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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 : 옥저, 동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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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 : 옥저, 동예

두바퀴인생 2010. 9. 16. 18:52

 

 

 

 

한국의 역사 14 : 옥저, 동예
 
 
 
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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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沃沮)는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기원후 5세기함경남도 북부에서 두만강 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던 종족과 읍락 집단을 가리킨다.

 

개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생산하였고, 어물과 소금 등의 해산물이 풍부했는데,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쳤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다. 민며느리제가 있었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풀이나 흙으로 가매장한 후에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공동묘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했는데, 그 입구에는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죽은 자의 양식으로 하였다. 고구려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한 옥저는 북위의 고구려 정벌의 여파로 동천왕 때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북옥저는 치구루(置溝婁)나 구루로 나타내었고 고구려어로 성(城)을 의미한다고 한다.[2]

 

위치

옥저는 고대에서 함경도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부족 사회이다. 북은 읍루·부여, 남은 예(濊)에 접하고 있었다. 일찍이 임둔이라 불리던 토착사회가 있어 뒤에 여기에 임둔군이 설치되었다.

 

통설

옥저는 동옥저로도 불렸고, 다시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되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남옥저는 함흥 일대에 있었고, 남으로는 정평 일대에서 동예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북옥저는 길림 연변에서 두만강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옥저와 주변국에 대한 위치 설명은 다음과 같다.

  •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으로 큰 바다(大海)를 접하였다. 그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서 천 리나 된다. 북쪽에는 부여읍루, 남쪽에는 예맥에 접하였다.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 夫餘 南與濊貊接
  •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에 있으며, 남으로 조선 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하였다.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 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 북옥저는 치구루라고도 불린다. 남옥저에서 8백여리의 거리에 있으며, 그 풍속은 남과 북이 같으며, 읍루와 접하였다.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 읍루는 부여 북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와 접하였다. 남쪽으로는 북옥저에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을 알지 못한다.
挹婁在夫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 예는 남으로 진, 북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하였다.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 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후한서》 「동이열전」의 옥저에 대한 내용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같거나 거의 비슷하다.

 

다른 의견

다음은 통설과 다른 소수의견이다.

  • 윤내현 주장 - 옥저는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요서지역의 대릉하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나라가 이 유역에 현토군을 설치하자 이를 피하여 동으로 이동하여 함경도에 정착한 것이 동옥저이며 옥저와 동옥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후한서》 「동이열전」의 옥저전의 내용(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치어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 武帝滅朝鮮,以沃沮地為玄菟郡。後為夷貊所侵,徙郡於高句驪西北,更以沃沮為縣,屬樂浪東部都尉))을, 옥저를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 옥저의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 “(옥저는)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하게 되었다(其土迫小,介於大國之閒,遂臣屬句驪).”라고 하였다.

 

변천

남옥저의 중심지역의 집단은 기원전 2세기위만조선에 복속되었고, 다시 의 군현에 소속되었다. 기원후 30년 한의 제후국으로 봉해졌으나 56년에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옥저는 고조선 멸망 이후 임둔, 현도, 낙랑군으로 소속이 바뀌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동예

 

동예(東濊)는 기원전 3세기 이전 ~ 3세기경에 한반도 동해안 일대에 자리잡았던 한민족의 초기 고대국가의 하나이다. (濊)라고 불렸으나, 넓은 의미의 예와 구별하기 위해 통상 ‘동예’라고 부른다.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고, 직조기술도 발달하였다. 산과 하천을 경계로 읍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을 삼로(三老)가 통치했다.

 

역사

지금의 원산 부근인 안변(安邊)지방을 중심으로 중부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부여 계열의 부족 사회로서, 옥저와 마찬가지로 한의 군현으로 있다가 후한(後漢) 말에 고구려에 복속했다.

 

위치

예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예는 북쪽으로 고구려옥저를 접하고, 남쪽으로 진한과 접하며,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낙랑에 이르니 본시 조선의 땅’이라고 기술하였다. 《삼국지》 부여전에서는 “위나라 때 부여의 곳집에 인문(印文)이 있었는데 예왕(濊王)의 도장이라 했고, 나라 안에 옛성이 있었는데 이름을 예성(濊城)이라 했으니, 대개 본시 예·맥의 땅”이라고 기술하였다.

 

 

                                                

 

 

삼국사기》 신라기 지리지에서는 ‘명주는 본디 고구려의 아슬라주인데 뒤에 신라에 속하였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지금 신라 북쪽 지경 명주가 대개 예국(濊國)이다. 이전 역사책(삼국지 부여전 등)에서 부여로 예 땅을 삼은 것은 대개 잘못이다’라고 기술하여, 동예의 위치를 지금의 강릉시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동사강목》에서는 ‘고구려 태조대왕이 동옥저를 취하였는데, 그 땅이 동쪽으로는 창해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동옥저의 땅은 지금의 함경남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 예 땅은 여기까지이고 한나라의 무제가 설치한 창해군이 통솔한 땅 또한 여기까지였는가’라고 기술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명주는 본시 예국이다’라고 하였고, 《여지승람》에는 ‘강릉이 본디 명주인데, 강릉부 동쪽에 예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그 수도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지》「동이전」에 2만 호의 인구가 기록되어 있고, 《한서》「동이열전」에서는 28만 명이 한의 요동군에 투항한 기록이 나온다. 대한민국 역사학회는 대부분 일반적으로 두 사서의 예를 별개의 세력으로 보고 있다.

 

윤내현 교수는 예(濊)는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요서지방의 난하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낙랑군을 피하여 동으로 이동하여 강원도 일대에 정착했다는 설을 주장한다.

 

정치·문화

공열(孔列)토기로 대표되는 무문토기문화이다. 주민은 옥저·고구려와 같은 예맥족이며 언어·풍속도 거의 같았다. 중기 이후로는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삼국지》〈위지〉(魏志)에 따르면, 호수(戶數)는 2만 정도이나 군주가 없었으며, 옥저의 삼로(三老)와 같이 중국 민족이 온 이래 후(侯)·읍장(邑長)·삼로(三老)의 관명을 사용하며 서민을 다스렸다.

 

한편 책화(責禍)라는 씨족 사회의 유습(遺習)이 남아 있었다. 동예의 법속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원시 형법이 사용되었으며, 도적이 적었다.

 

특산물

단궁(檀弓), 문표(文豹), 과하마(果下馬), 반어피(班魚皮, 海豹皮), 명주(비단)와 삼베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 과하마 : 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는 키 3척의 말
  • 반어피 : '반어피'는 수·당대 이후로 해표(바다표범)의 가죽이라고 하였다.
  • 명주(비단)와 삼베 : 방직 기술이 발달

 

풍습

혼상법(婚喪法)은 고구려와 비슷하여 동성(同姓)간에는 혼인을 하지 않고(족외혼), 질병자나 사망자가 있으면 곧 집을 버리는 등 금기(禁忌)가 많았다. 주민은 검소·근면하고 싸움에 능하였다. 매년 10월에 무천(舞天)이라 일컬어진 제천행사가 있었다.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는 책화라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새벽에 별자리를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점쳤다(별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