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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 : 선사 시대 구분 본문
한국의 역사 9 : 선사 시대 구분
한국의 역사 (연표) | |||||||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
환인 환웅 | ||||||
시 대 구 분 ‥ 원 삼 국 | 삼 국 | 남 북 국 | 후 삼 국 |
고조선 | ||||||
진국 | |||||||
삼한 | 옥 저 |
동 예 |
부 여 | ||||
진 한 |
변 한 |
마 한 | |||||
가 야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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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구 려 | |||||||
신 라 | |||||||
발 해 | |||||||
후 백 제 |
태 봉 | ||||||
고려 | |||||||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삼별초의 항쟁 ・ 홍건적의 고려 침공 | |||||||
조선 | |||||||
・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 |||||||
대한제국 |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 |||||||
군정기 |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한국의 선사 시대는 인류가 한반도에 나타난 시대로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를 말한다. 한반도의 선사 시대는 유럽이나 지중해 지역과는 달리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이 정리했던 《세 시대 체계》로 구분하기 어렵우며, 고고학적, 지질학적, 고생물학적 연구에 의존한다. 일반적인 일반적인 역사 및 고고학의 시대 구분에 의하면 석기시대에 해당되며, 석기 시대는 발굴되는 유적의 성격에 따라 다시 구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로 나누어진다. 그 영역은 한반도를 위주로 하지만, 그 기원 및 전파와 관련이 있는 러시아, 만주, 랴오닝, 중국 동부의 문화도 함께 연구된다.
지질학적 선사시대
지질학적 선사시대는 한반도 과거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바위는 선캄브리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연천의 지질시스템이 이에 해당하며, 서울 주위에서 북동쪽 방면으로 연천군으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눠지며, 각섬석 - 석영 - 장석 편암과 대리석, 석회-규산염, 규암, 흑연 편암, 운모 - 석영 - 장석 편암, 운모 편암, 규암, 안구 편마암, 석류석 함석류석 화강암으로 구성된다. 한반도는 중생대에 활동적인 지질학적 선사시대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산맥이 형성되었어, 신생대에 가서 점차 안정적으로 되었다. 중생대에 형성된 주요한 곳으로 경상도를 포함하며, 흑운모 화강암, 혈암, 사암, 역암질 안산암, 현무암, 유문암, 그리고 오늘날의 경상도 지방 아래에 덮여 있는 응회암으로 구성되었다.
한반도 인류의 선사시대
구석기 시대
이 시기의 기원에 대한 것은 원시 인류가 한반도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이며, 기원전 5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빠른 출현이 구석기 태동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에는 회의적이다. 구석기는 도기의 생산이 시작되는 기원전 8000년경에 끝난다. 방사성탄소측정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고대인의 출현은 기원전 4만년 경에서 3만년 경으로 지시한다. 고대인이 기원전 50만년 경까지 확장된다면, 호모 에렉투스가 한반도에 존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충청남도 공주 근처의 석장리 유적에서 구석기 시대 태동기의 특징을 가진 유물이 가장 낮은 층에서 발굴되었다. 양면을 뗀 석기와 떼는 도구도 발견되었다. 후기의 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로 생각되는 손도끼와 클리버도 발굴되었다.
구석기 중기에는 고대인들이 동굴에서 거주를 했으며, 제천군 점말 동굴과 청주 두루봉 동굴 등이 그 유적이다. 이 두 동굴 유적에서 코뿔소의 화석 유물과 동굴 곰, 갈색 곰, 하이에나와 여러 종류의 사슴들, 멸종된 종 등의 화석이 발굴되었다.
점말 동굴에서 사냥에 사용했던 도구로 보이는 석기는 고대인의 뼈로 만들 것이며, 동물뼈 골각기와 함께 사냥을 하거나 음식을 준비했던 도구로 보인다. 영양보충을 위한 밤껍질도 발굴되었다.
충청남도 공주 근처의 석장리 유적과 다른 강안의 유적에서 구석기 전통을 가진 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가는 규암 바위, 예를 들면 규암, 반암, 흑요석, 규질암, 규장석이 구석기 전기의 아슐리안, 르발루안의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뗀석기들은 모양이 단순하고, 석영이나 화강암(페그마타이트)에서 뗀 것들이다. 석장리의 중기층에서는투척용 볼라와 투척용 돌이 발굴되었다.
한국의 구석기 시대는 다시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눠진다. 이 중 현생인류가 남긴 유적은 주로 구석기 후기 이후의 유적에서 나타난다.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屈浦里), 평양직할시 상원군 검은모루,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全谷里),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石壯里), 충청북도 청원군 만수리를 손꼽을 수 있다. 이들 유적지의 발생 연대는 오늘날 고고학계에서 약 50여만 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 또는 강가에 집을 지어 작은 군집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생활은 대체로 짐승의 사냥과 과일이나 열매 등의 식물 채집에 의존한 것으로 여겨지며, 집단 생활을 하게 된 동기는 세계의 다른 지역의 모든 석기시대의 사람들처럼 보다 효율적인 사냥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
중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는 1만여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져서, 자연환경이 바뀌면서 구석기시대의 주요 사냥 대상물인 맘모스, 쌍코뿔이, 물소 등의 큰 짐승이 사라지고 작은 짐승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짐승을 잡기 위한 무기인 활, 화살촉 등이 등장했다.
중석기 시대의 유적지
빗살무늬토기 시대
시작되었는데,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은 간석기와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토기이다. 이들은 주로 물가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고기잡이와 사냥을 했고, 신석기시대 후기가 되면 초기 농경 단계로 들어간 곳도 있다. 또 돌쾡이와 돌보습으로 밭을 갈고,돌낫으로 곡물이나 이삭을 따 갈돌로 갈아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내어 먹었다.
민무늬토기 시대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구리와 주석 또는 아연을 조금씩 섞어 만든 청동기를 사용한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무문토기와 공열토기가 주로 쓰였다. 신석기시대처럼 돌쾡이를 사용하여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반달 돌칼로 추수하였다.
- 대평 유적 (大坪 遺蹟, 진주 옥방 유적)
- 사천시 이금동 유적 (泗川市 梨琴洞 遺蹟)
- 민무늬토기 시대 (無文土器時代)
선사 시대 세 시대 체계 구분법
세 시대 체계(three-age system) 구분법은 인류의 선사 시대를 세 개의 연속된 기간으로 분류하는 것으로 각각의 주요 사용 도구를 기준으로 이름을 붙였다.
이 체계는 유럽과 지중해 사회의 발전을 가장 잘 반영하며, 다른 지역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도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체계의 구분법은 너무 기술 중심적이라고 비난을 받아 왔다.
기원
이 시대 구분의 정식적인 소개는 덴마크의 고고학자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에 의해 1820년대 덴마크 국립박물관의 수집품을 중 유물을 분류하기 위해 제안되었다. 톰센은 선사 시대 문화를 도구에 의한 분류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골동품상이었던 니콜라스 마후델(Nicholas Mahudel)도 18세기 초기에 유사한 체계의 제안을 하였고, 이러한 개념은 중간 백년동안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체계는 혁명적이었고, 이전 선사시대 고고학의 정립되지 못한 무질서한 체계와 비교할 때 엄청난 개선이었다.
석기시대 구분
1865년 유라시아의 석기 시대가 존 러벅의 저서 《선사 시대(Prehistoric Times)》에서 처음 용어를 쓴 이후 처음으로 구석기 시대(Palaeolithic)와 신석기 시대( Neolithic)로 분류되었다. 또한 보다 더 세분화된 구분법이 소개되어 모든 시대를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게 되었다. 아프리카 고고학자들은 《고석기 시대(Old Stone Age)》, 《중기 석기시대(Middle Stone Age)》 그리고 《말기 석기새시대(Late Stone Age)》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였다. 어떤 문화의 고고학적 증거에서는 《구리 시대》를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사이에 삽입할 필요가 있게 한다. 《거석문화 시대(Megalithic)》는 단순히 어떤 특정한 시기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라 단지 특정 시기의 고대인들이 사용한 거대한 돌을 사용한 시기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다.
연대측정
서열화, 유형론, 계층화 분야에도 많은 발전이 있었고, 유물의 조합적인 연대측정과 보다 더 세련된 방법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연대의 정확한 수치는 이러한 세 시대 체계를 이용해서 제시할 수 없는 것들이며, 이것들은 단지 상대적인 수치의 배치만 제공하는 것들이다. 고대 이집트의 수치가능한 연대측정으로 유럽과 근동을 정렬하려는 많은 노력이 있어 왔다. 그러나 탄소연대측정법과 같은 보다 직접적이고 확실한 과학적 연대측정법은 20세기 중반까지 개발되지 못했다.
적용의 문제점
세 시대 체계는 유럽과 지중해 외부의 체계에 완전히 적용시키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어떤 사회는 특정 단계를 뛰어넘거나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남미의 어떤 아마존 부족은 여전히 신석기 시대에 머물러 있거나, 아프리카 사하라 주변에서는 석기에서 철기로 기술적 진보가 일어났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의 단계에서 또 다른 단계로의 이전은 빠르고, 정확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유럽의 철기 시대에도 여전히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뗀석기가 남아있었고, 기술적으로 신석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금속 유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사회의 진보를 측정하는 세 시대 체계는 종종 아주 부정확하다. 어떤 사회의 유물이 전혀 다른 단계의 시대에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고대 마야의 사회에서는 유럽의 르네상스 시기에 버금가는 수학과 천문학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 잉카 문화에서는 기원전 1500년 대에나 시작되는 금속제품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기원전 10000년 경에 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청동기는 없었고, 벼농사는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500년 경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예:한반도의 선사 시대
이 시스템을 유럽 외부의 세계에 적용시키는 데서 생기는 어려움은 한국의 선사시대에서 잘 나타난다. 세 시대 체계는 일본의 식민지 이후 일본과 달리 〈한국은 청동기 시대가 없었다〉는 일본 식민지 고고학자들의 잘못된 요구에 부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용이 되었다.[2] 대신 후지타 료사쿠와 같은 일본 고고학자들 한반도가 석기 시대 문화에서 《동석병용기 시대(Chalcolithic)》나 《동석 시대 문화》(Eneolithic culture, 청동의 발견 이전 순동만 사용하던 시대)로 바뀌었다고 부정확한 가설을 세웠다. 세 시대 구분 체계는 한국의 선사시대의 독특한 복잡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학자들과 일반 대중들에 의해 폭넓게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최근까지 한국의 고고학자들이 사용한 시대구분 도식에서는 신석기는 기원전 8000년 경에 시작되어 기원전 1500년 경까지 지속되었다고 나온다. 고대민족식생의 연구에서 최초의 경작이 기원전 3500년 경까지 시작되지 않았음을 명확하게 지적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게다가 고고학자들은 청동기 시대가 기원전 1500년경에서 기원전 1000년경에 시작되었으며, 기원전 300년경까지 지속되었다고 계속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거부되어 왔다. 비록 청동기가 기원전 700년경에 바뀌었다고 할지라도 청동 기술은 기원전 700년경까지 한반도에 적용되지 않았다.
고고학자들의 기록은 청동이 기원전 400년 이후에는 비교적 많은 량이 소비되지 않았다고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한국의 선사시대에 대한 조잡한 끼워맞추기 적용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국 역사(기원전 300년에서 기원후 668년)를 전공한 일부 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신석기 - 청동기 - 철기 시대의 구분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반면 대부분의 선사시대 고고학자들은 세 시대 구분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으며, 빗살무늬토기 시대(기원전 8000년경 ~ 기원전 1500년경)와 민무늬토기 시대(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300년경)와 같이 도기 제작 무늬와 기술에 대한 변화에 근거한 시대 구분을 채용하고 있다.
현 시대의 구분법
비록 세 시대 구분 체계가 현대 고고학 발견에 점점 부정확해 지고, 사용 빈도가 줄어들기는 하지만, 오늘 날에도 여전히 선사시대 고고학적 개념을 뒷받침하는 용어로서 고고학자들이나 사람들의 인식 속에 깊이 남아 있다. 선사시대 고고학에 관련된 시대 분류 체계로서의 친숙함은 대중들에게 고고학적 정보는 더 이해하기 쉽게 전달해 준다.
시대 | 기간 | 도구 | 경제 | 주거형태 | 사회 |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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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 시대 | 구석기 시대 | 손으로 만든 도구 또는 자연물 – 몽둥이, 곤봉, 날카로운 돌, 썰개, 손도끼, 긁개, 창, 작살, 뼈바늘, 뼈송곳 | 수렵과 채집 | 이동식 주거 – 동굴, 오두막, 동물 가죽, 강이나 호수서 얻은 것 | 수렵과 채집을 위한 군집(25~100명) | 사후에 대한 믿음이 나타나는 증거가 초기 신석기 시대에 매장풍습이나 조상숭배와 같은 것에서 발견. 선사 시대 제사장이나 무당 등장. |
중석기 시대 (준구석기시대) | 손으로 만든 도구나 자연물 – 활과 화살, 어망, 배 | 부족이나 군집 | ||||
신석기 시대 | 손으로 만든 도구나 자연물 – 끌, 괭이, 쟁기, 멍에, 낫, 곡식, 보리, 직기, 질그릇 (도기) 그리고 무기류 | 신석기 혁명 - 농경으로 전이. 채집, 수렵, 어로 그리고 가내목축 | 농장 | 신석기 말기에 부족이나 읍락형성 | ||
청동기 시대 | 구리나 청동기, 도공용 녹로 | 농경 – 목축 – 세공, 무역 | ||||
철기 시대 | 철기 | 도시의 형성 | 국가의 형성* |
- 국가의 형성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청동기 시대 초기에 시작되며, 후기에 최초의 황제가 발견된다.
한반도의 연대기에 따른 고고학적 시대 분류
구석기 시대
고대 인류가 한반도에 출현하기 시작한 이 시대의 가장 이른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는 기원전 4만년에서 3만년 사이로 올라간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전히 공개적인 의문점이며, 한국의 고고학자들은 보통 구석기 시대 태동기까지 올라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반도에도 호모 에렉투스가 존재하였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빗살무늬토기 시대
이 시기의 시작은 가장 초기 토기인 덧무늬 토기(융기문 토기)의 출현으로 정의된다. 이 초창기 토기는 기원전 8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이 시기를 다른 이들은 신석기 시대로 불렀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기술이나, 사회 구조, 빗살무늬의 특징 등 명백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다른 지역의 《신석기 시대》의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증명하였고, 그래서 신석기 시대라는 별칭은 적절하지 못함을 밝혔다.
민무늬토기 시대
이 시기의 시작은 기원전 150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자들의 기록은 집단으로 정착 생활을 하며, 민무늬토기로 소규모의 농경을 한 사람들이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거리 교역을 통해 습득된 청동기는 기원전 800년경에 등장을 하였고, 곧 청동의 생산이 뒤를 이었다.
원삼국 시대
민무늬토기 시대가 끝나고, 원역사 시대가 기원전 300년경에 시작되었다. 철기가 등장하였고, 청동기는 제사용품으로 더욱 보편화되었다. 원역사 시대는 국가 단위의 사회가 형성되면서 끝나고, 시기는 기원후 300년경에서 400년경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삼한 시대로 알려져 있으며, 초기와 말기 철기 시대이며, 원삼국 시대이다.
삼국 시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서는 국가가 기원전 100년경에 형성되었으며, 고구려도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국가가 나타난 것은 기원후 300년경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초기 역사 시대는 신라가 668년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끝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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