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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 : 청동기 시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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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 : 청동기 시대

두바퀴인생 2010. 9. 13. 02:56

 

 

 

 
한국의 역사 10 : 청동기 시대
 
 
 
한국의 청동기 시대

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연표)  v  d  e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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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진국
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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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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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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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한국의 청동기 시대기원전 약 1500년부터 기원전 3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다만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로 한정한다면 그 상한은 기원전 약 1000년을 넘어서지 않는다.

 

한반도에 청동기 시대가 존재한다는 것이 학술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청동기 시대에 관하여 그 간의 경위를 살펴볼 때 한국의 청동기 시대 연구도 나름대로의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다른 지역의 청동기 시대와는 특징적인 면에서 차이점을 보이기 때문에 민무늬토기 시대라고 명명한다.

 

특징 및 연구

청동기 유물과 함께 출토된 간 돌칼

 

 

개화기에서 일제 시대에는 식민사관에 입각한 일본 학자들이 한국의 고고학을 연구하였을 때, 한국에는 물론 청동기 시대가 없었다고 보았으며, 그뿐만 아니라 금속문화라는 것 자체도 한국에서는 독자적인 발전이 없이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이라고 일관하여 생각하였던 것이다.

 

1945년 이후 한국인에 의한 고고학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한국에도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이 차츰 알려지게 되었고, 또한 각처에서 청동기 유물이 나타남으로써 물적 증거가 되기 시작하였다. 과거에는 한국의 청동기 유물은 북한(北韓) 지역에만 있다는 설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한반도 전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출토(出土)되고 있어 모두 시정되었다. 현재 청동기 유물의 분포를 보면, 함경도에서부터 전라남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다.

 

원래 청동기 시대는 석기 시대를 거치거나 지역에 따라서는 석기와 공존하는 금석 병용기(金石倂用器) 시대를 거친 뒤에 나타나는데, 한국에서는 뚜렷한 금석병용기의 유물은 발굴되지 않았다. 청동기 유물은 석기와 함께 나오거나 순수하게 청동 유물만 나오기도 하며, 철기와 함께 출토(出土)되기도 한다. 이는 보편적인 현상임에도 일제강점기의 연구는 철기가 나오는 김해 패총(金海貝塚, 조개더미)을 금석 병용기라고 정의하였다.

 

시대의 상한

현재 청동기 시대의 상한(上限) 문제는 학계에서 정론(定論)이 없는데, 기원전 7세기, 기원전 10세기 등 대체로 두 설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청동기 유물이 중국적인 영향권이 아님을 볼 때, 다시 검토해야 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돌널무덤은 그 분포가 남(南)시베리아·만주·한국 등지까지 넓게 퍼져 있는데, 시베리아의 돌널무덤은 기원전 8세기로 정해지고 있어 이 연대가 한국의 청동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볼 수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돌널무덤에서도 청동기 유물이 나오기 때문에 향후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반드시 기원전 8세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연대가 더 올라갈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유적 및 유물

한국 고유의 청동기

청동기 시대의 간 돌칼
 
 
 
붉은 간토기

 

 

한국의 청동기로는 세형 동검(細形銅劍)·겹꼭지 잔줄 거울(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청동촉(靑銅鏃)·구리창(동모(銅鉾)) 등이 있다. 특히 세형 동검은 만주, 한국, 일본규슈(九州), 러시아연해주에까지 걸친 광대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지난날 한국에서 나오는 간석기 돌검은 동검의 모방품이라고 보았지만, 지금은 그러한 해석이 타당성을 잃고 있다. 그외 경문청동기를 비롯하여 제사나 주술 등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가지방울이나 잔무늬 거울 등이 출토되고 있다.

 

토기

진주시 대평면에서 출토된 민무늬 토기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는 토기는 주로 민무늬 토기이다. 이 민무늬 토기는 무늬 토기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구릉 지대에서 출토되고 있지만, 때때로 청동기와도 함께 오고 있다. 또 대전 괴정동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검은간토기가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기도 한다. 특히 민무늬 토기는 무늬 토기(특히 빗살무늬 토기)와 달리 밑이 편편한 것이 특징인데, 반달 돌칼이 나오는 경우 그것은 예외 없이 민무늬 토기 유적이며, 무늬 토기와는 관계가 없다. 반달 돌칼은 중국 룽산 문화(龍山文化)의 특징인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농경이 있었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지만, 그것이 전파된 경로는 아직도 정확하지 않다.

  • 붉은 간토기(홍도)
  • 검은 간토기(흑도)
  • 민무늬 토기(덧띠 토기)

 

무덤

강화도 고인돌

 

 

청동기가 출토되고 있는 묘제, 곧 무덤에 대한 관습이나 제도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널무덤·고인돌(Dolmen, 지석묘)·돌널무덤(석관묘), 독무덤(옹관묘), 움무덤(토광묘) 등인데, 이를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널무덤

은파군 갈현리 하석동, 황주군 천주리 한밭골, 황주군 흑교리(黑橋里), 재령군 부덕리 수역동, 은율군 운성리, 황주군 선봉리, 경주 구정리(九政里) 등에서 세형 동검 등이 쇳조각(철편(鐵片))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함경도에서도 흥남군 호상동, 홍원군 운포리, 영흥군 소라리, 성주군 대성리, 경성군 동관리, 신창군 세동리에서 청동 유물이 나온 바 있다.

 

돌널무덤

강계군 어뢰면, 영덕군 사천리, 사리원 상매리, 서광군 천곡리에서 청동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인돌

한국의 고인돌도 지난날에는 남방식(南方式)·북방식(北方式)으로 확연히 구별하였지만, 북에서도 남방식의 고인돌이 나타나고 있어 정확한 개념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양주군 사노리, 봉산군 어수구, 김해 무계리에서 청동 유물을 얻고 있다. 이 외에도 대전시 괴정동과 전라남도 화순에서 청동제 유물이 나와 귀중한 학술적 가치를 던져 주고 있다.

 

이 고인돌도 전파 경로가 불명(不明)인데, 중국의 동북지방에 많이 분포되고 있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만주·한국과 일본의 구주 지방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고인돌이 대륙으로부터의 전파인지, 해로(海路)로 들어온 것인지는 아직도 단언할 수가 없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고인돌의 연대는 상한(上限)이 기원전 8세기 이전에 시작되어 기원전 3~2세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대표 유적지

  • 부여 송국리 선사유적지
  • 울주 검단리 유적
  • 진주 남강 유적지
  • 의창 덕천리 유적

 

경제 활동

청동기 시대의 경제활동은 어로(漁撈)나 수렵 및 채집과 같은 초보적 단계를 벗어나 최소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반달 돌칼의 존재는 농경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고, 거대한 고인돌을 조영(造營)할 수 있는 힘도 실은 양곡의 충족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청동기라는 이기(利器)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벌써 신분제의 초기적 성립을 보여주기 때문에 자유자재의 양식 생산이 가능한 사회에서 청동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들 청동기를 만들 수 있는 사회적 바탕이 곧 고대 국가를 세울 수 있는 힘과 조직의 근원이 된 것이다.

갤러리

 

 

부여 송국리, 한국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다.

 

지난 75년부터 20년간 발굴이 진행된 부여 송국리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마을로 상징되고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석관묘에서 청동 비파형 동검을 비롯하여 잘 갈아서 만든 고급 석기류, 옥 제품, 청동 도기 거푸집 등이 출토 되었다. 대규모 마을 형태가 유지된 채 발굴되었는데, 마을 주변에 환호와 목책 구덩이가 발견되었고 외부의 침입에 대비한 흔적을 발견하였다. 집단적으로 모여 살았던 흔적인 많은 집터도 발견되었다.

 

청동기의 발명으로 농업 생산이 크게 늘어난 청동기 사회는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점차 빈익빈 부익부가 발생되었다. 그에 따라 자연적으로 공동체 마을에서는 계급이 형성되면서 마을을 지도하고 통치할  지배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또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식량이 풍족해졌고 식량을 저장해야 했으며 이러한 식량을 탐내는 다른 마을이나 부족 등 외부의 침입과 약탈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야 할 의무도 생겨났다.

 

개인 주거지는 물론 마을 공동체의 곡간을 만들어 식량를 비축하였다. 움집은 반지하화로 집안 구조는 신석기 시대와 비슷하나 사냥도구, 농기구, 석도,돌낫,갈돌,곡식저장 토기, 마을 공동체 곡식 저장고에는 수수,쌀, 보리, 팥, 밀 등 10여 가지 이상의 곡물류가 발견되었다. 마을 부족장은 청동제 칼을 차고 청동 거울을 가슴이 걸고 햋빛에 광채를 발하면서 마을을 활보하였을 것이다.

 

일년간 고생하여 생산한 식량을 노리는 외부의 침략 부족이 늘어나면서 한반도 각지에서는 부족간에 식량쟁탈전이 벌어지곤 하였다. 농사도 짓지 못하고 마을을 형성하지 못한 떠돌이 사람들이 떼를 지어 습격하거나 식량을 약탈해 가기도 하였고 강력한 부족은 다른 부족을 침략하여 정벌하거나 통합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래서 마을을 스스로 지킬 수 없다면 언제 다른 부족에게 점령당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노예로 전락하거나 또는 식량을 빼앗기고 가족들이 끌려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던 시대였다. 청동기 시대는 농업 생산량의 혁신을 가져와 풍족한 생산물이 넘쳐나자 식량을 저장하고 보호해야 할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방어시설의 등장은 본격적인 농경 정착시대가 도래하였던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청동기 사회는 춘추전국시대를 방불하게 하였던 것이다. 송국리 마을은 처음에는 이렇게 번창하였지만 어느날 원형집터 사람들이 일거에 침입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파괴하였으며 부족장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저항하다 죽는 등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라지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원형집터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

 

부여 송국리 마을 외에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청동기 유적지 발굴에서 그 당시 사람들의 살았던 모습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96년 남강 댐 수몰시 진주 대평리 청동기 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약 110만평 규모로 엄청난 크기로 마을 주변에는 환호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길이가 300미터, 폭 2미터, 깊이 1.5미터의 역삼각형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환호 옆에는 목책을 세웠던 구덩이가 일정 간격으로 발견되었다.

 

강릉의 방동리 마을 유적지는 환호속에 여러 곳에 주먹 크기의 깬돌 무더기가 발견되었고 이는 투석전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환호와 목책 흔적은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그만큼 마을간 또는 부족간에전쟁이 심하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림동 고인돌에는 칼과 사람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무기에 대한 숭배 사상이 강하였던 사회였다.

 

춘천 천전리 유적에서는 길이 2미터, 깊이 1미터의 원형 구덩이가 일정 간격으로 발견되었는데, 바로 곡식 저장고 였다. 고랑, 이랑, 두들 등 밭을 일군 흔적이 발견되어 대규모 적인 농경 사회임을 나타내고 있다. 나무 가공용 석기 발굴로 다양한 농기구를 개발하여 농경에 사용하였던 흔적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농업 생산량의 혁신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천안 마전리 유적에서는 논 유적과 수로, 관개시설 설치 흔적이 발견되었고 정착을 위한 대규모 취락이 등장하였으며 농업 생산의 혁신으로 인정적인 식량 확보로 지배계층이 등장하였고 사회.경제 체제가 변화되었으며 부의 축척을 가져오게 되었다.

 

마산 진동리 유적에서는 무덤군이 발견되었는데, 석관묘 30기, 고인돌 40기가 발견되었다. 돌크기, 무덤 크기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잇는 바, 이는 권력자와 지배자의 구분에 따라 무덤 크기도 달라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주거지는 크기가 달라지는 모습도 발견되었는데, 빈부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는 증거이다. 농토가 넓고 살기가 좋은 곳에는 무덤이나 고인돌이 대규모로 집단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무게가 무려 109톤이나 나가는 돌은데, 이를 운반하려면 대략 1,090명이 필요하고 5인 가족으로 보면 5,000~6,000명이 집단으로 거주하였던 곳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다. 이는 대족장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전북 고창 운곡리 고인돌의 경우는 297톤이나 나가는데, 운반에 필요한 인원은 대략 2,970명 정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성인 남성이 이루는 가정은 대략 1만 4,850명 이상의 인구가 모여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청동기 사회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지배자는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한반도의 청동기 사회는 정복, 통합 과정을 반복하였고 이는 고대 국가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 세계 고인돌이 약 4만개 정도인데, 그 중 한반도 고인돌이 거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청동기 시대의 한반도에는 수많은 부족 공동체가 존재하였고 집단 농경사회가 전개되었으며 농경 기술의 혁신으로 풍요를 가져왔고 이에 따라 빈인빈 부익부가 발생하면서 차별과 계급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부의 불균형은 공동체간에 상대적인 힘의 불균형으로 나타났고 전쟁,정복,파괴,통합이 반복되면서 새로운 사회로 탈바꿈하고 있었던 것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대 국가의 출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