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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5 : 부여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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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5 : 부여 1

두바퀴인생 2010. 9. 17. 03:24

 

 

한국의 역사 15 : 부여 1
 
 
                        
 
 
 
 

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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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부여(기원전 2세기 ~ 494년)는 삼국시대 한국고대국가로 여겨지는 초기 국가(연맹 왕국)들 중 하나로,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하얼빈, 아청, 위수, 눙안, 창춘, 솽양, 지린, 옌지, 훈춘, 치치하얼, 룽장)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구려백제는 부여로부터 기원한 국가로 추정된다.

 

예맥(濊貊)은 숙신(肅愼), 동호(東胡)와 함께 고대 중국의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 거주한 민족으로, 일명 맥(貊·貉) 혹은 예(濊·穢·薉)로도 불렸다. 예맥족은 기원전 126년 이후 압록강두만강 유역은 물론 한반도의 동부 및 중부에 정착했다. 백제의 뿌리가 되는 민족이며 현재는 한국인의 조상이자 한국인에 해당한다.

 

예맥은 원주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2 ~ 3세기경에 남쪽으로부터 한족(漢族), 서쪽으로부터 유목민의 압박을 피해, 지금의 만주 동부에서 한반도의 동부·중부에 걸쳐 정착한 듯하다. 예맥족은 옛날 숙신(肅愼)과 동호(東胡) 사이에 개재(介在)하여 송화강·흑룡강·압록강 등의 유역과 함경·강원도 지방에 걸쳐 활동한 대민족으로 역사상 부여·고구려·예맥·옥저 등으로 부르는 여러 족속을 포괄한다.

 

예족은 호랑이에 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곽박의 《爾雅(이아)》, 《니혼쇼키》 등을 근거로 '맥(貊)'이 곰을 의미했고, 예족과 맥족의 관계가 단군신화에 반영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로부터 단군신화(檀君神話)에는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이 곰을 부족의 상징으로 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부족의 상징으로 하는 예족(濊族)을 평정하고 복속시키는 사실을 설화로서 전해주는 신화(神話)로 남아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국호

부여에 대한 국호는 아래의 4가지로 볼 수 있다.

  • 夫餘
  • 扶餘
  • 扶余
  • 夫余

      

 

         

개요

기원전 2세기경부터 500여 년간 예맥계의 부여족(夫餘族)이 세웠던 부족 국가로서, 일명 북부여라고도 한다. 현재의 북만주 농안(農安)·장춘(長春) 일대에 웅거하여 동은 읍루(挹婁), 남은 고구려현도군, 서는 선비(鮮卑), 오환(烏桓)과 인접하였다. 농안 지역은 소위 동이(東夷)들의 주지(主地) 속에서는 가장 평야가 넓은 곳이었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였고, 은력(殷曆, 은나라 역법)을 사용하였으며, 궁궐·성책·창고·감옥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가졌었다. 신분계급은 왕과 그 밑에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 4가(四加)와 대사(大使)·사자(使者) 등의 지배층, 그 밑에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농노·노예로 구성된 피지배 계급의 둘로 나뉘었다. 이른바 4가는 부여 전국을 4등분한 사출도(四出道)를 각기 맡아 다스렸는데, 국도(國都)만은 왕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 즉 4가는 국왕의 통솔을 받지만, 4출도에서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들을 영솔해 마치 영주(領主)와 영읍(領邑)의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적의 침구가 있을 때는 4가가 친히 출전하고, 하호는 모두 군량을 부담했는데, 특히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가 실시된 듯 집집이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인접 고구려와 자주 투쟁이 있었으나 원래 그들은 경제적으로 호조건을 구비하였기 때문에 평화를 사랑했다. 기원후 49년 부여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혼인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추수 후 음력 12월에는 영고(迎鼓 : 맞이굿)라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이 있었으며, 형법(刑法)은 아주 준엄하여 살인·간음·부녀의 투기 등에 대하여 극형에 처했다. 특히 간음과 투기자는 그 시체를 산에 갖다 버릴 정도로 혐오했다. 일부다처·축첩·순장(殉葬) 등의 풍습이 있었으며, 백의(白衣)를 숭상하였다. 이는 역시 한민족의 현재의 풍습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또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항시 노래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명산물(名山物)로는 말·적옥(赤玉)·미주(美珠) 등과 모피가 있었다. 부여에서는 전쟁이 있을 때 제천의식을 행하고 소의 발굽으로 길(吉)·흉(凶)을 점치는 우제점법(牛蹄占法)이 행해졌다.

 

해부루왕(解夫婁王) 때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권고를 받아들여 가섭원(迦葉原)으로 서울을 옮긴 뒤부터 동부여라 하였다. 위(魏)의 고구려 정벌에 부여는 군량을 제공하였고, 부여가 선비족의 침입으로 위태로울 때 진(晋)은 부여를 재흥케 하였다. 그러나 진의 세력이 북방 민족에게 쫓겨져 남쪽으로 천도하면서 부여는 국제적인 고립상태에 빠졌다. 285년(고구려 서천왕 16) 선비 모용외(鮮卑 慕容廆)에게 공격을 받아 옥저로 도망하였다가 후에 다시 본국을 회복하기는 하였으나, 346년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에게 멸망했으며, 그 후 이 국토는 고구려의 판도가 되고 말았다.

 

                                           

 

북부여의 기원 

오늘날 부여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사서는 《사기》에서이다. 《사기》에서 열전 화식편 오씨과(烏氏倮)조에 진시황 때 오씨현 상인 과(倮)와 거래하던 상인 가운데 부여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식화열전(食貨列傳)에서 “이 북으로 오환과 부여에 접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여는 고조선기원전 108년에 망하기 이전, 적어도 기원전 3세기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부여의 영역을 “(장성 이북의)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으로 고구려와 접하고, 동으로 읍루, 서로 선비, 북으로 약수(弱水)-약수를 헤이룽강으로 보기도 한다-에 접한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따라 부여의 영토는 지금의 창춘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성 지방, 북쪽으로는 헤이룽강(하얼빈)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에는 부여의 역사가 해부루왕부터 등장하는데, 솽양에서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나타나 해부루왕을 가섭원으로 옮겨가게 하고,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며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쓰여 있다.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기원전 59년 북부여를 건국하였으며, 그에게는 첫 번째 아내로부터 얻은 해부루라는 아들과 하백의 딸 유화로부터 얻은 주몽이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신화적 요소를 배제하고 추측한다면, 원래 부여가 있었고 거기서 독립해 나온 집단이 동부여를 건국했다는 것, 그리고 북부여라는 명칭은 그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원래 부여에 붙인 이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혹은 이때의 하얼빈 지역에서 해모수가 신진 집단으로 원래의 부여족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새로운 국가, 즉 북부여를 세웠다고도 볼 수도 있다.

 

북부여의 유민들이 외세에 유린되는 부여를 탈출해 두막루를 세웠으나 오래 존속되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북부여는 왕실이 기존의 고구려 영토 내부로 편입되면서 명맥을 유지하였고, 494년 물길이 북부여를 압박하자 왕실이 고구려에 항복하면서 완전히 멸망하였다.

 

 

 북부여(北夫餘) 역대왕 

시조 해모수(BC 239-BC 194) -> 2대 모수리(BC 194-BC 169) -> 3대 고해사(BC 169-BC 120) -> 4대 고(해)우루(BC 120-BC 108) -> 5대 고두막(BC 108-BC 59) -> 6대 고무서(BC 59-BC 58) 

 

시조 해모수(解慕漱)

첫해(기원전 239년)가 임술(BC239)년이다. 

 

본래 고리국 사람으로 수유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웅심산【熊心山흥안령(興安嶺) 으로 추정】을 의지하여 일어나 집을 난빈(蘭濱) 에 지었다. 

 

【고리국 藁離國 해모수가 군대를 일으킨 곳으로 [삼국유사]에서 북부여 시조 해모수 (解牟漱)가 대요국 의주계(醫州界)에 있는 홀승골(忽昇骨)에 도읍 하였다고 전한다. 신개하(新開河) 유역의 과이심 좌익중기(科爾沁左翼中旗) 육가자(六家子) 문화로 고려된다

 

2년(기원전 238년) 3월 16일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연호법【烟戶法 사람과 집 수를 조사하여 해마다 나라에 보고하는 법】을 세웠으며 오가의 군사를 나누어 두고 둔전을 작급하게 하여 불시의 근심이 있을 때를 대비하게 하였다. 

 

8년(기원전 231년)에 임금이 무리를 거느리고 옛 도읍에 가서 깨우치니 오가 (五加)가 드디어 공화(共和) 의 정치를 철폐하고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단군(檀君)을 삼았다. 

 

11년(기원전 228년)에 북막(北漠)의 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를 습격 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죽이고 크게 약탈해 갔다. 

 

19년(기원전 220년)에 비(丕)가 죽고 아들 준(準)이 아버지를 이어 번조선 番朝鮮) 왕이 되었다. 연(燕)이 장수 진개(秦介)를 보내어 우리의 서부 변방을 침범하여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만번한 滿番汗 부신시 하얼투(哈爾套) 서남쪽의 탑영자향(塔營子鄕) 만한영자촌 (滿漢營子村)으로 추정)

 

20년(기원전 219년)에 명을 내려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게 하고 7월에 새 궁궐 366간을 짓고 이름을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22년(기원전 217년)에 창해(滄海)의 역사 여홍성(黎洪星)이 한인(韓人) 장량 (張良)과 더불어 박랑(博浪)의 모래 가운데서 진(秦)왕 정(政)을 저격하다가 잘못하여 부거【副車 본인이 타지 않고 여벌로 따라가는 수레】를 맞췄다. 

 

31년(기원전 208년)에 진승(陳勝)이 군사를 일으키자 진(秦)나라 사람이 크게 어지러워지니 연(燕)·제(齊)·조(趙)의 백성이 번조선으로 도망 온 자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 운장(雲障)에 나누어 두고 장수를 보내어 감시하게 하였다. 

 

38년(기원전 201년)에 연의 노관이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동쪽의 한계를 패수(浿水, 요중현(遼中縣)으로 추정)로 하였다. 

 

【노관 한(漢)의 풍(豊) 땅사람으로서 고조와 한 마을에 살고 같은 날 낳았다고 하여 매우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뒤에는 흉노로 항복해 들어가 동호로왕(東胡盧王)에 봉해졌다】이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동쪽의 한계를 패수【浿水 요중현(遼中縣)으로 추정

 

45년(기원전 194년)에 연의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凶奴)로 들어오자 그 무리 위만(衛滿)이 우리에게 도망올 것을 요구했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위만(衛滿) 유방이 죽자 노관은 여황후(呂皇后)의 전횡(유씨 왕, 즉 자기 아들이 아닌 왕은 다 죽여버리는 처사)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흉노에 망명하였다. 이때 노관의 부하인 위만이 번한(后新秋)으로 망명하였고, 번한왕은 위만에게 연나라와의 경계에 살면서 상하 운장(上下 雲章; 閭陽 + 黃泥崖)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위만은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온다고 번한왕 기준(箕準)을 속여서 번한성에 입성하였고 번한왕을 내몰 았으며 스스로 번한왕이 되었다.

 

그러나 임금이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단안을 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많은 기회를 잃으므로 드디어 위만을 받들어 박사(博士) 를 삼고 상하 운장(雲障)을 나누어 봉하였다. 

 

【운장(雲障) 조선과 부여의 전방 전초기지로 만번한 지역을 가리킨다. 군사적 목적이 강한 자치 행정구역적 성격을 띤 조직으로 생각되어진다. 상운장은  당시의 구려하인 유하근처이고, 하운장은 압록수인 요하 하류 반산(盤山)이 된다】 

 

이 해 겨울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태자 모수리가 왕위에 올랐다. 

 
 
2대 모수리(慕漱離)

첫해(丁未 기원전 194년)에 번조선(番朝鮮)왕 기준(箕準)이 오랫동안 수유 (須臾)에 있으면서 일찍 많은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다 부유하였다. 뒤에 떠돌아 다니던 도적에게 패하여 도망하였는데 바다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기원전 146년에 위만(衛滿)이 기준을 배신하고 거짓으로 중국군이 쳐들어 온다고 하여 패수 번한성(沛水番韓城; 彰武市後新秋)에 입성하여서, 기후의 후손인 번한왕 기준(箕準)을 내몰고 번한왕이 되었고 기준은 황해도로 옮겨가 금마(金馬) 마한에 정착하였다

 

이에 제가(諸加) 무리들이 상장(上將) 탁대(卓大)를 받들어 많은 사람들이 길을 떠나 바로 월지(月支)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곧 탁이 난 고향인데 이것을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중마한(中馬韓) 월지는 웅백다(熊伯多) 마한 조선의 개국지, 영변의 달지국(達支國)과 같은 곳으로 본다. 우리말 달지가 중국말 월지(月支)로 바뀐 것으로 본다. 따라서 중마한 탁의 월지국은 청천강패수 일대이다

 

이에 변(弁)·진(辰) 두 한이 또한 각각 그 무리들이 봉함을 받은 백리 땅을 가지고 도읍을 세우고 스스로 나라 이름을 지었으나 모두 마한(馬韓)의 정령 (政令)을 듣고 사용하니 대마다 반(叛)하지 않았다. 

 

2년(기원전 192년)에 임금이 상장 연타발을 보내어 평양에 성책을 세워 적(賊) 만(滿)에게 대비하게 하였는데 만(滿)도 또한 괴로움에 지쳐 다시는 침략하는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연타발 후대의 소서노의 부친인 연타발과는 다른 사람으로 부여의 장수

 

3년(기원전 191년)에 해성(海城)을 평양도(平壤道)에 소속시키고 임금의 아우 고진(高辰)에게 지키도록 하니 중부여(中夫餘) 한지역이 모두 군량미를 바쳤다. 

 

【중부여(中夫餘) 북부여(北夫餘; 今 康平縣)에 비하여 개원시 일대가 중부여(中夫餘)인 것인 바, 단군 구물(丘勿) 이래 대부여(大夫餘)를 중부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25년(기원전 169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고해사가 왕위에 올랐다. 

 

3대 고해사(高奚斯)

첫해(壬申 기원전 169년) 정월에 낙랑(樂浪)왕 최숭(崔崇)이 곡식 300석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이 낙랑으로부터 진기한 보물을 산같이 쌓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의 수도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다. 

 

기원전 195년에 낙랑국(樂浪國)의 후예가 해모수에게 패전하여 철령시 낙랑홀 땅에서 마한의 왕검성 주위, 즉 대동강변으로 이주하였다. 최씨 낙랑은 낙랑홀, 즉 철령시 최진보산성에 살다가 해모수(解慕漱) 북부여의 성립에 의해 그 압력으로 마한땅으로 옮겨간 것이다. 철령시의 낙랑인들이 마한에 옮겨가서 상륙한 곳은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부근으로 추정한다

 

이것이 단군 해모수(解慕漱)의 병오(기원전 195년) 겨울이었다. 

 

42년(기원전 128년)에 임금이 몸소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남려성 (南閭城) 에서 위적(衛賊-위만의 무리)을 쳐서 이기고 거기에 관리를 두었다. 한(漢)이 나라의 남쪽의 제후인 남려(南黎)를 회유하여 복속시키고 창해군 (蒼海郡)을 설치하였다. 

 

후한서 문구에는 예군 남여가 원삭원년(기원전 128년) 우거왕을 배반하고 요동군에 내속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당시 남녀는 북부여의 남쪽 담당 제후 였으므로, 예군 남여는 우거왕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북부여를 배반한 것이다

 

49년(기원전 120년)에 일군국(一郡國)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이해 9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고우루가 왕위에 올랐다.

 

 

 

 

 

4대 고우루(高于婁) 또는 해우루(解于婁)

첫해(辛酉 기원전 120년)에 장수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치게 하였으나 이롭지 못하여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병력을 증강하고 성책을 많이 설치하여 우거를 막는데 공이 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高句麗侯)를 삼았다. 

 

위만(衛滿)의 손자 우거(右渠)는 북부여를 살수 이북으로 물리치고 요양의 연주산성으로 천도하였으나 한무제에게 토벌당했다】 

 

3년에 우거(右渠) 적이 크게 쳐들어 왔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 땅이 모두 노략질 당하여 그들의 소유가 되었다. 

 

4년에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해성을 쳤으나 석달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였다. 

 

6년에 임금이 친히 정예 군사 5천을 거느리고 해성을 쳐서 이기고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니 구려하(句黎河)로부터 동쪽이 모두 항복하였다. 

 

【구려하 九黎河 오늘날의 수수하(秀水河)이다. 요하의 한 가지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철법시 서쪽에 위치한다】 

 

7년에 좌원(坐原)에 목책을 설치하고 군사를 남려(南閭)에 주둔시켜 불시의 일에 대비하게 하였다. 

13년(기원전 108년)에 한(漢)의 유철(劉徹 한(漢)의 무제(武帝), 경제(經濟)의 아들)이 평나(平那)에 쳐들어와 우거 (右渠)를 멸하고 이어 이곳에 사군(四郡) 을 설치하려 하여 큰 기세로 군사를 내어 사방을 침입하였다. 

 

【사군 四郡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은 낙랑(樂浪), 임둔(臨屯), 진번군(眞番郡)이고 현도군은 1년 뒤인 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다】 

 

이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를 부르짖고 군사를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도둑을 쳐부수니 남아있는 백성들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싸우는 군사를 도와 크게 떨치는 소식을 알려왔다. 

 

【고두막한 高豆莫汗 동명왕(東明王)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高朱蒙) 역시 시호가 동명성왕(東明聖王)이나 고구려 시대에는 <광개토왕 비문>에 추모왕(鄒牟王) 이라고 기록하였으니 고두막한 동명왕과 구별되는 것이다

 

34년(기원전 87년) 10월에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사람을 시켜 와서 말하기를 

"나는 천제이 아들로서 장차 여기에 도읍을 하려고 하니 왕은 이곳을 피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를 곤란하게 여기다가 그 달에 걱정으로 병을 얻어 세상을 뜨니 임금의 아우 해부루가 왕위에 올랐다.

 

동명왕이 군사를 내어 위헙하는 것을 그치지 않으니 군신이 이를 매우 곤란하게 여겼다. 

 

이에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이 아뢰기를 

"통하(通河)가에 가섭원(迦葉原)이 있어 땅이 기름지고 오곡을 키우기에 마땅하오니 도읍할만한 곳입니다." 

 

하고 드디어 왕을 권하여 도읍을 옮겼다. 

 

이곳을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라 하고 혹은 동부여(東夫餘)라고도 한다.

 

5대 고두막(高豆莫) (22년간 재위, 27년간 재제위)

첫해(癸酉 기원전 108년)가 고우루(高于婁) 13년이다. 임금의 사람됨이 호걸 스럽고 준수하며 용병을 잘 하였다. 

 

일찍이 북부여(北夫餘)가 쇠하고 한(漢)의 도둑이 강성함을 보고 분개하여 세상을 구할 뜻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본(卒本)에서 즉위하여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하고 혹은 고열가(高列加)의 후손이라고도 하였다. 

 

【졸본 卒本 고두막한이 일어난 곳으로 동요하와 서요하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졸본천은 비류수(동요하)의 한 가지인 현재의 온덕하이다】 

 

3년(기원전 106년)에 임금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檄文)을 띄웠는데 가는 곳마다 대적하는 자가 없더니 10여일이 못되어 무리가 5000에 이르렀다. 싸울 때마다 한의 도둑이 그대로 무너지니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구려하(句黎河)를 건너 추격하여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곧 옛날 고리국땅이다. 

 

22년(기원전 87년)은 곧 고우루 34년이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배천(裵川)의 한나라 도적을 쳐서 이기고 남아있는 백성들과 힘을 합하여 가는 곳마다 계속하여 한나라 도적을 쳐부수고 그 지키는 장수를 사로잡아 적을 막으며 대비 하였다.

 

23년(기원전 86년)에 북부여(北夫餘) 온 성읍이 항복하고 여러번 보전하게 해주기를 애걸 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해부루(解夫婁)의 직급을 낮추어 후(侯)로 삼고 이를 분릉으로 옮게게 하였다. 

【분릉 이통하와 송화강이 만난 곳을 이른다. 다시 말하면 분릉수의 가지가 이통하이고 이통하의 가지가 개사수이다

 

그리고 임금이 앞에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무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인도하여 도성으로 들어가니 이를 북부여라 하였다. 가을 8월에 한의 도적과 더불어 여러 번 서압록하(西鴨綠河) 위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30년(기원전 79년)년 5월 5일에 고주몽(高朱蒙)이 분릉에서 탄생하였다. 

 

49년(기원전 59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유명(遺命)에 의하여 졸본(卒本)천에 장사지내고 태자 고무서가 왕위에 올랐다. 


 
6대 고무서(高無胥) (2년간 재위)

첫 해(壬戌 기원전 59년)에 임금이 졸본천에서 즉위하였다. 

 

2년(기원전 58년)에 임금이 순수하다가 영고탑(寧古塔)에 이르러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고주몽(高朱蒙)이 유명에 따라 그 뒤를 이어 대통을 계승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보고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 자리에 올랐는데 당시의 나이가 23세였다. 

 

그 때에 하부여 사람이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자,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부(陜父) 등 세 사람과 더불어 덕과 의로써 사귄 벗이 되어 도망하였다. 

 

【오이(烏伊)·마리(摩離)·협부(陜父) 왕검조선 때는 단제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비왕(裨王) 2명을 번한(飜汗.番汗), 마한(馬汗)이라 불렀는데, 고구려 때는 단제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최고위 관리를 오이, 마리라 불렀다. 따라서 고주몽이 오이, 마리를 데리고 갔다는 것은 부여의 고위관리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는 뜻이다】 

 

이후 골본(忽本:심양)이 현도군에게 점령당하자 당시 북부여의 수도이던 골본(忽本)에 남아 있던 동명계 무리 중 일부는 장춘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그 후 이 무리들은 동명성제 10년(기원전 28년)에 고구려에 정복되었다. 그러나 그 나머지 무리들은 계속 존속하니, 후에 위구태가 백제국 (구태 백제국을 지칭하며, 비류백제, 온조백제, 와 함께 3대 백제국이다)을 건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