 

근대 역사학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지배자의 이름에 따라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3개 시기로 구분하였다. 기자조선은 중국 상나라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시작된다.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한나라(기원전 2세기) 이후의 문헌에서 상세해진다.

 

 

문헌

한나라 이전의 문헌(선진문헌{先秦文獻})에는 기자가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은둔하였던 사실만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후 기자의 삶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기자조선이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尙書大典)》과 《사기》이다. 《상서대전》은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상서》에 주석과 본문을 추가한 유교 경전으로 한나라 이전의 《상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기자동래설이 추가되어 있다. 《상서대전》에 따르면 기자는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였다고 하며 주나라 무왕은 이를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다. 한편 《사기》 〈송미자세가〉에도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서대전》과 반대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기자가 조선에 가서 나라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러한 두 문헌의 차이는 이후 기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조선을 세웠는지, 아니면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조선을 세웠는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위략(魏略)》, 《한서》, 《삼국지》 등에서 기자동래설을 계속 기록하는 한편 기자 이후의 고조선 역사에 대해서도 기자와 연관시켜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사기》 〈조선열전〉에는 단순히 부왕준왕으로 기록되었던 고조선의 군주가 이후에는 기자의 40여 세손 기부(箕否), 기준(箕準)으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자동래설에 대한 기본 문헌들이 등장한 이후부터 기자동래설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기자를 조선의 군주로 숭상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가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신라최치원도 기자동래설을 긍정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점차 굳어져 가면서 한국 유교문화의 시원적 존재로 기자에 대한 숭배가 강화되었다. 그 결과 1102년에는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져 국가의 제사를 받았으며 기자의 묘까지 만들어졌다. 이후 조선 초기에는 단군과 기자가 나란히 국조로 숭상되었으며 《동국사략》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삼조선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정립하면서 기자조선이라는 왕조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사림에 의해 기자 존숭 의식은 더욱 발전하였고, 이이의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같은 기자에 대한 전기적 서적이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종휘의 《기자세가》, 정인기의 《기자지》 등에서 역대 왕의 명칭과 재위 연도 등 구체적인 내용이 등장하기도 한다.

 

 

기록

기자는 원래 상나라의 왕족으로 상나라가 주 무왕에 의해 멸망하자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상나라 멸망 후 기자가 주나라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고, 반대로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해서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는 상반된 기록이 함께 존재한다.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된 것은 기묘년(기원전 1122년)의 일로 전해진다. 기자는 5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조선으로 와서 조선의 백성들에게 문명을 가르쳤다고 한다. 한국의 기록 《삼국유사》에는 기자가 건너오자 원래 조선의 군주였던 단군이 기자를 피해 장당경으로 옮겨 갔다고 나타난다.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8조의 법금을 베풀어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고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을 가르쳐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기자 이후 기원전 323년연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빚을 때까지 기자조선의 역사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300년경에는 연나라의 진개(秦開)에게 서쪽의 영토 2000여 리를 빼앗겨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하며 기원전 221년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기원전 214년몽염(蒙恬)이 만리장성을 쌓자 당시 기자조선의 왕이었던 (否)는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복속하였다고 한다. 부는 기자의 40여세 손이라고 전해진다. 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아들 (準)이 즉위하였다. 준은 기원전 194년한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였고, 이로써 기자조선은 멸망하였다.

 

 

시대에 따른 관점

각 시대에 따른 기자조선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이 변화하였다.

 

고려시대

고려 시대에 들어 기자에 대한 내용이 《삼국유사》에 소개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주나라에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전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계승의식이 체계화되었다.

 

조선시대

조선 시대에는 기자를 은나라와 주나라의 태사로서, 기자조선은 두 나라의 스승의 나라로서 인식하였다. 단군과 더불어 기자에 매년 제를 지냈으며, 행적을 칭송하는 가묘를 세우기도 했다. 세조 때에 편찬된 《동국통감》, 영조 때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등 거의 모든 사서에는 기자조선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여러 학자들은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을 모아 책으로 저술하였고, 만주 중심의 사관을 가졌던 안정복은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국호 사용을 제시하였다. 이후 출간된 《동국사략》, 《삼국사절요》에도 동일한 체계를 사용하였다. 16세기 이후로 등장한 사림파의 영향으로 17세기에는 중국의 하.은.주 3대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이와 연관된 기자조선-마한-신라의 계승만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단군-부여-고구려-백제의 북방계와 기자-마한-신라의 남방계의 두 주류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조선 후기 안정복은 한국의 역사를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삼한으로 정리하여, 조선 초기의 체계를 따랐다. 대한제국 이후의 계몽기 사서들은 단군-기자-마한-삼국-통일신라-고려의 계승을 수록하였다.

 

조선시대의 논란은 주로 사서 내용의 불일치에 대한 것이었다. 주의 무왕을 피해 조선에 자리잡은 기자는 주나라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장유, 홍직필 등)

 

일제 강점기

중국의 사서인 《상서대전》, 《사기》, 《한서》 등의 내용을 근거로 기자가 이끄는 상나라 유민들이 조선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자동래설'이 부정되었다.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한민족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시라토리, 이마니시 등)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추측되기도 한다. 일본의 학자들은 기자동래설은 후대에 꾸며낸 허구이며 실제로 존재했더라도 중국에서 기원했으므로 중국인이 세운 나라로 조선과는 관계없음을 주장하였다.

 

광복 이후

광복 이후로는 기자조선에 대한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4년 교과서에서 기자조선을 삭제하기로 결정하였다. 1974년에는 교과서 개편을 앞두고 고조선에 대한 논쟁에서 기자조선의 실재성이 논의되었고, 교과서에 기자조선이 각주로 언급되었다. 1990년부터 발행되는 역사교과서에서도 각주로 언급되었으나, 2010년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에서는 기자조선이 언급되지 않는다.

 

현재 기자조선의 존재는 학계에서 대체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발굴된 유적을 근거로 상나라의 후예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발해 근방에 정착했고, 고조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날조된 역사로 여겨 인정하지 않는다.

 

기자조선에 대한 현재의 관점

현재 제시되어 있는 기자조선에 대한 여러 관점들은 다음과 같다.

<부정론>

기자가 고조선에 망명하여 기자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이야기는 만들어낸 전설이라는 주장이다. 주장 및 근거는 다음과 같다.

 

유적의 부재

1102년(숙종 7년)에 고려의 왕이 평양에서 기자의 무덤을 찾아내고 기자묘와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 외에도 정전(井田)과 같은 기자와 관련된 유적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실제 고고학 조사 결과 이들 유적은 모두 고려·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준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익산의 무강왕릉이 나타나는데, 이 무덤은 실제 발굴 결과 백제의 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임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또한 황하 유역과 요하 동쪽 지방의 신석기·청동기 문화가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도 주요한 논점이다. 중국의 청동기와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청동기는 양식이 전혀 다르며 성분 또한 크게 다르다. 기자가 상나라의 왕족으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상나라와 관계가 있는 청동 유물 등이 나타나야 하나 실제 고고학 발굴 결과는 두 지역 사이에 문화가 크게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문헌상의 문제점

기자조선과 관련된 문헌 사료를 살펴보면 선진문헌과 한대 이후의 문헌에서 큰 차이가 나타난다. 선진문헌인 《논어》, 《상서》, 《죽서기년》 등에는 기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나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거나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의 기록에서부터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또한 기자가 주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한 기록과 기자조선의 기록은 서로 모순된다는 점도 지적된다. 홍범구주는 주 무왕이 은둔하였던 기자를 찾아가서 얻은 것으로, 기자가 조선에 있었다면 홍범구주의 전래가 불가능하다.

 

한편 이마니시 류는 《사기집해》에서 기자의 무덤이 량국 몽현(蒙懸; 현재 하남성 상구현)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평양의 유적은 위작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정인보는 기자의 기(箕) 자는 임검의 검(儉) 자가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발음이 변한 것이며, 검(儉)과 기(箕)는 모두 높다(高) 혹은 윗사람(上)의 뜻이라고 하였다. 즉, 고구려 환도성에 있던 기산(箕山)이란 일명 기구(箕丘)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검재"를 한역(漢譯)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떠돌이 중국인들이 고조선 고구려 백제 등으로 이민하여 들어오면서 그들에 의하여 날조되었고 사대사상이 강한 중세 조선에 이르러 사실인 것처럼 묘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 곡주 협계현조를 예로 들어 신라 경덕왕이 협계현을 단계(檀溪, 단군골)라 고친 것은 이 곳에 기산(箕山), 즉 "검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정황상의 근거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지던 시기의 중국은 그 세력이 황하 유역에 불과하였으며 기자가 조선까지 이동하려면 먼 거리와 다른 이민족들의 영역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 지적된다. 또한 당시 조선에는 단군조선으로 알려져 있는 토착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망명자에 불과한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는 것은 어렵다는 점도 부정론의 근거로 제시된다.

 

북조선에서 발행한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지역까지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으며, 중국 사학자들은 옛부터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

 

기타 주장

춘추좌씨전에서는 기국이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 기록되어 있고 기(箕)자가 새겨진 은·주 시대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어, 기국은 중국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한편 윤내현은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하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은 기자가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도망친 것을 배반으로 다루지 않고 기자의 조선 거주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중국식 표현이라 주장하였다.

 

<긍정론>

문헌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나, 기자가 이끄는 은나라 유민들이 조선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실제에 바탕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기자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는지의 여부, 한반도와 만주에 위치하였는지의 여부, 그 세력의 크기에는 각기 다른 주장이 있다.

 

관련 유적

발해만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기후방정에 나타난 기후(㠱侯)를 한자가 다른 기자(箕子)로 해석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문의 해석을 잘못한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신채호의 주장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기원전 323년 경에 불조선(番韓)의 임금이 기자의 후손이 된 후에 자칭 왕이라 칭한 번조선을 기자조선이라 불렀다고 주장하였다.

 

기타 주장

  • 천관우는, 기자가 이끄는 집단이 고조선과 주나라의 접경지대인 요서 지역에 정착하여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켰고, 연나라의 확장에 밀려 요동을 거쳐 대동강 유역까지 이동했다고 주장하였다.
  • 서영수는, 기자 일족이 대릉하 유역에 거주하다가 춘추 말기 이전에 소멸되었으나, 고조선을 대체했다고는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 윤내현은, 기자조선이 주나라의 동북 지방인 하북성 연산, 난하의 주변에 자리잡아 고조선과 병존했다고 주장하였다.
  • 이기백은, 기자조선은 요서 지방에 있었으며, 춘추시대 말기에 소멸되었다고 주장하였다.
  • 송호정은, 요서 지방에서 발굴된 청동 그릇은 상나라 유민들이 요서 지방에 살았다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 이상시는, 기자는 한족(漢族)이 아닌 동이족(桓族)이라고 주장하였다.

 

 

 

위만조선

기원전 195년에 한나라가 임명한 제후인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나라 지역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위만(衛滿)은 이들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기원전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 집단과 토착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임둔 등의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나라는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위만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전한 무제는 기원전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위만조선을 공격하였고, 위만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위만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갔다. 또한 조선상 노인(朝鮮相 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 삼(尼谿相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기원전 108년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군·임둔군·현도군·진번군4군을 설치하였고 많은 고조선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삼한 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 고조선 지역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국호

원래 국호는 조선(朝鮮)이며, 《삼국유사》에서는 위만이 찬탈한 조선(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 이라 불렀다. 오늘날에는 1392년에 건국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지칭하며, 위만조선을 따로 구분하지 않은 채 모두 합쳐 고조선으로 본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군주에 따라 둘로 나누어 단군이 다스린 조선(단군조선)을 전조선, 기자가 다스린 조선(기자조선)을 후조선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이런 시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전조선과 후조선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존재하나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가장 오래된 설로는 《사기집해》에 인용된 장안(張晏)의 견해로 그는 조선이 강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이 숙신(肅愼)에서 나온 것이라 하고, 그 원래 명칭이 주신(珠申)이라 주장하였으며 고조선의 초기 도읍인 아사달을 한역한 것이 조선이라는 견해도 있다. 조선의 글자 뜻을 그대로 해석하여 ‘땅이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다(地在東表 朝日鮮明)’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치

위만조선의 관명(官名)으로는 박사(博士)·대부(大夫)·상(相)·대신(大臣)·장군(將軍)·비왕(裨王) 등이 보인다. 이들 관직 모두의 구체적인 성격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관직을 갖고 있으면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지닌 자들이 있었다. 한나라에 대한 외교 정책에서 왕과 의견이 맞지 않자 휘하의 2천 호를 이끌고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탈해 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 같은 이가 그런 예이다. 한나라와의 전쟁 중 전선을 이탈하여 수도가 함락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이계상(尼谿相) 삼(參) 등 세 명의 ‘상(相)’도 그러한 이들로 추측되는데, 상은 일정한 세력 집단의 대표로서 중앙정부에 참여한 이들이 지닌 관직의 이름으로 여겨진다. 당시 위만조선에는 여러 명의 상이 있었는데, 이름으로 보아 다수가 고조선 인이었다. 상의 휘하에 있던 집단에 대해선 왕실의 통제력이 어느 정도 미쳤겠지만, 적어도 각 집단 내부의 일은 자치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역계경 등의 집단적인 이탈행위가 가능했다는 점이 바로 이를 말해준다.

 

왕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집단들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의 장이었고, 위만조선 왕실의 경우 중국계 유이민 집단이 그 직할 집단이었던 것이다. 국가의 주요 결정은 이들 상들이 참가한 회의체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자연 왕권은 강력하지 못하였고, 중국식 제도에서 비롯된 관직명이 부분적으로 보이지만 관료 조직은 발달하지 않았으며, 정치 조직의 기본적인 틀은 자치집단들의 연맹체와 같은 것이었다.

 

유력한 수장 휘하에서는 촌락이 여러 개 귀속되어 있었다. 단 수장이 사적으로 지닌 우월한 경제적·군사적 힘이 이들 촌락을 규합하는 데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는 점에서, 수장은 이미 지배계급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유력한 수장들을 통합하여 성립한 것이 위만조선이며, 위만조선의 왕권하에서 수장들은 ‘상’으로 상당한 자치권을 지닌 세력 집단을 대표하였다. 고조선의 중심을 이룬 이들 집단의 외곽에는 피복속 촌락 공동체들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삼국 초기의 정치 구조와 연관성을 지닌다.

 

단군왕검

단군왕검은 고조선 사회의 제주이자 군장으로, 단군대제사장적인 성격을 많이 담고 있으며 왕검은 국가를 통치하는 대군주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해석한다. 즉 제정일치의 지도자이다. 방언의 분포와 비교언어학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를 함께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단군 신화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이 가장 오래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단군고기》가 인용되었다. 《삼국유사》의 설명은 《위서》에 기록된 단군의 건국과 전해 내려오는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위서》를 비롯한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단군신화의 내용은,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거하였으며, 그 아들인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왕권의 정통성과 국가의 존엄성을 수식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고조선의 왕은 매년 그의 조상신인 천신께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그때 베풀어진 의식은 단군 신화의 내용을 재현하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제의에 고조선을 구성하던 모든 집단의 장들이 참여해 정치적 통합을 강화하고 결속력을 높였을 것이다. 곧 단군 신화는 고조선 당대의 정치이데올로기였고, 그 제의는 정치적 집회의 기능을 지닌 것이었다.

 

참성단

참성단(塹星壇)은 오늘날 인천광역시 강화군 마니산 꼭대기에 있으며, 상고시대 단군이 쌓았다고 알려진 제단이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강화의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이기 때문이며, 예로부터 마이(摩利)·혈구(穴口) 등은 하늘과 인연이 깊다고 전해온다. 또 개국신화의 등장인물인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도 마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환웅의 권속이므로 단군이 참성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지낸 뜻을 짐작케 한다.

 

사회 및 문화

사마천사기반고한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겨져 있다.

  • '8조법'이라는 법률이 정해져 있었다. 이 법은 권력층의 사회질서 유지 수단이었다. 그와 함께 가부장(家父長) 중심의 계급 사회로서, 사유 재산을 중히 여겼으며, 응보주의(應報主義)에 따른 형법을 지녔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현재는 그 중에서 3개의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다.
    •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그 죄를 갚는다.
    •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 사람은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한다.
  •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아 대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었다.
  • 모두들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서 음란하고 편벽된 행위를 하지 않았다.

 

당시 고조선 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계급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8조의 법금(法禁) 중 현재 전해지는 3개 조항에서, 노비의 존재와 사유 재산에 대한 보호 조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 분화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촌락에선 공동체적 관계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 계층은 귀족, 촌락의 일반민, 노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귀족은 노예와 토지·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가지면서 촌락 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首長)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노비는 상당수 존재하였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 노예경영은 발달하지 않았다. 노예제 경영이 발달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화폐 경제의 발달, 도시의 번창 등과 같은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산 활동을 담당한 이들은 촌락의 일반민이었다. 이들은 당시 농업이 지닌 낮은 생산력과, 가뭄이나 홍수 등에 따른 생산의 불안정성 및 철제 농기구의 부족 등으로 인해 소농(小農) 단위의 자립성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촌락 단위로 상호 의존하여 생산과 소비생활을 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역사서의 내용

한편 고조선의 역사는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기록 내용은 사서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래의 사서들 중 일부는 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하기도 하며, 설령 진서라도 신화적 요소가 많은 경우도 있다.

 

삼국유사

삼국 시대의 역사가 일연이 쓴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 따르면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인간 세상을 다스리길 원해, 천부인 세 개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 도읍을 정해 신시라 했다. 태백산에 주를 달아 묘향산이라고 했다.

 

이후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한다. 단군왕검은 기원전 2333년 평양에 도읍하여 단군조선의 시조가 되었고, 이후 1500년을 다스렸다.

 

단군왕검이 도읍한 지 약 1500년이 지난 뒤에 은나라에서 기자(箕子)가 동래하여 임금이 되고, 단군은 신(神)이 되었다고 하니 이것이 기자조선의 시작이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존재유무와 기자조선의 성격 그리고 기자의 혈통 등에 관하여 논란이 많다.

 

사기

사기》(史記) 〈조선열전〉은 위만조선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위만조선의 역사를 고조선의 역사에 편입하는 학자들도 있고,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위치한 고조선의 봉국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한사군에 대해서도 기록하였으나, 한사군의 구성 조차 밝히지 않고 있어, 후대의 논란을 야기하였다.

 

기타 자료

'태원 선우씨'의 족보인 《태원선우씨세보(太原鮮于氏世譜)》와 허목(許穆)의 《동사(東史)》에 따르면 선우씨는 기자조선의 48세의 왕과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마한에 간 뒤의 일인) 마한의 9세의 왕을 지냈다고 하고, <청장관전서> 에는 기자조선의 41세 왕과 8세의 왕이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는 기자조선을 기술하지 않고 있고, 단군조선이 2096년간 지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규원사화》의 1195년과 901년의 차이가 난다.

 

건국 연대 및 치세

일반적으로 기원전 2333년 10월에 건국되었다고 알려졌고 단기도 그에 따르고 있으나, 사서에 기록된 단군조선의 건국연대와 치세의 기간은 다양하다.

 

건국 연대

  •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동국통감》과 《고려사》 지리지에 모두 ‘당요 무진년에 단군이 평양에 도읍하였다’하였는데, 요의 즉위가 상원갑자 갑진에 있었으니 무진은 곧 25년”이라고 하여, 기원전 2333년을 단군의 원년으로 삼았다.
  • 허목은 《미수기언》(眉叟記言)에서 ‘조선이 평양(平壤)에 도읍한 것은 도당씨(요임금)가 즉위한 지 25년이 되던 해’라고 하였다.
  • 《삼국유사》에 인용한 《고기》에서는 당요 50년 경인년(기원전 2311년)을 단군의 원년으로 하였다.
    • 삼국유사》에서는 《고기》를 인용하여,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했다. 저자 일연은 당요 건국 후 50년인 경인년에 건국했다고 하고 주 무왕 기묘년에 기자가 오니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겨 갔다고 하였다. 이 1500년설은 그 후에도 여러 사서에서 소개되어 왔다. 예컨대 조운흘(趙云仡)의 《삼한시귀감(1370년대)》 주석 이외에도 유희령(柳希齡)의 《동국사략(1529년》, 이종휘의 《수산집》에 실린 《동사》의 〈단군본기〉, 홍경모(洪敬謨)의 《총사(叢史)》 등에 실려있다. 이것은 '기자조선설'을 인정한 조건에서도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2622년 또는 기원전 2786년(《제왕운기(帝王韻紀)》의 종말 연대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으로 간주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황윤석(黃胤錫)이 단군조선 존속 기간에 대한 몇 개의 설을 소개하면서 '또는 말하기를 2800년이라 한다'라고 지적했다.
  • 중국의 당요 즉위년 간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즉 《사기(史記)》 권1, 〈오제본기〉, '제요(帝堯)'조의 한 주석에 의하면 황보밀(皇甫謐)은 당요(제요)가 갑신년(기원전 2377년)에 태어나서 갑진년(기원전 2357년)에 즉위하였다고 했다. 이 갑진년설은 그 후 송나라의 소옹이 지은 《황극경세서》에도 그대로 계승되었고 1711년에 쓴 서문이 붙어있는 오승권(吳乘權)의 《강감이지록(綱鑑易知錄)》에도 그렇게 되어있다.
  • 송나라의 류서가 쓴 《자치통감외기(資治通鑑外紀)》에는 제요의 즉위년으로서 세가지 간지들을 전하고 있다. 즉 무진년(기원전 2333년), 무인년(기원전 2323년), 신묘년(기원전 2310년)이다.
  • 해동역사》에 인용된 중국 《조선세가》에는 경자년(기원전 2361년)으로 되어있다.
  • 16세기 사람인 심언광(沈彦光)은 《단군사(檀君祠)》라는 시에서 단군의 건국 연대를 요임금 갑자년(기원전 2337년)이었다고 썼다(《어촌집》 권4).
  • 갑자년(기원전 2457년) 개기(開基)설이 있는데, 최명길의 시 등에 한마디 나오며, 그 의미는 명백치 않다
  • 조선 《성종실록》의 양성지 상언 내용 중에 단군 이후로 3,900년이 되었음을 주장하는데, 그 시기가 기원전 2420년이 된다.
  • 고려사》 열전의 〈백문보전〉에 백문보공민왕에 단군 이후로 3,600년이 되었음을 주장하는데, 그 시기가 기원전 2240년 부근이 된다.
  • 《제왕운기》의 연대를 따르면 기자조선의 치세 928년, 공백기간 164년, 단군조선의 치세 1028년으로, 건국연대는 기원전 2313년으로 계산된다. 하지만 본책에서 단군 원년이 무진년이라는 내용과 달라, 일반적으로 1028년을 1048년의 잘못으로 보고 원년을 2333년으로 본다.
  •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홍산문화를 고조선의 문화라고 보며 고조선의 성립이 기원전 30 ~ 24세기라고 주장한다.

 

치세

  • 조선《세종실록》 75권, 18년 12월 26일 정해 4번째 기사에서 전 판한성부사 유사눌(柳思訥)이 《세년가》에는 단군이 나라를 누린 것은 1048년이었다고 주장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 《제왕운기》는 1028년으로 기록되었으며, 《본기(本紀)》에는 1038년이라 인용하였다.
  •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했다.
  • 응제시주》는 단군의 후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1000년 이상이며, 단군의 수명은 1048세라고 했다.
  • 역대세년가》는 단군의 수명을 1048세 라고 했다.
  • 동국통감》은 1048년이 단군의 수명이 아니라 그 후손들이 역대로 다스린 햇수라고 기록했다.
  • 동사강목》은 단군의 수명을 1048세라고 했다.
  • 기년아람》은 단군의 수명은 1048세 혹은 1908세라고 했다.
  • 여암전서》는 '무진년에서 을미년에 이르기까지 1048년인데, 이는 재위년수'라고 했다.
  • 《규원사화》에는 1195년(실제 역년을 합하면 1205년)으로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