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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7 : 부여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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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7 : 부여 3

두바퀴인생 2010. 9. 19. 02:34

 

 

한국의 역사 17 : 부여 3

 

 

                                        

 

 

 

해모수 

 

해모수(解慕漱)는 북부여의 시조이다. 고리국 사람으로서 일찍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뒤 천제의 아들이라 자칭하였다. 흘승골의 승(升)은 본(本)의 오기에 기인한다. 왕이 되어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하백의 딸 유화와의 사이에서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이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국호는 부여였지만 후대에서 여러 부여계 국가를 구분하기 위해 북부여로 붙여진 것으로 본다. 졸본(卒本), 홀본(忽本), 골본, 흘본(흘승골), 솔빈 등은 다 같은 이름을 지칭한다. 골(忽)은 고을이라는 뜻인데 중국사서의 기록 특징 상, 蒙, 匈처럼 졸(卒, 죽음)한다는 뜻으로 그리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야 사학자 중에는 단군조선의 말기 나라 이름이 이미 부여로 바뀌었으며 허약해진 단군조선을 이어 고리국의 해모수가 세력을 모아 B.C. 239년 4월 8일에 부여를 세웠다고 말한다. 석가탄신일로 기념하는 사월 초파일은 불교 전래 후 해모수의 건국일과 합쳐져서 생겼다고도 한다.(마치 예수탄생일이 로마의 태양축제일인 동지 즈음과 결합되어 생긴 것 처럼) 그리고 주몽은 해씨로서 해모수의 후손 중의 하나이며,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의 전 남편 우태 역시 해씨로서 해모수의 후손이라고 한다.

 

북부여 성립 당시 남쪽에서는 역시 단군조선의 옛 땅을 이어 후조선의 부왕(비왕)이 들어 있었다. 후조선은 기씨(箕氏) 조선이라고도 하지만 성씨에 대해 논란이 많아 부왕, 준왕이라고 부른다. 해모수의 고리족에 대해서 8 세기경 코리(Khori)나 그 후 몽골의 할흐(Khalkh) 족으로 이어졌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해부루 

 

해부루동부여의 창건자이다.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천제를 올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바위를 굴려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해부루가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고 말했다. 이가 곧 금와(金蛙)이다.

 

또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 속에 천신이 나타나 부루왕에게 그의 나라를 옮기게 조언하니, 해부루는 나라를 가섭원으로 옮겼고 나라의 이름도 동부여가 되었다.

 

이후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기원전 60년 경)

 

 

금와

 

금와(金蛙)는 동부여의 제2대 군주이며 주몽 설화에서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과 관련하여 자주 나타난다. 성은 해(解)씨이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금와

금와는 해부루의 아들이며 태자이다.

 

동부여의 왕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천제를 올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바위를 굴려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해부루가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고 말했다. 이가 곧 금와이다. [금와란, 금개구리로서 개구리는 고구리로부터 기인된 말로 보인다. 북방어에 알틴, 알탄, 알지, 알신 등이 한자로 금(金)으로 표기된다.] 훗날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북부여를 창건한 후, 해부루는 도읍을 옮겼으며, 이후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얼마 후,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이가 바로 유화부인이다. 해모수와 강제로 잠자리를 함께 한 유화부인은 부모에게 버려져 그곳에 있었는데, 금와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궁으로 맞아들였다. 이후 유화부인이 알을 하나 낳았고, 이 알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주몽이다.

 

이후 주몽이 장성하자, 대소를 비롯한 금와의 일곱 친자인 왕자들이 그를 시기하여 주몽의 제거를 부탁하나, 금와는 이를 허락치 않는다. 이후 대소가 주몽을 제거하려 하자, 주몽은 동부여를 떠나 졸본부여로 도피하여 고구려를 건국한다.(기원전 37년)

 

금와의 재위 기간

금와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유화부인에게서 주몽이 태어났다. 주몽의 탄생 연도가 기원전 58년이므로, 금와의 등극 시기는 기원전 6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금와가 왕위에 내려온 시기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기원전 19년 4월에 유리명왕이 어머니인 왕후 예씨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한 때를 전후로 대소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대소

 

대소(帶素, 기원전 60년?~서기 22년)는 동부여의 제3대 군주이며, 금와의 첫째 아들이다. 성은 해(解).

 

대소와 동명성왕

대소는 금와의 큰아들로, 6명의 형제가 있었다고 한다. 금와의 아들들과 주몽이 모두 장성하여, 금와의 후계자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주몽이 항상 금와의 친아들보다 뛰어나 대소의 시기를 사게 되었다. 대소가 주몽을 미워하여 금와에게 주몽을 제거할 것을 간언하나, 거부당한다.

 

이에 대소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주몽을 추격하던 중, 엄호수에 이르러 물고기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몽을 강 건너로 보내주는 바람에, 대소는 주몽을 더이상 추격할 수 없었다. 역사는 이 사건을 가리켜 어별성교(魚鼈成橋)라 일컫는다. 이후 주몽졸본부여로 건너가 고구려를 창건한다.(기원전 37년)

 

대소와 유리왕

유리왕이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한 기원전 19년을 전후로 대소는 동부여의 권력자가 되었다.(왕위에 등극하였는지는 불명확) 이후 유리명왕이 고구려의 왕위에 오르자, 대소는 고구려에 대한 본격적인 전쟁을 개시한다.

 

유리명왕 14년인 기원전 6년, 대소는 유리명왕과 화친을 제의하고 인질교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유리명왕이 이를 거부하였고, 그해 11월 50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략한다. 그리고 고구려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후 대소는 직접적인 전쟁보다 고구려 내부의 대(對)부여 강경파온건파의 다툼을 지켜보는 쪽으로 정책을 바꾼다. 유리명왕 역시 건국 초기에 지나친 전쟁은 원하지 않았으며, 대부여 강경파였던 탁리사비를 죽임으로써, 의지를 보인다.

 

이후 왕자 도절해명이 잇달아 죽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민심이 흔들리는 현상이 도래한다. 10년경, 대소는 다시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하나, 유리명왕이 동부여에 화친을 청하면서, 전쟁은 벌어지지 않는다.

 

대소와 대무신왕

유리명왕의 다음 대인 대무신왕 대에도 대소는 동부여 군주의 자리를 굳게 지킨다. 대무신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째가 되는 20년, 대소는 고구려 측에 몸통은 두 개인데 머리는 하나뿐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

이에 대무신왕은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구나."

 

이러한 답변을 들은 대소는 크게 노하였고 고구려에 대한 전쟁준비를 서두른다. 대무신왕은 이에 선제공격으로 맞섰다. 21년 12월, 대무신왕은 괴유를 앞세워 부여를 침공했고, 22년 2월의 전투에서 대소는 패하여 참수당한다.

 

대소가 죽은 후 대소의 동생인 갈사왕갈사국를 세웠으며, 22년 7월에 대소의 사촌동생이 백성 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귀순하는 등, 동부여는 큰 혼란에 빠진다.

 

대소의 생몰년

대소는 주몽의 탄생년인 기원전 58년 이전에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대무신왕과의 전쟁에서 죽었을 때는 서기 22년 2월로, 80대의 나이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몽(동명성왕,동명왕)

 

 

동명성왕(東明聖王,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은 고구려의 개국 시조이자 초대 군주(재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이다. 은 고(高)씨이며, 원래 성은 해(解)이다. 는 주몽(朱蒙), 추모(鄒牟), 중해(衆解), 상해(象解), 도모(都慕)라고 한다. 동명왕(東明王)이라고도 한다. 상해의 상(象)은 중(衆)자의 오기로부터 유래일 수도 있다. 해모수의 연대와 주몽의 연대를 볼 때 주몽이 해모수의 직계 아들이라고 볼 수 없으며, 해모수와 주몽 사이에 부여의 중시조로서 원래의 동명이 존재한 것으로 보면 연대가 잘 설명된다. 이 동명은 위만 조선이 무너질 당시의 혼란기에 거병하여 북부여를 접수하고 해부루를 동부여로 밀어낸 인물로 보인다.

 

                             

 

탄생 설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및 《동명왕편》은 동명성왕의 탄생 설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현재 전해지는 주몽 설화는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하면서 부여 시조 동명왕의 설화를 짜맞춘 것이다. 역사계에서는 동명왕과 주몽을 다른 인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주몽이 해모수와 동명왕의 혈통이거나 또는 계승자인 것은 분명하다.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의 어여쁜 세 딸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가 더위를 피하여 청하(지금의 압록강)의 웅심연(熊心淵)에서 놀고 있었다. 이때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오다 연못안에 세 처녀의 가냘프고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세 처녀를 모처로 유인하여 술에 취하게 한 뒤, 문을 걸어 잠그고 사욕을 채우려 하였다. 훤화, 위화는 힘을 다해 탈출하였으나 유화는 그만 해모수에게 붙잡히게 된다.

 

하백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너는 대관절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듯 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하니 해모수가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높은 문족과 혼인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말하자, 하백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술법을 겨루며 해모수를 시험해 본 뒤, 곧 해모수와 유화의 결혼을 인정하며 유화를 하늘나라로 보내주나 여전히 해모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은 하백은 가죽주머니에 술에 크게 취한 해모수를 주머니에 묶어 가둔 뒤에 올려보내나 물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술에 깨버린 해모수가 크게 노하여 주머니를 뚫고 울면서 놓아주지 않으려는 유화를 버리고 홀로 떠나버렸다.

 

이에 하백은 유화에게 함부러 남자를 만난것을 나무라며 시녀 몇명을 붙여준 뒤 귀양보냈다.

 

이후 동부여의 왕 금와왕이 우연히 우발수(優渤水)로 나들이를 갔다가 유화(柳花)를 만나고, 유화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금와왕은 유화를 궁궐로 데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에게 햇빛이 계속해서 비치더니 마침내 임신하게 된다. 하지만 유화가 아이가 아니라 커다란 알을 낳자, 이 소식을 들은 금와왕은 불길한 징조라 하여 유화에게 알을 빼앗아 돼지우리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돼지들은 이 알을 먹지 않았다. 그 뒤 소와 말이 짓밟도록 알을 길가에 버리기도 하고, 새들이 쪼아 먹도록 들판에 놓아 두기도 했다. 하지만 소와 말은 알을 피해 갔고, 새들은 오히려 알을 품어 주었다. 그래서 도끼로 내리쳐보기도 했지만 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금와왕은 하는 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유화는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 하나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날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이에 이 아이의 이름을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 “주몽”이라고 지었다. 주몽은 대소 왕자 등 금와왕의 7명의 아들보다 능력이 출중하여 그들의 시기를 받았고,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 하였다.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유화는 주몽에게 동부여를 떠나라고 충고하였다.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친구와 함께 동부여를 떠나 추격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淹利大水)에 이르렀다.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엄리대수를 향해 주몽은 “나는 천제의 손자이며, 강의 신의 외손자다. 지금 나를 쫓는 자가 뒤를 따르니 그 위험이 급한 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 달라.”라고 하니, 이에 감응한 자라물고기가 물 위로 떠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추격자들은 강을 건너지 못해 더이상 쫓아오지 못했다 하는데, 역사는 이 사건을 가리켜 어별성교(魚鼈成橋)라 일컫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모수를 아버지로 하는 해부루고주몽은 배다른 형제로 해석할 수 있는데 주몽은 연대상으로 해부루의 손자뻘에 해당된다. 해모수의 아들이라기보다 해모수의 혈통으로서 권력에서 소외되어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주몽을 데리고(또는 임신한 상태로) 금와왕의 후궁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

부여에서 주몽은 자란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아 촉망을 받던 중 대소(帶素) 등 금와왕의 일곱 왕자가 그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자 화를 피하여 이주하였다.

 

대소의 위협에서 무사히 벗어난 주몽은 유유히 남쪽으로 향하여 마침내 졸본의 구려국(句麗國) (혹은 졸본부여)에 이르게 된다. 주몽은 졸본부여의 유력자였던 연타취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37년, 주몽은 졸본(卒本)에 구려국의 뒤를 이어 높을 고(高)를 붙여 고구려를 건국하고, 자신의 성(姓)을 ‘고’(高)라 했다. 그리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주몽은 영토확장을 위해서는 우선 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변방에 살고 있던 말갈족의 부락을 평정하여 말갈족이 더이상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기원전 36년에는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沸流國, ‘송양국’이라고도 한다)의 왕 송양(松讓)에게 활쏘기 경쟁으로 이겨서 항복을 받아내어 ‘옛 땅을 회복했다.’라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多勿)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도주로 삼았다.

 

비류국을 정복한 주몽은 기원전 34년 마침내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하여 나라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기원전 32년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보내 태백산(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였으며, 기원전 28년에는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하였다.

 

기원전 24년 가을 음력 8월에 동부여에 남아있던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죽었다. 이때 금와왕이 그녀를 태후의 의례로써 장사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이에 주몽은 동부여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어머니 장례를 성대하게 치루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토산물을 보냈다. 하지만 금와왕이 죽고 그의 맏아들이었던 대소왕자가 왕위에 오르면서(기원전 19년 전후) 고구려와 동부여의 관계는 이전과 달리 급속도로 악화된다.

 

기원전 19년 여름 음력 4월에 주몽의 아들 유리가 동부여에서 어머니 예씨 부인과 함께 도망쳐 돌아오자 주몽은 기뻐하며 그를 태자로 삼았으며, 그 후 5개월 뒤에 40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능은 졸본 근처의 용산에 마련되었으며, 묘호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하였다.

 

가족 관계

 

주몽을 둘러싼 논쟁

 

탄생년도

삼국사기》는 주몽의 탄생 연도를 기원전 58년으로, 《삼국유사》는 기원전 4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건국이 기원전 37년인 것을 볼 때, 삼국사기의 기록이 좀 더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졸본부여와 고구려

《삼국사기》는 주몽의 건국 이야기와 더불어 주몽이 졸본부여의 공주와 결혼한 후, 졸본부여의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구려본기〉)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는 백제의 건국 이야기를 이야기하면서, 주몽이 결혼한 사람이 바로 소서노임을 밝히고 있다. 소서노는 졸본 사람 연타취발의 딸이며,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아내였다. 그러나 우태가 죽은 후, 29세의 나이로 다시 주몽과 혼인하였다.

 

일부 중국 사학자들과 북조선의 사학자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보장왕 대의 기사(27년 음력 2월 : “고씨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운 지 이제 900년이 된다.”)를 내세워 고구려의 건국시기를 기원전 200년경으로 추정한다.

 

위와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주몽은 동부여에서 도망친 후, 졸본부여의 귀족인 연타취발과 혼인관계를 맺은 후, 졸본부여의 군주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200년경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는 어떠한 사료도 없는 점으로 보아, '고구려 900년 역사'라는 보장왕 대의 기사는, 주몽 이전의 졸본부여의 역사를 합친 것으로 판단된다.

 

졸본은 홀본, 흘본, 흘승골, 골본으로도 불리며 흘승골의 승(升)은 본(本)의 오기로부터 기인한다. 그 이름은 발해의 솔빈부를 거쳐 지금의 하얼빈에까지 남아있다. 몽골의 동쪽 지역에서는 코릴라이족 출신의 메르겐이 동몽골 지역을 거쳐 자기의 일족 '솔론'족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이로써 고려나 한국을 부르는 솔롱고스의 어원이 되었다. 발음이 변천되었겠지만 몽골어로 메르겐(Mergen)은 명궁의 뜻이고, 주우(Zöv)는 '바른'의 뜻으로서 '주우 메르겐'은 주몽이 곧 '선사자(善射者, 활 잘쏘는 이)'란 말이라고 한 것과 같다. 중국 동북부의 넌장(눈강)현을 '메르겐'이라고도 부르니, 인명이나 지명으로 유추할 때 만주 일대가 고구려의 건국지인 것은 확실하다. 엄리대수는 눈강, 흑룡강(아무르강), 송화강 등 여러 가설이 있지만, 아무르강과 연관지을 수 있다. 지명을 정치적 인위적으로 새로 붙이지 않는다면 과거로부터 부르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주몽과 동명왕의 별개 인물설

주몽과 동명왕이 별개 인물이라는 이야기는, 서기 60년 후한의 왕형이 쓴 『논형』에 나오는 다음 같은 기록에 근거하는 듯하다.

 

"북쪽 이민족 탁리국(고리국)에 왕을 모시는 여자시종이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했다 그러자 여자 시종은 계란 같은 큰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답했다. 나중에 아이를 낳아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놓고 말에 밟혀 죽도록 했으나, 말들 역시 입으로 숨을 불어 넣어 죽지 않았다. 왕은 아이가 아마 하늘의 자식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모친에게 노비로 거두어 기르게 했으며 동명(東明)이라 부르며 소나 말을 치게 했다. 동명의 활 솜씨가 뛰어나자 왕은 그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그를 죽이려 했다.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가다가 엄체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고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적하던 병사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그는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에 부여국이 생기게 된 유래이다."

 

위의 기록은 바로 동명왕의 탄생, 건국 설화인데, 동명왕을 부여의 건국자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록에 근거해 동명왕이 고구려가 아닌 부여의 건국자라고 보는 견해에 의하면 동명성왕은 주몽과 동명왕이 겹쳐지면서 붙여진 후세의 명칭이라는 것이다.

 

이 동명왕 신화를 보면 고주몽 신화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따라서 주몽과 동명왕이 별개의 인물이라는 주장은, 동명왕 신화가 원본이고 고주몽 신화는 그 모조 신화라고 보는 관점에 근거한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천손의 후예라는 천손의식이 굉장히 강했다.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건국자 주몽은 그 무엇보다 신령하고 대단한 존재로 신격화될 필요가 있었고 그런 고구려인들이 이용한 것이 바로 부여의 건국자이자 영웅 동명왕 신화였다는 것이다. 즉, 부여가 망하면서 고구려는 동명왕 신화를 자신들의 시조 고주몽의 신화로 둔갑시키고, 고주몽의 왕호도 동명성왕으로 바꾸었는데, 그 후 고구려의 국력이 더욱 강해지면서 원본인 동명왕 신화는 거의 잊혀지고 그 모조 신화인 고주몽 신화가 원본인 것처럼 인식되며 널리 퍼졌다는 것이 주몽과 동명왕이 별개의 인물이라는 주장하는 측의 견해이다.

 

 

소노서

 

소서노(召西奴, 기원전 66년?~기원전 6년?)는 비류를 시조로 하는 백제 건국 설화에서 나오는 비류온조의 어머니이자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의 두 번째 부인이다.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며, 북부여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인 우태와 처음에 혼인하였다. 우태 사후, 동명성왕과 혼인하여 그를 도와 고구려 건국에 일조했다고 한다. 이후에 부여에 있던 동명성왕의 장자 유리명왕이 고구려에 올 때 주몽과 결별하고 비류온조 두 아들과 함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소서노의 죽음

삼국사기에는 소서노의 죽음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봄 (음력) 2월, 경성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나이 61세였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 《삼국사기》백제본기,

일부 사학자는 이를 온조왕과 소서노의 다툼으로 해석한다. 즉, 처음 백제를 건국한 10인의 신하들 중, 비류를 지지했던 다섯 명의 신하들이 소서노를 위시하여 온조왕에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당하고 소서노 역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