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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 : 선사시대 1 (구석기 시대)

두바퀴인생 2010. 9. 10. 15:53

 

 

 

한국의 역사 8 : 선사시대 1 (구석기 시대)

 

선사시대란 인류 문명이 기록으로 남겨지기전의 시대를 말한다. 이 시기는 수석기,신석기,청동기를 포함하며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전후하여 인류문명이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구석기 시대 움집 

 

 

 

한국의 구석기 시대
 

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연표)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환인
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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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진국
삼한

 



 
 
 


 
 
 


   

   
 


고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삼별초의 항쟁
홍건적의 고려 침공
조선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한국구석기 시대 유적은 산악지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서 현재 약 90여 군데가 발굴되었다. 한데(노천) 집단거주 유적이 큰 강가나 물줄기 언저리를 중심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로 강가에 살았고, 물고기를 잡고 협동적으로 사냥을 하였다고 추측된다.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60년대 이후에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구석기 문화의 유적지 발굴은 함경북도 웅기군(雄基郡) 굴포리(屈浦里)와 충청남도 공주군 석장리(石壯里)에서만 이루어졌으나, 그 밖에 구석기 유물이 나오는 곳은 금강 유역, 남·북한강 유역, 태화강 유역 등이며, 화성·수원·안성·경주·순천·울주·웅기군 부포리 등에서도 발견되어, 한국의 여러 곳에서 구석기 유물이 나오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국이 빙하로 덮인 흔적은 없으나 빙하의 인접 지역으로서 빙하기나 간빙기(間氷期)의 영향을 받은 것은 지층의 구성으로 판명되고, 여러 지질층 사이에 문화층이 끼어 있는  공주 석장리 유적에서는 구석기 시대 전기·중기·후기 유적이 모두 출토되었다.

 

전기.중기 구석기

불을 사용하였고, 간단한 타제석기를 제작·사용하였다.

 

전기 구석기 시대에는 아주 거친 잔손질을 한 외날찍개와 긁개를 사용하였다. 몸돌을 중심으로 하는 석기가 주가 되고 사냥이나 부엌용 석기가 많다. 후대로 갈수록 긁개 종류가 많아진다. 평균 기온은 현재보다 9℃ 정도 더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기 구석기 시대에는 긁개가 많으나 깎개의 수가 늘어나고 외날 전통은 계속되면서 원초(原初)형 주먹도끼가 나왔고, 또 창끝으로 쓰였으리라 추측되는 찌르개가 나왔다.

 

중기 구석기인의 활동에서 달라진 것은 예리한 날의 깎개가 늘고 홈날 칼과 톱니날 칼을 만들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쌍날의 주먹도끼·주먹대패·밀개 등이 나타나며, 깎개·찌르개의 수가 늘어나고 모룻돌떼기·부딪쳐떼기 등의 수법도 보인다. 제작에 오랜 시일이 걸리는 석기도 차츰 등장한다.

주요 유적

 

후기 구석기

대략 4 ~ 3만 년 전 이후 ~ 1만 년 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2만 년 전 ~ 1만 년 전의 시기는 해수면이 낮아 황해가 남쪽으로 후퇴하고, 한반도와 중국 본토는 서로 이어져 있었다.

특징

  • 유적은 현생인류가 남긴 것이 대부분이다.
  • 한데유적과 발달된 타제석기와 세석기가 주로 발굴된다.
  • 한반도와 발해 북부, 시베리아의 구석기 유적에서 토기 조각, 초기의 마제석기가 발굴되었다.

*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는 벼농사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 드물게 집터에서 화덕자리가 발굴되기도 한다.

* 예술 활동도 자못 활발한 시기이다.

주요 유적

 

 

 

인류의 태동과 구석기 시대의 문명들...

 

아득한 옛날, 한반도로 코끼리와 원숭이, 사슴은 물론 쌍코뿔이 등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동물을 포함하여 수많은 동물들의 천국이었다. 자연계의 법칙만 존재하던 시대... 그러나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각변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구석기 시대, 인류연사의 99%를 차지하는 시대, 이 시기에 한반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충북 청원군 두루봉 지역. 지금은 채석장으로 바뀌었지만, 이곳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지 중 하나. 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충북대 이용조 교수가 이끄는 발굴팀이 지난 76년부터 10년간 발굴한 이 유적에는 무려 6개의 동굴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는 엄청나게 많은 짐승뼈와 석기, 사람뼈가 발굴된 이상적인 동굴유적이어서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아시아 전체를 감동시킨 발굴현장이고 유적지가 되었다.

 

동물뼈를 비롯한 많은 양의 구석기 시대 유물이 썩지 않고 발견될 수 있엇던 것은 이 지역이 알카리성의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지층이기 때문이었다. 두루봉 유족 동물 화석 중에는 지금은 멸종되고 없는 쌍코뿔이 등 다양한 동물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6개의 동굴은 각기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것으로 그중에는 지금의 한반도보다 훨씬 따뜻한 곳에서 생활했던 동물들이 많아 당시의 기후를 짐작하게 한다. 쌍코뿔이, 하이에나, 코끼리 상아, 사슴 이빨 등이 발견되었고 사람들이 주로 사냥으로 살았으며 뼈화석 주변 흙에서 꽃가루를 분석한 결과 피나무, 참나무 등 활엽수가 번성하였고 그 당시 한반도는 아열대와 비슷한 환경이었음을 추정할 수가 있으며, 지구가 생성된 이래 네 차례의 빙하기가 도래하엿고 이 시기는 마지막 빙하기가 17,000~15,000년 사이로, 약 20만년전 두루봉 지역 동굴은 지금의 아열대 기후와 비슷한 지역으로 판명되었다. 

 

구석기 시대는 약 250만년전부터 1만년전까지로 불 수 있는데, 인간의 역사 99%가 구석기 시대의 역사이다. 인류의 역사는 먼 옛날 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전 세계로 퍼저 나갔다고 하는데, 한반도에 도착한 사람들은 누구이며 우리들과는 어떤 관계인가?

 

경기도 여주 구석기 유적에서 많은 양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한반도 구석기 유적은 1천여 곳으로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북한 상원군의 검은 모루 구석기 유적이 우리나라에 사람들이 살았던 가장 오래된 시기로 평가하고 있다. 이곳에도 두루봉 동굴과 마찬가지로 하이에나, 쌍코뿔이 등 멸종된 동물을 포함 29종의 동물뼈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약 100만년전의 것으로 인간이 동물계에서 막 벗어나 동물을 잡아먹으면서 살게 되던 시기다.돌쪼각으로 창을 만들고 화살을 만들었으며 동굴에서 생활하면서 사냥을 통해 동물을 잡고 돌쪼각으로 가죽을 벗기고 살을 발라 먹고 가죽은 몸을 보호하는데 사용하였다.

 

한반도 최초의 현생 인류, 우리들 조상은 누구일까?

 

이는 76년 두루봉 동굴의 흥수굴에서 출토된 약 4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을 발견하였는데,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흥수 아이 유골로 지칭하였다. 흥수 아이 인골은 키가 약 120센티미터 정도의 어린 아이인데, 치아를 통해 나이를 추정하였다. 얼굴을 복원하여보니 현재의 우리들과 너무나 많아 닮은 모습으로 판명되었다.

 

충북 단양 금굴. 구석기 유적 중 가장 큰 규모이다. 굴의 높이 12미터, 길이 150미터가 넘는 굴이다. 지난 83년부터 3년에 걸쳐 발굴이 진행되었고, 구석기인들의 대규모 주거지임이 밝혀졌다. 그곳은자연조건이 아주 살기에 적합한 곳으로 앞으로는 큰 남한강이 흐르고 물고기 자원이 풍부하였으며 주변의 넓은 들판은 사냥하기에 좋고 동굴 규모도 크고 아늑하여 최적의 장소로 판명되엇다.

 

동굴이 모두 주거지는 아니었다. 비탈진 곳에서 발견된 구상굴은 사냥을 위한 베이스 캠프로 이용되엇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곳에서 사냥한 동물을 해체하엿으며 부위별로 짤라 거주지로 운반하엿던 곳이다. 많은 양의 동물뼈가 발견되었고 대부분 부셔진 상태가 강하게 충격을 준 어스러진 뼈들이 많았다. 뼈 중에는 사슴뼈가 많고 그중에서도 대부분 어린 사슴뼈였다. 그래서 추운 겨울철 사냥 켐프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인두물머리 지역. 구석기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곳으로 판명되었다. 집터는 기둥을 세운 구덩이가 발견되었고, 공주 석장리를 포함, 이미 구섟기 시대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으며 불도 사용하였던 화덕이 발견되었다.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적은  세계 구석기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바로 아술리안으로 불리는 주먹도끼. 세계 고고학계에서 전곡리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되자 세계 고고학계가 발칵 뒤집어 졋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도 서쪽 즉, 유럽, 아프리카 지역에서만 주먹도끼가 발견되어 인도 동쪽 지역인 아시아 지역은 찍개문화권으로 양분하여 유럽 지역의 구석기 문화의 우수성을 자랑하던 것이다. 그래서 전곡리의 주먹도끼 발견으로 구석기 시대의 이원론 학설이 무너져 버렸다.

 

단양 수양개 후기 구석기 유적. 석기 제작터가 50군데 이상 발견되었으며 3만점 이상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흑요석은 구석기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재료였다. 주로 화산 지역에서 출토되는 흑요성은 단단하고 얇게 짤라지며 날카로운 경암이다. 이 흑요석은 창과 호살촉, 칼, 도끼 등을 만드는데 가장 긴요한 암석이다. 흑요석은 생산지마다 성분이 달라 이동 과정을 추적하기가 용이하다.

 

홍천에서 발견된 흑요석은 백두산 것으로 판명되었고  300키로미터를 이동하야 홍천가지 전해졌다. 이동간 조금씩 조각을 내어 만나는 마을 마다 다른 물건과 교환하였을 것이다. 즉 물물교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지막 빙하기에는 바다물이 줄어 중국.일본과 육지로 연결되어 동물이나 사람들이 이동이 용이하였고 교류가 이루어졌다.

 

제주 고산리 신석기 유적은 구석기 유적과 같이 출토되었다. 신석기 시대는 구석기를 거쳐 자연스럽게 신석기 시대로 이행되었으며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로 이어졌다.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의 희노애락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자연에 대한 숭배 사상은 당연하였고 특히 동물 뼈는 재생과 생명의 원천으로 생각하였으며 뼈로부터 모든 개체가 부활된다고 생각하였다. 홍수아이 매장지를 살펴보면 석회석 판자돌 위에 부드러운 흙을 깔고 시신을 안치하였다. 다 자라지도 못하고 갑작스럽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게 된 어린 아이에 대해 온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애도속에 시신이 안치되었을 것이다.

 

국화꽃이 만발한 청명한 어느 가을날, 흥수아이가 갑자기 죽었다.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던 꽃가루, 시신 가슴 부근에 많은 꽃가루가 발견되었는데 그 꽃은 국화꽃이었다. 사람들은 국화꽃을 꺽어다가 죽은 흥수 아이 가슴에 올려 놓고 슬픔을 흐느끼며 죽음을 애도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과 다를 게 없이 구석기인들도 희노애락을 똑같이 느꼈던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들의 조상이었다.